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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한반도/ 마르크스 200주년/ 노동자연대/ 고흐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5. 14.

전지윤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는 어디로

 

남북정상회담의 여운과 기대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북한의 핵, 미사일 시험에 새벽잠을 설치는 일은 없을 거 같다. 비무장지대의 무기와 지뢰도 철거된다고 한다. 남북이 철도, 도로로 연결되면 서울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로 여행갈 수 있을지 모른다. 집권 6년간 22군데나 경제개발특구로 지정한 김정은의 시장화는 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앞날이 장밋빛일리 없다는 것도 맞다. 벌써 미국은 화학무기 문제 등 새로운 더 강한 조건들을 내밀며 북한의 백기투항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북한으로선 핵사찰 과정이 곧 폭격 지점 탐색 과정이던 이라크가 떠오를 수 있다.

 

이 고비를 넘겨도 문제는 많다. 국가통제에서 자유시장으로 나간 많은 나라들에서 노동권 억압, 부패, 투기, 빈부격차 등이 증가했었다. 반도체 공장은 이제 죽음의 직업병과 함께 남한에서 동남아를 거쳐 북한으로 옮겨갈지 모른다. 그 대신에 진짜 평화가 올지도 불확실하다.

 

남북회담 다음날 중국 전투기가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넘었고, 며칠후에는 미국의 F-22 8대가 한반도로 날아왔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후에도 주한미군과 유엔군사령부는 그대로라는 게 거듭 확인되고 있다. 심지어 이 지역에서 미국의 핵우산도 그대로일 거라는 말이 있다.

 

한반도 핵문제의 본질, 즉 미국의 핵과 미사일, 핵항모, 핵폭격기 등은 여전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 주도 군사훈련에는 더 많은 나라, 병력, 장비가 참가할 것이라 한다. 북미가 가까워지면 남북미 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미국의 태평양함대는 이제 동해에서 남중국해로 더 많이 갈 것이다. 당장 8월 을지훈련(UFG)에서 방향이 드러날 것이다. 중국도 대응할 것이고, 한반도는 갈수록 미중 간에 선택을 요구받으며 줄타기는 더 불안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도발로 중동은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고 아랍 민중은 더욱 고통받고 있다. 두발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멀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변화를 기뻐하는 이유는, 이마저 평화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노력 덕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분위기가 깨지길 바라는 것처럼 위장평화쇼라는 오른쪽도, 사람들이 속고 있다며 혀를 차는 왼쪽도, 이것이 몇몇 권력자 개인의 능력과 선택 때문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것은 박근혜를 구속시킨 힘이 박영수, 윤석렬에게서 나왔다고 보는 것처럼 맞지 않다.

 

물론 지금의 변화는 모순적이고 한계적이다. 사람들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다음 정상회담과 예술교류 때는 수어통역을 제공하라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같은 노래는 빼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미투운동을 만들어보자는, 평양에서 퀴어퍼레이드를 해보자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런 요구와 꿈에 함께해야지 싶다.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이 열린 비판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지나며 돌아보면, 마르크스주의에 끌렸던 이유는 인간이 천대받고 구속받고 버림받으며 경멸당하는 존재로 되어 있는 모든 관계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그 급진적 휴머니즘에 있었던 거 같다. 심장을 고동치게 했던 그 흥분은 사라지고 어느새 닫힌 체계와 정답처럼 그것을 되뇌고 암송하지 않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마르크스는 세계를 변혁하라고 했지만, 그 이유를 단지 사회경제적 구조와 법칙들에서 찾지 않았다. 억압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 그것에 대한 공감이 중요했다. 그것을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슴 속에 거역할 수 없는 필연으로 뚜렷이 새겨져 손에 잡힐 만큼 명백한 물질적 사실이라고 했다.

 

물론 그런 공감이 특정한 집단과 부분에 한정되지 않았나 하는 시대적, 인간적 한계는 있었겠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과 인간사회를 그 뿌리부터 파악하는데 큰 도움과 영감을 준다.

