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세상읽기 – 노태우/ 소시오패스 낙인/2차가해/수단..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10. 31. 10:48
전지윤
● 노태우 추모, 조문, 국가장이 용납될 수 없는 이유
노태우에 대한 애도, 조문, 국가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도 반성, 사과하고 합당한 처벌을 받아들여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면 화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내가 지금도 성폭력 피해자를 괴롭힌 운동단체 지도부에 끝없이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노태우의 역사적 죄악을 잘 알면서도, 희귀병으로 10년 동안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은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 상태로 서서히 죽어간 그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아들이 대신해서 매년 광주를 찾아 유가족들에게 거듭 사과한 것이나 2천6백억 원의 추징금을 완납한 것은 전두환과 다르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이와 죽음 앞에서 너무 모질게 할 수는 없다는 심정도 있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도 그런 것들을 감안해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가거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지는 않지만, 장례는 국가장으로 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모든 것을 감안해도 노태우의 죽음에 대한 추모, 조문, 국가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노태우마저 애도하러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마음이 아니라,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무너져내릴 독재와 학살의 피해자들의 마음이다. 쿠데타, 광주 학살, 6공 폭압 통치와 그 피해자들에 대한 노태우 자신의 온전한 사과와 반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분노와 용서>에서 찰스 그리스월드를 인용하면서 사죄를 통해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요건들을 제시한 바 있다.
‘자기가 책임 있는 행위 주체임을 인정하고/ (자기 행위의 부당성을 인정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행위와 그 행위를 저지른 자신을 비판하며/ 피해를 야기하여 느끼는 후회를 피해자에게 표현하고/ 거듭나려는 온갖 노력을 말로는 물론 행동으로 보여주며/ 피해자의 관점에서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이해하려고 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자신은 어떤 면에서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해명을 제공해야 한다.’
노태우의 경우에 이런 것들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법적 처벌부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노태우 본인이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가 진정성있게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노태우의 아들인 노재헌 씨의 사과는 있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심지어 운동사회조차) 너무나 드문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의미있었다.
하지만 사과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대리해서 사과하는 것도, 피해자를 대리해서 용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당사자가 식물인간 상태라서 한계가 있었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의식과 사고는 유지됐다고 하면서도, 분명한 사죄의 뜻을 전하지 않은 것은 설명이 안 된다.
특히 2011년에 출판한 회고록에서 자신의 역사적 범죄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부분들을 개정해서 재출판하는 최소한의 조치들(5.18 피해자들이 핵심으로 요구한 부분)도 취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를 바랐다”는 유언은 더 실망스럽다. 이것은 조건절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흐리고 있다.
노재헌 씨와 가족들의 태도도 이해가 안 간다. 그동안의 사과가 진정성이 있었다면 가족이 먼저 나서서 국가장을 취하했어야 옳다. 이것은 ‘아들의 사과는 노태우 사망 이후에 예우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닌가’하는 그동안 제기되던 의심을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학살자들은 시민들에게 사과한 적 없고, 우리 시민들 또한 사과받은 적 없다”는 5·18 관련 단체들의 성명이 전적으로 맞다. 이것은 노태우가 악마나 괴물이었고, 그를 끝없이 저주하는게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5.18의 피해자들이 아니라 노태우, 전두환같은 학살자들에게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기괴하게 웃으며 입에서 피를 흘리는 괴물이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병상에 누워 서서히 죽어간 사람과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 노인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다. 이런 ‘평범한 악인’들이 특정한 상황과 구조 속에서 학살자와 독재자가 됐고, 심지어 지지를 얻어서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었고,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과 손잡고 3당합당으로 권력을 연장하기도 했다.
그 당이 아직도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주요 양당 중에 하나이고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 이 당의 대선 후보들은 대선토론에서 또다른 독재자인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는 발언들을 하고 있다. 곽상도처럼 독재에 부역했고 간첩조작과 ‘유서대필’ 조작 등을 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국회의원 자리에 있고 다른 악행들을 저지르고 있다.
독재와 학살을 돕던 족벌언론들은 여전히 엄청난 대중적 영향력과 의제 설정력을 과시하고 있고, 이번에도 노태우의 ‘서거’를 추모하며 그의 업적을 강조하며 ‘화해와 용서’를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음으로써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들의 온전한 반성과 사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세력과 구조의 철저한 청산이 없는 어설픈 화해와 용서가 있을 수도 없고, 너무나 위험하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홀로코스트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 ‘이재명은 소시오패스’라는 폭력적 낙인찍기
요즘 국민의힘 대선 후보 토론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발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노조 혐오, ‘종북’ 혐오, 중국 혐오 등이 여기서 발견되는 단골 레퍼토리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시청하지 않아서인지, 낮은 사회적 감수성 때문인지, 국민의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는 이상하게 열의가 없는 언론 때문인지 별다른 관심과 지적들이 없다.
