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다른 세상을 향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

류한수진

 


[아래 글은 최근 우리 모임 내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반성폭력 등 평등하고 정의로운 동지적 관계를 위한 규약 마련을 위한 토론 과정에서 나온 발제문이다. 비록 내부 토론을 위한 글이었지만, 여러 가지 유익하고 함께 고민할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1. 운동사회 내 인권침해에 맞선 운동의 간략한 역사

 

지금 운동사회에 널리 자리잡고 있는 인권 규약의 뿌리는 90년대, 2000년대의 반성폭력 운동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까지는 운동사회 내부의 차별이나 폭력에 대한 공적인 담론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나, 90년대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성폭력 문제가 이슈화되고, 2000년대에 들어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원회>)의 사건 폭로로 운동사회 성폭력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운동 사회 내부의 여러 가지 인권 침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운동적으로 시정해나갈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되었다.[각주:1]

 

<100인위원회>는 조직과 정파를 초월한 여성활동가들의 네트워크로, 운동사회의 명사들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들을 제보받아 가해지목인들의 실명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서 인터넷과 대자보로 폭로하였다. 이는 90년대 대학가에서 확산되었던 반성폭력 운동의 방식과 담론을 본뜬 것이었다. <100인위원회>의 이러한 실천에 대해서는 내외적으로 반발이 많았으며 현재까지도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들의 폭로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만들어내고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를 단번에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00인위원회>를 계기로 운동 사회의 분위기는 크게 변화하였고, 이러한 성과는 이후에 주로 반성폭력 내규나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한 공동체적 해결이라는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일상적 성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일상에서의 성차별적, 여성 억압적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운동 내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성범죄를 넘어 문화와 관습까지 확장되었다. 또한 성폭력 내규나 공동체적 해결 절차를 본따 반장애폭력, 가정폭력, 성소수자 차별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규약이나 해결 프로세스를 마련하는 단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2. 2000년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와 한계

 

이상에서 살펴본 2000년대 이후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 문제를 더 이상 쉬쉬하지 않고 엄격하게 처벌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운동사회와 공동체의 정치적 문제로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성과를 남겼다. 또한 이전에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되던 인권 침해들을 폭력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권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진보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성범죄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문화, 인습을 문제삼을 수 있게 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꾀하게 된 것 역시 중요한 진전이다. 이는 여성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운동 내에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지 않고 평등하고 안전하게 운동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며, 운동의 도덕적 신뢰도뿐만 아니라 단결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운동 내부에서 소외와 배제, 차별과 폭력이 횡행할 때 진정한 결속과 신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동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한계 지점들 또한 존재한다. 첫째, 무엇보다 지역이나 집단의 성비, 교육 수준 등에 따른 의식의 편차가 심하고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한계이다. 일선에서 일하는 여성 주체들은 특히 지방이나 남초 사업장의 경우 반성폭력 문제의식의 기초조차 공유되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둘째,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성별 간의 적대감을 부추기거나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피해자의 삶을 효과적으로 회복하고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가해자를 단죄하고 응징하는 것이 여성주의 투쟁의 목표인 양 오해되는 경우가 있었다. 비단 운동의 비판자들뿐만 아니라 주체들도 이러한 우를 종종 범했다.

 

셋째, 사건 해결의 원칙으로 피해자중심주의를 내세우면서 진상과 타당성을 따져보기도 전에 피해호소만으로 가피해를 기정사실화하는 오류, 모든 인권침해를 경중을 따지지 않고 범죄화하는 오류(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성폭력 개념의 무한 확장이 성범죄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드는 한국 사회의 엄벌주의 정서, 흉악 성범죄만을 성폭력으로 생각하는 협소한 대중의 개념과 결합하여 이런 반응을 낳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중심주의 원칙이 주관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에 더하여 ‘2차 가해개념의 모호함이 겹치면서 어디까지 2차 가해인지 구성원들이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없게 되어 발언 자체를 꺼리게 되거나 정당한 이견 제시가 2차 가해로 몰리는 등 민주적 토론이 봉쇄되는 오류 등 운동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하는 오류들이 반복되어 왔다.

 

넷째, 소수의 여성주의 주체들이 절차를 전담하다시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는 여성주의를 잘 아는 일부는 계속되는 성폭력 사건 처리에 치이고 공동체에서 지지를 얻지 못해 고립되는 바람에 끝없이 지치고 소모되는 반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해결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치의 정당성을 납득하지 못하고 성폭력 문제 해결의 주체로 성장할 기회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대중의 민주적 토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전문가들의 결정으로 대안을 도출하는 데서 일반적으로 생기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3. ‘다른세상을향한연대는 어떤 규칙과 합의를 지향할 것인가?

 

현재 우리는 과거 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시점에서 참고할 만한 매우 중요한 글이 바로 전희경의 <공동체 성폭력 이후’,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다>이다.[각주:2] 이 글은 실제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유익하고 실질적인 논의들을 많이 담고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성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라는 틀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정의와 신뢰의 문제로 사고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운동 내부의 인권 침해에 맞선 노력이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꾀하는 데까지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무엇을 왜 비난해야 하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폭넓은 질문,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는가?’라는 질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내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끊임없이 실천적 경험을 쌓아가면서 형성해갈 수밖에 없다. 실효성 있으면서 올바르고 풍부한 규약을 만들고자 한다면 모든 회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많은 논의를 거치고, 또 많은 시행착오와 보완·발전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도출할 수 있는 몇 가지 실마리들을 던지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우리의 지향점으로 다음과 같은 공동체의 상을 제안하고 싶다.

