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론의 혁신

‘구 볼셰비즘’에 대한 재검토: 1917년 3월의 혁명 노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 14.

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오목눈이

 

 


구 볼셰비키가 낡은 도식에 매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 온 레닌이 4월 테제를 통해서 그것을 분쇄하고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주로 트로츠키에서 비롯된 정설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분석하는 글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균형있는 재평가에 도움이 될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Eric Blanc)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이자 역사학자이며 볼셰비키와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출처:

https://johnriddell.wordpress.com/2017/04/02/a-revolutionary-line-of-march-old-bolshevism-in-early-1917-re-examined/

 

서론

 

러시아 혁명 이후 100년 동안, 사회주의자들 및 학자들은 1917년 초에 볼셰비즘에서 전략적인 방향 변경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해 왔다. 이 주장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레닌이 4월에 러시아에 돌아와 사회주의 혁명 및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며 당의 방향을 전환할 때까지 자유주의적 임시 정부를 지지했다.

 

19173월 볼셰비키의 정치적 상황을 재검토함으로써, 이 글에서는 볼셰비키의 방향성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며 이 견해는 볼셰비키가 어떻게, 그리고 왜 러시아 혁명을 주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켜 왔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레온 트로츠키가 1924년 저술한 책자인 "10월의 교훈"에서 제시했던 "구 볼셰비즘"에 대한 해석을 계속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1917년 상반기에 대한 여러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해 왔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지도부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그 때까지 지지하지 않았으므로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려고만 했지 전복시키려 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레프 카메네프나 요세프 스탈린과 같은 구 볼셰비키임시 정부를 압박함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시킬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교조적인관념에 대한 집착은 3월에 볼셰비키의 방향성이 필연적으로 멘셰비즘을 지향하는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레닌이 19174월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도록 당원들을 설득하기 위한 운동에 착수하기 이전까지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러한 사실상의 멘셰비즘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체제 전복이나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지향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과 일치한다면, 19174월 레닌의 개입이 구 볼셰비즘으로부터 극적인 방향 전환을 일으켰다고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173월 제정 러시아 전역에서 러시아어와 라트비아어로 작성된 볼셰비키 신문, 책자, 회의록 및 결의문을 검토해보면, 확고한 1차 자료를 통해 트로츠키의 주장 전체가 가진 기반에 반론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을 이제부터 논의하고자 한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을 포함한 볼셰비키 지도부의 구성원들은 3월에 임시정부의 해체와 혁명적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국가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부르주아와 결별하여야만 노동자 계급은 전쟁을 종결시키고 러시아에서의 사회적 요구를 달성하며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주장했다.

 

이러한 기본적 계획이 없었다면 1917년 볼셰비키의 성장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4월은 볼셰비즘의 전략적 전환이 아니라 정치적 진화의 시간이었다. 내 주장은 역사가 라스 리(Lars Lih)가 트로츠키의 서사에 대해 제기한 획기적 도전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현존하는 증거는 리가 주장한 것과 같이 19173월에 볼셰비키가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것은 191710월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리는 초기에 볼셰비키 내에서 있었던 정치적 변동 및 1917년에 걸친 볼셰비키 내의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를 축소함으로써 연속성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다.

 

볼셰비키의 전투적 전략과는 달리, 특히 제정 러시아 주변부에서 볼셰비키 지도부는 3월에 걸쳐 종종 중도적 사회주의자나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은 구 볼셰비키지도부가 표출한 입장을 드러낸다기보다는 그런 입장과 방향을 달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레닌이 돌아오기 이전에 나타났던 정치적 비일관성은 특히 어떤 당과 계급이 혁명 정부를 주도할 것인지에 대해 확고한 입장이 없던 볼셰비키의 전략에 내포된 몇 가지 갈등에 의해서도 역시 촉진되었다. ‘구 볼셰비즘에 의한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에 대한 모호한 요청은 제정 붕괴 이후에 볼셰비키가 서로 다른 여러 방향을 취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런 결과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특히 볼셰비즘의 연속성이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부정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볼 때 1917년 동안 볼셰비즘이 가졌던 연속성에 주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볼셰비키 내부의 동요는 대중운동에 관여하는 어떤 정치조직에서나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의 주도권에 대한 전반적인 입장의 일치가 이러한 동요에 비해 크게 나타났다.

 

1920년대 스탈린주의의 부상에 맞서 노동자 민주주의와 국제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절박한 시도의 일환으로 트로츠키가 구 볼셰비즘에 대해 일방적으로 서술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욱 관료적으로 변한 공산당과 소련에 맞서 트로츠키가 모든 선전 방법을 동원해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포함하는 구 볼셰비키간부들의 신뢰도를 하락시키려 한 것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많은 1차 사료들에 분명히 반하는 트로츠키의 해석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트로츠키가 주장한) 영구혁명론을 포함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19173월에 실제 볼셰비키 내의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다시 고찰하는 것 정도로 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하다고 본다.

 

정치적 맥락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기 이전 볼셰비키의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혁명에서 해당 시기의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 임시 정부나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은 1917년 중 어느 때보다도 대중의 정서와 일치하였다.

 

3월 즈음에는 페트로그라드뿐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이중권력 구조가 정립되었다. 러시아는 명목상 임시정부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실제 권위와 권력은 소비에트에 편중되어 있었다. 임시 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었으며,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전쟁과 군주제를 지지하여 노동자들과 정치적으로 동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임시정부 체제는 중도적 사회주의 지도부의 지지에 의존하였다. 정치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노동자 및 군인들의 시각에서는 소비에트만이 정당한 권력이었다. 32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의에서 채택된 잘 알려진 문구를 빌자면, 소비에트는 새로운 부르주아 행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수행하는 한도 내에서만지지하고자 하였다.

 

1905년 이후 멘셰비키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많은 부분 반영한 이중권력 체제는 대체로 멘셰비키 지도부에 의해 수립되었다. 멘셰비즘은 여전히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포괄했지만, 모든 구성원들은 군주제 몰락 이후 부르주아가 집권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러시아의 후진적인 사회적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적 변화는 불가능하였으며, 따라서 노동자 정부는 논의할 대상이 아니었다.

