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 세상읽기 - 반올림/ 故 노회찬 추모/ 자영업/ 소비자/ 사과

전지윤

 

 

반올림 11년의 싸움과 1023일의 농성이 남긴 것

 

지난달말에 있었던 반올림 농성의 마무리와 마침 문화제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사실 끄트머리에 일부 함께하면서 조그만 손을 보탠 처지에서 11년의 싸움, 1023일의 농성에 대해 뭐라 말하기도, 얼굴내밀기도 부끄러운 처지이다. 하지만 이 투쟁의 주역들과 같이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한혜경님, 김시녀 어머님, 황상기 아버님과 같이 손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런 부끄러운 마음을 알고서 당신들의 작은 연대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이 성과가 이뤄졌다최고의 연대상이라는 멋진 상까지 만들어 모두에게 나눠 주신 것 같다. 물론 걱정하거나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중재위원회가 어떤 안을 내놓을지, 상고심을 앞둔 이재용의 꼼수 아닌지, 문정부의 생색내기에 이용되는 거 아닌지. 하지만 그런 분들이 봐줬으면 하는 게 있다.

 

반올림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얼마나 거대한 흐름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지, 왜 이재용이 3년전에 오만하게 거부했던 방안을 무조건 받겠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는지,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즈>같은 외신까지 이 결과를 주목하는지. 왜 직업병 판정에서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결과들이 계속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직접적인 증거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없더라도 노동자의 손을 들어줄 수 있고, 입증 책임을 노동자에게서 사측에게 돌려야 한다는 새로운 판결 기준들은 정말 대단한 의미가 있고, 이것은 삼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전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변화는 힘겹게 택시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없는 살림과 아픈 몸으로 온갖 고난을 견디면서도 이 투쟁을 버텨온 아버님, 혜경님, 어머님같은 분들이 반올림 활동가들과 서로를 신뢰, 사랑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의미는 도저히 깎아내리기 어렵다.

 

반올림 영문 블로그에서 지적했듯이 만약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대자본들은 도전하기에 너무 강력하고 이런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본다면, 한 작은 단체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오만한 회사로부터 받아낸 거대한 양보를 봐야 한다.’ 농성장에서 컵라면을 끓여먹거나, 한솥도시락을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들이 벌써 그리워지는 거 같다




 

노회찬 의원의 재능과 기여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정치적 입장 차이를 떠나서 노회찬 의원은 치열한 삶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에 큰 기여를 했던 분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정의당으로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런저런 아쉬움은 많지만, 그래도 고인이 뉴스공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출연자가 됐을 때, 정의당 지지율이 10%를 넘었을 때, 고인이 썰전의 새로운 패널이 됐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단지 고인과 정의당만의 성과가 아니라 진보좌파 정치 전체가 함께 만든 성과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탄압받고 소외된 사람들도 기억돼야 마땅하지만, 동시에 고인의 재능과 기여도 결코 깎아내려질 순 없다.

 

그런 고인이 이제 없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고인이 느꼈을 외로움과 부담감을 생각하면 참 가슴아프다. 탄압받던 사회주의자, 배고픈 진보정치인, 유력 국회의원까지 거쳐오며 지켜온 마지막 자존감마저 송두리째 무너지는 기분이었을까. 비아냥과 조롱 속에 끝없이 추락하며 주변 사람들도 같이 수렁에 빠질 것을 걱정한 것일까.

 

바로 어제까지 부인 전용 운전기사까지 두고 무슨 노동자 대변인가’, ‘정의를 말하더니 가증스럽다등의 기사를 쏟아내던 언론들. 이제 태도가 달라진 보도들을 보면서도 살아서 감당했어야지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수모는 과연 눈뜨고 견딜만한 것이었을까.

 

여전히 건재한 기득권 체제와 우파의 힘을 확인한다. 그들은 촛불을 막을 순 없었지만, 고인같은 진보정치인도 선거정치와 금권정치의 덫으로 옭아맸고, 무리한 드루킹 특검도 받아냈고, 결국 이런 비극까지 만들어냈다. 곳곳에서 어떤 의미있는 개혁도 가로막는 높고 튼튼한 벽은 여전하다. ‘협치내각이 필요하다며 눈치보는 말도 나온다.

 

기득권 체제와 우파가 진보정치에 강요한 또 하나의 굴레는 종북이었고, 내가 고인과 정의당에게 가장 서운함을 느낀 것도 그 부분이었다. 굴레를 씌운 저 멀리 적들보다, 그것에 흔들리는 가까운 동지들이 더 야속했던 것이다. 그래도 결국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때 재판정에 출석해, 옛 동지들을 변호하고 해산에 반대하던 고인의 모습이 기억난다.

