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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호의 일대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1. 4.

라스 리(Lars T. Lih)

번역: 오목눈이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관련해서 러시아 혁명의 의의와 교훈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재검토하려는 노력과 시도를 계속하고자 한다. 이 번역글은 그런 시도의 일부로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제기된 맥락과 내용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분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의 필자인 라스 리는 러시아어 원자료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입각한 레닌주의에 대한 재해석으로 주목받아 왔고 <레닌의 재발견: 맥락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책을 썼다. 이 글은 20148월에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진행한 강연과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서 이처럼 관련된 글을 지속적으로 다룰 계획이다.]


출처:

https://johnriddell.wordpress.com/2014/08/18/all-power-to-the-soviets-biography-of-a-slogan-by-lars-lih/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분명 혁명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슬로건들 중 하나입니다. 이 슬로건은 러시아 혁명 시기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와 견줄 만하죠. 저는 이 자리에서 이 슬로건이 왜 부상했고, 어떤 배경 하에서 탄생하였으며, 실제로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1917년 러시아의 맥락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펴 볼 이 슬로건은 вся власть советам (로마 알파벳으로 표기하면 vsya vlast’ sovetam)이라는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Vsya”는 영어의 “all”, “vlast’”“power”, 그리고 “sovetam”“to the soviets”에 해당하죠.


“sovet”라는 러시아어 단어는 단순히 '조언'이라는 뜻이었지만, 그로부터 회의라는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이 러시아 단어가 매우 친숙한데, 우리가 이 단어로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유래한 특정한 함의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이 강연에서 저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에 사용된 원래 러시아어 단어였던 vlast를 러시아어에서 쓰이는 키릴 자모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바꿔 사용코자 합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권력'은 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이라고 보기 힘든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러시아어 단어인 vlast'권력(power)'이라는 영어 단어에 비해 조금 더 구체적인 의미, 즉 특정한 나라의 주권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vlast를 가지기 위해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권리, ,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이 실행되도록 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한 것이죠. 효과적인 vlast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무력에 대한 확고한 통제와 더불어 강력한 정당성과 사명감 및 사회적 기반이 요구됩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이야말로 이 문제의 핵심인 셈이죠.


이러한 뉘앙스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예컨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과 같은 저서처럼) vlast를 영어로 옮길 때 - 어법에는 맞지 않아 생경하긴 하나 - "the power"로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강연에서 애초의 러시아 단어를 사용코자 하는데, 이를 통해 청중 여러분이 1917년 러시아에서 형성된 정치 담론 내에서 이 단어가 지녔던 기본적인 취지를 이해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구호가 출현하게 된 다양한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구호에 담긴 세 단어들을 각각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권력(power)"은 이 구호의 과거, "모든(all)"1917년의 특수한 맥락, 그리고 "소비에트로(to the soviets)"는 이 구호가 암시하는 더 보편적인 주장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측면을 살펴보기 전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로 구체화된 반응을 촉발시킨 1917년의 상황에 대해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일부 제시하고자 합니다.


1917년에 ‘vlast’를 가졌던 주체는 누구인가?


1917년의 상황을 실감할 수 있도록 미국 여성인 레타 칠데 도어(Rheta Childe Dorr)의 저서 가운데 일부를 낭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어(Dorr)는 기자이자 여성운동가였으며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인물이었는데,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사회주의에 대해 독특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안에서 본 러시아 혁명(Inside the Russian Revolution)"인데요, 이 책에서 도어(Dorr)는 당시 러시아에서 자신이 받은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날 아침에 내가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스무 명 남짓 정도의 젊은 남자 한 무리가 호텔 앞에서 큰 흰색 글씨가 적힌 붉은 현수막을 들고 가두행진을 벌이는 광경이었다.

"저 현수막에 뭐라고 쓰여 있나요?" 나는 옆에 서 있던 호텔 직원에게 물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쓰여 있습니다." 직원이 대답했다.

"소비에트가 뭐죠?"라고 묻자 직원은 짤막하게 답했다. "지금 러시아에 있는 유일한 정부입니다." 


이 구절에 비추어 볼 때, 도어(Dorr)가 러시아에 도착한 시기는 언제일까요? 우리들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듯이 소비에트가 임시 정부를 전복한 10월 볼셰비끼 혁명 이후일 거라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사실 도어(Dorr)19175월 하순에 러시아에 도착해 그 해 8월 말까지만 머물렀습니다.


