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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

젠더, 계급, 인종 - 사회재생산과 상호교차성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5. 28.

지난해 11월 초에 영국 런던에서 이루어진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2015 컨퍼런스에서 사회재생산과 상호교차성에 대한 토론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여기서 콜린 윌슨(Colin Wilson)은 사회재생산의 개념을 소개하고 티티 바타차리야(Tithi Bhattacharya), 앨런 시어스(Alan Sears), 헤스터 아이젠슈타인(Hester Eisenstein), 케이트 데이비스(Kate Davies)와 리즈 보겔(Lise Vogel)과 이루어진 토론과 논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최근 강남역 사건으로 불거진 여성 혐오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많은 상황에서, 이 글이 자본주의와 여성 억압, 착취와 억압의 상호교차적 관계 등에 대한 더 진전된 고민과 토론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번역에 수고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출처:

http://rs21.org.uk/2015/11/17/hm-2015-social-reproduction-and-intersectionality/


 

사회재생산이란 무엇인가?

 

역사유물론의 첫 번째 메인토론과 뒤에 이어진 많은 토론들은 사회재생산을 둘러싼 쟁점들을 다루었다. 사회재생산은 리즈 보겔의 <마르크주의와 여성억압>이라는 중요한 책이 최근에 재출간된 이래로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생산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노동자들에게서 사회적 가치(social value)를 추출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적인 말로 하자면 노동자들이 계속 노동을 해야만 이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노동력이 계속 이용 가능한 상태인 것, 즉 현재의 노동력이 미래에 재생산되는 것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함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무엇보다 가족을 통해 이루어지며, 가족 내에서 미래 세대의 노동자들이 길러진다. 가족의 존재는 자본으로 하여금, 예컨대 복지와 돌봄 서비스를 감축하고 가족이 그런 것들을 제공하게 만듦으로써, 사회재생산에 대한 지출을 줄일 수 있도록 한다


여성들이 돌봄노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되며 실제로도 대부분의 돌봄노동을 하기 때문에, 사회재생산 이론은 여성의 사회적 상황을 자본의 이윤 추구와 연결시키며 여성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가족은 자본이 노동력의 이용 가능성을 보장하고자 사용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이주는 처음부터 자본의 핵심적인 측면이었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중반에 수천 명의 아일랜드인들, 2차 대전 이래로는 카리브 해, 인도 아대륙, 동유럽과 기타 다른 곳 출신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이 그랬다.

 

예전에, “시초축적시기의 자본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와 강제노동에 의존했다. 사실 18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 카리브 해에서 생물학적 재생산, 즉 노예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사회재생산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 노예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은 그보다는 오히려 아프리카에서 새로 데려온 노예들을 계속적으로 구매함으로써 보장되었다.

 

이 도입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지적은 사회재생산이 그저 충분한 물리적인 신체들의 존재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을 갖추도록 사회화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노동력을 발전시키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재생산은 예컨대 돌봄, 교육 그리고 주거의 공급을 포함한다.

 

자본이 이런 영역에서 지출을 줄이려 하거나 자본의 필요에 더 잘 맞게 함에 따라, 이런 영역들은 점점 더 계급투쟁의 장소가 되어 왔다. 티티 바타차리야를 포함한 몇몇 저술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시카고 교사들이 파업 투쟁 동안 했던 것처럼 작업장의 투쟁을 노동계급 지역사회에서의 더 넓은 쟁점들과 연결하는 것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티티 바타차리야: 마르크스, 노동 그리고 사회재생산

 

티티 바타차리야는 노동하는 인간 신체와 그것을 둘러싼 물질적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마르크스의 묘사를 검토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특히 본능적인 노동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동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만든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벌들은 항상 완벽한 육면체의 방들을 만드는 반면, 인간 건축가들은 다양한 구조물들을 만든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창조하며 자기 자신의 본성 또한 변화시킨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주로 경제와 임금노동에 대한 것이라는 통념적인 견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고 우리 스스로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월요일 아침을 두려워하는가? 이는 감각을 만족시키며 목적의식적인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에 자본이 가하는 폭력의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또한 우리 자신의 신체와 역사적 주체성 역시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인간 노동을 끊임없이 소비함으로써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우리가 더 많이 생산할수록 노동자들은 더 가난해지고,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사물들은 무언가 우리에게서 소외된 것으로서 우리를 마주한다.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은 그러므로 의식, 신체와 자연의 통합체에 쐐기를 박아서 그것들을 쪼개는 과정이다. 자본주의는 전체적으로 하나로 느껴져야 할 생물학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를 분리시킨다.

