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러시아 혁명 100년: 비판적 돌아보기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발표됐던 글이다. 이 글의 앞부분은 볼셰비키가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개의 기존 좌파들의 관점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어서 혁명의 변질이 스탈린주의에 책임이 있고, 레닌의 주도로 내전 시기에 채택한 정책들은 불가피했다며 정당화하는 관점들을 넘어서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 글의 필자인 사무엘 파버(Samuel Farber)는 쿠바에서 나고 자랐으며, 쿠바를 다룬 여러 저서들과 논문의 저자이다. 사회주의 정치에 50년 넘게 관여했고, 가장 최근 저서는 헤이마켓 북스에서 2016년에 출판된 <체 게바라의 정치학: 이론과 실천>이다.
이 글의 번역에 수고해 준 정강산 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출처:

http://newsocialist.org/one-hundred-years-of-the-russian-revolution-a-retrospective-view/

 


 


1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진정 세계를 뒤흔들었던 러시아 혁명은 그 해방적 의의와 몰락, 배반의 측면에서 다시금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당이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멸적인 제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악화된, 러시아 사회에 영향을 준 중대한 위기가 언젠가 큰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이 볼셰비키 당의 조직화 기술과 정치, 전략, 그리고 전술에 탁월했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없이 이뤄졌을지는 의문이다.

 

볼셰비키 쿠데타로서의 혁명이라는 묘사와는 반대로, 10월 혁명은 소농들과 연합한 러시아의 산업 노동계급에 의해 일어난 대중적인 봉기로서 권력을 잡았다. 볼셰비키 당에 의해 제안된 간결한 기획은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의 심장부에 매우 깊게 반향 되었던 두 가지 방침을 주장했다.

 

첫 번째로, 제국주의 전쟁이자, 반동적인 차르 제정과 비탄에 잠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피를 쏟아내게 했던 전쟁인 제 1차 세계대전의 동맹에서 러시아의 참여를 조속히 끝내는 것. 두 번째로, 토지를 국유화하고, 작물을 재배하거나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할 수 없었던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급진적인 토지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다(이는 소농들에 의해 지지받은 비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혁명당(SR)의 기획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약속은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의지와 무관한 몇몇 이유들로 인해 이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즉 독일이 혁명적 격변에서 이점을 취하여 어떤 평화조약도 거부하며, 최종적으로 1918년 초 봄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소련의 요구로 동맹국들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된 벨라루스의 지역이름: 역주)조약으로 러시아에 엄청난 영토적 비용을 전가하는 것으로 귀결될 때까지 자신들의 군사적 이익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혁명 정부는 러시아 내외의 사람들에게 모든 제국주의적 조약들과 합병론자들의 주장을 공개해버리고, 차르가 전쟁 승리 후 얻게 될 영토적 전리품을 동맹국들과 분배하기로 한 비밀협약들을 폭로하면서, 투명하고 개방된 방식으로 평화적인 절차를 수행했다.

 

토지개혁의 경우, 새로운 정부는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전적으로 자발적인 소규모의 공동실험을 넘어 막대한 규모의 집단 농업은 객관적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농업중심의 자본주의가 러시아의 시골 지역을 대표하는 상황의 위협도 인식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정부는 그들이 농민들에게 준 토지 할당에 따른 자유로운 토지 사용권에서 토지를 사고 팔 권리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토지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았다.

 

권력을 잡자마자, 혁명은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책들을 시행했는데, 이는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력 확장과 통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보수주의자들과, 차르 제정을 전복한 2월 초의 혁명 이후 잠시 러시아를 통치했던 무능한 임시정부에 도전한 이중권력의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민주적 기치는 대부분 풀뿌리 민주주의 기관으로서의 소비에트(평의회)의 빠른 확산에서 나타났다. 이 단체들은 1905년 혁명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당시 파업 운동 중에 다양한 공장에서 대표들이 선출되었고, 이는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설립으로 이어지며 이내 그 도시에서 모든 노동자들과 혁명적 운동을 대표하는 일반적인 정치적 기관이 된다.

