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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한반도/ 비정규직 연대/ 민주노총 총파업/ 탁현민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7. 6.

전지윤



 

한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비이성적이고, 어디로 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정권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트럼프 정권 말이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부터 계속 한반도에 가공할 첨단무기와 핵무기들을 배치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문정인의 북핵을 동결하면 한미군사훈련도 축소하자는 발언 직후에, 가장 위협적 폭격기라는 B-1B 2대를 한반도로 출격시켰다. 회담 직전엔 이지스함을 남중국해로 보내 군사작전을 펼쳤고, 대만에 대한 거액의 무기 판매를 발표했다.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며 문재인의 머리 위에 돌덩이를 얹은 것이다. 결국 트럼프는 한미일 동맹과 군사협력, 미국의 핵우산, 대북압박과 제재에 대한 문재인의 충성약속을 받아냈다. 주한미군 주둔비 협상과 한미FTA 재협상을 위한 디딤돌도 놓았다. 문재인은 대북 추가 제재나 반IS 국제연대에서도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멀쩡해보이던 정치인도 미국만 건너가면 아무말을 한다는 법칙은 또다시 확인됐다. 친미독재와 싸워선 이뤄낸 게 이식된 민주주의라니? 사드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도 미국에 가서는 거의 배치 확실성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감명깊게 봤다는 주사파라고 문재인을 공격하던 극우익도 약간 머쓱할 거 같다. 얼마전엔 베트남 참전을 애국이라더니, 트럼프 앞에 가서 낯부끄러운 말들까지 했으니 말이다.

 

조중동은 새정부의 외교안보 분야에서 자주파와 동맹파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해왔는데, 한미정상회담 결과는 동맹파의 승리로 보인다. 친미동맹우파들은 여전히 새정부의 요직을 꿰차고 앉아,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국 먼저 가서 충성맹세해야 한다는 관행을 재확립했다. 문정인은 찌그러졌고, 강경화는 눈치보고 있다.

 

따라서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북한의 응답이 장거리미사일 실험이라는 것은 예측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초강대국 미국, 반세기 넘게 뿌리내린 한미동맹, 친미우파를 한번에 뒤집을 수는 없지 않냐고 변명할지 모른다. 전작권 반환, 4 NO(대북 적대시, 공격, 정권교체..) 확인, 남북대화 지지 등을 얻어내며 운전대를 잡게 된 건 성과 아니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작권은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라서 넘기려는 걸 이명박근혜가 한사코 안받겠다고 뻗대던 문제라 성과로 보긴 애매하다. 운전대를 잡더라도 트럼프가 시키는대로 운전한다면 무슨 의미인지 따져보자.

 

실제로 문재인은 제재와 압박을 우선하며, 북한이 먼저 핵을 동결해야 한다는 전제조건도 달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실험에 바로 한미합동 선제타격 무력시위를 지시했다. 실패한 전략적 인내와 뭐가 다른가?

 

북한을 빌미로 중국을 포위하며 패권을 유지하려는 게 한미일 동맹의 본질인데, 그 틀 안에서 추진하는 남북대화의 한계는 명백할 수밖에 없다. 미국 대신에 내가 한번 북한을 무릎꿇려보겠다는 식이면 달빛정책도 미국이 허락하는 햇볕의 한계를 넘기 어렵다.

 

지금 상황은 참여정부 초기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때도 이라크 파병 대신에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성과 남북대화 허용, 전작권 등을 받겠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일단 시간을 벌고 힘을 기르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요구는 평택미군기지, 제주해군기지로 갈수록 늘어났고, 부시는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지고 나서야 남북대화를 허용했다. 그 사이에 참여정부의 지지기반은 붕괴했고, 친미우파는 힘을 되찾아 대대적 반격에 나섰다.

 

물론 자유주의 정부의 개혁정치인이, 조지 부시에게 지옥의 유황냄새가 난다고 일갈했던 차베스처럼 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사드 배치와 한미동맹에 반대해 싸우는 사람들의 기를 꺾고 좌절시키는 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진정으로 한반도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중을 기다리지 않으며 싸우고 힘을 키울 때만, 트럼프의 도발을 막아내고 문재인 정부가 운전대를 옳은 방향으로 꺾도록 강제해낼 것이다.

