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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NO트럼프/ 핵발전 공론화/ 와인스타인 이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0. 25.

전지윤


 

다같이 NO트럼프 NO WAR의 목소리를 높이자

 

위험한 고비라던 북한 노동당 창건일(1010)이 지나자, 이어서 미국의 전략폭격기, 핵잠수함, 핵항모들이 줄줄이 한반도로 몰려들며 전쟁의 그림자를 짙게해 왔다.

 

군사옵션을 떠드는 트럼프가 라스베가스 총기난사범과 겹쳐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강력한 총기규제가 필요한 건 명백해 보이지만,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들 중에서도 유독 미국에서 끔찍한 총기난사가 계속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침략, 폭격, 학살로 얼룩진 제국의 역사가 뒤에 있는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 신드롬에서 벗어나 군사적 개입을 본격화하던 시기와 총기난사 사건이 증가하는 시기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도 있어 왔다.

 

트럼프는 완전파괴를 떠들고 위협하지만, 라스베가스 학살범 스티븐 패덕처럼 실행한 건 아니라고 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둘은 죽여도 되는 무가치한 대상으로 인간을 본 점에서 공통적이다. ‘전쟁이 나도 여기가 아니고 거기라는 트럼프의 말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미국의 백인이 아닌 생명에 대한 존중은 없다. ‘서울에 타격이 가지 않는 군사옵션발언도 별 다를 게 없다. 여기에는 북한에도 피흘리고 죽어선 안 될 소중한 생명들이 있다는 생각이 아무렇지 않게 빠져 있다.

 

물론 스티븐 패덕과 트럼프의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개인화기들을 갖고 있던 패덕은 이미 사라져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아니지만, 트럼프는 최강대국의 최고권력자로 살아있으며 첨단 대략살상 무기들을 손에 쥐고 한반도로 날려보내고 있다.

 

이 트럼프가 11월초에 한국에 방문한다. 그때 우리의 엄청난 분노를 보여주면 좋겠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에 찌든 트럼프와 전쟁 불장난에 대한 거부라는 한가지로 뭉쳐 커다란 목소리를 내야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무덤덤해 보인다는 외신보도들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를 돌아보며

 

한반도 핵 위기를 말할 때 북한핵은 사실 제일 큰 위험이라 보기 힘들다. 제일 큰 위험은 미국이 툭하면 전략핵무기들을 날려보내 핵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바로 남쪽에 빽빽이 들어선 핵발전소들이다. 30킬로내에 380만 명이 사는 곳에 10기의 핵발전소를 몰아둔 것은 세계 유일, 최대의 자폭행위다.

 

이런데도 신고리5,6호기 건설재개가 결정돼다니 말문이 막힌다. 탈핵을 말하다가 책임을 공론화로 넘긴 문재인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탈핵의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며 건설 중단을 호소하지 않은 것에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문정부는 기계적 중립에만 머문 것 같지도 않다. 친문인사들이 ‘5,6호기는 일단 짓고 노후 원전부터 닫자는 말을 흘렸다고 한다. 책임회피, 공약파기 등 잘못이 한둘이 아니다.

 

물론 문정부만 탓하며, 왜 우리는 더 크고 강력한 탈핵 운동과 여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는지 돌아보지 못한다면 반쪽 평가에 그칠 것이다. 문정부가 그런 걸 다 대신해줄 거라고 봤다면 그거야 말로 잘못된 환상이 된다. 이미 많은 환경단체와 활동가들이 그런 쓰디쓴 돌아보기를 시작했다. 한수원 노조가 찬핵 진영의 선봉이 된 것도 곱씹을 점이 많다.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 그러게 공론화에 왜 응했냐. 문정부의 사기극을 도와준 셈...’ 이런 냉소와 비난이 불편하게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팔짱끼고 있는 분들보다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뛰어들어 하나라도 바꾸려고 온몸을 던진 분들의 고군분투에 더 공감이 가는 것이다. 12년 동안 굽힘없이 투쟁했을 뿐 아니라, 이번에도 전국을 돌며 최선을 다한 밀양 어르신들 앞에서 할 말도 아니다. 별 힘도 보태지 못한 입장에서.