 

1917년의 2월 혁명 후 소비에트는 후에 최고 소비에트 주요부의 대표를 뽑는 선출된 대표들(그들의 선거구민들에 의해 즉시 소환되도록 되어있는)과 함께 다시 부상한다. 1917년 초의 소비에트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다른 대도시들과 산업 단지로 확산된다. 나중에 그들은 대규모의 주둔군을 수용하는 곳과 규모가 더 작고 더 먼 지역으로, 무산계급이 없는 지역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

 

많은 좌파 정당들과 정치경향들은 이들 소비에트에서 매우 활동적이고 실로 지배적으로 되는데, 여기엔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그리고 여러 작은 사회주의적 단체들이 포함된다. 볼셰비키를 그 대의 기관들에서 다수파로 만들고 10월 혁명이 일어난 해에 정치적 기초와 민주적 정통성을 설립한 것은, 19178월에 미수로 그친 우파 코르닐로프(Kornilov) 쿠데타의 실패 후에 일어난 소비에트의 급진화였다.

 

러시아 혁명의 중대하고 급진적인 특성은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의 범위를 넘어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여성 해방의 이상은 혁명 정부가 특히 이혼과 낙태에 관한 권리를 승인하면서 매우 진전되었다. 혁명이 추진되고 그 자체로 강화되면서, 인종적, 국가적 소수인 게이나 장애인과 같이 다른 피억압 집단들의 이상 또한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게 된다.

 

교육은 대중적 접근성 측면에서, 즉 오직 소수 집단에게만 개방되어있었던 차르시기의 교육체계를 관장했던 과거의 반 과학적인 교육철학과 방법론을 일소하는 측면에서의 급진적 진보와 함께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상충되는 스타일과 사상의 학파들이 열정적이고 심지어 격렬하게 서로 경합하면서 예술은 혁신, 창조성 그리고 논란 속에 한층 풍부해졌다.

 

전 세계에 걸친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기치는 중국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는 여러 국가들에서의 운동과 정치적 격변을 추동했다.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즉 볼셰비키가 나타났던 유럽의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요람은 위기에 빠졌고, 낡은 사회민주주의를 생디칼리즘과 아나키즘과 같이 다른 정치적 전통에서 나타난 이들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국제적 정치운동이 그 좌파 측에서 나타났으며, 이전에 조직되었던 정치적 경험이 없이 새롭게 정치화된 이들과 함께, 1919년엔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스탈린주의적 반혁명

 

그러나 20년대 후반에 스탈린주의 권력이 부상한 결과로서, 앞서 언급한 10월 혁명의 모든 성취는 고사상태에 빠진다. 소비에트의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통제는 오래도록 사라지고, 무자비한 비밀경찰과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의 굴락 시스템에 의해 지원되었던 일당 독재 국가가 설립되었다.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에 농민 계급은 유혈 낭자한 과정을 통해 국가의 집단 농장으로 강제 편입되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기근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산업 노동계급은 강제 부불노동에 복속되었고, 더 나아가 단지 정부의 컨베이어 벨트가 되었던 관제 노조와 병행된 (일종의 장려금 체계인)스타하노프주의(Stakhanovism: 소련의 광부였던 노동영웅 스타하노프로 상징되는 노동생산성 향상 운동을 일컫는다 - 역주)에 관한 정부 정책에 의해 착취되었다.

 

예술적 자유는 사라지고, 관변의 범속한 스탈린주의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미학이 지배적으로 된다. 스탈린주의는 또한 외국 공산당들의 정책과 실천을 러시아의 국가 이익에 종속시켰던 러시아 애국 정책을 강요하면서, 1919년의 제 3인터네셔널이 내걸었던 원칙적 국제주의를 포기했다. 그 체제는 러시아가 동쪽을, 독일이 서쪽을 점유하며 폴란드의 분할로 이어진 1939년의 히틀러-스탈린 조약을 포함하여, 냉소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취했다.

 

10월 혁명의 성취들을 뒤집으면서, 스탈린 체제는 젠더와 가족 문제에 관해서도 매우 보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사형을 포함하여 무자비한 처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대인 박사들과 글쟁이들에 대해 씌워진 명백히 허위적인 죄목들에 이르는 공식적인 반유대주의가 스탈린 통치의 마지막 시기 동안 그 추악한 머리를 다시 드러냈다. 스탈린 체제에 의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처형과 의도적으로 유발된 기근, 강제노동수용소, 볼가 독일인들(Volga Germans)과 같은 인종적 집단에 대한 대량학살정책을 통해 투옥되고, 죽임 당했다.

