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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사회재생산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12. 28.

자본주의와 여성 억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혁신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사회재생산 이론을 살펴보는 글이다. 여기서 영국 rs21(21세기 혁명적 사회주의: Revolutionary Socialism in the 21st Century)의 활동가 에스텔 쿠치(Estelle Cooch)는 이 이론의 발전을 둘러싼 논점들 중 몇몇을 검토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여성억압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 충분히 존재하는지 묻는다. 번역을 하고 자세한 역주까지 달아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rs21.org.uk/2014/03/26/socialreproduction/

 



2012년 여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역대 최강의 베스트셀러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해 8월 아마존은 그 시리즈가 해리포터 시리즈의 모든 책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팔렸음을 알렸다. 작가 EL 제임스는 BBC뉴스나이트에서 인터뷰를 했다. 런던 구석구석에 이 시리즈 광고가 붙었다.

 

이 시리즈는 한 여대생과 가학적 성행위를 좋아하는 거물 사업가 파트너 사이의 관계를 그린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학대에 가까운 관계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완전히 상품화된 커플에 대한 묘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은 그냥 컴퓨터가 아니라 애플 맥(Mac)을 선물받고, 그냥 시계가 아니라 롤렉스(Rolex)를 받는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내 나이 또래(20대 초반)의 모든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걸 읽고 있었다. 대학에 다니든 안 다니든, 연애를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마찬가지였다. 그 책의 무언가가 당대의 분위기를 사로잡은 것이다.

 

자연히 이는 페미니스트 블로그에서의 길고 격앙된 논쟁들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80년대의 페미니스트 섹스 전쟁[각주:1] 때 나왔던 질문들 중 많은 것들에 다시 불을 붙였다. BDSM[각주:2]은 억압적인가? 포르노는 괜찮을 수 있는가? 이 논쟁들은 인도, 이집트, 스페인에서의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과 나란히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50가지 그림자>는 신자유주의가 바라보는 여성의 정점이었다. 여성들은 아나스타샤 스틸[소설 여주인공]처럼 되어야 했다. 젊고, 섹시하고, 챙겨 주고, 똑똑하고, 일도 잘 하고, 하지만 또한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해야 했다. 만약 <50가지 그림자>가 서점의 픽션섹션에 놓였다면, 이 책은 판타지로 분류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동안 무언가가 정말로 확실해졌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현상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성 억압, 여성의 상품화, 가사노동에 대한 책이 역대 최강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어떻게 반응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는가?

 

두 가지 가능한 이유들이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세계 전체에 걸쳐서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운동에 제시할 만한, 여성 억압에 대한 유용한 분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성 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논쟁 이래로 흔들리게 되었고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삶에 준 충격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두 번째 입장을 주장할 것이다. 여성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최근에 부족한 상태였지만 마르크스, 엥겔스, 룩셈부르크 그리고 후에 리즈 보겔 등 다른 이들이 제공한 프레임은 오늘날의 여성억압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용하다.

 

이혼

 

1960년대와 1970년대 여성운동의 부상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남성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했다. 이는 또한 여성을 위한 정치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집회와 시위는 의식 향상[각주:3]의 부상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반사적으로 모든 페미니즘 이론을 거부했다. 다른 이들은 그보다는 예의바른 태도를 보였지만, 어정쩡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중요한 이슈를 분명히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의 동력이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재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어디 있는가? 분명히 마르크스는 노동력, 공장, 면공업계 구석구석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했지만, 그가 집 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던가? 청소의 가치는 무엇인가? 아이를 목욕시킬 때 사용되는 노동력은 무엇인가?