그러나 이번 강윤형 씨(원희룡 후보 부인)의 '이재명은 불우한 어린 시절과 부모의 애정 결핍으로 인한 치료도 어려운 소시오패스'라는 발언은 꽤나 이슈가 됐다. 이재명 후보가 유력 대선 후보이고 강윤형 씨는 민주당의 경쟁 상대인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언론은 이것을 ‘공방’으로 보도했지만, 정치적 경쟁자를 (성격)장애인으로 낙인찍으며 편견에 기대고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폭력이 명백하다. 나아가 이런 행위는 공격받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정신질환/정신장애로 어려움을 겪어 온 사람들과 주변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행위다. 갑자기 날라온 돌에 애먼 사람들까지 다치는 셈이다.
강윤형 씨가 정신과 전문의라는 것은 이번 잘못의 심각성과 책임을 더 크게 만든다. 정신과 전문의라면 정신장애인들이 결코 모두 다 범죄자나 괴물이 아니며, 그런 식으로 함부로 낙인찍는 것이 얼마나 잘못이고 큰 상처를 주는지, 불우한 어린 시절과 부모의 애정 결핍이 곧 정신질환과 장애를 낳는다는 식의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더욱 잘 알아야 마땅하다.
강윤형 씨가 당사자를 진찰한 적도 없이 진단을 내린 것도 큰 문제이지만, 만약 진찰한 적이 있다고 해도 더욱 더 문제일 것이다. 진찰을 해서 누군가의 정신병력이나 사적 기밀을 알고 있는 의사, 상담사가 그것을 함부로 공개하고 유출한다면 그 자체로 심각한 직업윤리 위반이며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자신과 견해나 입장이 다르거나 대립하는 상대를 공격하면서 '(정신)장애'를 낙인의 무기로 사용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진영을 뛰어넘어 상당히 만연해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수 정치세력이 더 상습적이고 심각하다. 예컨대 지난 몇 년간 전사회적 사냥과 몰이를 당한 조국 교수의 부인(정경심 교수)은 유튜버와 댓글 등을 통해서 시각장애에 대한 지독한 조롱과 경멸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 정경심 교수가 출석하는 재판정 앞에서 우파 시위대는 안대를 끼고서 '애꾸눈'이라며 공개적 모독을 했다. 이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괴롭힘이자 장애인 혐오가 명백했고, 더구나 정치적 경쟁자의 가족까지 다툼에 끌어들여서 인신공격을 하며 괴롭힌 전형적인 경우였다.
더 서글픈 것은 당시에 진영을 넘어서 조국 가족을 비난하는데 목소리를 높이던 대부분의 언론과 지식인들 속에서 그것을 가로막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 전 윤석열 부인에 대한 '쥴리' 논란이 불거졌을 때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취한 태도와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조적 이중성은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윤석열 부인 논란에서 취한 대체로 상식적이고 옳은 입장(가족까지 끌어들이는 것은 과하다/ 부인의 사생활과 과거가 무슨 상관인가/ 소수자성에 대한 편견을 담은 조롱은 안 된다 등)의 진정성과 설득력을 떨어트리게 한다.
윤석열 부인 논란에서 낯설게도 '낙인과 조롱은 문제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던 <조선일보>는 이번에 강윤형 씨의 발언 이후에 '소시오패스란 무엇인가'에 대한 후속기사와 전문가 인터뷰까지 하며 열심히 불씨를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족벌언론과 보수 정치세력의 행태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큰 분노를 느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차별, 혐오, 낙인을 주특기로 삼아서 일삼는 세력에게 또다른 차별, 혐오, 낙인으로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민주당과 지지자들 일부에서 '원희룡은 분노조절장애', '윤석열과 국민의힘이야말로 소시오패스 집단'이라거나, 원희룡 후보 딸의 신상과 실명을 거론하는 경우 등이 그렇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낙인으로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수 없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면 어떤 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과거에 미국 심리학자들도 트럼프의 정신상태와 위험을 경고한 적 있다', '탄핵 당시에 박근혜에 대한 정신분석도 많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바로 당시의 그것이 문제였고 틀렸던 것이다. (함부로 장애진단을 내려서는 안된다는)'골드워터 룰'과 (진찰을 통한 알게 된 위험을 경고해야 한다는)'타라소프 룰' 중에서 무엇을 적용해야 하는가 따지는 것도 번지수가 어긋난 물타기이다. 원희룡 부인은 이재명 후보를 진찰한 적도 없기에 ‘타라소프 룰’은 애초 논의될 수도 없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트럼프라는 개인의 광기나 아니라, 트럼프주의라는 정치현상의 기반과 배경이 된 미국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신우파 집단의 이해관계였다. 탄핵 때도 일부 족벌언론과 황색언론들이 '박근혜가 무슨 주사를 맞았고, 거울방이 있었고, 침대가 몇 개였고' 하는 선정적 소문들에 주로 치중하면서 박근혜 정권이 펼친 주요 정책들이 왜 문제였고 누구의 이익을 대변해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본질은 사라져갔다. 그것은 박근혜라는 개인만 떨궈내고 기존의 구조, 정책은 유지하고 싶던 세력이 원하는 방향이었을 것이다.