도어(Dorr)의 저서는 그 해 가을까지 신문에 보낸 기고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0월 혁명 이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저서에서 그녀가 보여준 전망은 먼 훗날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얻게 된 통찰력이 개입되지 않은 채 1917년에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유의미한 자료입니다.


도어(Dorr)의 설명은 매우 중요한 점 한 가지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전역에 걸쳐 들불처럼 빠르게 확산되었던 소비에트, 혹은 병사 및 노동자 대표회의는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러시아인들이 정부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인 기관이었다. 노동자 및 병사 대표회의가 러시아 민중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페트로그라드뿐만이 아니었다. 매 도시마다 이런 기관들이 존재했을 뿐 만 아니라, 민간과 군사적인 영역 모두에서 이 기관이 문제를 해결한 권한을 지녔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도어(Dorr) 자신은 이를 폭력적인 군중독재라고 여기면서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몹시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적대감은 어느 정도는 독일에 대항하는 전쟁을 계속 해야 한다는 도어(Dorr)의 믿음에서 기인했죠. 이런 이유로 도어(Dorr)는 소비에트 통치가 차르 통치와 비교해 별 차이가 없으며, 어떤 점에서는 더 못하다고 여기기조차 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언론 검열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평범한 미국인 여행자가)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들을 죄다 읽는다 치더라도 별다른 정보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현재 언론에 대한 검열은 군주제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엄격하며 폭압적인데, 차이가 있다면, 이전과 다른 종류의 보도가 통제될 뿐이다.”


미국인 독자들에게 러시아를 집어 삼킨 위원회에 대한 열광(the committee mania)”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도어(Dorr)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재무장관의 집무실로 미국 노동 총동맹에 소속된 한 간부가 들어 와서는 우리는 당신들 부서를 통제하러 왔으니, 관련 책들과 기밀문서를 내놓으시오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자. 러시아의 장관들에게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노동자 및 병사 대표 위원회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유권자들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일이 벌어날 것이다.”


도어(Dorr)는 자신들의 의도는 러시아에서 최고 vlast를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소비에트 측의 항변을 미심쩍어했습니다. 그녀는 10월 혁명의 서곡이 된 정치적 내분 과정에서 벌어진 한 가지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그들은 날카로운 투쟁을 거듭한 끝에 투표를 통해 케렌스키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는 투표를 통해 케렌스키에게 최고 통치권을 주기로 했지만,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케렌스키를 지지한 적은 없었고, 케렌스키도 이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10월에 이르러 소비에트가 사회주의자들로만 구성되지 않은 정부 부서에 대해서는 지지를 철회하고, 그런 부서들을 자신들의 비판과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점에 비춰볼 때, 이들이 케렌스키에 대해 보냈던 지지는 정직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도어(Dorr)가 보기에, 러시아가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의 분별 있는 구성원들이 엄청난 규모에다가 조직화되지 못하고 무지하며, 불안정할 뿐 만 아니라 바라는 것도 많은 러시아의 군중들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이성에 귀 기울이도록 강제하는것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유혈 충돌이 수반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죠.


도어(Dorr)는 기아와 추위, 그리고 “19181월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인해 차후에 소비에트 권력이 붕괴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책 말미에서 향후 사태 전개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10월 혁명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러시아에 대한 그녀의 판단은 다음과 같았던 겁니다. ,


내가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하나의 계급독재에서 벗어난 민중이 옛 체제만큼이나 야만적이고 공익을 나몰라하는 또 다른 종류의 계급독재를 수립하기 위해 일부러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도어(Dorr)가 실제 목격했다시피, 소비에트의 권력은 191710월이 아닌 2월에 성립되었습니다. 사실 1917년 전체에 걸쳐 나타난 기본적인 세력 배치(lines of force, 力線)들은 제가 1917227일에 발생한 혁명의 빅 뱅이라고 불렀던 과정, , 혁명의 최초 몇 시간 동안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최초의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수백 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하던 차르의 vlast는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붕괴했는데,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짜리즘은 그 단어의 참다운 의미에서 말 그대로 vlast였죠. , 황제는 군대를 통제하였으며, 강력한 정당성과 사명감은 물론, 사회적 기반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수도에서 권력이 붕괴하자마자 삽시간에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은 러시아 전역에 걸쳐 벌어지던 역사적 vlast”의 소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2.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매우 신속하게 병사 대표자들에게 호소한 결과로 성립되었습니다. 수립되자마자 소비에트가 발표한 유명한 명령 제1호는 소비에트에게 vlast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 즉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군대의 민주화와 병사 위원회 설치를 요구함으로써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병사들의 충성과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비에트는 적어도 맹아기에는 vlast의 또 다른 속성들도 지니고 있었어요. ,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민주화라는 사명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노동자 및 (병사들로 대표된) 농민들이 소비에트의 사회적 기반이기도 했던 겁니다.


