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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시대정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4. 14.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시대정신: ‘소련 이후의 사회주의에 대한 짧은 생각

 

윤미래

 

 

 

소련 이후의 시대에 맑스주의자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세계 계급투쟁의 판세는 크게 바뀌었고, 맑스주의는 공식적으로 실패한 이념이라 선언되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포했다

 

한국의 운동은 90년대 중반까지 조금 더 명맥을 유지했지만 이내 체제내화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는 아주아주 별난 사람들이나 쓰는 케케묵은 사어가 되었고,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사회적 상식으로 알고 살았다

 

이 시대에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역사적인 시류의 한 자락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시류를 거스르는 미친놈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정말이지 쉽지 않은 선택이다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시도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암담한 시대에 사회를 바꿔보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고민들을 안고 나아간다. 누군가는 답을 미래로 미루면서, 누군가는 그래도 놓을 수 없는저항의 불씨를 붙잡으면서, 누군가는 조직이 답을 만들어줄 거라 믿으면서. 또 누군가는 나처럼 이런저런 답을 찾아보기도 한다.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사회주의의 정강이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투쟁하고, 조직하고, 그래서 싸움을 만들어내는 것뿐이라고. 나는 열심히 했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2013년 철도파업이 정치적 지도력의 공백 때문에 백기투항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서 나는 내가 철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민주당 지도부에 협상을 맡기고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는 대신에 철도노조 지도부에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싸워서, 힘이 닿는 데까지 밀어붙여서, 그 다음에는 어쩔 생각이었던가? 총파업을 일으켜서 정권을 퇴진시키는 건가?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사회는 어떻게 되지? 지금보다 나은 사회가 될까? 그렇다 한들 그 사회가 지탱될 수 있을까? 소련은 왜 무너졌지? 중국은 왜 부패하고 있나? 북한은 왜 개인을 신처럼 섬기나? 우리가 하면 다를까? 어떤 점에서? 내 전망은 스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 싸우자고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사람들이 내 말에 보이는 불신을 그 때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다가올 시대가 답해야 할 질문들이다. 나는 나 혼자서 모든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최소한 그 뒤는 나도 몰라라고 답하면서 내 정치를 지탱해갈 자신은 없다. 그래서 고민하면서, 좌충우돌하면서 실마리를 찾고 조금씩 진전하고 있다. 내 고민이 과거와 미래를 적절히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사회주의 운동은 하자가 없었고, 다만 충분히 전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련, 중국, 북한 등의 나라에서 보이는 정치적 독재와 부패, 빈부 격차는 단순히 충분히 전진하지 못한 운동이 아니라 변질된 운동의 징후들을 보여주었다

 

역사를 조금 더 공부하면서 나는 실제로 소련이나 중국이 아래로부터의 민중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국제적 고립과 군사적 위협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이런 변질은 국가 차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권력을 잡지 못한 사회주의 조직들에서도 지도부의 독선과 개인에 대한 폭력, 조직이기주의와 패권주의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불리한 여건이 사회주의 운동의 변질을 불러왔다는 관점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혁명 초기의 상황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 관점 역시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됐다. 나는 소련 초기부터 체카(비밀경찰)가 이미 실질적으로 법외 기구였고,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루어졌고, 당내에서 소수 분파를 조직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국가의 권력이 당내의 소수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었으며, 당시 유수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추세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조치들을 분명하게 비판하지 않거나 심지어 합리화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의 흐름을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조차 자기 조직을 운영할 때에는 비슷한 방식, 즉 비판적 토론과 기층 구성원들의 주체화를 봉쇄하고 반대자를 운동의 적으로 몰아 탄압하는 방식을 서슴없이 취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운동의 변질에는 객관적, 외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주관적 요인도 있었으며 그 문제가 여태껏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져 갔다. 사회주의 운동이 그런 상태여서야 민주주의에 익숙한 대중에게 외면받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잡더라도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지지하는 관점은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민주주의를 경시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고, 우리가 그 오류로부터 아직도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원칙으로서, 나는 할 드레이퍼가 제안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는 소수 엘리트에 의한 개혁 또는 혁명에 의해 대안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다수 대중이 주체가 되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운영할 때에만 우리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으로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나는 소련, 중국, 북한 등이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건설되었다면 지금과 상당히 다른 사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를 운동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것, 즉 민주주의를 단순한 정치공학적 처세나 제도·형식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전략이자 원칙이자 기치로 대우한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누구와 활동을 하든 모든 활동에서, 모든 방면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능동적으로 실천하도록 온 힘을 다해 돕고 이끌어야 한다. 당장 자기가 생각하기에 정확한결론을 관철시키는 것보다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민주적 토론을 통해 결론이 내려지도록 이끄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할 만큼 대중을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 신뢰와 존중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이 조직에서 서로 관계맺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을 때 사람들은 단순한 동원 대상이 되는 것을 넘어서 의사 결정과 책임의 주체가 된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깨어있는 계급대중만이 사회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진정한 보루이며,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노동자민주주의가 필수적이라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회주의자가 누가 있는가

 