 

어째서 러시아 혁명은 퇴보했는가?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주의의 악몽으로 변질된 이유에 대해 많은 설명들이 제출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니콜라스 베르데야에브(Nicholas Berdyaev), 베르나르드 파레스(Bernard Pares), 존 메이너드 경(Sir John Maynard)과 같은 초기 평론가들의 문화 결정론에 따르면, 혁명 후 러시아의 퇴보에 있어 상당 부분은 필경 항상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슬라브 족의 특성과 역사적 제도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 엄청난 정치적 영향의 측면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정통파, 즉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아담 울람(Adam Ulam), 레오나르드 샤피로(Leonard Shapiro)와 같은 사람들의 작업으로 대표되는 소위 전체주의 학파였다.[소련사 연구에 있어 그 정치사적 측면에 방점을 뒀던 학파로서, 부분적으로는 10월 혁명 자체의 필연성 혹은 네프시기의 소련을 긍정적으로 주목하는 레오폴드 헤임슨(Leopold Haimson), 라비노비치(F. Rabinowitch) 등의 1세대 수정주의 학파와 후에 보다 소련의 사회사적 측면을 강조한 쉴라 피츠패트릭으로 대표되는 2세대 수정주의학파에 의해, 결정적으론 냉전해체 이후 점차 학계에서 영향력을 잃게 된다 - 역주]

 

이들의 설명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헤게모니적인 위치에 있었고, 냉전 중엔 미국과 그 서구 동맹국들의 정치노선과 긴밀히 연결되게 된다. 역사학자 스테판 F. 코헨(Stephen F. Cohen)은 그들에 대한 수정주의적 비평가로서, 러시아 혁명 초기와 소비에트 국가에 관련된 한, 전체주의 학파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1710월에, 작고, 유권자들을 대표하고 있지 않았으며, 이미 혹은 애초에 전체주의적 당이었던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는 권력을 강탈했고, 따라서 러시아 혁명을 배반했다. 그 순간부터, 1917년부터 소비에트의 역사는 그 원조 지도자였던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공산당의 전체주의적 정치 역학 - 일당독재 정치, 무자비한 전략, 이데올로기적 정통성, 프로그램에 입각한 교조주의, 규율적인 리더십, 그리고 집중화된 관료 조직 - 에 의해 결정되었다.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를 빠르게 독점하고, 기본적인 전체주의적 당-국가를 만들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규율, 조직, 무자비함을 통해 1918년에서 1921년 사이의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했다.”

 

거기서부터, 정통파 해석자들은 심증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스탈린주의적 결말을 그 전체주의의 기원에 들어맞는 논리적인 결론과 연관 짓는다. 비록 스탈린주의자들이 서구권의 냉전 옹호론자들만큼이나 볼셰비키와 스탈린주의 당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미신에 사로잡혀있긴 하지만,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 윌리엄 로젠버그(William Rosenberg), 스테판 F. 코헨과 등 많은 역사학자들은 1918~1920년 사이의 내전과 함께 시작된 지속적인 관료주의적 변질의 과정 이전에, 볼셰비키의 혁명당이 다원적이고 민주적이었음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레프 카메네프(L. Kamenev)와 그레고리 지노비예프(G. Zinoviev)와 같은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10월 혁명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191710월 이후에 당의 중요한 리더로 남았고, 심지어 니콜라이 부하린(N. Bukharin)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평화조약에 대한 레닌의 생각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치노선을 공개적으로 선동했으나, 그는 그 후로도 당의 지도자로서 다년간 남아있었다.

 

레닌은 볼셰비키의 지도자들 속에서 동급 중에서도 1인자로 간주되었으나, 실제로 그가 끝내 설득하기 전에는, 독일과 평화를 도모하는 방법에 관련된 초기 결정들을 포함하여, 여러 논쟁적인 당의 결정들에서 지는 편이었다. 한편 평화에 관한 쟁점과 관련하여 당 내부의 논쟁들은 공적으로 표명되었고, 경합하는 볼셰비키 당파들의 보도 기관들에 의해 토론되었다.

