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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 주장

[박노자] 독립이 아닌 독립: 리가(Riga) 시찰기(視察記)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7. 23.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수많은 책을 썼다. 본인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 )에 실렸던 글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지금 발트해 해안에 있는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 리가 (Riga)에서 가족 휴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이 도시를, 제가 딱 30년만에 찾아왔습니다. 30년 전, 그 당시에 고교생인 저는 제 학교와 리가의 한 고교가 '교환 견학'을 협정함에 따라 리가를 며칠간 견학한 일은 있었습니다. 30년만에 바로 눈에 띄는 차이는?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어릴때부터 어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해온 탓에 언어적 차이부터 눈치 챘습니다. 30년전, 안그래도 망하려 했던 쏘련으로부터 그 독립을 되찾으려는 라트비아에서는 민족주의적 '국어 열풍'은 한참이었습니다. 민족의식이 많이 고취된 (?) 많은 라트비아인들은 그때 아예 쏘련의 타지방으로부터 온 저 같은 이들과의 러어 대화를 거부하곤 했습니다.

 

종족적 민족주의야 라트비아 우파의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지만, '민족어 열풍'을 인제 교체한 것은 '국제어 필수화'라는 슬픈 현실입니다. 러어 대화가 환영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어도 많은 경우에는 독어도 대환영입니다. 인제 중국어 학습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봐서는, 다음에 필수화될 국제어가 무엇인지 불보듯 뻔한 것이죠. 30년전에 폭발적으로 노정되었던 '민족어'에 대한 애착은, 인제 냉엄한 현실에 대한 체념과 같은 수용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현실이란, 인구가 채 2백만 명도 안되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낀 약소국으로서는 '독립'이란 이름뿐이라는 점입니다. 쏘련이 붕괴되고 라트비아는 '민족국가'를 되찾았지만, 이 민족국가는 거의 당장에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명실상부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잊어야 했습니다. 재정지원을 찾으러 유럽연합에 가입한 빈국 라트비아는, 바로 그 순간 스칸디나비아 기업의 시장이 되고 스칸디나비아 은행들의 '효자 고객'이 됐습니다.

 

Swedbank 등 스웨덴, 노르웨이계 은행들이 원했던 것은 장기적 인내를 필요로 하는 제조업 기업금융이 아니고 단기이윤을 보다 빨리 뽑을 수 있는 주택담보대출과 소비자대출이기에, 국제 경쟁력 제고에 필요한 돈을 빌릴 데가 없는 현지 공장들이 줄줄이 문 닫는 대신에 수십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모기지론의 덫에 걸려 북구은행자본의 '부채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전체 금융시장의 약 85%를 차지하는 스칸디나비아 은행들은 사실상 라트비아의 경제정책을 담당하다시피 합니다. , '독립'이라고 하기에는....

 

그런데 Swedbank 모기지론 덫에 걸려 그 융자를 40년동안 상환해야 할 라트비아인들은 그러면 과연 그 돈을 어디에서 벌어야 하는 거죠? Swedbank 등 덕에 (?) 공장들이 폐사를 당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일제시대 용어를 쓰자면 데카세기(出稼), [부자나라에] 나가서 벌이하는 것입니다. 현재 노동가능한 연령의 라트비아 주민들의 약 3~4분의 1은 서구의 부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그들은 바로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가서 저임금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북구의 국가들과 자본으로서는 라트비아의 유사(類似) '독립'은 정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 격입니다. 유럽 주변부에 편입된 이 나라를 금융 차원에서도 착취할 수 있고, 거기에다가 라트비아로부터의 저임금 노동력의 흐름 덕에 '인건비 절감' 효과도 볼 수 있고... 실은 별다른 사회적 불만을 자아내지 않고서 노르웨이나 스웨덴에서 성구매자들을 처벌하는, 매우 진보적인 법률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인과 북구인을 위한 하나의 커다란 사창가가 된 라트비아의 덕(?)이기도 합니다.

 

이런 법률로 불이익을 받을 상습적 성구매범들은 일단 한시간 비행하여 리가에 오기만 하면 '진보'와 아무 관계없는 모든 짓거리들을 바로바로 다 벌일 수 있으니까요 (https://en.wikipedia.org/wiki/Prostitution_in_Latvia). 그러니까 핵심부에서의 '진보적' 쇼들은 보통 대개 주변부의 희생을 가중시키는 효과를 발생합니다. 노르웨이에서 문 닫은 유해한 제지공장은 라트비아로 이전 가고, 노르웨이에서 성구매를 더 이상 못하게 된 노르웨이 마초들은 리가에 날아가서 똑같은 짓거리들을 훨씬 더 추잡한 방식으로, 그리고 더 저렴하게 자행할 것이고...

 

결국 쏘련 시대에 쏘련에서 최첨단 전자공업과 기술집약적 농업의 중심지이었던 라트비아는 서구 중심의 신세계에서 금융업자들의 사냥터이자 성인을 위한 유원지”(?)가 된 셈입니다. '독립'이 와도 독립 같지 않고... 그런데 과연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인구 2백만 명의 비교적 가난한 약소국은 어디까지 독립할 수 있는가요? 강력한 국가가 보호막이 되지 않는 이상 바로 이 국가의 GNP보다 더 많은 매출고를 올리는 국제 자본시장의 야수들의 먹이가 되고 말죠.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이상 "보호막 국가"는 애당초 불가능하고요...

 

지난 18년간만 해도 라트비아 인구는 18%나 감소됐습니다 

(https://www.politico.eu/article/latvia-a-disappearing-nation-migration-population-decline/ ). 나이 드신 분들이 돌아가시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오슬로나, 스톡홀름, 런던에 다 가고 없고... 몇십 년이 지나기만 하면 대대적인 이민자 유입 없이는 아마도 라트비아의 국가존립 자체가 불가할 것입니다. 라트비아 같이 "복지국가"들의 자본에 먹히고 만 희생국들의 문제들을, 일국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라트비아인들도 오늘날과 같은 모델이 장기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겠지만, 라트비아에 대한 금융, 노동력 착취로 비교적 우월한 생활조건을 누리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노동운동 단체들도 북구와 발트3, 나아가서 북구와 남/동구 전체 관계들을 문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국제행동을 통해 핵심부 자본들의 폭리행각을 억제하지 않으면 라트비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기사 등록 2018.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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