 

우리의 세계는 상품들의 집합체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라는 살아 있는 존재를 마주하는, 무생물인 이 상품들이 우리의 자아를 축소시키고 우리를 빈곤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상품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는 총체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오직 한 측면 속에서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형식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하지만, 사실 이 체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생산하는 수단에 대한 폭력적인 강탈과 소수에 의한 전유에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진짜 불평등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현실 아래로 내려가 보아야만 명백하게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추출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안에서 임금노동이 된다. 신체, 자아와 목적의식적 노동의 감각적 통합체는 그저 노동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노동으로 쪼개진다. 마르크스는 이를 소외라고 불렀다


이스트반 메자로스(István Mészáros)는 소외에 대한 그의 글에서 노동(독일어로 Arbeit)을 핵심적인 수렴점, 즉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서, 그리고 본성적인 것을 의식적인 것에서 분리시키는 소외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아, 신체와 목적의식적 노동의 감각적 통합체가 쪼개진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젠더는 이러한 분열의 한 측면이다. 생물학적 성(sex)과 반대되는 의미에서든 아니면 그것의 연속적인 표현으로서든, 젠더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고 자본주의가 주장하는, 많은 화해 불가능한 이원성 중 하나이다.

 

우리의 임무는 자본주의 하에서 젠더와 생물학적 성 양쪽 모두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탐색하고, 양쪽 모두가 우리 존재의 더 넓은 총체성과 갖는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어야 한다. 리즈 보겔의 작업은 여성의 가사노동에 가 있었던 이전의 초점을, 자본주의적 생산 영역과 가족이 맺는 구조적 관계로 옮긴다. 가정 영역에서의 여성억압은 자본주의 생산의 총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잉여가치의 추출은 모순적이다. 이는 자본이 그 피지배자들의 삶을 잠식하는 과정인 동시에, 예컨대 노동일의 길이와 일반적인 노동조건에 대한 전투처럼,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는 지형이기도 하다. 임금 체제는 우리의 착취를 측정하는 동시에, 예컨대 파업처럼 자본주의에 파열을 내기 위해 행동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인도 델리의 남쪽 공장지대 외곽에 있는 파리다바드(Faridabad)는 거대한 경제개발지역의 일부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의 섬유, 자동차, 소프트웨어, 콜센터, 공장과 슬럼지대에서 노동한다. 이 곳의 관리자들은 생산을 24시간 주기로 늘리려는 목적으로 기계 속도 증가와 윤번교대제를 도입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해 왔다. ‘파리다바드 노동자 신문5월에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여기에 반대하는 행동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정기 야간교대 동안, 총관리자는 졸고 있는 노동자를 보기만 하면 신경질을 내곤 했습니다. 그는 그들에 대해 징계 조치를 취하곤 했죠. 어느 날 밤, 우리 108명이 다 같이 공장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한 명씩 차례로 우리를 감시하러 온 관리자들은 우리가 한 곳에서 전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돌아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3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못되게 굴지 못했고, 불이익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공장의 다른 부서의 노동자들도 따라서 했습니다. 일종의 전통이 되었죠.

 

여기서 노동자들은 기계 속도 증가, 자신의 육체와 노동을 보충할 능력의 감소에 반대해서 투쟁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한 잉여가치의 추출보다 자신들의 재생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사회재생산 이론에서 중심적인 주제인 노동자의 재생을 둘러싼 투쟁인 것이다.

 

두 번째로, 남성과 여성 모두 위의 야간 시위 동안 공장 바닥에서 잠을 잤다. 생물학적 혹은 젠더화된 선에 따라 분열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연대를 통해 극복한 것이다. 실제로, 새로운 집단적인 투쟁체가 구상된 것은 바로, 노동자의 자기 재생산 영역과 공장 바닥 사이의 구분선을 지워버림으로써였다. <대지의 소금: Salt of the Earth>이라는 영화도 비슷한 과정을 묘사한 바 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노동하는 신체(labouring bodies)와 생물학적 성이 부과된 신체(sexed bodies)라는, 축적의 분리된 영역을 만들어 내는 자본의 구실을 폭로한다. 이런 영역들은 하나로 수렴하여 자본,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라는 선을 뛰어넘어 펼쳐지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위한 하나의 목적의식적이고 물질대사적인 총체를 구성해야만 한다.

