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단결에 관한 짧은 고민들/ 도덕과 헤게모니

단결에 관한 짧은 고민들

미래



1.

본질적으로 같으니까 연대할 수 있다는 입장도,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 이해일치는 없다는 입장도 동일성을 연대의 조건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도 지금의 상황에서 아주 중핵적이고 구조적인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하는 것이다. 차이는 잘 다루었을 때는 오히려 연대의 힘이 될 수 있으며, 차이가 분열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운동이 그러한 차이를 다루는 데에 실패했을 때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연대와 단결이 반드시 동일성을 필요로 한다는 관념이야말로 이런 실패를 낳는 가장 큰 요인들 중 하나다.

 

정치는 모순도 갈등도 없는 목가적 공동체를 만든 후 그것을 무한 확장해서 세계를 정복하는 기획이 아니라 위치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간의 긴장과 간극을 다루면서 협상과 동맹을 이루는 기술이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유대감, 결속감, 애정, 헌신, 고양감 등의 감정들이 자라나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한 순간이라도 무엇 하나 절대화하지 않는 것, 차이와 갈등이 단결의 본질적 일부임을 항상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작 사람들이 가장 상처입고 가장 많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운동에 근본적 환멸을 느끼고 돌아서는 것은 외적인 탄압보다는 알량한 사회적 위계와 기득권이, 교조가, 집단심리가, 관성이, 파당이 운동을 갈라놓을 때이고 그것은 그만큼 그 싸움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든 구조적 억압과 착취와 싸우는 것만큼이나 필사적으로 그런 불필요한 분열에 맞서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단결은 그냥 힘 약한 소수가 다수에게 맞추라고 주문하기 위한 편리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소수자의 이익을 자본축적을 위해 억압하고 종속시키는 체제를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2.

단결은 구호나 강령으로 쟁취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적인 실천으로,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들 속에서 이해와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단결을 목놓아 외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꾸준해야 하는 일이고, 많은 좌파들은 아직도 여기에 무척 서툴다. 관계나 소통의 방법들은 여전히 합의보다는 암묵지나 개인의 요령, 미덕처럼 전해지고 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서로 말하는 방법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규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이러한 지침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듣는다.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대충 흘려듣지 말고 항상 상대의 시각을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조망수용이라고도 한다) 상대의 체험이나 감정을 상상(사회학에서는 이것을 추체험이라고 한다)하려고 애쓰면서 귀기울여 듣는다.

 

불편한 이야기를 꺼리지 않되, 쓸데없는 공격성을 버린다

 

차이와 갈등은 무시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외면상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민감하거나 불편한 화제를 피하는 것이 습관화되면, 결국 수면 아래 누적된 갈등이 언젠가 파괴적인 형태로 폭발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현실이 요청하는 모든 문제를 애매모호하지 않은 직설적인 방식으로 정직하게 다루고 논쟁하는 것이 분열을 막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런 실천은 당연히 감정적인 상처나 대립을 수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이나 그것을 최소화하려는, 최소한 불필요하게 키우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격 모독, 비아냥, 조롱, 낙인찍기(ㅇㅇ주의자) 등 아무 효용 없고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하는 화법을 버려야 한다. 상대가 명백히 반동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레닌이 당내의 반대파를 적대 계급이 침투하는 통로로 취급한 결과 러시아 공산당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상기하자. 설령 정말로 상대가 해악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해도, 그것은 서로를 잠재적 반동분자로 취급하는 태도가 낳는 해악에 비하면 십중팔구 사소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상대가 감정적으로 나오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차별이나 혐오의 표현이 아닌 한 부드럽게,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고 상대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것을 안심이 될 만큼 확실하게 계속 전달하면서 공감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할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누구에게든, 올바른 것을 이해하고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 잠재성은 있다. 인간은 낡은 고정관념, 편협함, 이기심과 자기중심성, 두려움에 갇힐 수도 그것을 넘어설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것들이 강령이나 정파라는 형태로 응고되어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개개인에게서 이런 가능성은 처지와 체험에서부터 문제의식, 존경하는 사람, 종교나 사상 등 다양한 층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찾고, 거기에 말을 거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야 한다. 당연히, 이렇게 하려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서 깊이 이해하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지난 겨울에 우리는 수많은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 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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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와 사회주의자의 도덕

 

도덕은 몰계급적인 것이고, 따라서 계급의 실리가 도덕을 대체해야 하다는 주장(“문제는 피와 강철로만 해결될 수 있다”)은 사회 체제라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결여된 입장이다. 날것의 이해관계와 폭력만으로, 그것도 단 하나의 지배계급에게만 복무하면서 장기간 유지될 수 있는 체제는 없다. 지배가 지속되고 정상적인 질서로 자리잡으려면 최소한 수동적이고 마지못한 동의라도 필요하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성공하는 지배계급은 자신과 경쟁하는 다른 계급들에게 일정 부분의 양보와 이익을 제시했고, 말하고 글 쓰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학자, 사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러기 위해 때로 정치적, 경제적 손실조차 마다하지 않아왔다. 그람시는 이렇게 얻어진 동의를 헤게모니라고 칭했다.

 

특히나 도덕은 사회 질서를 건설·유지하는 데 법 이상으로 중추적인 기제다. 만인을 매순간 법의 시선으로 감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법적 처벌로 위협당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내면화하고 지키는 규범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는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공자는 2500년 전에 이미 정치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은 면하되 부끄러움이 없다고 가르쳤다. 논리적으로 일반화가 가능한, 인간의 보편적 이상과 열망에 가 닿는 규범을 구축하지 못하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나 이런 편향에 대한 반편향으로, 자신의 주관적 도덕 감정으로 정치적 진보성의 판단을 대신하는 것은 더 나은 대안이기는커녕 그저 보수적 통념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이유는 같다. 도덕은 특정 사회, 특정 시대에 특정 집단이 행사하는 헤게모니의 일부이며, 개개인의 도덕 감정은 개개인의 위치성에 당연히 의존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이 하는 행사마다 쫓아다니며 방해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성판매 여성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는 순결주의자들도, ‘메갈과 일말의 관련이라도 있는 여성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벌이던 성차별주의자들도 자기 나름대로는 확고한 도덕 감정에서 우러나서 그렇게 한다. 옳은 일을 하려면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왜 이것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나와 다른 처지와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이것을 옳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거기에 선뜻 답할 수 없다면 내가 특권이나 기득권에 의거해 사고하는 게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진명제가 가능한가? 우리가 좇아야 할 도덕이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하고자 하는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자본가계급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다수자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는 소수자들의 투쟁이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약한 사람이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들이 인류 전체를 더 나은 인류의 욕구와 존엄을 실현하기가 더 쉬운, 인간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고 더 자유로운 - 세계에 살게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즉 우리가 사는 특정한 시대와 사회 구조 하에서 이 힘들이 인류의 보편적 이해와 결을 같이하는 부분이 실제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적 도덕은 이러한 이해관계의 논리적 표현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우리는 세계와 사회로부터의 소외를 넘어 그것을 이성적 통제 하에 두려는 욕구, 인습과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온전히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구에 기초해서 도덕을 정립해야 한다. 그것은 천부인권이라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현재의 도덕 체계보다 훨씬 현실에 감응적이고, 훨씬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훨씬 더 유연한 변화와 발전을 허락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소극적 자유의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유폐하거나 선험적으로 정해진 권리의 칸막이에 스스로를 구겨넣지 않고도 사회의 보호와 지원을 청할 수 있는 여지를 훨씬 더 넓게 열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도덕은 도덕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허구적 이항대립을 마침내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기사 등록 201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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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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