 

그건 단지 몇몇 뛰어난 개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혁명적 사상의 존재는 혁명적 계급의 존재를 보여 준다고 했다. 그래서 더는 마르크스라는 거인의 어깨를 딛고 세상을 보자는 말이 와 닿지 않는다. 젠더, 생태 등에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발전시킨 수많은 또 다른 거인들이 있고, 무엇보다 진짜 거인은 그런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맞서 싸워온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 속에서 함께 토론하고 배우면서 열린 자세로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해석하고 변혁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 점에서 최근에 존 벨라미 포스터가 마르크스 200주년을 맞아 한 말은 여러모로 동감간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르네상스는 다양한 분야와 범위를 걸쳐있다. 특히, 최근에는 생태학(마르크스의 생태적 위기 이론이나 신진대사 균열을 기초로), 젠더(새로운 사회재생산 이론의 형태를 통해), 그리고 인종(인종적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접근)에서 역사유물론적 비판이 모여진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들 모두는 강탈과 착취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러한 최신의 이론적 발전들이 직접적 착취 밖의 성, 인종 및 환경에서 실제 움직임과 조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투쟁의 대부분이 발견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결론이 열려있는 비판을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특수한 자본 축적의 시스템을 가장 깊이있게 분석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투쟁해야 한다. -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연대 지도부의 성찰을 기대하며

 

노동자연대, 성폭력 피해 강제로 사건화하고 괴롭혀

[운동사회 미투] 피해자 J, 노동자연대로부터 성폭력 2차 피해 사실 밝혀와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3169

 

나는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위 기사에서 큰 용기를 내 미투에 나선 ‘J’는 나와 아주 가까운 동지다. 내가 여성의 삶과 페미니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동지의 경험과 고민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 글에 나온 15년전 그 사건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비겁한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나는 2016년의 토론회에서 J의 청중발언도 페북에 올렸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운동사회 성폭력의 심각성을 돌아볼 거라 기대했지만, 그것은 J가 노동자연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꼬투리가 됐을 뿐이다.

 

지난해 J가 또다시 노동자연대의 공격을 받은 것도 나 때문이다. 아는 사람도 많지만 노동자연대 동지들은 나를 끔찍이 증오하고 혐오한다.(그리고 미움받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특히 내가 2012년부터 시작된 노동자연대와 관련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예전 간부였던 사람으로서 함께 반성하자고 한 것 때문이다.

 

작년에 그 문제가 다시 불거졌을 때 나는 또다시 노동자연대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P는 나를 강력 비난하는 글을 썼고, 그 글에서 J도 다시 끌고나와 공격했다. 노동자연대가 왜 이렇게까지 모질었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간다.

 

나와 가까운 동지이기에, J는 더더욱 끔찍한 공격과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작년 11월 노동자대회 때 노연 운영위원 P를 우연히 만났다. 차별금지법 캠페인에 참가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그가 보였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J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느냐. 제발 사과하고 그런 글은 내려라.’ 그는 나를 벌레보듯 쳐다보며 뿌리치고 가버렸다.

 

J는 노동자연대에 이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를 이미 여러 번 줬다. 그리고 아직도 늦은 건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사과하고 거듭나야 한다. 제발, 운동사회가 이런 문제를 더욱 민감하고 철저하고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노동자연대 안팎의 많은 분들이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거라 기대하고 호소하고 싶다.

 


 

2년전 토론회에서 J의 발언 이후 나는 이런 포스트를 페북에 올렸었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J에게 소환조사를 요구하고, 그것에 응하지 않자 불순한 의도로 중상모략을 한 거짓말쟁이라고 공개 비난하는 핵심 근거가 됐다. ‘전지윤도 이렇게 올린 걸 보면 당신의 발언 의도는 뻔하다는 식이었다.

 

이러 괴롭힘 속에 고통받는 J를 보면서 얼마나 나 스스로를 탓하며 자책했는지 모른다. 이 포스트를 올린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내 잘못이 아니다. 이 포스트가 왜 노동자연대를 중상모략하려는 불순한 의도의 글이란 말인가? ‘그 발언을 듣고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는 말이 왜 문제란 말인가?