 

이런 분들이 과연 60년 동안 계속 기울어 온 것도 모른 채 운동장에 뛰어들었을까? 교육, 언론, 기업, 관료들이 모두 찬핵을 돕고 있다는 걸 몰랐을까? 시민 참여와 토론을 강조해 온 입장에서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두꺼운 벽의 귀퉁이라도 허물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다고 봤을 것이다.

 

물론 혹시나하는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누구도 앞날을 꿰뚫어볼 수는 없으며, 좌충우돌 속에 배워나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회변혁이란 정답을 가진 소수가 일방적으로 선물하는 게 아니라, 엎치락뒤치락하는 논쟁 속에서 함께 길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닌가.

 

실제, 이번 공론화 속에서 핵발전 축소입장이 갈수록 커진 결과는 틀린 기대만은 아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번 공론화가 민주적이고 열린토론이려면 5,6호기 중단은 공약이행으로 가면서, 핵발전 찬반으로 논의를 넓혀야 했다. 공정한 토론 기회와 충분한 숙의 시간을 보장해야 했다. 하지만 문정부는 5,6호기 중단/재개로 논의를 좁혔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완하는 공정한 심판 구실도 못했다.

 

결국 뿌리깊은 경쟁력과 국익의 논리가 머리 속을 파고들었고, ‘재생에너지는 아직 충분히 현실적이지 않고, 당장 원전 관련 일자리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먹힌 것 같다. 부울경 지역과 2030에서 토론할수록 오히려 건설재개 입장이 커졌다는 결과가 말해주듯이.

 

장기적으론 탈핵이 맞지만, 짓던 원전은 계속짓자는 이 모순된 결과는 탈핵과 탄소경제 해체를 위해서 정의로운 전환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핵발전과 탄소경제에 의존해 노동과 삶을 유지하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냈고, 이들에게 비용과 고통을 전가하는 것은 에너지 전환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문정부의 탈핵 약속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이제 핵에너지의 1/25에 불과한 재생에너지 연구비부터 대폭 늘려야 한다. 계획중이던 핵발전소 6기는 모두 백지화하고, 노후 핵발전소들을 앞당겨 폐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보거나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없도록, 사라지는 일자리보다 더 많고 더 좋은 녹색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밀양 주민들이 더 이상 고압송전탑 아래 고통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수결로 소수에게 고통을 강요하거나, 토론을 통해 결정됐으면 반대하던 사람들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토론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 이견과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고, 동의하지 않는 결정은 따르지 않을 권리도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핵발전소 건설 중단과 폐쇄를 위한 투쟁은 이제 한고비를 넘었을 뿐이다.

 

 

와인스타인 사태 이후 반성폭력의 물결

 

30년 넘게 성폭력을 저질러온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은 단지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 남성들의 문제를 보여줄까? 그보다는 여성차별적이고 성폭력적인 문화와 가부장적 구조에서 할리우드 스타 여성 배우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지금 이어지고 있는 'me too'의 물결은 부와 권력의 차이를 떠나서 이 세계의 곳곳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수많은 남성들의 존재, 차별과 폭력에 노출돼 온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도 보여 준다. 우리가 자본주의계급만을 강박적으로 이야기해선 안 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용기있는 폭로와 고발의 물결은 서로에게 힘을 주며 서로를 고립에서 지켜내려는 피해자들의 연대다.

 

특히 놀라운 것은 10, 20년 전의 사건을 고발하는 여성들의 용기다. 한국 사회에서라면 이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오래전이라면 증거가 남아있을 리 없고, 공소시효마저 지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목격자도 있기 어렵다.