대중적 편견에 기대서, 정치적 경쟁세력을 '정신나간 병자' 집단 취급하고, 잘못된 행동을 무슨 '장애'라는 식으로 표현하며 '병 걸렸냐', '입원해라'고 비웃는 것은 손쉽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다. 문제있는 세력과 동의할 수 없는 정책의 본질을 분석하고 명확하게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만 더 나은 길이고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차별, 낙인, 혐오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라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인간존엄성이 평등하게 존중되는 것입니다. 차별이 부당한 까닭은 차별을 통해 사람들의 안녕과 그들이 누려야 할 기회가 저해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평등이 부정당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해자의 지위를 격하시켜 기존의 지위를 역전시킨다고 해서 평등이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불평등이 다른 불평등으로 대체될 뿐이죠."(마사 누스바움, <분노와 용서>)
● 가해자와 황색언론의 공모가 낳은 심석희 선수의 ‘2차피해’
이번에 스포츠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심석희 선수가 가해자와 언론에 의해서 당한 공격과 피해들은 ‘2차가해’의 전형적 메카니즘을 보여줬다. 먼저 이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인 조재범 코치는 자신의 잘못을 진정성있게 반성 사과하지 않았고, 이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프라이버시, 사적 정보들이 공개되도록 만들면서 피해자의 과거 행실, 인성을 문제삼았다.(스포츠인권연구소의 성명: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400100298427194&id=106694017767825 )
재판 판결문까지 공개가 돼서 아무나 그것을 찾아볼 수 있었고, 가장 끔찍했던 것은 피해자가 결코 공개를 원하지 않았을 내밀한 사적인 메신저 내용까지 전부 유출시켜 버렸고 언론이 너도나도 대서특필했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에는 피해자가 기억하기 싫은 불쾌한 경험과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담겨있기 마련이다. 또 두 사람만의 내밀한 SNS 대화에는 공개를 예상하지 않고 쓴 표현과 내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상황이 심선수에게 얼마나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해자측은 이런 공개와 유출을 통해서 피해자를 괴롭히고, 또 피해자가 이처럼 친구의 뒷담화를 하고 욕설이 섞인 SNS 대화를 한 인격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한 것이다. 또 심선수가 승부조작을 시도했을 수 있다는 의혹과 그 SNS 대화를 한 사람과 비밀 연애를 했다는 소문도 퍼지게 상황을 만들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성폭력 피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담화를 하고 대화에 욕설이 많고 인성이 좋지 않은 여성은 성폭력을 당해도 싸고 피해를 호소할 자격도 없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런 상식은 잘 통하지 않는다.
당장 가해자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어났고, 심선수는 비난에 휩싸였고, 선수촌에서 퇴출됐고, 국제대회 출전에서도 제외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게 됐다. 앞으로는 인성이 훌륭하고, 바른말 고운말만 쓰던 사람이 아니면 성폭력 피해를 호소할 자격도 없고, 신상이 다 털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쓰디쓴 교훈만 남기고 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큰 분노와 서글픔을 느낀 것은 내가 조력해 온 운동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이 운동단체의 지도부나 몇몇 2차 가해자들에게 당한 괴롭힘들도 바로 이런 것들(사생활과 프라이버시 공개, 비공개 SNS 내용과 판결문 등의 유출, 평판과 행실과 인성 문제삼기)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현상은 성폭력의 사회구조적인 배경, 규범, 문화 등의 문제는 사라지고 개인의 책임과 대립만 남게하는 접근의 효과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가해자의 악마화로도 나타나지만, 피해자의 ‘피해자화’로도 나타난다. ‘순수하고 연약하고 보호받아야할 피해자’라는 ‘피해자상’과 어긋날 때 ‘동정’은 ‘공격’으로 변한다.