 

심지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도 가정부 존스 부인은, 그녀의 감사할 줄 모르는 고용주가 다음날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주축이 되는 역할을 한다. “사회 재생산에 관련된 이런 질문들은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에서 다루어졌다.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사회이론과 차별화되는 점들 중 하나는 유물론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세계에 바탕을 둔 이론이라는 것이다. 한 저술가가 말했듯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의 영역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가사노동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본론>의 개념들을 가져와서 여성억압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들이 다양한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969년 마가렛 벤스턴의 글 <여성해방의 정치경제학>의 출간은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벤스턴의 독창성은 가사노동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이라는 그녀의 주장에 있었다. 그녀는 가사노동 없이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없고 노동자들 없이는 자본이 재생산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벤스턴은 특히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셀마 제임스처럼 가사노동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한 일련의 다른 저자들의 작업을 위한 디딤돌을 놓은 셈이다. 1972년에 달라 코스타와 제임스는 자본주의가 가족구조를 만들어 내면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일로부터 남성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팸플릿을 출간했다. 그 결과 여성들은 사회적 긴장에 대한 안전 밸브를 제공하면서 생산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팸플릿은 커다란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 (비록 달라 코스타 스스로는 실제로 그 요구에 동의한 적이 없었지만) 팸플릿은 가사노동에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소규모이지만 공격적인 캠페인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놓았다. 또한 실비아 페데리치의 중요한 연구 <캘리번과 마녀>[국역돼 있음]에도 영감을 준 작업으로 인용되었다.

 

그들의 결론의 문제점은, 그들 중 누구도 마르크스가 생산적이라는 말을 무슨 뜻으로 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의 유용함을 노동의 사회적 형태와 혼동했다. 마르크스에게는 어떤 종류의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노동이 자본과 맺는 관계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자본주의와 임금노동 체계가 계속 지배하는 한, 오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자본가의 이윤을 만들어 내는 노동만이 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다리를 놀려서 고용주의 주머니에 이윤을 쓸어 담아 주는 뮤직 홀 댄서는 생산적인 노동자이고,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어머니들이 집 안에서 하는 모든 고생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잔인하고 어처구니없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현 자본주의 경제의 잔인함과 어처구니없음에 정확히 상응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주인공에 의해 고용된 존스 부인은 낮에는 생산적인 노동자이지만, (아마도 결박 도구들을 청소하는 것은 빼고) 그녀의 가족들을 위해 집에 와서 정확히 똑같은 일을 하면 그녀는 비생산적인 노동자이다. 이 점은 이후에 좀 더 자세하게 검증될 것이다. 요약하면, 달라 코스타와 제임스 모두 착취에 필요한 조건을, 착취 과정 그 자체와 혼동한다.

 

1979년에 하이디 하트만이 마르크스주의가 성맹적(sex-blind: 여성 문제에 무관심하다)”이라고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이라는 긴 글을 출간할 때까지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그 글에서 하트만은 이중체계론을 발전시켜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별개의 투쟁을 요구하는 별개의 시스템이며 둘 다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트만과 1970년대부터 나타난 새로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게,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혼은 끝난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억압적인 남편이었다면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고통받아 온 아내였고 이제 이혼을 원했다.

 

마가렛 벤스턴의 첫 글 이래로 10년이 지났고 정치적 지형은 변화했다. 가사노동 논쟁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여성억압을 이해할 마르크스주의적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1979년 마가렛 대처, 1980년 로날드 레이건의 당선은 좌파의 심각한 후퇴의 시대에 상응했다. 방향을 잃은 수많은 활동가들은 그들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렸다. 한 필자가 말하듯 대표권에 대한 1960년대의 요구들은 정체성 정치와 인정을 해달라는 요구로 후퇴했다.

 

우리는 계속 제기되었던 두 가지 질문들과, 마르크스주의 범주를 발전시켜서 여기에 실제로 적용한 사람들이 제공한 해결책들을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먼저, 생산적인 노동이란 무엇인가?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사노동이 비생산적이라고 말하는가? 두 번째로, 재생산 영역은 생산 영역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세 번째로, 마르크스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만약 말한 적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특별한 상품

 