 

정통학파에 의해 전체주의적 특징으로 돌려진 것과는 달리, 볼셰비키 당은 전쟁과 다른 문제들, 심지어 권력 찬탈을 포함한 문제들에 관한 정치적 입장의 다원성에 의해 특징지어질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행동의 통일을 추구하는 걸 방해하지는 않을 정도의 계속적인 분파 다툼 경향에 의해서도 특징지어진다.

 

레닌주의의 집권(Leninism in Power)과 스탈린주의 사이의 연결

 

내전(1918~1920 사이의)으로부터 출현한 레닌주의의 집권이 일당 독재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것은 20년대 후반부터 발달되기 시작한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 시스템과는 여전히 질적으로 달랐다. 스탈린의 시스템은 그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삶뿐만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처럼 다양한 분야의 방향과 관리까지도 포함하여 전체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손에 넣었다. 이 체계에 대한 모든 비판과 반대는 오래 지속된 공포 정치와 강제노동의 대대적인 운용 속에서 억눌러졌고, 그 끔찍한 특징은 스탈린이 죽은 1953년 이후에야 없어졌다.

 

그러나, “레닌주의의 집권이 스탈린주의와는 달랐다고 단언하는 것은 전자 하에서 일어난 것이 후자의 발달과 아무런 상관없다거나, 레닌 하에서 결정한 선택들은 스탈린주의의 발달을 촉진하는 데에서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이 문제는 빈번히 인용되는 논문인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실패했는가에서의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을 포함하여, 많은 사회주의 저자들에게 주로 건너뛰어진다.

 

하먼에게 그 [혁명의]죽음은 노동계급이 내전 중 학살당했을 때, 이미 드리워져 있었다. 소비에트의 기관들은 그들을 만들어낸 계급과 독립적으로 생명을 지켜나갔다. 내전 속에 싸운 그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공장 내 자신들의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었다. 교전 지대 전체에 걸쳐 퍼진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은 최소한 일시적이라도, 그들의 통치와 무관한 중앙집권화 된 정부의 장치에 의해 조직되고 조정되어야만 했다.

 

하먼은 볼셰비키가 대안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권력을 포기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 권력을 방어하느라 싸우는 와중에, 그들이 대표하는 계급이 스스로를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계급 자체가 자신의 이익을 결정할 수 있도록 집단적으로 조직 된 기관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권력의 기초를 훼손시킬 사상의 선전을 용인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먼에게 있어, 혁명의 지도자들에 의한 많은 결정들은 사실상 역사적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는 레닌과 그 서클이 내린 가장 결정적인 선택을 무시한다. 즉 내전으로부터 출현한 - 교전 지역 전체에 걸쳐 흩어진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력을 행사하는데 대한 무능력에 대처하려는 일시적인 특징으로서 하먼에 의해 정당화되는 - 비민주적인 일당 통치의 제도적 배열을 사회주의와 거의 같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필요를 미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먼의 논문은 일부 중요하고 귀중한 지점이 있지만, 레닌 자신의 기록과, 그것이 스탈린주의의 등장을 촉진 했는지의 여부와 방법에 대해서는 비판적 검토를 삼간다.

 

사실, “레닌주의의 집권에 의한 선택들은 권력을 포기하지 않거나 야당을 용인하는 것에 대한 문제에 제한되지 않고, 심지어 볼셰비키의 단체들과 개인들이 레닌의 볼셰비키 주류와 구별되는 등 다른 중대한 문제들의 범위 전체에 걸친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내전 이전 및 내전 과정에서의 억압과 테러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혁명 정부와 볼셰비키 진영 내부에서 계속되는 비판과 토론의 원천이었다.

 

그들 비판은 주로 반혁명과 싸우기 위해 1917년 끝자락에 만들어진 비밀경찰 - 체카(the Cheka) - 의 정책과 업무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종종 악용되고 타락하였으며(체카의 수장이었던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엄정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정부의 정책을 위반했다.[각주:1]

 

나의 저서 <스탈린주의 이전: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흥망>(Before Stalinism: The Rise and Fall of Soviet Democracy)에서 설명했듯이러한 비판은 서구에 널리 알려지게 된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와 같은 혁명가들뿐만 아니라, 프라우다(Pravda)의 편집부원이자 레닌과 크룹스카야의 허물없는 친구였고, 프라우다에 여러 차례 비평문들을 게재했던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Mikhail Stepanovich Olminsky: 1863~1933)와 같은 고참 볼셰비키(Old Bolsheviks: 1917년의 혁명 이전부터 볼셰비키의 당파 속에서 활동한 당원들을 가리키는 비공식적인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 혁명 1917-1938>, 고광열 역, 사계절, 2017, p.14 2번 각주를 참조하라 - 역주) 역시 포괄한다.