 

1917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멘셰비키가 노동자의 권력 장악에 관한 전략을 포기하였고 자유주의자와의 동맹이 필수적이라는 관점을 취했다. 즉각적인 방침으로서,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일부와의 동맹을 통해서만 우익 반혁명의 심각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념적으로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일부 결정적 세력이 봉건주의의 잔재를 대체하여 민주주의와 사회적 진보를 지지할 것이라는 입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멘셰비키 내에서 러시아 자유주의에 대한 기대에서는 큰 의견 차이가 있었다. 3월의 멘셰비즘은 4월 위기와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임시정부 입성 이후에 비해 유의미하게 덜 친정부적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 부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917년 초반, 멘셰비키는 부르주아가 주저하지 않도록 아래로부터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독립적인 노동운동의 지속적 압력이 필요하다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하였다. 3월 대부분에 걸쳐 멘셰비키는 이러한 비교적 비협조적 자세를 굳건히 유지하였으며 정부를 진보적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따라서 멘셰비키는 왕정을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초기 입장을 거부하였고, 군인들에 대한 소비에트의 정치적 영향력을 주장하였다. 멘셰비키는 정부 및 일반 사회를 주도할 노동자 계층의 보루로서 소비에트를 구축하려 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임시정부와 연합군이 1차 대전 종전을 위해 구체적인 단계를 밟도록 압력을 가하는 정치 운동을 시작하였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의 지도 하에 소비에트는 초기에 몇 가지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 국민에 대한 정치적 자유와 법적 평등, 경찰 및 공안부서 폐지, 모든 정치범 석방, 반란 행위에 참여한 병사에 대한 징계 철회, 제정 러시아의 고위관료 해임 및 신속한 입법의회 선출은 소비에트에 의해 임시정부가 실행하게 된 정책들이었다. 입법의회 선출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19173월 당시의 정부가 임시정부임을 강조하였으며 몇 개월에 걸쳐서만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멘셰비키의 이중권력 계획의 현실성은 민중의 시급한 요구를 실행하려는 부르주아의 능력과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지나치게 빠르게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의 자제력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양쪽 계층 모두 멘셰비키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음을 입증하였다.

 

3월은 임시정부가 진보적 정책을 비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있어 정점이었다. 소비에트는 평화 운동을 벌였지만, 프랑스 및 영국 제국주의의 지지를 받은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은 전쟁을 지속하였으며 승전 이전까지 대규모의 사회개혁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승전에 이르기까지전쟁을 지속하겠다는 행정부의 계획이 알려진 4월에, 소비에트 지도부의 희망을 무시하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반정부 집회가 일어났다. 4월 위기는 당시의 임시 정부가 통치를 위해 충분히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행정부 및 멘셰비키의 전략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자본주의적 정부에 참여하는 데에 대한 원칙적 거부와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 사이에서 멘셰비키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볼셰비즘과 혁명 정부

 

볼셰비키는 19173월에 나타났던 특수한 러시아의 사회 구성을 예상하고 있지 못했다. 1905년 이후 계속해서 볼셰비키는 노동자 및 농민이 스스로 민주주의적 독재체제를 수립하거나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 입헌군주제를 통해 집권할 것이라고 예상해 왔다. 그러나 군주제 이후의 자유주의 정부 출현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전쟁 종식과 민중의 요구 실현을 위해 노동자의 집권으로써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 정부를 수립한다는 볼셰비키의 주된 주장을 무력화하지는 않았다. 리는 볼셰비즘은 왕정 종식 이후에 대해 예측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완성을 위한 전략을 뒷받침하는 러시아 사회의 역동적인 힘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하였다고 지적한다.

 

3월 초순에 걸쳐 가장 급진적인(극좌파로 불릴 수 있는)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위한 즉각적 대중 선동을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볼셰비키 지도부는 볼셰비키 조직이 취약하고 페트로그라드 외부에서 혁명의 전개는 수도보다 늦었으므로, 노동자들이 주로 소비에트 내의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런 압력은 위험하며 시기상조라고 반론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임시정부는 중요한 민주적 조치들을 따르고 있었다. 3월 하순 볼셰비키 회의에서 필립 골로셰킨은 임시정부는 구성 및 본질에 있어서는 반혁명적이다. 그러나 대중의 압력 하에 임시정부는 혁명적 과업들을 실현하고 있으며, 그만큼 스스로의 기반을 만들어간다. 우리는 대중이 임시정부가 많은 일을 하였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반혁명에 대항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하여야 하나 강압적 행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는 없다고 이를 언급하였다.

 

34, 알렉산더 슐라프니코프와 바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주도한 러시아 볼셰비키의 최고 지도부였던 러시아 중앙 위원회(Russian Bureau of the Central Committee)는 볼셰비키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게시한 결의문을 통해 이런 흐름에 따르는 전략적 방향을 확정하였다.

 

현재의 임시정부는 거대 부르주아와 귀족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반혁명적이다. 따라서 임시정부와 합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과업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노동자 및 농민의 독재에 의한) 임시 혁명정부의 수립이다.”

 

비보르그 지역의 볼셰비키들은 이 목표를 즉시 달성해야 한다는 입장에 따라 3월 초순 대형 공장의 결의대회에서 노동자 및 군인의 소비에트는 즉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임시 정부를 제거하고 임시 혁명정부를 선포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는 상대적으로 신중론을 펼쳤다. 33일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노동자, 대중 민주주의 및 민중의 이익을 따르는 행동을 취하는 한 임시정부 권력을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결의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로써 볼셰비키 지도부가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라는 멘셰비키의 입장을 채택하였다는 부정확한 결론을 내린 바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결의는 단순히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즉시 해체할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으며 임시정부가 취하는 각각의 진보적 조치를 지지할 것임을 나타낼 뿐이었다.

 

또한, 볼셰비키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잘레즈키(Zalezhsky)가 설명하였듯,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지도부와의 입장 차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지지할 것대신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였다.

 

볼셰비키는 얼마 뒤 정당 기관지를 통해 페트로그라드 회의에서 취한 정치적 방향성을 설명하였다. 라트비아 볼셰비키 지도자였으며 페트로그라드 회의에 참여하였고 소비에트 행정 회의에 대표로 참여한 세 명의 볼셰비키 당원 중 한 명이었던 페테리스 스투치카(Pēteris Stučka)는 볼셰비키의 입장을 특히 정교하게 서술하고 있다.