 

신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수탈의 속도 증가에 저항하고, 노동 시간을 자본 관계 밖의 삶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시간으로 대체하는 것, 전통적으로 젠더화된 작업장이라는 공간을 젠더와 섹슈얼리티라는 자본주의적 효과에 저항하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에 대한 인간적인 대안으로 상정하는 해방적 사회관계의 측면들이다.

 

앨런 시어스: 사회재생산과 성 해방(sexual liberation)

 

알란 시어스는 성 해방 투쟁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킴으로써 논의를 이어갔다. 비록 LGBT에 대한 억압이 지속되고 있으며 법적 평등과 해방 사이의 격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많은 곳에서 LGBT 권리가 쟁취되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남아있는 격차를 더 좁히고, 형식적 평등으로부터 진정한 젠더 및 성 해방으로 나아가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 이론은 섹슈얼리티를 생산과 재생산과의 관계 속에 자리매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성적 정상성이 노동의 특정한 분업에 의해 유지됨을 명확히 한다. 성 해방은 사회 조직의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를 이루고 강탈을 끝장내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그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조안나 브레너와 같이, 마르크스주의가 이제까지는 사물의 생산을 주로 다루었지만 사람의 생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단언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으로부터 나왔다. 1980년대에 존 데 밀리오(John D’Emilio)는 사회재생산을 레즈비언 및 게이 정체성의 출현과 연결시킨 선구적인 작업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상호의존적 가족 단위에서 사는 것과 대조되는 임금노동의 발전이, 동성애적 욕망(same-sex desire)과 합쳐져 가족 외부에 기반을 둔 개인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그의 최근 저서 <Warped>에서, 동성애적 정체성을 자본주의 내에서 역사화했다. 자본이 노동 분업을 재조직하고 직장생활을 변화시킴에 따라 그런 정체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검토하며 이를 한층 발전시켰다.

 

사회재생산은 게일 루빈이 섹스-젠더 체계(sex-gender systems)”라고 부른 것으로 이어지는, 일과 삶의 조직화의 바탕을 이룬다. 자본주의에서의 생산과 재생산은 직접생산자들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며, 강탈의 과정에 의존한다. 마르크스에게 이는 시초축적이라는 한 번의 과정이었다.

 

데이비드 하비와 실비아 페데리치 같은 보다 최근의 저술가들은 이를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본다. 로즈마리 헨니시(Rosemary Hennessy)는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관계에서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더 빼앗기도록 강요되는 방식을 지칭하기 위해 천대’(“abjection”)라는 용어를 쓴 바 있다.

 

헨니시는 예를 들어 여러 종류의 돌봄노동에 낮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에서 천대가 표현된다고 한다. 다른 종류의 천대들은 제도화된 강간 문화와 같은 강탈의 위계적 과정들을 포함할 것이다. 현대 국가에서 정상 상태가 되어 버린 경찰 폭력을 통한 인종 위계의 재생산, 감옥-산업 복합체와 이민자 수용소 또한 차별화된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며 강탈과 연결돼 있다.

 

이렇게 차별화된 강탈의 과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화된 것 같은 노동 분업을 뒷받침한다. 젠더 차이, 지불노동과 부불노동의 차이는 이런 과정들과 강탈의 위계에 의존한다. 그러니까 여러 측면에서 젠더는 노동분업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도로시 스미스(Dorothy Smith)는 여성이 일반적으로 체화된 돌봄에 집중되어 있고, 이는 앎과 삶의 특정한 방식들과 관련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남성이 타인을 돌보는 것에서 유리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추상적 방식의 앎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과 성애적 욕망의 젠더화된 패턴은 노동 분업을 통한 젠더 구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노동 분업은 행위와 앎의 서로 다른 목록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주디스·잭 할버스탐(Judith·Jack Halberstam)은 노동을 통해 구성될 수 있는 여성의 남성성에 대해 썼다. 몇몇 농촌 여성은 도시 기준으로 볼 때 더 남성적인데, 이는 단지 그들이 육체노동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지 그들의 성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예컨대, 미국 흑인들의 가족 형태는 이성애에 대한 일반적 규범에 맞지 않는 경향이 있어 왔다고 로드릭 퍼거슨(Roderick Ferguson)은 썼다. [흑인 남성들의 대량 투옥으로 가정에서 남성 가장이 부재하게 만드는] 감옥-산업복합체부터 흑인 여성들이 [힘이 더 세다는 편견 속에] 백인 여성들과는 다른 형태의 육체노동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미국의 흑인들이 하는 일이 종종 이성애규범적(heteronormative) 이상형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 해방을 이해하고 평등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성애규범적인 것과 동성애규범적인 것이 강탈의 위계질서를 둘러싸고 조직된 특정한 노동 분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사회재생산이라는 프레임은 우리가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가질 수 있는 선택지에 노동의 조직 방식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렇기에 성 해방은 그저 관습에서 벗어나는 실천, 더 대담하게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몸과 삶에 대해 자원과 통제권을 갖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강탈의 위계질서, 노동 분업, 개입되는 폭력의 형식,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을 제한한다. 성 해방은 이 모든 형태의 부자유를 고려해야 하고, 사회재생산은 우리가 거기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기여한다.