 

사실 1918년 말 프라우다는 니콜라이 부하린의 편집 하에 체카의 지지자들 보다는 반대자들의 논설을 더 많이 발행하고 있었다. 체카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공개적인 비판은 레닌의 통치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레닌이 체카가 벌인 최악의 어리석은 짓들과 난폭한 일들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종종 개별적인 사안들에서 그러한 몇몇 난폭한 일들을 멈추려고 상당히 긴 시간을 보냈다.(막심 고리키는 종종 성공적으로, 이런저런 구속 혹은 처형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레닌에게 연락하곤 했던 인물 중 하나다.)

 

허나 정치적, 제도적 관점에서 체카의 제한되지 않은 권력을 크게 통제하거나 바꾸는 데에 레닌은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소비에트 생활의 다른 영역들에서처럼, 레닌은 지도부 인사의 교체를 정치적, 구조적인 체카의 관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적색 테러와 집단 처벌

 

한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서 레닌은 체카의 최악의 월권행위를 편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들을 고무했다. 집단 처형, 즉 단지 실제로 반혁명적 범죄를 저지른 특정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가족, 사회계급, 그들이 속한 인종 집단에게도 공식적으로 허가된 처벌의 시행이 있었던 것이다.

 

레닌의 접근은 1918년 여름 페트로그라드에서, 그와 볼셰비키 지도부와의 마찰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는데, 이때 후자[볼셰비키 지도부]는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암살에 대항하여 레닌 자신에 의해 적색 테러라고 명명되고 밀어붙여진 집단적 정책과 임의적인 처벌을 거부했다.

 

2007년의 저서 <볼셰비키의 집권: 페트로그라드에서의 소비에트 지배 첫해>(The Bolsheviks in Power: The First Year of Soviet Rule in Petrograd)에서 역사학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에 의해 설명되었듯, 페트로그라드의 체카는 내전 중 모스크바에서 우세했던 정책과는 반대로, 테러를 통해 질서를 복원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진 정책의 중요성을 줄이고, 대신 사리에 맞지 않는 폭력과 경제적 범죄, 권력 남용 등을 겨냥한 구체적인 기준들에 집중했다.

 

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수색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가짜 체카단원과 부패한 체카 단원을 잡기 위한 지침을 만들었다. 시민들에겐 처벌의 위협 없이 승인되지 않은 무기들과 폭탄, 수류탄, 폭발물을 반환할 수 있는 이틀 정도의 기간이 주어졌다. 감옥에 남아 절차를 기다리고 있는 정계 인사들 때문에 재판 진행에 박차가 가해졌으며, 이 결정은 페트로그라드의 감옥 수감 인구를 줄일 필요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방식 사이의 대립은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 지도자였던 V. 볼로다르스키(V. Volodarskii)1918620일 암살되었을 때 정점에 달했다. 몇몇 지역의 볼셰비키들과 노동자 대표들은 볼로다르스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즉각적인 탄압을 요구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는 엄청나게 과열된 분위기에서 토론을 위한 긴급회의를 열었고, 비절차적 재판(lynch justice)은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결정에 격노한 레닌은 지노비예프와 라셰비치(Lashevich), 그리고 기관의 다른 최고 지도자들에게 즉시 강력한 비난을 전달했다. “우리는 오늘에야 피터에서 노동자들이 볼로다르스키의 죽음에 집단 테러로 대응하길 원했다는 걸 들었고, 당신들이 그들을 저지했다는 걸 알았다. 이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의 비공식적인 적색 테러가 모스크바와 다른 러시아 도시들에서 몇 달간 계속되었으나,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의 지도자 우리츠키(Uritskii)가 암살되고, 8월말 모스크바에서 레닌 자신에 대한 암살이 기도된 이후에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당의 지도부는 대량의 즉결 처형을 포함하는 엄청난 규모의 적색 테러를 명령했다.