 

33일 페트로그라드 회의에서 채택된 조건부결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스투치카는 우리의 임무라는 37일 기사를 통해서, 어떻게 이 결의가 볼셰비키의 전략에 들어맞는지를 서술한다. 라트비아어로 출판되어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이 문서는 혁명이 종결되었는지, 또는 시작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서 볼셰비키가 국가 권력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스투치카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함께 혁명을 일으켰으나 임시 정부는 반혁명적부르주아에 의해 운영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새로운 행정부는 (군주제 철폐와 같이) 대중의 압력에 따라 실질적인 변화의 단계를 밟을 수밖에 없기는 하였으나 혁명에 필수적인 과업을 수행할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혁명적 대중의 지지를 잃는 순간 임시정부는 몰락할 것이었다”. 스투치카는 이러한 볼셰비키의 전략적 관점이 임시정부의 몰락은 혁명 전체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믿는 중도적 사회주의자들과 우리(역주: 볼셰비키)를 구분하는 토대라고 설명하였다.

 

이와 달리, 스투치카는 진정한 임시 혁명정부, 즉 노동자와 농민의 임시정부만이 러시아를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와 제국주의적 전쟁 종결 등 민중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국가권력에 대한 목표를 염두에 둔다면, 혁명가들의 당면한 과제는 중재를 거부하고 직접적인 혁명적 구호를 제시하며 임시정부의 모든 발걸음을 비판적으로 보는 동시에 혁명의 발전을 거스르지 않는 경우에만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볼셰비키 지도부는 조건부에 대한 논의를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전략에 포함시켰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지도자였던 니콜라이 수카노프(Nikolai Sukhanov)는 임시정부의 진보적 정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것은 당시 볼셰비키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우파 사회주의자들에 맞서며 대중을 상대로 선전하는 것 역시 볼셰비키의 공식적 입장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멘셰비키 지도부가 부르주아 통치 체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전략적 목표를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압력으로 국한시킨 반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거부하고 현 정부를 노동자 및 농민의 정치체제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였다.

 

러시아의 역사가 V. I. 스타르체프는 “33일 볼셰비키 결의와 32일 소비에트 결의의 유사성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었으며, ‘조건부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문법적 공통점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3구 볼셰비키는 혁명이 전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볼셰비키가 민주 혁명의 목표를 왕정 종식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다. 볼셰비키의 관점에서 민주 혁명은 지주들의 토지가 몰수되고 노동자들이 무장하며 공화정이 수립되고 급진적인 경제 정책이 실행될 때에만 완결될 수 있었다. ‘구 볼셰비키니콜라이 밀류틴이 3월 하순에 서술하였듯, 볼셰비키 혁명은 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혁명이었다.”

 

312일 볼셰비키 지도부의 구성원인 카메네프, 스탈린 밑 뮤라노프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바로 <프라우다>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지도부의 도착은 상대적으로 신중론을 펼치는 진영에 무게를 실어 주었으며 더 비타협적인 러시아 사무국이나 비보르그 위원회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33일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회의가 처음 취했던 혁명적 조건부타협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트로츠키의 근거 없는 주장과는 달리, 새로운 <프라우다> 편집진은 현 정부 타도와 노동자 및 농민의 전체 권력 장악이라는 볼셰비키의 목적을 공개적으로 확정하였다. 3월에 걸쳐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임시정부 자체를 지지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통해 임시정부가 시행한 각각의 진보적 조치만을 지지함을 밝혔다.

 

카메네프의 표현을 빌자면, “(임시정부) 지지는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지지를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임시 정부는 제국주의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임시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

 

314일 기사에서 카메네프는 국가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볼셰비키의 입장을 명확하게 반복하였다.

 

노동자, 농민 및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는 자신의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질 때에만, 그리고 구체제의 경제적 및 정치적 잔재가 완전히 파괴될 때에만 혁명을 완결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노동자, 농민 및 군인의 요구가 모두 만족되기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 병사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야만 한다. 혁명이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한, 혁명은 노동자 및 농민의 독재로 귀결될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볼셰비키 전략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317일 새로운 편집진은 <프라우다> 1면에 소비에트에 대한 볼셰비키의 1906년 결의를 게재하였다. 이 결의는 소비에트가 노동자 봉기를 통해 임시 혁명정부로 전환되어야 할 혁명권력의 맹아임을 주장하였다. 편집진은 현재의 소비에트는 이미 왕정이 종결된 토양에서 작동하고 있으나 이 결의의 방향성이 기본적으로 현재에도 정당하다고 선언하였다


318<프라우다>에서 스탈린은 직접적으로 제국 전체에서 소비에트가 설립되어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요구하며 이러한 구호를 고안하였다. 스탈린의 기고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위한 첫 번째 조건러시아 전역의 소비에트필요한 동력이 주어질 때, 민중의 혁명적 투쟁을 위한 기관에서 혁명적 권력 기관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분명히, 볼셰비키 내의 가장 급진적 구성원들과 달리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임시정부가 즉시 전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가장 빨리 무장 봉기를 시작하려 했던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급진주의자들의 성급한 태도에 반해 카메네프는 권력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권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기는 올 것이지만, 우리가 가진 능력은 여전히 불충분하므로 시기를 연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카메네프는 페트로그라드 위원회(Petrograd Committee)에서 주장하였다.

 

3월 동안 <프라우다>의 편집진은 당의 고립과 극좌적 경향성을 심각한 위험으로 보았다. 이러한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비보르그 지역에서 페트로그라드 급진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노동자 대부분이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기 한참 전에 정부를 전복시킬 것을 주장함으로써 블랑키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 돌아간 이후 레닌도 성급한 볼셰비키 당원들이 4월 및 7월의 무분별한 정치적 행동에 의해 때 이른 봉기를 일으켜 혁명을 중단시킬 위협에 맞서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와 흡사하게, <프라우다>의 우회적 전술이 3월의 정치 상황에 가장 적절했을 것이라는 증거는 상당하다. 한 가지의 예를 들자면, 크론슈타트에 대한 Israel Getzler의 연구는 카메네프의 지도 하에 수립된 전술을 통해 이 전략적 시점에 볼셰비키의 운명을 전환시킬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비보르그 위원회의 영향력 하에 이루어졌던) 크론슈타트에서의 성공적이지 못한 볼셰비키 정치 행동이 어느 정도 공격적이고 최대주의적인논조에 의한 것이었다면, 3월 중하순부터 4월의 나날들까지의 온건하고 최소주의적입장은 볼셰비키의 조직과 영향력을 구축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혁명적 소비에트 정부(또한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에 대한 3월의 요청은 페트로그라드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볼셰비키 위원회 중 한 곳에서는 노동자의 이해관계에 대한 유일하게 일관된 표현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이다. 따라서 모든 방면에서 소비에트를 지지하고 임시정부의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며 최후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혁명을 지속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라고 선언하였다.