 

고인의 비극 앞에 생각해본다. 지난 세월 속에 아무리 복잡한 애증이 쌓였더라도, 아무리 견해 차이가 크다고 해도, 이제는 선을 긋고 상처주는 날선 언어보다, 무엇이 힘들고 어디가 아픈지 관심과 공감에서 출발하면 좋지 않을까. 고인이 사랑했던 분들, 고인을 사랑했던 분들, 정의당 당원 분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자영업과 최저임금 - 을들의 대결을 낳는 강탈적 축적

 

 

최저임금을 을들의 대결로 몰아가는 갑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동시에 또다른 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해결책 고민도 필요할 것이다. 나몰라라하면서 조직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이 중요하다는 정답만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조직노동자]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또다른 사례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자영업자의 규모가 6백만에 달하고 인구비중이 OECD 평균의 2배나 되는 이 나라에서 이건 더욱 필요한 일이다. 이들 대부분은 소득이 임노동자의 60% 수준이고, 빚도 평균 2천 이상이 더 많다고 한다. 대부분이 고용, 산재보험 밖에 있고, 5년내에 70%가 폐업할 정도로 불안정한 처지이다.

 

저녁이나 주말도 없이 일하며, 연간 노동시간은 세계최장이라는 노동자들보다 300시간이 더 많다. 자발적 무급노동을 통한 자기착취가 만연해 있고, 전형적인 감정노동, 서비스노동 속에 노동의 소외가 심각하며 고령화와 여성화도 나타나고 있다.

 

명퇴당한 노동자들이나 구직포기자들이 많을뿐 아니라, 사회안전망 밖에서 빈곤과 불안정을 겪고 있는 이들을 노동계급이 아니며 사회변혁의 주체가 아니다고 보는 건 타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특수고용직과 자영업의 경계를 흐리며, 착취는 물론 강탈을 통해 축적해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또다른 희생자이자 자기해방의 주체로 봐야 한다.

 

을과을, 을과병의 더욱 복잡한 위계의 사다리를 만들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건 재벌, 대기업, 가맹본사, 건물주들이다. 을과을의 갈등, 난민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 속에 흐려지는 것도 이 들의 책임이다.

 

이들에 맞서면서 저임금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청년알바, 실업자 등 모든 피착취, 피강탈자들을 단결시키는 투쟁과 요구가 발전돼야 한다. 분노와 불만을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혐오와 절망의 정치세력화를 막아야 한다.

 

최저임금 1만원을 정부가 책임져야하듯,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안정적 일자리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명예퇴직과 조기퇴직,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두집 건너 치킨집과 커피숍이 들어서진 않을 것이다.

 

갓물주의 불로소득과 지대추구를 없애야 하고, 본사는 가맹점의 기본적 노동조건과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국가는 골목상권과 소득을 보장하거나, 아예 직접 유통과 서비스를 맡아서 내수시장과 고용을 책임져야 한다. 화폐와 마찬가지인 카드사를 국영화해서 사적 마진을 없애야 한다.

 

그러면 잠도 제대로 못자며 일해서 매달 적자를 보다가 결국 문닫는 동네가게들은 줄어들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도 문을 열어두고 24시간 영업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자유시장에 대한 더 강력한 규제와 개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최저임금만이 아니라 이런 문제들도 사회적으로 결정하고 법적 준수를 강제해서 안될 이유는 뭐란 말인가.

 

재벌과 자본을 자유롭게 놔줄수록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고 인간적 상식을 지킬 거라는 생각은 틀렸다. 삼성이 자유로울 때 나타난 것은 죽음의 직업병과 국정농단이었고, 이제 구속과 처벌의 걱정 앞에서 이재용은 반올림의 요구를 듣는 척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소비자를 대립시키는 착취 구조

 

무더위를 참지 못하고 에어컨이 빨리 설치되기를 바라는 소비자가, 결과적으로 에어컨 생산 노동자들이 휴가도 없이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구조라는 지적을 읽고 정말 맞다고 생각했다.

 

사회운동 활동가로서는 당연히 노동자들이 충분한 여유와 휴식을 취하면서 적절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비자로서는 원하는 즉시, 가능한 싼 가격에 더 질높은 서비스를 받기를 원하게 된다.

 

지난주 집이사를 하며 격하게 느낀 점이다. 여러 이사짐 센터를 불러 견적을 내보고 가장 낮은 가격에 계약했고, 그마저 가격에 큰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당일에 이 최강더위 속에 땀을 뻘뻘흘리며 짐나르는 분들과 내가 지급한 금액을 비교해보니, 사실 2배는 더 줘도 하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그렇다고 웃돈을 크게 드릴 여유는 없고.

 

이런 딜레마는 이사 이후 인터넷 이전 설치에서 다시 불거졌다. 곧 연락하고 올거라던 기사님은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고, 처음엔 너무 더워서 자체 휴가와 태업중이신가하다가... 그래도 당장 인터넷이 안되니 너무 갑갑하고, 테더링해 쓰는 것도 비용 부담이 커져 계속 전화해 닦달했다.

