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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안 되는 까닭/ ‘악의 평범성’에 대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 24.

윤미래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안 되는 까닭

 

C.S. 루이스는 영혼이 우리가 가진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는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미덕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방에 위험과 공포로 에워싸여 살아온 약자가 사방에 자신을 관철하는 것이 익숙했던 사람만큼 용기있을 수 없고, 폭력이 유일한 자기보호의 방법인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이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호의적이리라고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는 사람만큼 온유할 수 없는 것이다. “고양이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에 빠진 고양이를 구하는 것이 제가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을 만한 전공을 세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성실함도 다정함도 겸손함도 개방성도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 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처한 내적인 조건과 상황에 불과하다.

 

루이스에 따르면 영혼은 그 모든 외적 내적 조건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선택을 내리는 아주 작은 부분이다.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은 우리의 영혼에 흔적을 남긴다. 나쁜 선택을 내리는 영혼은 훼손되어 타락으로 접어들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영혼은 점점 고결해진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신체적 항상성을 유지하려 애쓰듯이 정신적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애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지극히 정확한 통찰이다.

 

고난을 무릅쓰고 소중한 것을 포기해가면서 최선을 다해 올바름을 지키려 한 경험은, 그것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는 긍지가 된다. ‘나는 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자신을 지탱하는 정체성이 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한 것들의 값이 되었을 때 당신은 다음번에 그것을 저버리기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선을 행하는 일은 그래서 반복할수록 쉬워진다.

 

반대로 시작은 한 번의 안이함이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서 속죄를 거부하고 자기합리화를 시작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려는 의지가 자기 스스로 생기게 된다. 자기가 비난받고 부정당하는 기분에, 비슷한 상황에서 가해자에 먼저 이입하고 가해를 변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느끼게 된다. 그러느라 신망을 잃고 비웃음을 사는 일이 반복되면 그것들이 다 그 잘못된 신념을 지키느라 지불한 비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길을 돌이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작은 일 하나라도 양심을 지키고 잘못했으면 최대한 빨리 인정해야 한다. 사람의 행동은 경로의존적이기 때문에 악마와의 거래는 한 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의 이득이 아무리 커 보여도.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가 그걸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질 테니까.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해도 그럴 만한 가치는 없다. 그리고 운동, 조직, 사회의 경우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에 대해

 

악의 평범성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20세기 최악의 윤리적 반동이다. 인간은 원래 주어진 것에 순응하고, 권위 앞에서 약해지고, 고민해봐야 괴로울 뿐인 일은 아예 잊어버리고 싶어한다. 그것은 악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인 이상 당연히 가지고 있는, 자신의 평안을 바라는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마음의 발로이다. 그런 인간적인 안이함이 학살에 공모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질서가 악한 탓이다.

 

폭력, 기만, 살인, 음모를 동원해 그 질서를 사수하는 지배자들이 아니라 목숨바쳐 저항할 용기가 없어 그 질서를 울며 겨자먹기로 수긍하고 살아가는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홀로코스트를 민중의 자기성찰의 부재에 귀인한 결과가 무엇인가? 누가 그 질서의 편이고 누가 그 질서에 저항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지워버리고 검열과 탄압으로 사상을 획일화하고 비판자를 탄압한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을 통째로 동일시하는, 그야말로 세기적인 양비론이다. 사회가 어떤 목적을 갖는가, 구성원들은 그 목적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그 목적은 얼마나 성공적으로 달성되고 있는가 하는 평범한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사를 가르는 문제들은 여기서 완전히 부차화된다.

 

성찰과 비판은 현실을 왜곡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조차 세뇌하고 포섭하는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한 사활적인 도구다. 그리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성찰은 학살과 파괴를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인간과 인간이 경쟁자이자 적으로 대면하게 만드는 조건들을 폐절하지 못한다. 사실 이런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자기성찰을 할 여유와 능력이 있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기득권이다. 나는 성찰을 핵심으로 하는 인생관은 이 기득권을 가진 전통적 지식인들의 자기도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 가진 자의 자기미화야말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의 정의라 생각한다. 그 자체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 그 자체로 인간 존엄을 부정하는 것, 그 자체로 혐오하고 지탄하고 배격해 마땅한 마음으로는 그것이 유일하다.

 

자기 기득권을 붙들고 미화함으로써 악의 질서를 재생산하고 견고히 하는 고결한 지식인보다는 악의 평범성에 면역이 없는 성실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차라리 선량하다. 그리고 세상에 판치는 악을 멸하는 것은, 물론 그러기 위해서 성찰과 비판으로 무장해야 하겠지만, 결국은 평범한 선량함일 것이다

 

 

(기사 등록 2018.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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