 


정규직 양보인가 노동자 연대인가

 

민주노총의 6.30 총파업을 앞두고 공공노조, 금속노조가 비정규직과 청년들을 위한 연대기금 등을 내놓으며 논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여타 논쟁들이 쉽게 빠졌듯이 서로 귀를 막고 평행선을 달리는 식으로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논쟁이 격해지면 쉽게 나타나듯, 상대의 진정성과 의도를 함부로 단정하며 상처주진 않았으면 한다.

 

먼저 연대기금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귀족과 대기업 정규직의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보다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연대와 투쟁에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걱정에 반발하는 것이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단지 투쟁과 연대에 관심없고 협상, 타협만 바라는 사람들은 아니다. 여기에도 비정규직, 청년들을 조직하는 데 누구보다 관심갖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많다. 한 쪽은 사회주의자이고 다른 쪽은 개혁주의자라고 단정짓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런 이분법은 정확치도 않지만, 편 가르고 딱지붙이는 것일 수 있다.

 

지금 노동운동은 개별 작업장에 갇혀 눈 앞만 보다가 수렁에 빠진 게 현실이다. 조직노동과 비정규, 청년들 간에 격차를 만들어낸 자들이 그걸 빌미로 또 조직노동을 공격한다. 이 상황에서 조직노동이 앞장서 싸우면 나머지도 나아진다. 정규직 양보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은 불행히도 비정규직,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규직-비정규직이 연대하면 된다는 평면적 주장은 잘 와닿지 않는다. 매년 최저임금으로 싸울 때마다 알바노조 등이 앞장서고 주요 노조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보인 게 사실 아닌가.

 

그 점에서 양보와 연대주장은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1) 비정규직, 청년들의 박탈감에 공감하며 2) ‘지금 이대로가 아닌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제의식은 공감가는 면이 있다.

 

어차피 받지 못할 돈으로 쇼한다는 조중동의 공격도 틀렸다. 그 돈은 정규직 노동자가 받아야 마땅한 체불임금이고, 그것을 내놓겠다는 건 깍아내릴 일이 아니다. ‘투쟁 기금, 조직화 기금은 안내면서라고 냉소하기 보다는, ‘그러면 이제 여기에도 눈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이 방안의 빈 곳은 커 보인다. 노동운동의 핵심 과제는 비정규, 비조직, 여성, 청년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맨 앞에 놓으며 그들을 투쟁의 주체로 만들고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규직의 요구와 투쟁이 뒤로 밀리는 손해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장 이번 6.30 총파업에 정규직노조들의 참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최저임금보다 자신들의 임단투에 더 관심이 가 있는 정규직노조들이 연대기금으로 면피하면서, 막상 투쟁하는 비정규직을 잘 안받아주거나 내치기까지 하니, 이러다가 그 빈자리를 문정부의 노동회의소가 메울 수 있다는 걱정이 들린다.

 

물론 그런 연대와 투쟁이 하루아침에 가능할 순 없다. 그 점에서 민주노총 6.30 총파업은 매우 좋은 출발이다. 이제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청년을 위한 총파업에 정규직노조들이 앞장서는 그날을 위해, 누구나 쉽게 들어오고 손잡을 수 있는 더 크고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조직하고 설득하는 정말 어렵고 힘든 과제가 남아있다고 본다.



 

<82년생 김지영>과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들이 있다면, 하나는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면서 김지영의 어머니가 두딸에게 독립된 방을 마련해주며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여주는 장면이다. 그것은 가장 공부를 잘하고 재능도 많았지만 오빠들의 뒷바라지하며 희생해야 했던 어머니, 선생님이 꿈이었던 어머니가 두 딸에게 보내는 연대였다.

