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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이론과 지식인에 관하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1. 23.

윤미래 

 

 

 

이론에 관한 객관주의가 왜 필요한가

 

이론이 필요한 것은 개인이나 개별 집단, 지역, 성별, 인종, 사회세력의 인식은 언제나 극도로 부분적이고 현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 인식의 한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론 생산은 일반적 보편적으로 통용 가능한 인식을 향해 적어도 한 단계의 질적 도약을 꾀하는 시도다. 이러한 노동을 통해 개별자들의 특수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사회 일반의 인식이나 원리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론은 개별자의 대립물로서 일반 사회의 존재에 조응하는 지적 구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론은 또한 현상으로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본질을 포착하고자 하는데, 이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가 특수한 원리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이렇게 사고하면 철학이 가장 우월한 학문이고 분과학문일수록 열등한 것이 될 것이며, 좀더 나아가면 철학자는 존귀하고 기술자는 천하다는 결론까지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총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분에서는 현상되지 않지만 전체 그림을 보면 드러나는 본질적인 진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구조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시기나 국면일수록 이러한 진실들은 인간의 삶에 어마어마하게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사실에 가깝게 규명할수록 의도에 맞게 바꿀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론이라는 것이 지식인 이외의 계급에게도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래서 설명력 있는 이론을 갖는 것이 단순히 반대편을 논파하는 선전술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객관적 실재라는 게 있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려는 결론에 잘 들어맞게가 아니라 우선 사실에 가깝게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이론은 문학이나 종교와 다르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설득하고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일은 대개 예술가나 교주들이 훨씬 잘 한다. 객관적 진리란 없으며 중요한 것은 당파성뿐이라는, 일선의 활동가들과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히 지지자를 얻곤 하는 좌파적 반지성주의는 그런 점에서 자가당착이다.

 

 

 

 

사회주의 시대의 지식인

 

레닌은 인텔리겐챠들이 프롤레타리아적 규율을 싫어하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이 있어서 계급투쟁에 덜 적합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디지털화 시대의 눈으로 보면 그냥 규율을 물신화하는 사고에 불과하다. 9시 출근 6시 퇴근식의 시간 조직이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작업하는 식의 노동과정은 특정 시기, 특정 사회, 특정 산업에 고유한 것이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보편 특성이었던 적이 없고, 사회주의의 이상은 거대한 군대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며 이것은 현실의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게만 구현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미래의 낙원이 찾아올 때까지 유보되어도 좋을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 계급의 반동적인 속성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현재 사회에서 지식인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지적 특권에서 비롯된다. 지식이 소수의 특권인 세계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특권을 내심으로 흡족해하는 치들은, 관념적으로는 모든 위계의 해체와 인간의 평등을 지지할지언정 자기 자신의 가장 큰 특권만큼은 결코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아서 배우지 않은 비전문가 대중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주장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을 도무지 눈 뜨고 봐줄 수 없어한다. 많은 진보적지식인들은 이 특권의식에 기한 혐오가 너무나 노골적이고 압도적인 나머지 제국의 위안부 논쟁에서처럼 실제 전문가들이 대중과 함께 서고 사이비 전문가들이 무지한 대중으로부터 학문을 보호할 것을 호소하면 기꺼이 사이비들의 편에 서길 택할 정도다.

 

지식인들의 이런 정치성은 역사가 진전할수록 지식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상아탑은 인류가 인류의 지식으로부터 소외된 계급지배시대의 산물이고 시대는 이 소외를 폐절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식 역시 그 방향으로 진화함으로써만 시대와 발맞추고 사회에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기에. 특권계급으로서 인텔리겐챠는 계급특권과 함께 시효를 잃는다. 낡은 생산관계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생산력 발전의 질곡이 된다.

 

그러나 구시대의 지식과 문화 일체를 내다 버리려는 시도는 사회에 이로웠던 적이 없다. 기존의 지적 산물들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재전유되고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하고, 그것은 자연과학이나 기술적 지식뿐만 아니라 인문사회적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변증법적 지양이 그렇듯이 그것은 혁명의 논리로 외부에서 학문을 칼질함으로써가 아니라 현재의 학문 내부에서 학문의 동학으로 학문을 내파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이런 작업은 당연히 학문에 정통한 사람들의 노동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작업 속에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태동하고 있는 새로운 계급이 태어날 것이다. 지식을 사랑하는 만큼 지식인의 특권성을 증오하는, 지금 중심과 주변을 허물고 다수의 참여를 가능하게 할 대안적 지식 생산의 방식을 상아탑 안팎에서 찾아헤매는 사람들, 특권층으로서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정초해가는 과도기의 주체들, 그리하여 마침내 선조들을 부관참시하면서 등장할 진보적 지식인의 후예들. 도식적으로 말해, 하부구조를 내파하고 새로 짓는 것이 산업프롤레타리아나 농민, 소상공인 계급이라면 상부구조의 담당 부대이자 작업조는 이들이 될 것이다. 이 계급이 첫 울음을 터뜨릴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근대 과학에 대한 종교적 오해

 

과학적 사회주의란 들리는 것만큼 거창한 말이 아니고, 조야하게 말하면 이런 세상이 되면 참 아름답고 좋지 않겠어요?’ 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안에서 누가 어떻게 해방되려고 애쓰고 있는지 사실대로 이해하는 걸로 시작해서 전망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절대적이고 예정된 법칙대로의 운동이라는 관념은 마르크스 이전에 근대 과학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생기는 오해다. 근대 과학은 확고하게 고정된 비판 불가능한 절대적 진리라는 관념은 유지한 채 신을 과학으로 대체한 게 아니고, 오히려 이론과 인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수정될 수 있다고 처음부터 전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과학의 본질적 강점이다.

 

물론 이런 오해는 사람들이 무식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계급적 직관을 억누르고 계급지배에 순응하게 만들려면 절대적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찍어누르는 권위가 필요하고 현대 사회에선 과학에 그 역할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요는 과학이 실제로 중세의 신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과학의 종교화는 과학 그 자체의 정신과 대치되는 것이고, 이는 계급지배가 근대가 탄생시킨 생산력을 온전히 발전하지 못하도록 구속하고 왜곡시키는 낡은 시대의 질곡이 되어버린 일반적인 상황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샌드라 하딩은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에서 페미니즘 과학 비평이 과학 자체에도 이롭다는 논지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전개했는데, 계급적 비평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학의 난국을 보면 과학의 종교화, 교조화가 과학을 얼마나 끔찍하게 구속하고 있는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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