 

볼셰비키는 모스크바, 에카테린부르크, 카르코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유사한 입장을 발표하였다. 마찬가지로 43~4일에 열린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회의는 레닌이 귀환하기 직전 볼세비키 지도부의 대체적인 관점을 보여 준다.

 

V. I. Yahontov 한 사람만이 새로운 혁명 정부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반대하며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경제 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대표들은 당신이 볼셰비키가 맞는가라고 야유하였다. 그 직후 Yahontov,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에 의해 비판과 고립을 겪은) 블라디미르 보이틴스키가 이끄는 페트로그라드의 몇몇 동조자들은 멘셰비키가 되었다.

 

레닌이 돌아오기 이전에 이미 볼셰비키 가운데 권력 장악에 반대하였던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주변화됨에 따라 바로 멘셰비키 당원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트로츠키가 암시하듯 볼셰비키 내에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면 Yahontov나 보이틴스키의 탈당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의 주장은 특히 볼셰비키에 대해서 공개적 정치 공세를 가한 우익 언론의 사례에 대해서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슐랴프니코프는 회고록에서 전쟁과 임시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볼셰비키의 입장 때문에, 지배층이 볼셰비키에 대해 3월 내내 가했던 맹렬한 공격과 비난을 기록하면서, “부르주아의 적개심은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는 증거였다고 결론짓는다.

 

스몰렌스크 혁명에 대한 마이클 히키(Michael Hickey)의 최근 연구 역시 레닌이 러시아에 돌아오기 이전에도 볼셰비키의 입장은 지역 언론에서 반복해 공격받았다는 점을 논의한다. 전쟁과 임시정부에 대한 볼셰비즘의 입장은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3월 내내 강한 공격 하에 놓였다. 볼셰비키의 전쟁 반대 태도는 특히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슐랴프니코프가 회상하듯, “부르주아와 방어주의적 멘셰비키 및 사회혁명당원들은 말 그대로 우리에 대한 대대적 공격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국제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기도 있었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논쟁 역시 레닌이 돌아오기 전에 시작되었다.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와의 동맹이 필요하며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낮은 단계에 있기 때문에 노동자 권력이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 “만약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및 병사 소비에트가 직접 권력을 장악한다면, 이 권력은 공상적일뿐 아니라 즉시 내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멘셰비키의 주된 기반이 있던 페트로그라드의 기관지는 선언하였다.

 

이처럼, 볼셰비키 지도부는 레닌이 4월에 러시아에 도착하기 이전부터 소비에트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학자 및 활동가들이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소비에트 권력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3월에 취했던 정치적 입장을 회고하며, 스투치카는 1918년에 우리 볼셰비키 및 페트로그라드 집행위원회 모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당시 우리는 즉시 사회주의를 택할 것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언급하였다.

 

1917년 후반까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이전하라는 요구는 구체적으로 직접적인 사회주의적 변화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함께 이끄는 정부의 수립을 의미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1917년 후반에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주장했으나 사회주의 정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이에 따라 멘셰비키 및 연방주의적(Bundist) 제주의의 핵심적 지도자였던 라파엘 아브라모비치는 19177월에 아래와 같은 선언을 통해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혁명은 이제 한 가지 방향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도시와 농촌 소부르주아 내의 혁명적 계층과 함께 노동자에 의한 정치권력, 즉 독재가 이루어지는 것이 혁명의 방향이다.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중대 규모의 부르주아의 협조를 받지 않고, 또는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루어져야 한다.”

 

제정 러시아 전역에서 다른 여러 정당 및 정치집단은 서로 다른 전략적 관점으로부터 소비에트 권력을 요청하였으며, 이 관점 대부분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함하지 않았다. 스탈린주의화된 후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 달리, “구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변화가 긴 시간 동안의 자본주의적 발전과 정치적 민주주의 이후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 볼셰비키 지도부는 19173월에 이 관점에 직설적으로 반대하였다. 대신에, 볼셰비키 지도부는 국제적 자본주의 전복을 위해 농민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책자, 연설문 및 기고문에서 볼셰비키는 제국주의적 충돌에 의해 나타나고 심화된 자본주의의 위기가 즉각적인 세계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고, 따라서 러시아 혁명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투치카는 제정 러시아 내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먼저 장기적인 사회적 자유의 시기가 존재하여야 사회주의를 위한 진지한 투쟁이 가능하다는 관점은 사회주의 자체를 오랜 시간 동안 연기하는것을 의미한다며 이 관점에 반대하였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경계 안에서만 사회주의를 실행에 옮길 희망은 미미하지만, 유럽 전역에 걸친 혁명이 있다면 러시아도 분명히 거기에 포함될 것이라고 스투치카는 설명하였다. 스투치카의 선언에 따르면 혁명의 경험을 통해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긴 시간의 정치적 자유를 거치지 않더라도 급진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었다. “혁명기의 6개월은 평화로운 발전 가운데에서의 수십 년과 같다는 것이 스투치카의 주장이었다.

 

10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많은 경우 10월이 지나서도 대부분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유럽에서의 성공적 프롤레타리아 혁명 여부에 따라 러시아 경제의 유의미한 사회주의적 전환의 가능성이 결정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닌은 사회주의를 위한 단계에 대한 4월의 제안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자본주의적 산업을 몰수하자는 주장도 피했다.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가장 황당무계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로서 레닌은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이 사회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소농임을 들었다. 자신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기를 거치지 않기를 목표로 한다는 주장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며, 레닌은 4월 동안 자신이 노동자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병사 및 농업노동자로 구성된 광범위한 체제를 옹호함을 밝혔다.

