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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적 성폭력 공론화와 잔인한 괴롭힘을 당장 중단하라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9. 30.

강제적 성폭력 공론화와 잔인한 괴롭힘을 당장 중단하라

- 가해 중단은커녕 대상을 확대하는 노동자연대

 

제이

 


논의의 기본 전제를, 최소한 제가 생각하는 기본 전제를 확인하고 싶어 두서없지만 발언을 신청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사실 상시적인 성폭력의 직간접 피해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저 역시 평범한 한국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혼전순결서약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요. 저도 그런 걸 했었고, 스스로 현모양처가 인생의 비전이라고 할 만큼 성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학생운동 경험이 없다보니, 뒤늦게 운동에 뛰어 들면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이런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해방감과 희열 때문에 아마 지금도 열심히 하지는 않지만, 운동의 끝자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발제자도 말씀하셨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운동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저 스스로 보고 느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엄청난 혼란과 배신을 느꼈습니다.

 

이 경험이 특히나 고약했던 건, 운동 신입이고 소위 조무래기에 불과한 저 자신과, 상대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동지, 이런 구도 속에서 제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가 그 동지를 잃는 것, 괜히 조직을 흠집 내고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스스로 들었고, 결국은 말하지 못했고 자책했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내가 왜 택시를 같이 탔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심지어 저처럼 이렇게 목소리도 크고 한 성질하는 여성조차 심지어 운동사회 내에서 이런 일을 겪고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슬픈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심한 저 같은 사람과는 달리 아주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저는 그들을 열심히 응원하면서 기대했습니다. 제가 응원하고 기대했던 건 내가 맺혔던 이 원한을 풀어줘라, 내 복수와 응징을 해줘라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다만 제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가 제기했다면 해결됐을 거야. 저 건강한 공동체가 잘못을 확인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내가 시도하지 않고 가졌던 막연한 불신을 깨끗이 해소해 줄 거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되레 피해자는 개인 신상이 낱낱이 털려 공개 당했고 의도를 의심 당했고, 심지어 정신상태까지 거론됐습니다.

 

저는 매우 매우 끔찍했는데, 그 용기를 지지하고 함께한다는 이유로 그 동지도 한 묶음으로 교활한 음모자로 찍혔습니다. 저는 굉장히 절망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뭘 느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교훈을 얻었습니다. 내가 제기하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결코 이 말을 내놓지 않을 거다. 이런 교훈을 얻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땐 내부자로서 스스로 내 머리 속을 단속하고, 나와서 제기하면 의도와 음모를 가진 파렴치한 사람으로 찍히는 이 구도 속에서 도저히 제기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와보니 피해자들의 이런 문제제기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토론자도 송곳얘기를 하시던데, 만화 송곳'두려운 건, 지는 게 아니라 혼자 남는 거'라는 대사가 있습니다. 내가 차마 먼저 나서진 못하지만 혼자 내버려두진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상처에만 골몰했던 게 아닙니다. 본인이 애정과 신뢰를 보냈던 공동체의 건강성을 확인하고 서로 간 신뢰를 회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게 본인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토론회도 이들의 용기가 이뤄낸 성과와 진일보 위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사회는 이렇게 용기 있게 문제제기하는 분들의 기여와 그 용기에 큰 빚을 졌고 이것을 갚아나가야 할 과제를 우리 모두가 함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위는 지난해 초, 서울대에서 열린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 성인지적 객관성은 가능한가?' 토론회 청중석에서 한 내 발언의 전문이다. 나는 당시 참여자 다수의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박수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운동사회 내의 성폭력과 그것의 공동체적 해결을 모색하는 토론회 취지를 볼 때 그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저 발언을 거듭 읽어보고, 녹취 파일을 다시 들어봐도 내가 겪은 일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정확히 언제, 어디서, 누가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피해자로서 나는 이것을 공론화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성으로서 겪은 놀라울 것도 없는 경험을 이야기하며 운동사회 성폭력에 대한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을 촉구하는 게 발언의 의도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였고, 토론회 초반에 사회자도 성폭력 피해자 등이 참석해 있으니 구체적 사건 등을 언급하지 말라고 당부한 상태였다.