 

그러나 9월 중순, 볼셰비키가 이끈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평의회는 적색 테러의 무차별적인 성격에 경각심을 갖게 되어, 페트로그라드의 당 지도자들에게 엄격한 통제와 총살, 체포, 노동조합 사무실 수색과 노조 임원들에 대한 구속에 대한 안전장치를 전반적으로 설치할 것을 호소했다고 라비노비치는 설명한다.

 

심지어 전에 적색 테러에 자유로운 영향력을 주는 것을 옹호했던 지노비예프 역시 볼셰비키와 그 동조자들, 그리고 정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인들에 의한 무분별한 체포와 총살을 우려했다.

 

그는 또한 필시 전문가들, 극장과 음악계에서 중요한 인물들, 소비에트와 발틱 함대의 기술자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퍼진 유행성 질병에 대처하려했던 의사 등 그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체카의 감옥에 수감된 재소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할 때 그가 직면한 문제들에 의해 분개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지도부가 우려했던 비절차적 재판이 마침내 실현되었고, 아무도 안전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했다.

 

비록 극단적이지만, 이것들은 내전 중에 채택된 조치들이었고, 따라서 테러리즘적 반대자들과 백군에 의해 자행된 보다 엄청난 잔학한 행위와 싸워야 할 필요성을 고려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개진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 중 하나는 10월 혁명에 뒤이어, 그리고 내전의 시작 이전에 집단 처벌이 정부 조직 내에서 논쟁적인 쟁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혁명당 좌파 지도자이자 혁명 초기에 사회혁명당 좌파-볼셰비키 연합 과정에서 사법 정치위원이었던 아이작 스타인버그(I.N. Steinberg)1917년 말에서부터 1918년 초까지의 장관 직무 중 이러한 정부 정책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반혁명적 의견과 행동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후자는 처벌할 수 있지만 전자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독일 귀족들’(German Barons) 간의 반혁명적 모의가 드러나자 그것에 연루된 죄인들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 17세 미만의 남자와 20세 미만의 여자를 제외한 모든 귀족들을 불법화시키려 한 에스토니아 수도 소비에트 의장의 결정에 분명히 반대했다. 밝혀진 대로, 소비에트의 지도부가 전쟁의 종결을 협상하고 있던 독일 정부를 배제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다.

 

탐보프(Tambov) 지역에서의 소위 녹색농민 봉기와 연루된 농민들의 가족에 대한 처벌을 결정한 19216월 법령에서처럼, 집단 처벌과 동일한 정책이 다른 무장 대립들에 적용되었는데, 이는 반혁명적 내전에서의 백색분자들에 의한 초기 무장 충돌과는 상당히 달랐던 충돌이었다. 

 

1990년의 저서에서 탐구했듯, 그 비슷한 시기에, 소비에트와 당내 민주주의, 노동자들에 의한 통제, 언론의 자유, 사회주의적 합법성에 관한 엄청난 위반을 포함하여 그 밖의 우려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한다. 적색 테러의 경우에서처럼, 이들 사안들과 정부에 의해 심화된 정치적 정당화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승인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의 기준에 심각한 효과를 초래했다.

 

이는 스탈린주의의 전체주의적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조직적 능력을 손상시키는데 일조했다. 그 국가를 지배한 제도들과 정치적 문화는 스탈린주의 체계의 설립에 저항할 수단에 관한 노동계급과 농민의 유산을 포함하여, 소비에트 시민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테러에 관한 레닌의 정치학

 