 

10월 혁명 이후 수 개월 동안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키 지도부는 생산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1906년 트로츠키가 예측하였듯, 노동자의 집권을 유도함으로써 볼셰비키는 원래의 계획보다 현저히 더 나아가야만 했다.

 

자본가들의 경제적 방해, 통제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자본 몰수 행위 및 러시아 내전의 동력에 의해 볼셰비키는 1918년 하반기에 모든 주요 산업을 국유화해야만 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나, 때 이른 국유화에 의해 생산 활동은 파국에 이르렀으며 국유화는 국가 관료가 특권층으로 성장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회주의적 전환에 대한 볼셰비키의 입장 변화는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것보다 더욱 복잡한 과정을 걸쳐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났다. 역사적 기록은 19174월에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볼셰비키를 설득하였다는 주장은 반박하고 있지만, 반면에 이미 11년전에 제시된 영구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선견지명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며 권력을 잡든,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의 내부적 작용에 의해 정치 권력을 확보한 프롤레타리아가 비록 스스로 원한다고 하더라도 부르주아의 사회적 권력 장악을 위한 민주공화국의 창출만을 목표로 할 것이라는 발상은 극도로 공상적이다.”

 

페트로그라드에서의 타협

 

19173월 볼셰비키 지도부는 정부 수립을 혁명의 목표로 한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였으나, 어떻게 혁명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종종 충돌하였다. 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자유주의자 및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의 요구에 얼마나 많이, 어떤 방면에서 부응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지, 권력 장악이 즉시 이루어져야 하는지 또는 중장기적 계획인지, 그리고 권력 장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요구를 제시하고 임시 정부의 진보적 조치들을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고 유동적이었음을 감안할 때, 어떻게 투쟁을 전개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내부적 충돌이 있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이후의 사건 전개는 매우 예측하기 어려웠다. 라트비아의 볼셰비키 지도자 한 사람은 이 상황에서 적절한 전술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분파적 고립과 원칙 없는 순응을 모두 피하면서 대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기회주의와 필요한 타협 사이의 경계도 분명치 않았다. 4월 이후 1917년 동안 그러했듯, 볼셰비키는 러시아 전역에 걸쳐 가장 전략적으로 응집된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었지만 급진주의자들의 정치적 및 전술적 접근 방법은 일률적일 수 없다.

 

이 글에서 당시의 모든 논의를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다. 그러나, 3월 중 많은 볼셰비키 구성원들이 외부의 정치적 세력에 대해 타협하는 문제있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제정의 전복 이후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 및 노동자 대중은 러시아 전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단결을 위해 독자적 관점을 보류하거나 약화시키라고 요구하였다.

 

모든 지역은 제정 전복에 대한 기쁨과 계급 타협에 의한 밀월을 겪고 있었다. 사회혁명당 좌파 한 명은 “2월의 사건을 통해 대중은 바로 며칠 전까지 지주 및 자본가와 타협 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을 잊어버렸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단결한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또한, 합의를 요구하는 다른 중요한 요인은 3월 반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두려움이었다.

 

남부에서 발트 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역에 걸쳐 1917년 초반의 다양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세력은 노동자 지배에 대한 계획을 철회하거나 또는 일시적으로 포기하였다. 예컨대, 3월에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긴 시간 동안 취해 왔던 계급 협력과 자본주의 정부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을 포기하였다.

 

핀란드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오토 쿠시넨은 회상하기를,

 

“2월의 자유는 하늘로부터의 선물처럼 느껴졌고, 우리 당은 3월의 기쁨에 취해 있었다. 공식적인 표어는 1차 대전 이전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자적 계급투쟁이었다. 1917년 이전의 반동적 시기에 이 입장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누구도 심각한 공격을 취하지 않았고, 당 내 우익의 저항도 불충분했다. 3월 동안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노동자적 미덕은 유혹을 받아 타협이라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다.”

 

어떤 사회주의적 조류도 특정한 정치적 전략을 취함으로써 외부 사회, 특히 다른 사회주의 세력 및 대중의 정서로부터 오는 압력에 순응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구성원들 가운데에서 성급한 극좌적 입장이 부상하는 것 역시 방지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혁명적 계획은 혁명적 실천을 위해 필요했으나 충분하지는 않았다.

 

볼셰비키는 다른 대부분의 사회주의 정치 운동에 비해 제정 러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볼셰비키 역시 내부의 차이를 불러일으키는 동일한 요인 하에 놓였으며 비슷한 방식으로 요동을 겪었다.

 

슐라프니코프는 외압은 동지라고 여겼던 몇몇 사람들까지 흔들리고 후퇴할 정도로 강하였다고 회상한다. 여러 볼셰비키 지도부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볼셰비키의 요구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정치적 입장에 수정을 가했다.

 

카메네프는 이 점에서 특히 크게 입장을 바꾸었다. 예컨대, 315<프라우다>에서 카메네프가 1차 대전에 대해 취한 입장은 소비에트 지도부의 혁명적 방어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계 대전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고 임시 정부와 유럽의 다른 부르주아 정권이 전쟁을 종결하도록 하는 혁명적 계급 투쟁을 요구하면서도, 카메네프는 투쟁이 이루어지는 동안 러시아를 독일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복했다.

 

하나의 군대가 다른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한 쪽이 무기를 내려놓고 귀가하라고 제안하는 것은 가장 황당무계한 정책이다. 이와 같은 요구는 평화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노예화의 정책이며, 자유민이라면 이를 격분하여 거부할 것이다. 러시아는 원래의 위치에 확고하게 서 있을 것이며 총탄에는 총탄으로 대응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문은 당시까지 볼셰비키가 취해 왔던 방어주의에 대한 선명한 반대에서 크게 벗어난다. 예측할 수 있듯이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 입장을 즉시 거부하였다. 당 지도 세력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카메네프는 다음날 방어주의에 대한 이러한 타협을 철회하였다.