 

물론 나는 이 포스트를 보고 사람들이 운동사회 성폭력에 대해 돌아볼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운동사회에서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누구든 피해자가,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성찰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고, 참담한 반응과 공격만이 돌아왔다. 현실에서 우리는 항상 피해자일 수만은 없다. 한편으로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기 쉽다. 특히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성찰하지 않는 남성들일수록 더 그렇다.

 

따라서 가해자를 괴물로만 생각하고,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피해자성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성도 담담히 받아들이며 성찰하고 고쳐가는 것이다.

 

나는, 내 동료는, 내가 속한 단체는 항상 피해자거나 피해자 편이지 절대 가해자이거나 가해자 편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떤 경우든 가해자라는 위치를 절대 인정 않으며 무슨 일이든 하려는 사람들처럼 위험한 사람들은 없다.

 

이 글이... 가해자의 편을 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의 문제의식을 발표했던 2017515일에 열린 토론회 당일에도 가해자를 조직적으로 옹호한다는 지목을 받은 당사자 단체가 자료집을 제작해 판매하는 일이 있었다..."

"보수적인 법정에서조차 점점 유죄 판정의 협소성에 대한 판단 기준을 변화시키고 있는 상황에 증거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단체가 있다. 피해자의 진술을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가해자의 진술을 옹호해 온 것으로 알려진 단체이다... 가해자를 옹호하다가 사법부보다 보수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반면교사의 가장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권김현영,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의 문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이걸 보고 노동자연대 지도부는 권김현영 선생님도 은근히 우리들을 비방하고 중상모략했다고 볼 것인가? 물론 나도 그렇고 누구도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외면하고 계속 고통을 가하는 것은 안될 일이다. 피해자 J가 말했듯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고 명예를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반 고흐의 사랑과 예술혼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들고 지칠 때는 영화나 음악이 휴식과 위로가 된다. 근래 좋은 휴식과 위로를 준 시간은 <러빙 빈센트>를 보는 시간이었다. 일단 가장 좋은 건 그야말로 살아움직이는 고흐의 그림을 2시간 동안 실컷 감상하는 기분.

 

영화에는 고흐의 이런 말이 인용돼 나온다.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영화를 보면서 위로받는 느낌이 든 이유가 여기 있었던 거 같다. 보통 우리는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마음이 느껴질 때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영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광인이나, 천재나, 이상한 외톨이로 보였던 고흐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옆에 날아온 작은 새를 보고 행복해 했던, 작은 것에 감사하고 아름다움을 느꼈던 고흐를 보여 준다. 8년간 800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단 1점밖에 판매하지 못했던 그의 가난하고 비루했던 삶도 보여 준다. 하지만 고흐는 다짐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 것 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어.”

 

실제로 고흐가 죽고 긴 시간이 지나서, 이제 사람들은 그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안다. 그것은 보잘 것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다. 그는 자신의 최고 작품을 '감자 먹는 사람들'로 꼽았다.

 

왜 그렇게 지저분한 빛깔을 사용하냐고 했지? 그러나... 그 탁한 빛깔 속에도 얼마나 밝은 빛이 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이 그림에 진실을 담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고 있는 이들의 삶의 진실을 담아낼 것이다. 사람들의 주름에 배어있는 깊은 삶과 손과 옷에 묻어있는 흙의 의미를 나는 그림으로 그릴 것이다.”

 

영화의 감동은 고흐의 편지집을 찾아보게 만든다. 거기서 또 너무 공감가는 고흐의 말을 발견했다. 맞다. 우리는, 특히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은, 울면 안되고, 상처와 외로움을 드러내면 안 되고, 감정을 숨겨야 한다고 배운다.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고 배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내가 펌프나 가로등의 기둥처럼 돌이나 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다정하고 애정 어린 관계나 친밀한 우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세련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애정이나 우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무언가 공허하고 결핍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기사 등록 2018.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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