 

가해자는 그런 적도 기억도 없다고 발뺌할 것이고 여성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갈 것이다. 심지어 가해자는 피해자를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공격할 수 있고 법률과 변호사의 도움까지 얻으며 그럴 것이다. 요즘 부쩍 눈에 띄는 성폭력 가해자 변호 전문 로펌들의 화려한 광고들을 보라.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결국 피해를 호소한 여성은 법적 처벌까지 받고 심지어 가해자에게 보상해야할지 모른다. 가해자는 아무 처벌이나 제약도 받지 않고 더 뻔뻔스럽게 머리를 쳐들고 돌아다닐 것이다. 이 기가막힌 상황의 억울함은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경험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말을 믿어 준다면, 손을 잡아 준다면, 더 많은 피해자들이 용기있게 고발에 나서 준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와인스타인 사건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다.

 

추석 연휴 때 본 소설 <다른 사람>의 마지막도 그런 피해자들의 연대로 끝났다. 외롭게 대학강사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붙이던 여학생 앞에, 또다른 피해와 폭력들을 증언하겠다고 나서는 선배 여성(주인공)이 나타나 손을 잡아주면서 희망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앞 부분이었다. 거기서 주인공은 오랫동안 서로 등을 돌리고 미워하며 살아온 친구를 찾아간다. 그 친구가 괴롭힘과 폭력에 직면해 있을 때 주인공은 자기도 엮이게 될까봐 모른 척했고, 옆에서 같이 돌까지 던졌던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는지 뒤늦게 깨닫게 된 주인공은 말한다.

 

수진아, 그때, 널 그곳에 두고 가서 진짜 미안해.”

 

이 말 한마디가 절실하게 듣고 싶은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면, 하지만 전혀 그런 말을 해줄 생각도 준비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드라마 <청춘시대2>가 보여 준 것

 

드라마 <청춘시대2>가 얼마전 끝났다. 드문드문 보긴 했지만 시즌1 만큼이나 참 좋은 드라마였다. 몇 장면이 기억나는데 하나는 중간쯤에 데이트폭력 피해자와 주변 친구들이 갈등하는 장면이었다. 피해자는 힘들어하며 날타롭게 반응하고, 주변 친구들은 그만큼 지쳐서 원망을 드러낸다. 누구도 탓하기 힘든 이 장면은 피해자 엄마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엄마는 너가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이렇게 됐냐며 딸을 혼내는데, 거기에 담긴 편견들도, 가장 아픔을 주는 게 가족이란 것도 전형적이다. 여기서 피해자는 스스로 인생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는 친구들에게 용기를 얻은 것이고, 어떤 말보다도 함께 분노해줄 때 피해자는 가장 힘을 낸다.

 

정말,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원망과 오해를 하는 건 피하기 어렵다. 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해줄 수도 책임져 줄 수도 없다. 다만 너 탓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를 신뢰해주고, 곁에 있어주는 친구는 정말 소중한 것이다.

 

힘든 이별 과정에서 연인에게 집착하다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고, 감정에 솔직해야 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니.

 

마지막도 주인공 한명이 13년전 성폭력 가해자를 공개고발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맞서 싸우며 끝났다.(내 주변 동지가 최근 힘든 것도 바로 13년전 일 때문인데!) 고발자는 허언증 등 정신병력이 까발겨지며, 진술의 진실성이 의심당한다.

 

13년 전의 일을 확실한 증거로 입증하기는 어렵다. 가해자는 잘못을 부정하고 피해자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또 피해자의 말만 믿는 것은 피해자 절대주의, 고발자의 정신병력과 사생활과 인간적 결함을 들춰내는 건 정당하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13년전을 아직 잊지 못하고, 그것에 고통받아 온 피해자의 존재만큼이나 강력한 증거가 어디있겠는가. 드라마는 성폭력 피해 여성, 피해자의 친구, 데이트폭력 피해여성 등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증언하고 연대하는 것을 보여주며 마무리한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완벽하고 순수한 피해자는 없지만, 피해자는 말할 수 있고, 우리는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드라마다운 열린 결말이었다.

 

(기사 등록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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