 

슐랴프니코프가 지적하듯, 3월 하반기에는 볼셰비키의 반전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의 더욱 큰공격이 이루어졌고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정부의 공격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운동에 집중하여야만 했다. 315일 카메네프의 기고문이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오기 이전 <프라우다>의 입장을 완벽하고 정확히 나타낸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카메네프가 1차 대전에 대해 329일에서 43일까지 이루어졌던 전 러시아 소비에트 의회에서 낭독한 볼셰비키의 연설문은 볼셰비키 내의 반전적 합의를 증명한다. 비타협적으로 전쟁을 비판하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하며, 카메네프는 이후 레닌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얻을때에만 국가의 방어가 필요하다고 단언하였다. 당시 계급 세력 균형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57 325의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었다.

 

국제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방어를 통해 카메네프가 중도적 사회주의자들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합의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는 일반적 인식에 반박할 수 있으나, 329일 의회에서 카메네프가 취했던 행동들 중 일부는 타협주의적 경향성의 증거로 보이기도 한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필연적으로 노동자와 충돌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카메네프의 개회 연설문은 소비에트 지도부의 국가적 관점에 대한 결의를 비판하고 당시의 임무가 혁명 권력의 배아인 노동자 및 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강화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주장으로 의원들을 단결시키려는 목표를 위해 멘셰비키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체레텔리(Irakli Tsereteli)만약 노동자 대중의 이해관계를 위해 필요하다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적인 차원으로 선언하였다.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는 초반의 제안을 철회하기 위한 결의문 수정도 이루어졌다.

 

이 시점에서 슐랴프니코프를 포함한 여러 볼셰비키의 최고 지도부 구성원들은 별도의 정부 수립 결의를 제시한다는 계획을 고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카메네프는 대부분의 볼셰비키 당원이 이에 비해 타협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도록 설득하였다.

 

총회에서 카메네프는 국가 권력에 대한 급진적 입장을 낭독하였으나, 볼셰비키가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노동자 및 농민의 정부 수립이 가지는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조건부합의문을 지지할 것임을 밝히기도 하였다.

 

슐랴프니코프가 우리 대다수의 이러한 결정은 부르주아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는 민주적 단결의 필요성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타협주의자에 대한 양보였다고 결론지은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타협주의로의 변화는 중대한 문제였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대한 레닌의 비타협적인 태도 중 많은 부분이 볼셰비키 중 일부가 중도적 사회주의자들과 타협하고,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와 타협하는 경향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카메네프에게 있어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의견을 일치시키려는 지속적 노력은 어느 정도 구 볼셰비즘의 요소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 전략은 어떤 사회 계급 혹은 정당이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를 위해 주도적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고, 이 체제는 종종 서로 다른 사회주의 정당 사이의 연합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산술적 구상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에 대해 볼셰비키가 취했던 태도 사이의 대립은 제정 몰락 이후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을 때 매우 선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셰비키 전략에 대한 중요한 질문은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이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깨뜨리고 새로운 혁명 정부의 수립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트로츠키,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및 폴란드 사회민주당이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취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1917년 동안 레닌은 점차 강하게 노동자 정당이 주된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정부 형태를 주장하였다.

 

4월에 레닌은 소 부르주아가 결국 부르주아와 입장을 달리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민주적 독재에 대한 요구는 당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구체적 상황에서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선언하였다.

 

9월에 이르러서 레닌은 다른 모든 정당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는 우리 자신이 정치권력을 잡을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의 목표는 혁명적 노동자에 의한 독재라고 주장하였다. 1906년 트로츠키는 누가 정부에서 정치권력을 잡을 것이며 정부를 통해 국가에서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답변이 영구혁명 전략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 중 하나라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카메네프와 동조자들은 비록 혁명 정부에서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잡는다는 목표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혁명 정부의 통치에서 소부르주아대중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포함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가능하며 바람직하다고 강조하였다.

 

4월에 레닌과의 논쟁에서 카메네프는 부르주아와 혁명적 민주주의 전체의 충돌은 필연적이며, 자본가들과 소부르주아 사이의 분열이 다가온다면 노동자와 소부르주아 사이의 연합이 붕괴하지 않도록 모든 전술을 구축할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소수였기 때문에,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가 참여한 정부는 새로운 혁명적 권력이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동맹 및 다수의 지지에 기반한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가장 가능성 있는 전망이었다. 특히 볼셰비키는 농촌에서 강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체제를 수립하려는 희망은 정치적 나약함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에 대한 교조적추종으로 불리울 수 없다.

 

그러나, 이 전략의 문제점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1917년에 걸쳐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중도적 사회주의자들 중 많은 수가 부르주아와의 결별을 주장했으나, 대부분은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혁명적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및 다른 급진적 볼셰비키가 주장한 동일성을 가진 사회주의적 정부에 대한 요구는 다른 사회주의 세력의 도움 없이 집권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들과 잘 알려진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리는 심각한 실질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던 이러한 전략적 분열의 중요성을 축소하였다. 그러나 3월에 카메네프가 취했던 타협적 접근을 볼셰비키 전체의 접근과 임의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역사가 D.A. Longley스탈린의 귀환 이후 발생했던 우익적 전환은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의 극히 일부에만 영향을 끼쳤으며 우익세력의 외부와의 관계에 의한 승리였고 정당 내 정치에서의 유의미한 변화가 아니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러시아 사무국, 비보르그 위원회 및 스투치카, 슐랴프니코프, 몰로토프를 포함한 볼셰비키 최고 지도부는 카메네프나 스탈린만큼이나 구 볼셰비즘의 정치적 시각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19173월 이들은 임시 정부에 대해 더욱 급진적 입장을 취했으며 다른 사회주의적 세력에 대해 더욱 독립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를 통해 이 세력은 국가 권력 장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주도권 확보라는 전략을 고수하는 볼셰비즘의 태도와 중도적 사회주의자에 대한 볼셰비즘의 날카로운 비판에 의존하였다.

 

독자적인 구체적 경험과 분석을 통해 4월 이전에 많은 볼셰비키 지도부는 중도주의자들이 부르주아와 결별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예컨대, 2월 혁명 동안 슐랴프니코프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볼셰비키와 연합해 혁명 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거부되었다. 역사가 하세가와 츠요시는 이러한 시도 이후 슐랴프니코프와 러시아 사무국이 31일에 이미 자신의 관점을 수정했음을 지적한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지도부가 임시 혁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볼셰비키의 세력 역시 아직 두각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슐랴프니코프 및 러시아 사무국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구호를 채택하는 것이 아직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 볼셰비키는 대중에 대한 조직과 선전 및 소비에트 내에서의 다수가 되는 데에 집중하여야 했다.