대학에서 내 선생님은 우리에게 첫 장부터 눈을 뗄 수 없는, 페이지를 계속 넘기게 되는독서를 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자본론>을 읽으라고 권했다. <자본론>이 결코 쉬운 책은 아니지만, 선생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마르크스가 특별한 상품인 노동력 즉 노동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체제를 돌아가게 한다는 심오한 통찰로 1권을 시작한다는 사실이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본은 오로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만나게 되는 경우에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역사적 조건만으로도 세계사를 구성하게 된다.”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가장 칭송받는 부르주아 이론가들조차도 이 간단한 통찰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만약 체제 전체가 돌아가는 것이 노동력에 달려 있다면, 노동력 그 자체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자본론>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을 포착하여 그것을 한층 발전시킨 한 사람은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과거 민권운동가였던 리즈 보겔이었다. 그녀는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세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1. 노동자가 회복되어서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매일의 활동들을 통해서. 이는 음식과 쉴 곳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에 대한 모든 정신적 돌봄도 포함한다.


2. 생산 과정 밖에 있는,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노인, 어린이, 실업자)을 대상으로 하는 유사한 활동들

 

3. (어쩌면 제일 당연한) 새로운 노동자들에 대한 말 그대로의 재생산. 출산.

 

재생산 노동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은 보겔로 하여금 가사노동 논쟁에서 공통적이었던 가정, 이성애, 생물학적 번식, 가족 형태나 세대교체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대신 그녀는 재생산 노동이 전체로서의 체제와 맺는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세 가지 방식 모두 생산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임금을 더 적게 받으면,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들에게 의존하는 이들을 부양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결과 그들이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낮아진다. 불황의 시작 이래로 유럽에서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많은 경제지에서 또 다른 위기즉 인구 위기를 논한다. 스페인에서는 2017년에 사망률이 출산율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때는 공공 서비스가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돌봄을 제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이러한 돌봄이 다시 집에서 이루어지도록 강제하며, 공공부문을 민간 투자와 이윤에 열어줌으로써 이윤율을 높인다.

 

이처럼 댓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을 하는 것은 단지 성인들만이 아니다. 영국에서 2001년과 2011년 사이에 집에서 부모나 친척을 돌보는 (18세 미만) 아동들의 수가 19.5% 증가했다.

 

집 안에서의 노동은 명백히 체제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여성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는 그러한 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집 안에서의 노동은 생산적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실제로 무슨 뜻으로 노동력이 상품이라고 말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마르크스에게 상품이란 시장에서의 교환을 위해 생산되는 물건이다. 모든 상품들은 두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이다. 사용가치란 그 물건을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만들어 주는 특징을 말한다. 사과는 먹을 수 있기에 유용하다.

 

반면 교환가치는 시장을 통해 생겨난다. 이는 한 상품이 다른 상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를 표시한다. 사과의 교환가치는 어떤 상품이든,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다른 상품으로 알 수 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다. 물은 유용하지만, 그것의 교환가치는 작다. 다이아몬드는 그저 예쁘기만 하지만 그것들의 교환가치는 터무니없이 크다. 마르크스는 교환가치가 (오늘날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수요와 공급법칙과 관계가 없으며, 그보다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얼마만큼의 노동력이 들어갔는지에 대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에 대해 논할 때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에는 교환가치가 없다. 시장에서 구매되고 판매되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구체노동유용한 물건들을 생산하기 위해 일하는 특정한 활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오직 시장에서의 노동만이 교환가치를 지닌 추상노동일 수 있다. 집에서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이지 않다. 결국 달라 코스타와 다른 이들은 틀렸다. 여성과 자본가 사이에서 자본가의 이윤을 증대시키는 그 어떤 교환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토록 필수적인 노동이 진실로 쓸모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뒤틀린 체제에 대한 비판이지, 그 노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이행

 

그것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적인노동이다. 생산 영역과 재생산 영역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 자본주의 가족이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정리해 보자.