 

소수자들이 안전하고 평등한 공동체

 

이는 지금까지 반성폭력 운동을 비롯한 내부 인권에 대항한 투쟁들이 암묵적으로 중심에 두어왔던 의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의제는 이견의 여지 없이 중요하고, 그 문제의식은 계승되어야 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들은 다수자들과는 다른 처지에 있으며, 공동체는 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처지에 인지적이어야 한다. 폭력을 사사화하려는 강력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소수자들의 인권은 공적인 문제임을 강조하고 기본 접근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비가시화되어 있는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인권 민감성을 키우려는 노력, 개별적인 폭력 사건의 배경에 있는 문화와 인습을 성찰하고 개선해나가는 노력, 사건 발생시 2차 피해를 예방하고 효과적으로 피해자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 역시 계속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공동체

 

이 기치는 과거의 운동 과정에서 다소 협소하게 해석되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있었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 역시 결국은 정의와 평등의 원리에 따른 것이기에, 절차를 우회하거나 누군가의 인권을 탄압함으로써 이를 꾀하려는 시도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시도든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원칙에 따를 필요가 있으며, 부당한 인권 침해를 당할 경우 이견을 제기하고 구제받을 수 있는 권리가 가해지목인을 포함한 모든 성원들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적인 공동체

 

모든 사람이 원론적으로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운동에서는 진영 논리나 이견의 터부시, 의견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적대감과 배제가 너무나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성역 없는 부단한 토론을 허용하고, 소수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대중의 민주적 토론을 통해 새로운 합의 형성과 공동체의 변화를 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오류를 인정하는 공동체

 

무오류의 조직을 추구하는 경향과 성폭력 사건에 대한 엄벌주의가 결합하면서, 조직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일종의 스캔들이나 수치로 치부하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정서는 피해 호소를 억압하거나 가해지목인을 꼬리자르기하려는 욕망을 부채질함으로써 공동체의 건전한 성찰을 방해한다. 우리는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를 가볍게 보지 않되, 그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언제든 우리 조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문제도 없는 청정한 조직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났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조직을 목표로 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고 현실적이다. 피해 호소나 문제 제기는 조직의 발전을 위한 귀중한 계기로서 장려되어야 하며, 가해자는 무조건 강하게 지탄하고 단호하게 배제해야 할 적이 아니라 적절한 재사회화를 통해 공존해야 할 상대로 간주되어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는 공동체

 

평등과 진정한 단결을 위해서는 폭력이 없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별, 성정체성, 나이, 직업, 경력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간으로서 온전히 존중받는 상태여야 비로소 평등하다고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상대방을 동등한, 그리고 충분한 판단능력을 지닌 주체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지니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상대방의 말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고, 합리적 핵심을 포착하면서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고 기각하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핵심을 살리면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토론을 습관화해야 한다. 또한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상대방의 입장과 감정을 섣불리 재단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

 

운동은 상처와 감정적 소모가 많은 활동이기 때문에 감정적 치유와 돌봄이 없으면 오래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탈진하기 쉽다. 더구나 서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정치적으로 가장 긴밀히 협력하는 동지들끼리 서로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대한다면, 활동가들은 조직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소외된 상태로 활동하게 된다. 이는 조직의 효율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활동가들의 건강한 삶을 해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또한 아무도 감정노동이나 돌봄노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노동이 습관화된 활동가가 자연스럽게 돌보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데, 사회에서는 주로 여성을 이렇게 사회화하기 때문에 이는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돌봄을 전가하는 성차별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공사를 구분하는 것과 서로를 정치적 도구로서만 대하는 것은 다르며, 후자는 지양되어야 한다. 운동 조직은 현실적으로 함께 부대끼고 생활하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고, 상호돌봄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감정적 소모를 줄여가야 한다. 감정노동을 (여성들을 비롯해) 하려는 의지가 있는 일부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균등하게 나눠 져야 할 책임이자 일상적인 활동의 일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보편화되는 공동체

 

운동 일각에서는 조직을 적대적인 외부 세계로부터 치유받을 수 있는 소모임으로 사고하고, 그 내에서의 해방과 평등한 관계맺음을 추구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 운동의 목표일 수는 없다. 바람직한 공동체의 상을 그렸다면, 각자가 선 공간을 그러한 공동체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자세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문제나 시행착오가 계속 있을 것이다. 건전하다고 믿었던 공동체의 상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이러한 경험들을 조직적으로 공유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상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고, 이를 통해 보다 현실적이면서 보다 해방적인 이상을 지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랑과 연대가 혐오를 이긴다!' - 6월 6일 '여성혐오 세상을 뒤엎자' 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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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엄혜진, <'100인위' 운동의 수용과 현재적 착종>, ≪페미니즘 연구≫ 제9권 1호, 2009. [본문으로]
  2. 전희경, <공동체 성폭력 ‘이후’,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다>,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토론회 자료집, 201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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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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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봉 2016.08.15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주택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공동주택이 늘어가고 농지가 택지로 전용되어 도시가 농촌지역으로 확장되었고, 주택보급율이 100%를 훨씬 넘었음에도 근로계급들이 주택문제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 입니다.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렇듯 넘쳐나는 주택속에서 왜 노동자계급에게 살 집이 없어 자연을 마구 파헤치며 주택건설 붐이 일어나야하고, 한쪽에서는 턱없이 비싼 보증금과 웰세때문에 살아갈 집에 못들어가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과거fh부터 유럽 혁명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주택문제가 무엇을 해결하고자 했는가? 그리고 주택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를 이제는 공공연히 말해야 합니다! 오늘날 남한에서 근로민중들은 주택문제때문에 생활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성경의 경구를 암송하고 해석하는 랍비집단처럼 사회과학을 종교화하고 가르치는 과외선생밖에 되지 못합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해석하고 변혁할 주택 강령을 내오기 위해 한국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주의운동에 프롤레타리아트 입장을 추가함으로써만 대중투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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