 

볼셰비키 전체의 방향성은 슐랴프니코프의 방향 전환과 일치했다. 적어도 191710월까지,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및 농민의 정부 수립에 동참할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굳어져 있지 않았다. 볼셰비키 지도부 대다수가 결국 소비에트 권력은 볼셰비키의 주도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이념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경험에 의거했다.



<프라우다>를 읽고 있는 카메네프 

 


페트로그라드 너머에서

 

러시아 정치의 핵심은 페트로그라드였지만, 1917년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분석의 지리적 범위를 넓히는 것은 중요하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에게 극좌적 경향과 기회주의적 경향 중 어느 쪽이 더 큰 약점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제국의 식민지와 주변부에서는 후자가 더욱 극심한 문제였다.

 

볼셰비키 타협주의가 수도 바깥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상황적 요인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에서만 실제로 봉기의 성격을 띠었으며, 1917년 대부분에 걸쳐 그 이외의 지역에서 계급 대립은 비교적 지연되었다.

 

바쿠에 대한 로날드 수니(Ronald Suny)의 설명은 다른 지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중도적 사회주의 정당들은 (중략) 대중의 방어주의적 성향으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혁명의 첫 1개월 동안 바쿠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는 데에서도 이익을 얻었다.”

 

볼셰비키 총 지도부가 기반을 두고 있었고 분파 사이의 차이가 가장 컸던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와 차이를 보였던 또 다른 지점은 지방의 급진적 볼셰비키 다수, 혹은 대다수가 2월 혁명 및 1917년 초반에 걸쳐 멘셰비키와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RP) 위원회에 멘셰비키와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03년 처음 분열하기 시작한 이후 계속해서 RSDRP의 조직 및 각 분파의 노선을 따르는 정도는 수도 밖에서 유의미하게 더 약했기 때문에 지역의 급진주의자들은 힘을 합쳐 왔다. 멘셰비키가 임시 정부에 참여한 1917년 여름까지 별도의 볼셰비키 조직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10월 이후에도 일부 볼셰비키는 합동 위원회에 참여했다.

 

합동 RSDRP 조직에 대한 참여가 멘셰비키에 대한 정치적 타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많은 급진주의자들은 위원회가 볼셰비즘적인, 혹은 적어도 확고히 국제주의적인관점을 취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 이른 분열을 통해 통합을 여전히 확고하게 지지하는 RSDRP로부터 고립될 것임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적 유연성은 멘셰비키 지도부의 계급타협주의가 가진 실체가 분명히 드러났을 때 사회혁명당 대다수가 볼셰비키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구 볼셰비즘에 대한 정치적 헌신이 이루어진 정도는 주변부에서 균일하지 않았다. 정치적 요인뿐만 아니라 지리적 요인에 의해서, 1917년 초반에 볼셰비키 급진주의자들은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페트로그라드의 지도부와 매우 약한 연결만을 보였다.

 

조지아의 볼셰비키 지도부에 속했던 필리프 마카라제(Filipp Makharadze)는 일반적으로 2월에 볼셰비키 운동이 티플리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별도의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중앙 위원회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바쿠의 사회주의자 한 명이 4월에 개탄했듯, 지역 RSDRP 조직은 매우 약했으며 선명한 전선이 없었다.”

 

19173월 동안 합동 RSDRP 위원회에서의 협력에 대한 압력, 페트로그라드 및 해외에 집중된 볼셰비키 지도부의 소재, 지역 급진주의자들의 비교적 약한 이념적 헌신 및 타협을 유도하는 주변부의 상황은 볼셰비키의 실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바깥에 위치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타협적 사회주의자들과의 선명한 구분은 예외적 상황이었으며 보편적 상황이 아니었다. 통합에 대한 압력 때문에 지역 볼셰비키는 종종 임시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하자는 입장을 넘어서지 않는, 애매모호하고 최소주의적인 방향성만을 취했다.

 

볼셰비키 최고 지도부는 조건부강령을 노동자 및 농민 정부에 대한 확고한 지지의 일부로 취했지만, 주변부 볼셰비키에게 이러한 전국적 목표는 공개적이거나 내부적으로 그다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트랜스코카시아 및 볼가 강 연안과 같은 제국 전역의 지역 급진주의자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나 볼셰비키 책자 및 결의문은 3월 동안 주변부 볼셰비키 활동가들이 볼셰비즘의 임시 혁명정부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거나 방어주의에 대한 반대를 폐기하려는 경향을 보였음을 입증한다.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에카테리노슬라프에서 볼셰비키 조직은 새로운 정부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노동자) 계급 조직의 힘을 통해 부르주아가 혁명적 성향을 띠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탈린에서 3월 중하순에 에스토니아 볼셰비키는 평화의 가능성이 완전히 검토되기 전까지는 방어전을 계속 지지하여야 한다고 선언하는 결의문에 동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전술적 유연성을 넘어 볼셰비키 진영의 실질적 정치적 약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에서와는 달리 이러한 동요가 구 볼셰비즘의 불명확성에 유의미하게 근거하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입장은 구 볼셰비즘의 전제로서 언급되거나 볼셰비즘의 전제를 이용해 정당화되지 않았다.

 

이는 볼셰비키의 전략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변부의 볼셰비키가 혁명적 이론에 대해, 특히 볼셰비즘에 대해 강한 헌신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점을 통해 바로 이 볼셰비키 위원회 조직들이 쉽게 4월에 입장을 전환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채택한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레닌이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열렬히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경지역 볼셰비키 조직 및 지도자들은 1918년 동안 계속해서 민족 자결을 위한 운동을 배척하며 그들이 오래동안 헌신했던 비타협적 국제주의를 유지하였다.