실천적으로도 사회주의 운동은 원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온 시기가 많았고, 부르주아식 대의민주주의와 비교도 안 되게 급진적인 민주주의의 원리들을 실천으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지금도 건강한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대부분 민주주의를 자기 원칙으로 안고 활동한다. 한국 운동사에서도 민주주의는 민주노조 운동을 관통하는 기치였으며, 학생회가 정당성을 구하는 원천이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정말로 운동에서 폭넓은 합의를 얻은 핵심적인 원칙으로 대우받고 있는가에 이르면 다소 의문이 생긴다. 가령, 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생산수단의 국유화 같은 강령처럼 운동의 핵심적 원칙으로 취급되어고 있는가? 민주주의를 배반한 실천이 계급배반으로 규정되고 단호하게 비판받는가? 우리가 나날이 하고 있는 운동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할지에 대한 고민은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활동가들이 민주주의에 표하는 의례적인 경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운동에서 민주주의 원리는 그것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민주주의는 너무나 자주 개인적 덕성이나 리더십의 방편, 혹은 일종의 암묵지나 문화의 수준에 머무른다. 정당화를 위한 형식이나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정치공학으로 활용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민주주의를 대놓고 단순한 원론이나 심지어 소부르주아적 이상으로 치부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경우는 또 어떤가!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중심 원칙으로 삼고 활동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주의자들 또한 많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아직 사회주의 운동에서 합의된 원칙으로 격상되지 못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원칙으로 천명한다는 것은 민주적 활동이라는 자구에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을, 그 운동이 물려준 전통과 유산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순히 패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운동을 잘못 이끈 것이다

 

우리는 모든 관습과 문화와 조직 운영의 방식들을 재점검하고, 우리가 지향해왔던 모든 이상들을 냉정한 눈으로 다시 평가해야 한다. 자신들이 이끈 혁명에서 민주주의가 질식되는 것을 보고도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그 과정을 적극 주도했다는 점에서, 레닌이나 트로츠키, 스탈린 등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서 영웅으로 추앙되어온 많은 선배들조차 비판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은 또한 민주주의, 대중의 주체화, 자기 통치라는 개념들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로 대중을 만나고 어떤 방식으로 운동을 건설하며 어떤 제도를 입안해야 이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숱하게 고민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실천적 노력을 쏟아붓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상적인 활동의 과정에서 이런 고민들은 사장되기 일쑤다

 

당장의 역관계가, 사업의 성사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 수가 눈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단순히 소탐대실이나 과욕을 지적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건강한 활동가라면 그런 당장의 문제에 치이면서도 원칙이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을,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정말로 운동의 원칙이라면 민주주의 또한 그런 구심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은 것이고, 현재의 운동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언하고 싶은 것이다.

 

이 개념에 그렇게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위에서 적었듯이, 나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가 단순히 외적 조건으로 인한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어차피 자본가들이 더 강하고, 사회주의는 패배할 것이라서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이 건설한 국가와 기구와 조직들이 자본주의보다 더 행복한 세상의 전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이 현실을 돌파하는 데서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한 대안이다. 물론 다수 대중이 의사결정과 집행의 주체로 참여한다고 해서 외부적 공격과 자원의 부족을 해소할 수는 없다.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가 세워진다 해도 혁명이 세계로 확산되지 못한다면 구성원들은 빈곤과 중노동을 감내해야 할 것이고,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공세 속에서는 아무리 민주적이고 대중지향적인 조직의 활동가라도 고립과 적대와 씨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조직의 주인이 되어 결정하고 책임지는 체제에서 사람들은 이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고, 누군가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고 감수하는 일로써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자 민중은 적어도 20세기 사회주의를 그토록 지탄받게 했던 예속과 감시 앞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며, 지배집단의 총칼 앞에서 소외된 노동을 강요받지도 않을 것이다. 위계와 억압을 허물고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체험, 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체험은 그 무엇보다 인간을 고양시킨다

 

이러한 체험을 꾸준히 재생산하는 사회는 설령 외적 요인 때문에 무너지더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기억할 만한 역사로 남을 것이고, 이후의 투쟁에 반면교사가 아닌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또한 소련이나 중국 같은 관료화된 사회주의 국가들이 세계혁명을 방어하는 동시에 방해하기도 했던 양가적 역할을 했던 것과 달리 전적으로 세계혁명에 기여하는 진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시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근본적 모순을 해소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며, 그것의 병폐는 나날이 천문학적인 규모로 증폭되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야말로 인류 역사의 종착점이자 도달된 유토피아라는 선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정의를, 평등을,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 21세기는 다시 한 번 체제의 문제를 수면 위로 밀어올리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될 것이다. 나는 막연하지만 그렇게 예감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직감은 활동가들의 좁은 식견을 자주 앞질러왔다. 새로운 세기의 노동자 민중은 지도부에게 전권을 양도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유보 없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나는 이 요구에 응답하는 운동만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성장하여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물려받은 운동의 유산에서 이 정신에 부합하는 것과 이 정신을 훼손하는 것을 가려내어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들을 더 강화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현재의 정세와 상황에 맞게 민주주의의 정신을 구체화해야 하고, 다양한 조건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다양한 방식과 전략들을 계발해야 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 다양한 사람들이 평등한 주체로 서는 데서 겪는 제약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를 더 세밀하게 모색해야 하고, 조직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관료주의나 권력의 집중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중인 노동자 민중의 실천에 참여하고, 거기에서 정말이지 끝없이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우리 자신부터가 끊임없이 반성하고 변해야 한다.

 

나는 이 정신을 가장 깊이 받아안고 고민하고, 그것을 가장 일상적이고 세밀하게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에 있다. 이 곳은 이 문제에 대해 풍부한 고민을 나눌 수 있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이 빠지는 함정처럼, 이 조직에 좋은 것이 곧 사회주의에 좋은 것이고 이 조직에 복무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자로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 한다. 오히려 다른 세상을 향한 연대라는 기반을 딛고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시대정신에 기여하는 것을 사회주의자로서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그 길을 가리켜 보인다고 믿는다. 이것이 지금 내가 사회주의자로서 인류의 미래에 걸고 있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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