레닌이 당대의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유별나게, 혁명적 이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고집했던 것은 역설적이다. 심지어 많이, 부당하게 비판받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도, 그는 차리즘에 맞선 정치적 투쟁을 경시했던 경제주의자들의 무관심과 적개심과는 대조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심성을 역설했다. 1915년 후반 칼 라데크(당시 라데크의 필명은 불평분자’Parabellum였다.)에 대한 반론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중심적 역할에 대해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적 투쟁을 모든 민주적 요구들에 관한 혁명적 기획, 전략과 결합해야만 한다. 즉 공화국, 시민군, 임원들에 대한 보통선거, 여성의 동등한 권리, 국가의 자결권, 등등에 말이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요구들 - 그들 모두 - 은 비록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에서조차도 유일하게 이례적인 일로 성취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이미 성취된 민주주의에 기반을 두면서, 그리고 자본주의하에서 그것의 불완전함을 폭로하면서, 우리는 대중의 빈곤 철폐와 모든 민주적 개혁들에 관한 완전하고 종합적인 제도를 위한 필수적인 기초로서 자본주의의 전복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몰수를 요구한다. 그들이 가장 일관되고 단호히 혁명적인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교육받음으로써 준비되지 않는다면, 역사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물리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은 실로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레닌의 정치학엔 내전 과정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장 변동을 설명하는데 일조할지도 모를 어떤 측면이 있었다. “-자코뱅주의(quasi-Jacobinism)”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프랑스 자코뱅의 공포정치에 대한 레닌의 긍정적인 관점, 혁명적 헌신과 당의 정신이 이룩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그의 강조에서 드러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각주:2]그리고 초기 트로츠키[각주:3] 등 자코뱅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모든 이들과 달리, 레닌은 자신의 팜플렛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사회민주주의 혁명가들을 이제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인식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조직과 확고하게 연결된 자코뱅이라 설명했다. 이는 혁명에 대해 헌신하는 당과 같은 소수 집단의 의식성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그의 강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치적 지도부의 필수불가결함을 인식하면서도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소비에트와 같은 계급의 민주적 기관의 발전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접근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혁명적 민주주의 이론을 향하여

 

따라서, 러시아 혁명의 패배는 단지 외부의 적대적인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또한 혁명 내부에서도 연원한다. 1917년 이후 이러한 혁명의 쇠퇴가 보여주듯, 노동계급의 권력의 상실은 하룻밤 만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를 지닌 관료 계층의 출현과 공고화에 따른 악화 과정의 결과였다.

 

낡은 질서의 혁명적 전복 이후, 노동계급 민주주의의 부재는 노동 분할의 위계적인 측면을 강화하는데, 이는 혁명의 대열 내부의 관료적인 트로이 목마가 될 것이었다. 반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의 지도자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Christian Rakovsky)1928년에 썼듯,

 

어떤 계급이 권력을 손에 넣을 때, 그들 중 일부는 그 권력의 앞잡이가 된다. 즉 관료주의가 대두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이 지도적 당의 구성원들에 의해 금지될 때, 이러한 분화는 기능적인 것으로서 발생하나, 그것은 나중에 사회적인 것이 된다.

 

나는 여기서 마음대로 차와 멋진 아파트, 정기 휴일을 갖는, 그리고 당에 의해 승인된 최고 봉급을 받는 어떤 공산당원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즉 탄광에서 일하며 한 달에 50에서 60루블을 받는 공산당원의 지위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지위 말이다.

 

그러한 작동은 조직 자체를 변형시키는데, 즉 말하자면, 국가의 행정과 경제에서 다양한 업무에 대한 지시를 맡은 이들의 심리는 단지 객관적으로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단지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사실상 이러한 똑같은 노동계급의 일원이 되길 그만두는 지점까지 바뀌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에게,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경험에 비추어 혁명 이후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정치학의 이론 구축을 시도하는 노력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사 등록 2018.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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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즉 1920년 1월 17일, 볼셰비키 정부가 군사 행동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구역을 제외하고 사형을 폐지했을 때, 체카는 임원들에게 수감자들을 군사 행동구역으로 이송하여 그들이 처형될 수 있도록 할 것을 지시하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Lennard D. Gerson, The Secret Police in Lenin’s Russia(Temple University Press, 1976), 161. [본문으로]
  2.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코뱅주의를 소규모의 반란자들이라는 프랑스의 블랑키의 개념, 그리고 러시아의 네차예프의 허무주의적 테러리즘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간주했다. Peter Nettl, Rosa Luxemburg, Abridged Editio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195. [본문으로]
  3. Leon Trotsky, “Part IV: Jacobinism and Social Democracy,” in Our Political Tasks, www.marxists.org/archive/trosky/1904/tasks/ch.05.htm 트로츠키는 이 팜플렛에서 자코뱅이 “진정한 인간을 향한 완전한 불신”을 가진 유토피아주의자들이자 이상주의자들이며, “‘의심’은 진리에 복종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이었다”고 날카롭게 관측하는데, 이는 트로츠키가 사회 민주주의의 “혁명에 대한 신뢰”라고 본 것과는 명백히 대조되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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