 

산업혁명의 서곡은 사람들이 하는 노동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가정 또한 변화시켰다. 봉건 시대에 농노 가구는 소비의 단위이자 생산의 단위였다. 가구는 체제로부터 소비하고 (음식, 쉴 곳) 동시에 체제를 위해 혹은 자신이 일하는 땅의 주인인 영주를 위해 생산했다. 반면, 오늘날의 가족은 거실에서 물건을 만들어서 현관에서 판매하지 않는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농노 가족은 사적인 것이 되거나 바깥 사회와 단절되지 않았다. 마크 포스터(Mark Poster)가 말하듯이 초기 근대 농노의 삶의 기본 단위는 혼인에 기반을 둔 가족이 아니라 마을이었다. 마을이 농노의 가족이었다.” 

 

토지 인클로저와 도시화에 뒤이어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생산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가족이 더 고립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이 마침내는 가족의 폐지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끔찍한 노동조건 때문에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열렬히 바랐던 것이 분명 하나의 이유였다.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1853~4년 프레스톤(Preston) 파업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산업 분규였다. 그 내부에서는 여성들에 의해 유명한 가족임금캠페인이 진행되었다.

 

더 나아가, 가족은 절대적인 비참함이라는 위협에 직면했을 때 피난처가 되었다. 미국에 있는 흑인 노예들이 가족을 옹호한 것에 대해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가 쓴 것이 특히 흥미롭다. 그녀는 노예제의 비인간적인 가혹함보다 가족의 활력이 더 강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가족의 유대가 부활했다고 썼다.

 

마르크스는 남성, 여성,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고용하는 것이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계급 가족 전체로 분산시켰음을 인식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 사회에서] 노동력의 전체적인 보유량을 감소시켰다. 1800년대 중반에 자본가들은 가정 안에서 사회재생산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재빨리 이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을 도입했다.

 

소비

 

그래서 자본주의 하의 가족은 그저 순수히 소비의 단위일 뿐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르크스의 소비 개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둘 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똑같이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동자는 이중의 방식으로 소비한다. 생산을 하면서 그는 그의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고, 그것들을 기존에 투입된 자본의 가치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생산적 소비이다. 동시에 이는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가 그것을 소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는 무언가를 소비하여 그것들을 더 큰 가치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드는 사람은 배를 만들기 위해 강철을 소비한다. 이것은 먹어서 없앤다기보다는 다 사용해 버린다는 의미에서의 소비이다. 만약 배를 만드는 사람이 강철을 먹어서 없앤다면, 노동력의 재생산은 꽤 빨리 중단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어서 말한다:

 

반면에, 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의 값으로 그에게 지불된 돈을 생활수단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개인적 소비이다. 노동자의 생산적 소비와 그의 개인적 소비는 그러므로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에서 그는 자본의 동력원으로 행동하며 자본가의 것이다. 후자에서, 그는 그 자신의 것이며 생산과정 밖에서 그의 필수적인 생명 유지와 관련된 기능들을 수행한다. 하나는 자본가를 살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를 살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소비의 두 가지 면, 일터에서의 (생산적) 소비와 집에서의 (개인적) 소비 모두를 과정 전체의 부분으로 구상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분리된 영역이라는 이미지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두 시스템 모두 서로 얽혀 있고 전체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둘 다 기능해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마지막 문장에 아주 절묘하게 요약되어 있다: 자본가가 살기 위해서는 노동자도 살아야 한다.

 

노동자가 집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개인적 소비는 무엇으로 변환되는가? 특히 리즈 보겔이나 최근의 헤더 브라운 등 몇몇 저술가들은 마르크스의 분석 중 이 부분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생활수단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대 교체”, 즉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도 포함한다.

 

안타깝게도 마술로 음식을 만들거나 마술로 아이들을 기를 수는 없다. [귀찮아서 대충 먹으려고] 아무리 학생들이 꾀를 내도,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을 수는 없다. 아이들이 진흙에서 뛰어놀고 나서 매일 같은 옷을 입을 수 없다. 노동자들이 집에서 소비할 수 있으려면, 가사노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여성이 가사노동의 압도적인 대부분을 하도록 남겨진 것일까? 이것이 그들에 대한 억압의 근원일까? 여기서 보겔의 통찰이 중요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여성억압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의 설명을 피한다. 대신 그녀는 앞에서 언급된 세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의 사회재생산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마지막 것(출산)만 성차에 의존적이다.