3. 임시 정부는 자유주의적 엘리트 정치인들에 의해 구성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제정으로부터의 합법적인 권력 승계와 연속성을 구실로 일종의 정통성을 주장하려 하였으나, 이 정부는 본질에서 소비에트가 형성되는 것에 대한 반동을 대표하였습니다. 따라서 시작 단계에서부터 엘리트 계층은 이미 소비에트의 vlast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직면해 균형을 잃게 되었죠.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임시정부가 소비에트내의 온건 사회주의자 지도부를 자신의 동맹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들 지도부들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엘리트 계층이 혁명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임시 정부가 자신의 계획 (승전할 때까지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연합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국내에서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임시 정부와 대립하는 소비에트의 vlast를 제거해야한다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졌습니다. Vlast가 지닌 바로 그 속성상, 한 국가에는 한 개의 vlast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이점은 사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중 권력이라는 표현을 접했을 때, 우리는 두 개 이상의 vlast가 존재하는 것이 용어상 모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부 영화의 표현을 빌자면,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는 이 나라는 우리 둘이 있을 만큼 크지 않다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셈입니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파를 막론하고 모든 러시아인들은 가속화되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가장 최우선적으로 긴급하게 필요한 조치는 확고한 vlast”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동의했습니다. 남은 질문은 이처럼 확고한 vlast’를 구축하기 위해서 무엇이 제거되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었죠. 따라서, 1917년에 실제로 벌어진 사태는 어떻게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전복시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데에 실패하였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Vlast”: 구 볼셰비키 구상의 유산

 

그렇다면 볼셰비키는 과거에 자신들이 수립했던 전망과 전략적 개념들을 통해 2월 혁명이라는 빅 뱅으로 인해 초래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점에 관해 활동가들과 역사학자들 모두 볼셰비키는 이러한 상황에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로버트 대니얼즈(Robert Vincent Daniels)1960년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혁명의 양심(The Conscience of the Revolution)>에서 이러한 입장에 기초한 영향력 있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볼셰비키는 2월 혁명에 의해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불가능하리라고 봤던 보수적 중간계급 주도의 정부가 집권하면서 레닌이 기초한 민주적 독재에 관한 입장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는 진실은 정반대라고 봅니다. , 볼셰비키가 혁명적 vlast가 가지는 특성에 대해 항상 중점을 두어왔다는 단순한 이유를 고려해봤을 때, 그들은 이같이 새로운 상황에서도 방향을 잡기 위한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1910년에 볼셰비키의 일원이었던 레프 카메네프(Lev Kamenev)가 썼다시피, 프롤레타리아트는 언제나 모든 사회문제와 투쟁을 vlast를 위한 투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하기 때문이죠.


구 볼셰비키가 세운 구상은 1905년 혁명의 경험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계획은 볼셰비키가 머지않아 러시아에서 반드시 발생할 것으로 여긴 혁명이 발발하는 과정과 그 후에 가능한 최대의 이익을 거두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용되는 특수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 구상의 요점을 극도로 간략화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혁명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에 기반을 둔 vlast가 만들어져야 한다. 힘을 합친 노동자와 농민들은 기타 근로 계층과 함께 narod, 즉 민중을 구성한다. 따라서, 새로운 혁명 정부는 narodnaia vlast(민중 권력)을 구성하게 된다.


2. vlast는 농민들에게 전국적 차원의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하는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될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관계는 볼셰비키 담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헤게모니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깨닫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며, 이에 필요한 정치적 지도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볼셰비끼의 주장은 농민의 정치적 의식 수준에 대해 꽤 낙관적인 평가를 한 것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멘셰비키는 이와 같은 전망에 동의하지 않았다.