 

 

상호교차성과 사회재생산

 

이어서 헤스터 아이젠슈타인과 케이트 데이비스의 발언이 있었다. 헤스터는 최상층에 있는 극소수의 여성들만 고위직을 갖는 게 가능한 가운데 현대 페미니즘의 상당 부분이 신자유주의와 동맹을 맺고 있는 방식을 다루었다. 자신의 저서 <타락한 페미니즘 Feminism Seduced>에서 논증했듯이, 그녀는 페미니즘이 양육, 재생산 통제, 어머니의 출산휴가와 아버지의 출산휴가에 대한 요구 등 대부분의 여성들을 이롭게 할 요구들과 분리되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케이트 데이비슨은 자신의 발제문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을 사용하여 호주의 가정폭력을 분석했다. 이 세션에서의 논의로 시작되었고 컨퍼런스 내내 이어졌던, “상호교차성개념의 유용성에 대한 논쟁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 발제문들을 간단하게만 설명하겠다.

 

상호교차성은 특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은 아니다. 이는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개인들의 경험이 서로 다른 형태의 예속(예를 들어 계급, 인종 혹은 젠더에 기반한 예속)을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고, 이런 예속들이 융합되는 방식이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컨대 흑인 여성의 경험은 흑인 남성의 경험과, 백인 여성의 경험과도 다르고,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가 단순하게 혼합된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토론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억압에 맞서 싸우는 데, 그리고 억압이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총체의 일부로서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전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투쟁들을 진전시키는 데 상호교차성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다.

 

예컨대 티티는, 상호교차성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우리 활동의 공백에 정당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반면 이론적 접근으로서의 상호교차성에는 많은 약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상호교차성은 젠더나 인종과 같은 범주들이 각각 자체적으로 정합적인, 단일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그저 교차하거나, 섞이거나, 상호작용하기만 한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는 이런 서로 다른 억압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혹은 그 억압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논리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사회재생산과 소외는 억압들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억압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프레임을 제공하지만 상호교차성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상호교차성에 대한 리즈 보겔의 주장

 

이 논쟁들은 상호교차성에 대한 물음토론회에서도 이어졌고, 여기서 리즈 보겔은 사회재생산과 상호교차성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을 제출했다. 보겔은 상호교차성이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에 의해 1980년대에 처음 사용되기는 했지만, 1960년대와 70년대 여성운동에도 인종-계급-젠더 사고라고 부른 것의 사례들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생각들 중 많은 부분은, 항상 계급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의 한 종류와 스스로를 분리하고자 한 클로디아 존스(Claudia Jones)나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와 같은 유색인종 여성들에 의해 발전했다.

 

1980년대에 이런 접근은 섹슈얼리티와 같은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보겔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는 사회운동의 쇠퇴기에 발생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페미니즘 학자들은 사회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없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다면적이었는데도, 페미니즘이 원래부터 백인의 것이고 중산층의 것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상호교차성은 이론적으로는 몇 가지 결점을 갖고 있다. “상호교차성이라는 용어는 온갖 종류의 것들을 다 의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는 인종, 계급과 젠더가 한편에서는 자율적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유사하고 비슷함을 주장한다. 인종, 계급, 젠더는 모종의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데,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겔은 상호작용에 대한 이 질문이 핵심적이라고 시사하면서, 모든 체계들이 동등한 인과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우리가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계급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되돌아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의에서 제이미 고프(Jamie Gough)가 마르크스주의 저술가 버텔 올먼(Bertell Ollman)의 작업에서 이루어진 구별을 인용하면서 특히 흥미로운 기여를 했다. 고프는 상호교차성은 구체적인 사례들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 및 올먼은 두 대상 사이에 논리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내적 관계, 두 대상이 서로 만나지만 필연적인 인과적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 외적 관계를 구별한다. 상호교차성은 우연적인 외적 관계에 기반을 둔 설명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적 관계라는 것이다.