 

그 토론회나 뒤풀이에서 나에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따져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금해 하는 이도 없었다. 그런데 내 발언을 듣고 전혀 다른 생각과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서너 명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노동자연대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이날 토론회에서 발언권을 연이어 얻어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가 얼마나 잘못된 개념이고 폐기해야 마땅한지 강변했다. ‘연애 결별의 복수 등으로 거짓말을 하는 여성과 그것으로 무고를 겪는 남성들을 들먹이며 말이다.

 

2012년에 자신의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한 후, 노동자연대로부터 바로 이 같은 논리로 끔찍한 공격을 받고 큰 고통을 당해 온 피해자가 이 토론회 청중석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정말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노동자연대로 돌아가 내 발언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했다. 내 발언이 은근히 노동자연대를 비방한 것으로 들은 것이다. 내가 단체를 특정하지도,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도, 심지어 나 자신의 이름이나 소속을 밝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내 발언에서 내가 겪은 사건을 공론화할 용기가 부족함을 밝혔는데 말이다.

 

물론 모두가 누구의 주장을 듣던 본인이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할 수는 있다. 성폭력 가해자는 뜨끔하게 들을 수도 있고 피해자는 공감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것이니. 하지만, 본인에게 그렇게 들린다 해서, 상대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토론회 이후 노동자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에게 수차례 메일, 전화, 문자를 보내며 자신들 조직내의 분쟁위원회에 출석해 조사 받을 것을 강요했다. 노동자연대 회원도 아닌 내가, 외부 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개인적 경험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이토록 무례하고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응할 이유와 의무가 내겐 전혀 없었다. 때문에 나는 사건화를 원하지도, 당신들을 신뢰하지도 않으니 제발 그만하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신뢰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문제가 신뢰의 문제는 아닙니다. 언제나 다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조사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면담에 응하지 않으시면, 000씨 주장의 진실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가해자가 누구인지라도 만약 가해자가 노동자연대 회원이 아니라면, 회원이 아니라는 것만이라도 분쟁위에게 조용히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로서는, 애초보다 훨씬 수준을 낮춰 정말이지 최소한의 사항만 요청드린 것임을 양해해 주십시오.”

 

이들의 조사 목적이 무엇인지 이처럼 잘 드러날 수가 없다.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치유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조직 보위에만 눈이 멀어 있음을 이토록 솔직히 드러내다니. 노동자연대는 심지어 나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그 토론회의 공동주최 단체에 연락해 내 발언을 공동 조사할 것을 제안했다.




 

사건화를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거듭 분명히 했음에도 해당 단체를 두 차례나 만나, 내가 조사에 응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한 것이다. 여기서 나를 더욱 비애에 빠뜨린 것은 그 자리에 노동자연대 회원인 나의 친언니가 노동자연대측으로 동석해 저런 입장을 대변했다는 것이다.


친언니는 내가 실망과 환멸을 갖고 노동자연대를 탈퇴하는 과정에서 급격히 사이가 멀어졌다. 이것은 나에겐 평생 치유되기 힘든 트라우마이자, 내 가족의 아픔이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노동자연대가 가족을 대동해 이런 비극을 또다시 재연한 것이다. 친언니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나를 믿지도 않고 조사를 강요하는 편에 서지는 말았어야 한다. 정작 나에겐 흔한 전화 한통없이. 


난 더 이상의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이렇게 일단락됐다고 생각했다. 다만, 앞으로는 언제 어디에서건 이같은 경험을 일반화해 말하는 것조차 어쩌면 큰 각오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펐다.

 

하지만 노동자연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최근, 6년 전 노동자연대 관련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다시 인신공격하고 인격살해하면서, 피해자를 돕는 사람과 단체들도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해자를 적극 지지해 온 전지윤 씨를 공격하는 글에서 나를 거론하며 대놓고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https://wspaper.org/article/19300). 내 발언이 자신들을 성폭력 단체라는 인상을 풍기려고 애쓴” “또 다른 중상모략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내가 단체명을 특정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앞뒤 맥락상 그 일이 노동자연대 내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이해될 수있으며, 따라서 노동자연대를 넌지시 중상하는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즉 내가 일종의 꽃뱀처럼 없는 사실을 지어내 자신들을 비방하고 손실을 끼쳤다는 논리다.