 

동시에, 초반에 볼셰비키의 입장을 비교적 완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지역 볼셰비키 당원 다수가 3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멘셰비키와의 입장 차를 더욱 분명히 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초기에 볼셰비키가 부르주아를 압박하기 위한 계급투쟁에 한정된 입장을 보였던 지역에서도, 다양한 의견 불일치에 의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차이가 계속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유주의자들과의 동맹에 충실할 필요성 때문에 대부분의 멘셰비키는 체제를 압박하기 위한 대중투쟁에 지속적으로 의존하지 못했지만, 볼셰비키는 그런 정치적 모순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점점 더 많은 도시에서 볼셰비키가 노동자의 무장 및 민주공화국 수립, 8시간 노동, 토지 몰수 및 전쟁 반대를 위한 대중 투쟁을 확고하게 지지함에 따라 진영 사이의 갈등이 나타났다.

 

예컨대, 사라토프에 대한 도널드 롤니(Donald Raleigh)의 연구는 “3월 말에 이르러서는, 최소강령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볼셰비키의 적극성을 반영하는 전술적 차이가 다른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볼셰비키를 고립시켰음을 지적한다. 조지아에서도 지역 볼셰비키는 부르주아를 본질적으로 반혁명적계급으로 규정하며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지지하는 멘셰비키와 대립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3월 동안 대체적인 흐름은 중도적 사회주의 진영 및 임시 정부와의 갈등이 커지는 방향이었으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외의 지역에서 볼셰비키 세력은 중대한 타협적 경향을 보였다. 4월에 이루어진 논의와 논쟁은 중심부에 비해 러시아 주변부의 볼셰비키에게 더 큰 방향의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424일부터 29일까지 열렸던 러시아 볼셰비키 총회와 총회 이전 당 내부에서 있었던 레닌의 “4월 테제에 대한 논의는 러시아 전역에 걸쳐 정당의 정치적 결집력과 비타협적 태도를 굳건히 하였다. 4월 이후 임시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전개되었으며 지역의 볼셰비키 급진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일관되게 소비에트 체제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타협적 사회주의자들과 볼셰비키를 차별화할 필요성 역시 더욱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레닌 개인 및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이 이런 변화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 정확히 분별하기는 어렵다. 3월에 걸쳐 임시정부는 변화에 대한 대중적 요구에 노골적으로 반하는 중요 조치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4월에는 임시정부가 승전에 이르기까지제국주의적 전쟁을 계속하려 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대중으로부터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널리 채택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4월 집회에서 참가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소비에트 지도부가 초반에 취했던 실질적 목표는 임시정부에 대한 압력이었지만, 4월 초순 이후 소비에트는 점점 부르주아 체제를 지지하고 대중의 급진성을 약화시키는 데에 집중하였다.

 

임시정부에 대한 유례없는 노동자 계급의 반발과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의 우경화 가운데, 러시아 전역에 걸쳐 많은 볼셰비키가 더욱 급진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취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4월 이후 볼셰비즘이 사회주의를 위한 단계”, 볼셰비키 주도 하의 혁명 정부 수립,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로서의 소비에트 및 노동자의 영구적 지배와 같은 레닌의 구체적 입장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0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18년까지도 볼셰비키와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점차적 급진화는 1917년 동안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가 부르주아와의 결별을 완강하게 거부했으며 선출된 제헌의회에는 중도파가 다수를 이루었고 10월 이후 자본가들이 방해공작을 펼친 것과 같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의 중대 사건에 대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대응에 의해 주로 결정되었다. 레닌의 개입은 중요했으나 지속적으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결론

 

이 글에서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볼셰비키는 19173월에 계급적 독자성과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주도권 확립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취했음을 살펴보았다. 볼셰비키 최고 지도부는 제정 전복으로 민주 혁명이 완결된 것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반혁명은 붕괴하지 않았으며 평화, 토지 분배, 8시간 노동 및 제헌 의회를 통한 공화국 수립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가 그러한 급진적 사회 변화에 저항할 것은 필연적이었으므로, 노동자와 농민의 전체 정치권력 장악이 필요하였다. 권력 장악을 통해서 러시아 혁명은 서유럽의 사회주의 봉기를 유도하고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할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분명히 급진적이었지만, 페트로그라드 및 특히 러시아 주변부에서 볼셰비키의 실천은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았다. 대체로 이러한 현상은 3월의 밀월국면에 대한 현실적 적응이었고, “구 볼셰비즘적 국가 목표가 가진 추상적이고 변화 가능한 형태 역시 일부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동요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3월에 일어난 현상은 대체로 구 볼셰비즘의 전략이 1917년에 걸친 급진적 성격의 배경으로서 작용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1917년 내내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와의 결별과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에 헌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합의 하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정당 지도자들은 중도적 사회주의자들이 정부 수립이라는 목표에 동의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전개하였다. 비록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되기는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서 수립된 체제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 자본주의 이후로 나아갈 수 있는지의 문제는 10월에 걸쳐서도 이에 비해 매우 부차적인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볼셰비키의 정치적 상황 전반, 그리고 특히 3월 동안 볼셰비키가 직면했던 상황에 대한 이해를 요한다. 초기 볼셰비즘의 한계나 1917년에 일어났던 볼셰비키의 정치적 관점 전환은 종종 과장되었으며 주로 레닌의 개인적 영향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볼셰비키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 요소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결론적으로, 볼셰비키의 전략에서 있었던 대립과 모호성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으며 전쟁에 시달렸고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도하는 혁명을 일으키는 행위가 가진 사회적 및 정치적 모순을 반영하였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상황의 전개는 구 볼셰비즘이 강조했던 노동자와 농민 동맹의 필요성과 러시아 내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회의를 대체로 뒷받침하였다. 동시에, 1917년 볼셰비키의 경험은 노동자와 농민이 오로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지도 하에서만 수권할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수립된 체제는 자본주의적 재산 관계의 기반을 공격해야 한다는 트로츠키 및 후기 레닌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런 모순을 발전적으로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에 의한 지배를 국외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세계 혁명이 임박하였고 필요하다는 점에서 구 볼셰비즘과 트로츠키의 시각은 완전히 일치하였다. 1917년 모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이 고립된다면 혁명은 패배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예견할 수 없었던 형태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전망은 결국 1917년부터 1923년까지의 국제적 혁명의 흐름이 패배하고 소비에트 체제와 볼셰비키가 스탈린주의적으로 후퇴함으로써 비극적으로 실현되었다. 새 세대의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한다면, 이 기본적인 지점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18.1.1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http://anotherworld.kr/164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