 

하지만 성차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자본주의의 커다란 모순이 들어온다. 임신기간 동안 그리고 임신 직후의 노동계급 여성은 자신과 태어난 아이를 돌보기 위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축소된 고용을 필요로 한다. 단기적으로 그들은 생산에 완전히 참여할 수 없는데, 이는 [단기적으로] 자본가들의 이윤에 해를 끼치지만, 장기적으로 자본주의는 새로운 노동력의 공급을 필요로 한다.

 

보겔은 여성 억압에 기여하는 요인들 중 하나로 임신기간 동안 남성과 여성이 수행하는 서로 다른 역할을 지목한다. 그녀는 원칙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역할은 임신 기간 동안에만 지속될 필요가 있을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은 필요노동과 관련하여 해야 할 일을 제공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반면 남성은 생활수단의 제공자로 보이게 된다.

 

자본주의의 도래는 잉여노동이 획득되는 곳과 가사노동이 이루어지는 곳의 명확한 구분을 만들어냈다. 봉건사회에서 그 구분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겔은 이것만을 여성억압에 기여한 유일한 요인으로 지목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생물학적 결정론이라고 비판받을 여지가 실제로 생겼을 것이다. 그녀의 강조는 온전히 그러한 차이들이 배태되어 있는 실제 사회의 맥락에 있다. 그녀는 사회주의적 전통이 주장해 온 대로, 여기서 문제는 소유권이다.”

 

그리고 사회재생산 이론의 입장에서, 문제는 자본주의이다. 이전의 그 어떤 사회에서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임금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가 착출되지 않았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젠더 관점의 해석이 되고자 한다. 만약 노동가치론이 어떤 특정한 사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사회재생산 이론 역시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결론

 

1980년대 말쯤 되자 가사노동 논쟁은 학술지의 전유물이 되었다. BDSM과 포르노그라피에 대해 논쟁했던 이른바 페미니스트 섹스 전쟁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페미니즘 운동이 신자유주의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는지를 묻도록 했다. “선택이라는 언어는 체제에 의해 급속히 포섭되어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 사회재생산을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날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논쟁들이 갖는 시의적절성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한 거대한, 미개발 상태의 자원이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젠더 관련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헤더 브라운의 기가 막힌 연구는 그의 재생산 개념은 대부분의 설명들이 가늠하고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그는 생산과 소비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고, 소비를 생산의 반영으로 여기는 것 같지도 않다. 그게 아니라 둘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전체의 일부이다라고 결론내린다.

 

마르크스에 대한 최근의 재독해는 유용하다. 엥겔스만 자동적으로 방어하는 것은 덜 유용하다. 리즈 보겔의 중요한 작업이 재출간된 것은 억압에 대한 분석을 그냥 가정 안이 아니라 전체 체제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는 가끔은 약간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레닌과 클라라 체트킨에 대한 보겔의 철저한 연구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녀가 [더 나아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작업을 검토하지 않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사회재생산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억압을 이해할 때 생물학에 의존하지 않고, 억압이 항상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에도 의존하지 않는 방법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생물학적 한계가 항상 사회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론이다. 재생산은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 것 이상을 포함한다. 재생산은 자본 관계즉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 자체의 재생산을 포함한다.

 

사회재생산은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의 유형을 강조한다. 재생산은 가족 안에서만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 23만 노동자들이 가족에게서가 아니라 거대한 기숙사에서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받는 오늘날 중국의 거대한 팍스콘(Foxconn) 공장을 보라.

 

마찬가지로 역사 전체에 걸쳐 죽음에 내몰리고 간단히 대체된, 수백만 명의 노예들을 생각해 보라. 이윤을 위해 세워진 체제는 세대교체에 반드시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사회재생산이 가정 내에서 이루어진다.

