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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박노자] ‘러시아식 권위주의’란 어떤 것인가?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0. 11.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학교 일로 (제 모교에서의 "코리아학하기학교" 참석 및 특강차) 얼마 전에 잠깐 제 고향인 레닌그라드 (현 상트-페테르부르그)에 갔다왔습니다. 저는 대체로 대중매체를 잘 청취하지 않는 인간형에 속하지만, 월요일 저녁에, 제가 공항에서 탄 택시가 교통체증에 막혀 있었을 때에 어쩔 수 없이 운전기사가 듣고 있었던 관변 "러시아 방송"을 차내에서 같이 들어야 했습니다.

 

그 방송의 "이 시간 뉴스"를 두 번 듣게 됐는데, 두 번 다 "땡푸뉴스"이었습니다. 80년대 한국의 "땡전 뉴스"를 기억하시죠? ""하고서 바로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나오는, 그 때 그 뉴스 말입니다. 러시아 관변 뉴스에서는 어김없이 "" 즉후에 바로 "...대통령"은 나옵니다. 오늘 어느 지역을 방문(순행?)했는지, 현지 관민들에게 무슨 연설(교시?)을 했는지, 미국의 새로운 제재에 무슨 맞제재로 맞설 것인지... 심지어 각하께서 낚시하신 시간에 무슨 물고기를 잡으셨는지까지 다 "뉴스감"입니다. 저는 두 번이나 "땡푸 뉴스" 청취를 강요받고 나서야 제 어머니의 아파트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꼭 현재 집권 중인 "보위부 계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헌납해야 하며, 기업 관련 그 지시에 어떻게 복종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재벌가들을 불러놓고 "빅딜" 강요하고 밉보였던 국제그룹을 망가뜨리고 "사장님"들로부터 비자금을 뜯어먹었던 전두환 시절이 바로 연상됩니다. 한데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을 이해해야 현 러시아형 권위주의 체제의 미래를 짐작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1. 전두환 시절에는 노후연금도 국민의료보험도 없었습니다. 최저임금제는 1986년에 이르러서야 생겼고요. 한데 낚시를 좋아하는 푸모씨의 왕국에서는 노후연금은 비록 보전률 (퇴직 이전 소득을 대체해주는 비율)32%밖에 안되어 푼돈이긴 하지만, 보편 적용되긴 합니다. 적어도 일단 "모두의 근본 생존"을 보장해주는 거죠. 지금 퇴직연령 상향조절로 민심은 흉흉해졌지만, 푸모씨를 밀어내자는 분위기보다 그에게 보다 많은 복지혜택을 따내자는 분위기는 더 강합니다


, 소비에트 시대 복지제도를 어느 정도 살려온 것은, 러시아 권위주의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공공의료제 "효율화"로 주치의가 환자에게 할애할 수 있는 표준상담시간은 15분으로 줄었지만 (쏘련 시절에야 의사에게 가서 한 시간 건강 상담해도 됐는데요...) 원칙상의 공공의료는 남아있긴 합니다.

 

2. 전두환 시절의 "의식 있는" 대학생에게는 "가카"는 광주의 살인마이자 미제 주구이었습니다. 푸모씨의 가장 큰 상징자산이란, 그야말로 미제 주구가 아닌, 적어도 표피적으로는 미제의 반대자라는 점입니다. 물론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분석하자면, 푸모씨도 그렇고 중국의 습근평도 그렇지만, 노리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체제의 해체라기보다는 저들의 ()주변부적 제국들이 미제와 "같은 레벨"의 권리를 누려 자기 나름의 영향권을 보장 받는 "수정된 제국주의 체제"입니다. 한데 맑스주의적 분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현재 러시아에서 기린만큼 드물죠.

 

대부분의 매체 소비자들은 "영미 통치자들의 흉모" 비난으로 가득찬 방송들을 들으면서 푸모씨를 "민족의 긍지를 지키는 세계적 저항세력의 중심", 말하자면 전두환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김일성으로 상상합니다. 실제 러시아 방송에서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외국의 정치세력들을 보면 기이하게도 반미극우파와 함께 반미급진좌파 (독일의 좌파당 등) 등이 빈번히 나옵니다


"반미"라면 더이상 색깔을 따지지 않고 좋게 보려 하는 식이죠. 그래서 오히려 학교에서 같으면 선생님들이 시리아 등지에서의 러시아 공군의 대량 살인행각을 (아주 낮은 목소리로, 서로끼리) 비판하지만, 학생들의 상당수는 "친미 반군의 궤멸"을 기뻐하면서 여당에 입당원서를 냅니다. 입당하고 나면 과거처럼 출세가 빨라지니까요.

 

3. 전두환 시절의 대한민국은 큰 병영이자 감옥이었습니다. "보도 지침"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야당지 하나 없었고, 외국에 자유로이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성을 기다리는 것은 잔혹행위가 일상인, 원칙상 예외없는 징병제 군대였습니다. 한데 전두환과 달리 푸씨는 일단 여유있고 자신만만합니다. 노후연금제 개악안으로 지금 지지율이 좀 떨어졌지만, 그래봐야 70% 정도입니다(https://www.news.com.au/world/vladimir-putins-approval-rating-is-falling-fast-and-heres-why/news-story/d708edd2c76bba21afb4ce29ccbce338). 평상시 같으면 80% 넘는데, 70%도 낮다고 보는 것이죠. 쏘련시대 복지제도를 살린 "미제 반대자" 이미지의 "러시아의 김일성"이라면 이 정도 안정된 지지기반을 가질 수 있는 거죠.

 

여유가 있는 만큼 80년대 한국만큼 "타이트하게" 주민 관리할 필요도 못 느낍니다. 야당지 몇 군데 (<노바야 가제타> )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고, 공무원 이외에는 출입국은 (아직!) 자유며 징병제긴 하지만 대체복무제도 있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소프트 권위주의"라고 볼 여지도 좀 있긴 합니다. 물론 야당지도 극소수의 비스탈린주의적 좌파지식인들도 자유노조들도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지만... 전자기계를 통한 감시는 이미 러시아와 같은 준주변부 뿐만 아니라 중심부에서도 거의 일상이 된 셈입니다...

 

진보성이 있는 연구자들 중에서는 "각하"의 체제를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데 이 체제를 매우 답답하게 보는 사람들마저도, 이 체제가 오래 갈 것이라고 예측을 합니다. 일단 보위부 계통의 현 집권세력을 대체할 만한 세력이 없는 거죠. 자유주의자들에게 "친미" 딱지가 있어서 승산이 없다고 봐야 하고, 스탈린주의 좌파 (연방공산당)는 집권세력들과 모종의 묵시적인 "약속"들이 있어 진정한 반정부 투쟁을 포기한 듯하고, 비스탈린주의 급진좌파는 일단 대단히 미약합니다


대중적 기반이 없는 거죠. 다수의 노동자들이 쏘련시대를 그리워한다 해도, 새로운 혁명보다는 더 많은 복지혜택만을, 즉 현 체제의 보다 "친복지적" 수정판만을 원합니다. 이 대중들이 러시아형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 어쩌면 급진화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멀었습니다. 아주아주 멀었습니다.



(기사 등록 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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