 

그러다가 뉴스를 보고 상황을 깨달았다. ‘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40일 넘게 파업과 노숙농성 중전화해 물었더니 파업 때문에 기사님을 못보내주고 있다고 실토한다. 결국 더 늦어도 할 수 없으나 대신 이번달 요금은 좀 깎아달라. 빨리 노조 요구 수용하라는 항의가 많다고 위에 전해달라했다.

 

결국 일주일만에 오신 기사님 덕분에 갑갑함은 해방되고, ‘혹시 요금 깎아달라고 한 것 때문에 피해보시냐고 물었더니 상품권도 하나 더 달라고 하지 그랬냐고 하신다. ‘지난해 직고용 정규직화라고 광고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사기였다며 길고 힘겨운 투쟁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더 저렴하고 좋은 서비스를 바라는 마음과, 더 높은 임금과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마음은 둘 다 문제가 아닐텐데, 그것을 서로 대립시키는 구조와 그 뒤에 숨어있는 건 누구인가. 무더위를 날려버릴 승리의 소식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진정성담긴 사과만이 치유와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사건으로 불리던 문제에 일부 책임이 있는 한 동지가 사과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반가웠다. '대학문화'의 새로운 구성원들마저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한 상황에서 좋은 화해와 치유의 기회가 될 거라 봤다. 사실 그 동지를 생각하면 항상 안타까움과 함께 미안함도 느낀다.

 

노동자연대 지도부가 초기에 문제를 잘 풀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래 곪아오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연 지도부가 그 동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것이기도 하기에, 그 지도부의 일부였던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과 안타까움 때문에라도, 이번에 나온 잘못된 사과문에 대해 못 본척할 수가 없다. ‘노동자연대 분들을 정말 아낀다면 주변에서 목소리를 내주셔야 한다고 내 스스로 운동사회에 호소해 왔으니 말이다.

 

자꾸 이 문제를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려고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원치 않는데 포르노를 보게된 피해자가, 그 피해를 호소했는데, 무작정 불신하고 피해자를 비난하고 더 나아가 소송으로까지 가서 괴롭힌 것이다. 물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방어권이 있고, 자기 나름의 사실 진술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피해자의 평판, 행실, 사생활, 정신상태 등을 파헤치며 진술의 신빙성을 떨어트리려는 것이면, 새로운 고통을 낳는 또다른 공격이며 정당화될 수가 없다. 이것이 노연 지도부가 지금까지도 조직적으로 하고있는, 스스로 진상 조사와 규명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상처만 더욱 들쑤시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사과문이라는 글에서도, 비슷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또 이 사건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던 논리, 피해자가 성판매를 하려고 해서 말리기 위해 포르노를 보여줬다더라가 재등장했다. 서글프게도 이것은 전혀 정합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이런 변명이 무슨 효과를 내고 피해자에게 어찌 느껴질지는, 그때든 지금이든 분명해 보인다. 피해자가 당시에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거부감을 보였다는 것은 사건 당사자들 모두가 인정한 사실인데 어찌 명시적 동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동지가 주목하듯 가해자로 지목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억울함을 말할 기회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그런 기회와 소통을 막은 책임은 바로 노연 지도부에 있다. 피해를 호소하자마자 온갖 불신과 비난의 댓글들을 달았던 것이다. 피해자측에서 몇 차례나 보낸 대화와 공동조사 요구를 모조리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송을 걸라고 권하고 부추겼고, 재판에서 바로 저런 논리로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이 상황에선 소통과 대화가 가능하기 어려웠다. 피해자 쪽에서도 자연스럽게 날카로운 반응들이 나왔던 것이다. 이 과정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사과라 할 수 있다.

 

왜 처음부터 무작정 피해호소를 불신하고 의도를 의심해야 했던가? 부당노동행위나 갑질을 겪었다는 노동자의 호소를 무조건 불신하고 비난하고 조금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왜 이런 사건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될까? 왜 더 들어보고 알아보려 하지 않을까? 왜 다들 골치아파하며 원사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까.

 

노연 지도부의 대응에 대한 몇가지 문제의식이 있었음에도 그 동지가 피해자를 공격하는 편에 서게 된 과정은 참 안타깝다. 처음에 피해자에게 별 일 아니고 가해자는 회원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것은 지금도 노연 지도부가 툭하면 들고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 회원이 물었는데, 피해자가 처음에는 이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말을 바꿨다. 피해자가 거듭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고 하는 데도.

 

서지현 검사는 성폭력을 겪고나서, 처음에는 주저하고 회피했다. 임은정 검사가 성폭력을 당한 여검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던데 혹시 뭐 들은 거 있냐?’고 묻자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임은정 검사를 잘 알지못했고 용기도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서지현 검사가 미투에 나섰을 때 임은정 검사는 왜 말을 바꾸냐고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불신과 감정이 많이도 쌓여왔다. 하지만 그것을 푸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성있는 사과를 통해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명백한 잘못을 더 기꺼이 분명하게 인정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는 것,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기사 등록 2018.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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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다른세상을 향한 연대 변혁 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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