 

사회재생산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지점은 투쟁과 관련된 것이다. 경제 위기에 대한 저항은 종종 체제 그 자체만큼이나 예측불가능한 모습을 보여 왔다. 정권에 반대하는 거대한 파업들뿐만 아니라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사람들), 터키와 브라질에서의 운동처럼 처음에는 작업장에 기반을 두지 않은 운동들도 두드러졌다.

 

진실로 민주적인 사회의 초석을 놓고자 한다면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와 정치 영역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투쟁이 꼭 생산 영역에서 먼저 발발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재생산과 생산 영역을 전체 과정의 부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비록 또다른 방식이라 할지라도) 이중체계론자들과 같은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최근 여성운동의 부활은 강간과 성추행의 문제에 많은 부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위기 이후 보고되는 범죄의 건수가 실제로 증가했기 때문이지만, 체제의 폭력을 보여주는 매우 직설적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운동들을 단일 쟁점 캠페인이라고 무시하거나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로 돌아가서 글을 마무리하자. 젠더는 계급이라는 현실을 숨기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쓰인다. 신자유주의는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분명 여성들이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기를 원한다.

 

외설 문화[각주:4], 희생자 탓하기와 재생산권에 대한 공격은 모두 그것을 위한 것이며 여성성이라는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것은 불안정성을 수반한다. 여성들(과 남성들)이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모든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와 그의 완벽한 파트너를 그리고 있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신자유주의 이야기이다. 크리스찬 그레이(소설 남주인공)는 이 책의 어딘가에서 , 나는 모든 것을 통제해요, 스틸 양. 나는 4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어요라고 으시댄다.

 

우리는 사실 모두 속고 있었다. <50가지 그림자>는 그냥 섹스에 대한 책이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책이었다. 아나스타샤 스틸은 그저 속아서 학대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뿐이 아니라 1%로 진입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결책은 99%에게서 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옷을 입거나, CEO가 되거나, 더 많은 혹은 더 즐거운 섹스를 함으로써 여성억압을 끝낼 수는 없다. 여성억압을 끝낸다는 것은 아나스타샤와 같은 사람들을 그녀와 이름이 똑같은 러시아인[역자: 러시아 혁명 때 쫓겨난 아나스타샤 공주]처럼 만들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세상을 깨부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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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 1980년대에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있었던, 포르노그라피, SM, 성매매 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으로서, 드워킨(Dworkin), 맥키넌(MacKinnon) 등은 성 관계가 남성의 권력을 강화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위험성을 강조한 반면 루빈(Rubin), 스니토우(Snitow) 등은 여성이 성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즐거움을 느낄 해방적 가능성을 더 강조하였다. 그래서 전자는 포르노 배우 등은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며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 등을 비판하고 거부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좋은 섹슈얼리티’와 ‘나쁜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포르노를 ‘나쁜 섹슈얼리티’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며 여성도 포르노 등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조은, 조주현, 김은실, <성 해방과 성 정치>, 서울대학교 출판부) [본문으로]
  2. [역자] 결박(bondage), 훈육(discipline), 가학행위(sadism), 피학행위(masochism)나, 지배와 복종의 행위를 포함하는 성행위. [본문으로]
  3. [역자] 1960년대 미국에서는 신좌파 운동에서 분리되어 나온 페미니스트들이 수많은 페미니스트 소모임들을 결성하였는데 그런 모임에서는 각자가 살면서 겪어 온 억압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정치적으로 중요한 과정으로 여겼다. 이것이 ‘의식 향상’(consciousness-raising)으로 명명되었다. [본문으로]
  4. [역자]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노출, 표현이 증가하는 문화. 미국의 여성 작가 아리엘 레비가 이라는 책을 써서 1960~70년대 페미니즘이 지향했던 ‘성 해방’이 결국 raunch culture 즉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상품화, 대상화로 귀결되었다고 비판하였다. http://www.womennews.co.kr/news/51315#.VnZQfxtunIX 참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