3. narodnaia vlast, 즉 노동자-농민 권력은 혁명을 완결에 이르도록(do kontsa)”(이것 역시 볼셰비키 담론에서 핵심적인 용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존하는 번역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혁명을 완결에 이르도록 수행하는 것은 혁명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가능한 최대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는 러시아에서 거대한 규모의 사회개혁을 일으키는 걸 목표로 삼는다.


4.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도 전제정치를 넘어서길 원하나, 그들은 필연적으로 증간에서 혁명을 멈추려고 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전면적인 민주적 개혁을 두려워하였고,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 역시도 그러했다. 자신들에게 편리한 시점에서 혁명을 멈추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은 농민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계급적 지도력을 확고히 하려 할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는 농민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자신의 주된 정치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물론 구 볼셰비즘(Old Bolshevism)에 대해선 이밖에도 할 말이 훨씬 더 많지만, 이러한 사항들이 볼셰비키가 제시한 정치적 계획의 기본적인 주된 항목들입니다. 여기서 두 개의 요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먼저, 볼셰비키가 염두에 둔 목표는 광범위한 규모에 걸친 야심찬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적 혁명 대 사회주의적 혁명이나 최소강령(minimum program) 대 최대강령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분류는 그 나름으로 어느 정도 쓸모가 있지만, 이러한 분류에만 의존할 경우, 볼셰비키가 소위 민주주의적 혁명에서 달성하고자 했던 개혁의 규모가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최소강령은 자본주의 하에서 달성할 수 있는 절대적 최대치를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였으며, 이 때문에 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들 목표들은 전혀 최소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구 볼셰비키의 구상은 예상된 혁명적 vlast의 제도적 형태가 아니라, 전적으로 계급적 내용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1905년에 등장한 소비에트를 노동자-농민의 vlast를 위한 가능한 수단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필수불가결하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것의 정확한 제도적 형식은 여전히 열려 있었으며, 최종 형태는 혁명 기간 동안 판가름 날 것으로 본 것이죠.


카메네프(Kamenev)1910년에 과거 볼셰비키의 구상을 요약하면서 제시한 것을 소개하면서 이 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에 따르면, 1905년의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러시아 혁명이 자유주의에 반하여 그것의 완전한 완성을 향해 매진해 왔다는 것이다. , 혁명적 계급의 수중에 vlast가 이관되고, 철저한 농업 개혁이 수행되는 것 말이다.” 따라서, 피할 수 없는 미래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그러한 투쟁에서 지도자로서 헤게모니를 행사해야 할 계급적 책무를 재차 떠맡게 될 것이다.”

 

모든”: 1917년의 도전

 

이 구상을 1917년에 벌어진 실제 상황과 비교해 보면, 망명 상태였던 지도부의 지도 없이도 러시아 국내에서 활동 중인 볼셰비키들이 2월 혁명으로 초래된 결과에서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 닥 놀랄 일도 아닙니다. , 당시의 정세에서 핵심이란, 시종일관 혁명을 완결에 이르도록밀어붙이고자 한 대중의 권력 기관들과 중간에서 혁명을 멈추려 갖은 애를 쓴 엘리트 권력 기관 사이의 대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볼셰비키가 혼란스럽게 여긴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 기관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임시 정부에 맞서지 않고 그것과 협력하려고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소비에트의 다수파는 자유주의자들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뒤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는 볼셰비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 결과,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매우 작았습니다. 저는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처럼 (볼셰비키에게) 놀라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와 그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이 오랫동안 견지해 온 분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메시지를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노동자와 농민들은 엘리트 계층과 권력을 공유할 수 없다. 엘리트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노동자나 농민들과는 상반된 것이고, 그들은 혁명 프로그램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그것들을 실현하려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시도 역시도 방해할 것이다.


볼셰비키는 1917년 내내 매일같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반복했습니다. 이 덕분에 결국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되었지만, 이것은 볼셰비키가 선전에 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1917년을 거치면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볼셰비키의 주장이 입증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볼셰비키의 메시지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구호의 모든이라는 단어에 압축되어 있어요. 역설적이게도, “모든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것은 부르주아의 정치적 수사에서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엘리트 정치인들은 이중 권력이 자기 파괴적이며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은 임시정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vlast를 독점해야 한다고 뜻이었죠.