 

또 하나는 고교 시절 김지영이 외딴 버스정류장에서 학원 끝나고 따라온 남학생에게 위협을 당하려던 순간에 버스에서 뛰어내리며 이거 두고 내렸다고 소리쳤던 한 여성이 보여 준 여성 연대였다.

 

민주노총 총파업을 한 630일 광화문 광장에서 학교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바다를 보면서 느낀 것도 여성 연대의 힘이었다. 특히 수만 명이 다같이 양심수 석방카드를 들고서 약자들과 연대하며 종북몰이가 낳은 부담도 꺼리지 않는 모습은 더욱 멋졌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자형제를 위한, 남편을 위한, 자식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해 왔을 분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궂은 일을 다하면서 뒤에 가려져 왔을 분들. 가장 소중하고 절대 없어선 안 되는 일을 하는데도 최저의 댓가만 받아온 분들.

 

그들이 더 이상 참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장면, 문재인 시대에 민주노총 첫 파업의 선두에 나선 장면, 노동운동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한 장면은 여러가지 점에서 압도적이었다. 이런 여성 연대, 가장 차별받아서 더욱 절실하고 서로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곳곳으로 퍼져가서, 더 많은 것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세일즈맨>, <엘르>, 탁현민

 

근래 봤던 영화 <세일즈맨><엘르>는 둘 다 성폭력을 다뤘지만, 배경이 이란과 프랑스라는 점 말고도 풀어가는 방식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면 두 피해여성 모두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가해자보다 경찰을 더 싫어하거나 두려워했다.

 

이란처럼 보수적 사회에서 경찰이 가장 권위적 마초적일 것이란 점은 짐작할 만하다. 반면 <엘르>의 경우는 좀 사연이 있다. 주인공이 어렸을 적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에서, 그녀 자신도 피해자인데 경찰과 언론 때문에 가해자 못지않은 고통과 비난을 당했던 것이다.

 

<세일즈맨>의 피해자도 가해자보다 더 고통받기는 마찬가지다. 사건 자체뿐 아니라 주변의 시선과 편견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그래서인지 직접적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에는 큰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엘르>는 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인상적으로 무너뜨린다. 주인공은 성폭력을 당하고 나서도 하게 일상을 유지한다. 그의 정체를 몰랐긴하지만, 가해자에게 먼저 작업을 걸기도 한다. 정체를 알고 나서도 호감을 유지하고, 자신이 위기에 처하자 도움을 받기도 한다. 모두 피해자답지않은 태도다. 하지만 주인공은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특히 다른 여성이 또다시 피해를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두 영화 모두 사회에 공기처럼 퍼진 여성혐오와 사회적 강간, 강간문화의 문제를 어느 정도 보여 준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면서도 폭력의 책임을 여성에게 묻고, 여성의 입을 막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세일즈맨>에서 남편의 복수심은 아내의 고통보다, 떨어진 자신의 명예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밝혀진 범인은 너무도 평범한 이웃이었다. <엘르>에선 강간범만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디지털성폭력을 저지르는 부하직원, 주인공과 성관계 기회만 노리는 친구 남편 등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는 타고난 악인들이 아니며 바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다. 지금 탁현민과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봐야 한다. 가해자는 괴물이 아니며 우리가 공유하고 방치한 문화 속에서 나온다.

 

따라서 탁현민의 책과 글에서 나온 여성에 대한 철저한 성적 대상화, 도구화는 결코 그냥 넘어갈만한 작은 문제가 아니다. ‘콘돔을 안 쓰는 여자가 좋다?’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며 낙태에 갸우뚱하면서 콘돔은 한사코 피하는 남성들이 우리 주변에 한둘인가.

 

<엘르>의 주인공을 평생 괴롭게 했던 아버지는 그래도 자기가 사라져야 할 때를 알았다. 탁현민도 물러설 때를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시민사회와 진보운동도 내로남불은 안 된다.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더 큰 잘못을 키우는 사람들, 눈을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들... 과연 우리 안에서는 볼 수 없던 일일까

 

#탁현민OUT #그래서탁현민은요?

 

(기사 등록 20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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