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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파시즘에 관한 소고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6. 28.

윤미래

 

 

유럽에서 파시즘의 위험을 보여주는 르펜과 국민전선 

 

 

1.

혐오는 원래공포에서 나온다. 실제로는 약자인 사람들에게 온갖 공포를 투사해서 그들을 강자’ ‘가해자라고 상상하고 자신의 약함, 피해자성을 호소하는 게 모든 혐오의 공통 문법이다. ‘김치녀담론도 남성보다 돈이 많고 모종의 권력(?)으로 남성을 착취하는 상상 속의 잘 나가는 여자를 겨냥하지 가난하고 못생긴 비정규직 여성을 대놓고 겨누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공포에 실체가 있는지, 누구의 경험에 기반해서 그런 담론이 나올 수 있으며 여기서 주변화되거나 지워지는 사람은 누구인지이고, 난민들에 대한 이른바 여성들의 공포가 이 면에서 어떤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2.

파시즘이 무서운 것은 인륜을 무시하기 때문이거나 (이 세계 자체가 인륜을 체계적으로 뒤틀어 인간에 대한 경멸로 바꿔놓음으로써만 지탱되고 있다) 허구적인 편견에 근거해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가 벌이는 거의 모든 전쟁이 이미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삶와 세계에 대한 피억압자들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총체적인 분노를 그들을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피억압자들 가운데에서 골라낸 희생양에게 쏟아붓도록 동원함으로써 체제의 위기를 체제의 피해자들에 대한 학살로써 모면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반동은 지배계급에 의한 위로부터의 탄압과는 규모와 질이 다른 야만을 가능하게 한다. 말마따나 경험에 접속하는’ ‘실존적인감정들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나는 만약 올해 당장 경제 위기가 터져 한국의 거리가 실업자로 넘쳐나고 빈곤과 사회 불안정이 판을 치게 된다면 저 소위 래디컬이라는 양반들이 트랜스젠더나 성판매 여성, 이슬람 난민을 집단 린치하거나 심지어 살해할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메갈쿵쾅’ ‘페미퇴출을 열렬히 외치는 뭇 남초 사이트 유저들이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여성들을 강간 살해하거나 여성단체 사무실에 불을 지를 가능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그러나 작은 악이라고 악이 아닌 것은 아니고, 트랜스젠더여서 살해당하든 페미니스트여서 살해당하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별다르게 차이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을 존중해야 할 자생성, ‘지식인들은 모르는 민초들의 목소리따위로 미화하는 것은 의식적인 기층 조직화는 좌파의 전유물이라는 낡은 오만이다. 혁명이 좌파의 정치이듯이, 파시즘은 우파의 정치다. 둘 다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서 목소리를 낼 길을 찾을 수 없는 기층 민중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일임은 분명하나, 그것을 총화하고 조직하는 의식적인 세력 또한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주체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하는 분노,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 옳은 일을 할 의무 같은 것이 좌파가 경험에 접속하는 지점이라면 약자들에 대한 혐오(이것은 원래 언제나 공포에서 나온다. 약자를 향한 공포가 바로 혐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와 방향 잃은 원한감정, 치졸한 기득권의식 따위가 극우가 경험에 접속하는 지점이다. 나는 지금도 소위 래디컬이라는 사람들의 진영 어딘가 논리를 만들고 의제를 던져주는 극우파의 요원들이 암약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들이 활용할 만한 에너지를 발견하고 손길을 뻗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극우파들이 퍼뜨리는 논리에 경악하고 화를 내는 것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 필수적인 첫발을 떼고도 소진되지 않은 기력이 남아 있다면, 그 다음은 우리가 우리의 방식으로 경험에 접속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 극우가 접속하는 경험들이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 접속을 저지하고 맞서 싸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그걸 더 잘 하는 쪽이 이길 것이다.

 

3.

파시즘 역시 서발턴이 말을 하는 방식이라고 했을 때 그에 대항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그들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시스템의 겉면만을 긁으며 피억압자들의 상호 파괴로 분노를 배출해주는 언어가 아니라, 억압의 시스템을 정확하게 겨누도록 분노를 총화하고 정련해줄 언어를.

 

그것은 다수자들의 언어에 그들을 포괄하는 방식으로도(“실업자도 부랑자도 노동자계급으로 뭉치자!”) 다수자들의 경험을 그들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도(“나도 성찰을 게을리할 때마다 파시스트들과 다를 바 없어지는 거야”) 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파시스트 쥐새끼들이 기존의 어떤 세력에서도 주변화되어 있으며 그래서 기존의 어떤 언어도 그들의 경험을 포착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만 시작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처지와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에 인도될 때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언어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조장하고 정당화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떨거지’, ‘쓰레기들의 이해에 정말로 철저하게 복무하는 언어라면 노동자계급 다수자와의 동맹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더 약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원한감정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처지를 정말이지 하나도 나아지게 하지 않으며, 체제는 그들을 앞세워 노동자계급 다수자의 전위들을 처단하고 저항을 무력화한 뒤 누구보다도 먼저 이 파시즘의 기층을 토사구팽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 역사적 경험에 대한 총화가 정말 절실하게 필요하다.

 

4.

나는 계급과 인종 문제를 항시 교차시키지 않는 시스젠더 비장애인 중심의 페미니즘에는 항상 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메갈리아와 심지어 워마드 계열의 여성들이 그들의 관점을 끝까지 밀고 나간 언어와 논리, 사고를 제공하는 그 자신의 유기적 지식인을 가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자신의 기반 집단의 이익에 항상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조망하고 연대와 동맹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를.

 

사회적 이해관계와 균열들, 그것이 낳는 정념과 동학은 당사자에게 말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말이 되지 못한 광증이나 폭력, 타해나 느닷없는 사보타지의 형태로 튀어나올 뿐이다. 나는 시스젠더 여성들의 대부분이 어쨌든 본질적인 지점에서 사회주의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과 이해를 같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그들이 명확한 자기의식에 이른 협상의 상대로 서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어느 시스 여성 당사자도 이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다수자 시스 여성들조차 얼마나 지독한 자원과 언어의 빈곤에 노출되어 있는지 방증하는 것 같아서 속이 쓰리다.

 

 

(기사 등록 2018.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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