이에 대해 볼셰비키는 vlast가 그 속성상 분할될 수 없는 것이므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모든 vlast를 독점한 기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임시정부 측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처럼 분할될 수 없는 vlast를 유일하게 행사할 자격이 있는 것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바로 소비에트라고 응수했습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고전적인 문구는 실제로는 레닌이 러시아에 돌아온 이후 4월에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레닌이 돌아오기 이전에도 이미 모든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주어졌어요. 2월 혁명이 발생하고 약 2주가 경과했고,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오기 약 2주 전인 314일자 프라우다지의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임시 정부가 상반된 방향으로 결별하게 될 것이란 점을 깨달아야 한다. 부르주아가 제 정신을 차리게 되면, 이들은 필연적으로 혁명 운동을 가로막으려 시도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필수적인 요구들이 충족되는 지점까지 혁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요구 사항을 완전히 충족시키려면 vlast (vsia polnota vlasti)가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들 자신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혁명이 발전하고 심화되는 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및 농민의 독재로 귀결될 것이다.”


이 사설이 볼셰비키 전체의 집단적인 선언임을 보여주기 위해 작성자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으나, 사설의 초안을 작성한 것은 카메네프(Kamenev)였습니다. “모든” vlast를 강조한 것은 1917년의 상황에 대해 카메네프(Kamenev)가 내린 분석에서 핵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카메네프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와 같은 슬로건을 볼셰비키 지도부의 공식적인 지령으로 제시하는 것은 주저했습니다.


그런 지시를 내린다는 것은 임시 정부 타도를 주장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마찬가지였고, 이는 임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거리로 나설 때가 되었음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카메네프와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들은 그런 시도가 시기상조이며 혼란을 조성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임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1917년 봄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큰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레닌도 이 같은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4월에 채택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3월에 카메네프가 조심스럽게 예측했던 것에 비해 훨씬 더 간명하고 단호한 것이었습니다. 이 슬로건을 통해 볼셰비키의 계획이 세 가지 생생한 단어들만으로도 전달됩니다. 그렇지만 카메네프가 예측했다시피, 이 구호를 채택함으로써 조바심에 찬 노동자와 병사들이 이 슬로건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때 이른 시기에 임시 정부를 전복하고자 시도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4월과 6, 그리고 특히 7월에 볼셰비키는 카메네프가 3월에 우려했던 상황과 실제로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 조직화되지 못한 채 감행된 때 이른 임시정부 전복 시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4월에 이 슬로건을 제기한 것이 오류였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 슬로건을 채택하는 데는 그만큼의 실제적인 위험도 동반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소비에트로”: 하나의 제도에 대한 보편적 요구

 

1917년 볼셰비끼의 핵심적 메시지, , “vlast를 엘리트 계층과 공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vlast를 독점한 채, 필연적으로 그들에게서 vlast를 박탈하려는 엘리트 계층의 모든 시도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라는 주장은 이미 19173, 다시 말해 레닌이 러시아에 입국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이 메시지는 과거에 볼셰비키가 견지하고 있던 입장을 1917년에 새롭게 조성된 독특한 상황에 맞게 비교적 간단히 적용한 결과물이고요.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의문, , 볼셰비키의 이 같은 메시지가 실제로 이미 3월에 준비되어 있었다면, 레닌의 러시아 입국과 그 과정에서 그가 제기한 4월 테제는 이 슬로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제기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이미 일부 답한 바 있습니다. 레닌은 볼셰비키의 전략을 슬로건, 즉 즉각적인 계획을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요약한 것으로 전환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슬로건이라는 것 자체가 대중의 집단적 행동을 조율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은 소비에트에 대한 새로운 발상을 품고서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 그는 소비에트가 단순히 1917년 러시아라는 특수한 상황의 맥락에서 계급적 vlast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제도적 형태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레닌은 소비에트를 항구적 정부로서는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유일하게 적합한 정치형태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입장은 러시아의 구체적 상황에 한정된 평가가 아니라, 보편타당성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미하일 깔리닌(Mikhail Kalinin)은 레닌의 이 같은 혁신적인 주장이 지닌 진가를 바로 알아보고는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 바 있습니다.


레닌 동지의 논지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부분은 노동자 대표로 구성된 소비에트가 유일한 정부형태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현재 상황에서 노동자 및 병사 대표로 구성된 소비에트가 유일하게 가능한 vlast라는 점만큼은 사실이다.”


레닌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 중 하나인 <국가와 혁명>에서 이러한 입장이 개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장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레닌의 주장 가운데 일부만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소비에트 민주주의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비해 진일보한 형태이다.