 

성폭력 피해자는 연애 결별의 앙갚음과 정신질환따위로 인해 거짓말을 하고 있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나 같은 사람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지도 않은 성폭력 경험을 겪은 양 지어내 여기저기 퍼뜨렸다는 것이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전지윤 씨는 단체를 특정하지도 않은 여성이, 그것도 노연이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뻔히 목격한 상황에서 출석 조사에 응할 리는 없었다. 이것은 어디서든 성폭력 경험들을 절대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압박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노동자연대는 나에 대한 공격과 강제적 사건화를 중단하기는커녕, 비열한 억지와 궤변들을 더 자세히 채운 증보판글을 공개하며 나를 모독했다. '친언니까지 나서 요청했음에도' 내가 자신들의 조사를 거부하며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려하지 않았다고 맹비난했다. 정말 미치도록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숨을 쉬기 힘들 정도다.   

 

그 글을 보며 십여 년 전, 2003년을 떠올리게 된다. 20대 중반이던 나는 이라크 반전운동을 겪으며 휘몰아치듯 운동에 빨려들었다. 환경단체, 노동단체, 진보정당 등에 줄줄이 가입했고 술도 섹스도 모두 처음으로 배워나가던 시기였다. 맑스레닌을 가르치듯, 연애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 섹스를 해야 연애가 완성되는 양 설득하던 새까만 남자 선배의 주장(?)을 들으며 스킨십에 인색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던 시기.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고, 응당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페미니즘을 알기도 전에 페미니즘의 한계부터 배웠다. 나는 여성주의는 곧 분리주의, 정체성주의, 반계급주의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겪은 일, 어쩌면 뻔한 레퍼토리다. 만취한 어린 여성의 귀가를 돕겠다며, 택시에 동승하고 여관으로 데려간 경험 많은 운동 선배의 이야기. 벌거벗은 상태로 깨어났을 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미안해요읊조리던. 그리고 너를 무사히 귀가시키고, 나는 길바닥 어딘가에서 잠들어버린 것으로 하자했다. 그러겠노라 했다. ? 아마도, 그의 늘어진 어깨와, 그의 동거하던 애인과, 나의 부족한 주량이 몹시 미안해서?

 

나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이 일을 공론화해 어떤 단체에서 있었던 일인지 밝히거나, 이제와 가해자를 처벌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사실 이런 일은 당시 운동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졌던 일일 것이고, 안타깝게도 여전히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때문에 나는 내 경험을 통해 같이 돌아보고 성찰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유사한 일을 겪는 여성도, 그런 잘못을 범하는 이들도 줄어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같이 고민해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같이 아파하며 성찰하고자하는 고마운 반응을 보였다. 본인이 겪은 비슷한 일을 나에게 고백하며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유독 노동자연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10년도 더 전에 그런 일을 겪었다는 한 여성에게 당신의 발언이 우리 단체에 흠집을 낼 의도임이 분명하니, 당장 와서 조사를 받아라. 응하지 않으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운동 초기에 활동했던 그 어떤 단체에서도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내가 바로 그 중학생이고 소녀였다는 가슴 아픈 고백에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나를 가해자로 볼지 모른다며 고소한 탁현민과 놀랍도록 닮았다노동자연대(와 그 글의 필자인 박성환 운영위원)는 도대체 내 발언에서 무엇이 그토록 견디기 힘든 것인가?

 

만약 내가 겪은 일이 실제로 노동자연대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이런 반응과 공격이 나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일지 조금도 짐작되지 않는단 말인가?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화를 원치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가해자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까, 증거가 없다고 우기며 결국은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지 않을까, 믿을만한 곳에서 조사가 가능할까, 신상이 털리지 않을까...

 

때문에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론화하고, 사건화 할지는 여성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지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더구나 피해 여성이 조금치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강요한다면 이는 그 자체로 심각한 가해이고 폭력이다.

 

노동자연대는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당장 중단하고, 부끄러움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성폭력 경험을 공론화한 후, 6년간 노동자연대의 집요한 가해로 고통 받고 있는 피해 여성에게 당장 사과부터 해야 한다.


 

(기사 등록 2017.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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