 

 

사회재생산과 상호교차성에 대한 퍼거슨과 맥낼리의 주장

 

마지막으로, 비록 <역사유물론> 컨퍼런스에서 발제를 하진 않았지만, 사회재생산을 이슈로 다룬 잡지 <관점 Viewpoints> 최근호에 실린 캐나다인 마르크스주의자인 슈 퍼거슨(Sue Ferguson)·데이비드 맥낼리(David McNally)의 인터뷰를 언급하는 것이 유익할 수 있겠다.

 

퍼거슨과 맥낼리는 그들이 보기에 사회재생산 이론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먼저 이 이론은 노동력을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던 기존 버전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노동력이 사회적 존재와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사실 노동력은 오직, 직접적인 노동-자본 관계 밖에서 특정하게 젠더화되고 성애화된(sexualised) 사회관계가 있기 때문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회재생산 이론은 자본주의의 지속이 임금을 지불받는 노동과 부지불 노동 둘 다의 존재를 요구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이론은 그들이 말하기를 복잡하게 차별화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통합돼 있는 사회적 총체에 대해 종합적 이해를 제시한다. 퍼거슨과 맥낼리는 상호교차성의 몇몇 강점들을 인정하는 한편 근본적인 약점들 또한 묘사한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장 훌륭한 상호교차성 해석들은 그 어떤 특정한 억압적 관계도 다른 것과 분리할 수 없음을 제대로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명들은 예컨대, 왜 그리고 어떻게 이성애화된 관계들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이 방식으로 가부장적(patriarchal) 관계들과 교차하는지에 대해(가족은 왜,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식이, 예를 들어 동성 결혼을 포섭하기 위해 변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규범성과 가부장제가 항상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승인되는 사적 제도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 그 어떤 정합적인 설명도 발전시킨 바가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 사회적 총체, 즉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교차하는 전반적인 과정 혹은 동학를 부적절하게 개념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서로 구별되는 억압들이 함께 구성요소가 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런 억압들을, 공간 속에서 교차하거나 맞물리긴 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구별되는 체계들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몇 영역에서는 한층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재생산 이론이 상호교차성보다 더 유익한 접근이라고 주장한다.

 

상호교차성 이론이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했고 중요한 통찰들을 해냈기는 하지만, 이 이론은 왜 이러한 여러 가지 억압들이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에 걸쳐 존재하고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리고 그들의 상호작용 방식을 설명하는 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사회재생산 이론은 총체적이면서도 통합된 접근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런 영역에서 잠재적으로 더 잘 갖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사회재생산 이론의 몇몇 중요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종주의 그리고 식민주의 이론 및 실천의 가장 훌륭한 부분에서 배우려는 많은 노력과 진정성 있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이 사회재생산 이론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정치적 결론은 인용할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직접적인 노동/자본 관계, “경제적교환과 운동법칙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사실 이는 서로 다르게 젠더화되고, 성애화되고, 인종화된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일련의 살아있는 관계(lived relations)에 핵심적으로 의존한다는 데 동의합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인종화되고, 성애화되고, 젠더화된 몸, 실천, 그리고 제도들이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자본주의의 진짜혹은 이상적인기능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분리될 수 있는 역사적 일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자본의 강탈과 축적의 실제 과정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며, 그 과정을 정말로 활동적으로 촉진한다는 의미에서, 그 과정의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같은 논리로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인종주의, 성차별 혹은 그 어떤 억압에 대한 도전이든 자본의 재생산을 방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작업장 투쟁이 계급투쟁인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 그런 투쟁들은 그 자체로 본질상 잠재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작업장 투쟁이 언제나 처음부터 반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회재생산 접근의 정치적 중요성은 여러 전선들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중요성을, 다만 명확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바탕으로 해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http://anotherworld.kr/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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