2. 소비에트는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민중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기관들을 대표하는, 경찰이나 관료제 같은 제도들을 폐지할 것이다.

3. 소비에트는 대중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한다.

4. 지속적인 재선거를 통해 대표자들에게 책임성을 강제한다.


우리가 이러한 내용을 잘 알고 있는 것은 <국가와 혁명>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레닌의 주장이 보편타당성을 지닌 것이라 1917년 러시아라는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레닌이 소비에트에 대해 가졌던 생각 가운데 좀 더 일반적으로 유효했던 것들을 제쳐놓은 채, 다음과 같이 자문해봤으면 합니다.


, 이 슬로건에 내포된 이러한 측면이 1917년의 상황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특히, 소비에트를 하나의 제도적 형태로 옹호한 것이 1917년 동안 볼셰비키가 자신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데 어느 정도로 큰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국가와 혁명>1918년에 가서야 출간되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라도 이 책은 이 과정에서 그 어떤 역할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볼셰비키의 메시지에 담긴 주제는 vlast의 계급성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제도는 노동자와 농민, narod 계급이 권력을 행사하는 매개체였다는 점에서 중요했어요. 이 때문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의 기초가 되는 입장은 모든 권력을 narod” (вся власть народу) 인 것이며, 실제로 종종 그렇게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수행한 선동에서 소비에트가 더 발전된 민주주의적 형태라는 주장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잠정적이긴 하지만, 볼셰비키가 발행한 각종 당 선전물과 레닌 자신을 포함한 지도부들이 쓴 기고문들을 샅샅이 읽은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적어도 그렇습니다. 소비에트가 더 발전된 민주주의적 형태라는 주장은 1917년에 지속된 위기라는 맥락에서는 그다지 시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당시에 볼셰비키들은 위기로부터 벗어나 혁명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엘리트로 구성된 정부를 전복시키고, 이제 막 시작된 반혁명을 격퇴해야 하며, vlast 전체를 소비에트가 대표하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부여해야 한다는 핵심적 내용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후의 전개: 레닌 집권기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에 담긴 세 가지 각기 다른 측면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각각의 측면들은 이 슬로건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단어 각각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 “권력”, 혹은 vlast라는 단어를 통해서는 이 슬로건이 과거 볼셰비키가 정립한 구상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는 과거의 구상을 1917년에 벌어진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켰죠. 마지막으로, “소비에트로라는 부분은 소비에트가 가장 발전된 민주주의 형태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유일하게 적합한 정치형태라는 주장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1917년에 이 슬로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측면이 압도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191710월 이후에 전개된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논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소비에트를 발전된 민주주의 형태로 바라본 레닌의 전망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볼셰비키 당원들도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내전이 종료되었을 시점에 볼셰비끼 지도부는 실제 소비에트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19년에 멘셰비키 지도자 유리 마르토프(Iulii Martov)는 이러한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정식화한 바 있습니다. , 마르토프(Martov)소비에트의 권력 (the power of the soviets)”(vlast’ sovetov)이라는 문구가 그냥 소비에트 권력(soviet power)” (sovetskaia vlast’)이라는 문구로 수사적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형태는 실제 민주적으로 구성된 소비에트에 진정으로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두 번째 형태는 애초의 독립적 소비에트와는 역사적 혹은 정서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을 뿐, 볼셰비키 당에 기반을 둔 vlast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실패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였지만, 대체로 내전이라는 긴급한 상황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어요. 하지만 레닌의 주장 중 한 가지만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새로 수립된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narod에서 점점 더 많이 충원되었다는 점 말입니다.


레닌의 기대에는 미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러시아 혁명에서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실제로도 이 슬로건은 현실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타 칠데 도어(Rheta Childe Dorr)가 목격한 것에서 보았듯이, 2월 혁명 중에 성립된 소비에트 권력은 그 자체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보여주면서 1917년 내내 실존했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은 앓던 이를 뽑듯이 소비에트를 해체하려는 임시 정부의 시도에 맞서 자기 자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며, 이후에 소비에트 권력을 파괴하려는 시도 역시도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매우 많은 측면에서 민주적이진 못했지만, 소비에트 권력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러시아 narod를 대변했으며, 그 과정에서 좋건 나쁘건, narod가 향배를 좌우하게 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기사 등록 201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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