더불어서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주류언론의 황색 저널리즘 문제가 덧붙여진다. 이런 언론들은 분노와 혐오를 자극하는 경쟁 속에서 갈등과 대립을 부추겨 더 많은 클릭수와 이윤을 얻는다. 이번에 심선수를 괴롭히는 ‘단독’을 한 <디스패치>와 수많은 어뷰징 기사를 쏟아낸 <조선일보> 등이 대표적이다.(진보정치인들이 이런 족벌언론들과 인터뷰를 하거나 기획연재에 응할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둬야할 이유가 여기서도 거듭 확인된다.)
이런 언론들이 먹잇감 삼는 공인(주로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들을 다루는 방식은 항상 이런 식이다. 누군가가 부정적인 이슈로 구설수에 오르면, 그 사람의 온갖 사생활과 프라이버시를 끝없이 파헤치며 ‘단독’,‘특종’으로 내보내기 시작한다.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SNS를 지켜보다가 의혹을 제기하고 인성을 문제삼는다.
‘이혼한 전 배우자’까지 찾아내 ‘속보’를 올리고,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서 ‘이 상황에서 웃고 있는 000’라고 기사를 올린다. 결혼, 이혼, 외도 등 모든 신상이 털리고, 다툼과 갈등이 벌어지면 실시간 생중계하며 부추긴다. 말려든 이들 중에 하나가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다, 제발 그만하자’고 후회해도 이미 관련자들은 모두 만신창이가 돼 있다.
물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식으로 분노와 혐오와 갈등을 부추겨 돈을 버는 이런 수법에서 ‘가로세로연구소’같은 곳들이 족벌 주류언론들보다 더 극심하다. 그래도, 가세연의 그 지독하던 김용호 기자도 얼마 전 이렇게 후회했다. “그런 행위에 대해서 비참함을 느꼈다... 괴물을 때려잡는다고 하면서 제가 괴물이 됐다... 남을 찌르는 칼에 너무 취해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세연의 기사들을 약간만 톤다운시켜서 가장 잘 받아쓰기하고 더 널리 효과적으로 퍼트려지도록 해 온 족벌 주류언론들과 대형포털들은 별다른 후회와 반성도 없고, 오늘도 내일도 비슷한 방식으로 계속 기사를 만들어내고 클릭수를 높이고 있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고,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 #SudanCoup #ThereNoWayBack
10월 25일에 수단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것은 2019년 여름에 수단을 불타오르게 했던 거대한 충돌의 후속편이다. 당시에 수단에서는 민중 대항쟁이 벌어져 30년 독재자 알 바시르(수단판 박정희)가 물러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치적 공백 속에 신군부가 등장해 ‘과도군사위원회’를 꾸려서 시간을 끌다가 ‘하르툼 대학살’(수단판 5.18)을 저질렀다.
그러나 수단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고, 결국 주변 국가 정부들의 중재 속에 군부와 민간이 절반 정도씩 차지하는 ‘공동주권위원회’를 구성해서 국가를 공동 운영하는 것으로 사태는 어정쩡하게 봉합된 바 있다. 학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뿐 아니라, 처벌받아 마땅했던 자들이 자리를 지킨 것부터 불길한 악의 씨앗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후 이제 권력을 완전히 민간에 이양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해서, 결국 육군참모총장 엘 부르한(수단판 전두환)과 신군부는 다시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군부는 총리와 주요 민간인 지도자들을 모두 체포 감금하고, 인터넷을 중단시켰고,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해서 수십 명을 죽였다. 군부 뒤에는 오늘날 중동 ‘반동’의 보루인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이집트가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수단 민중은 결코 무릎끓지 않고 있다. 즉각적으로 1백만 명에 달하는 수단 민중이 거리로 나서서 바리케이트를 쌓고 도로를 막고 매일같이 강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고 수단 공산당(SCP), 노동조합, 저항위원회는 시민불복종과 정치적 총파업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저항의 결과로 현재 군부는 일단 총리를 다시 석방한 상황이다.
지금 수단의 상황은 미얀마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수단과 미얀마 모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국제적 투쟁의 일부이다. 양상은 좀 다르지만, 미국에서는 최근 ‘위드 코로나’로의 전환 속에서 민간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 공공부문에 그치던 파업 물결이 경계를 넘어서 흘러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촛불 이전으로 회귀를 꿈꾸는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꽤 높아지고 있다. 전두환 발언으로 윤석열은 욕을 먹었지만, 국힘당 모든 후보들은 너도나도 박정희 정신의 계승을 자처하고 있다. 주요 고비에서 기득권 우파와 그 지지자들의 눈치를 보고 타협하는 문재인 정부는 ‘노태우 국가장’으로 다시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수단의 상황은 독재와 학살의 잔재를 제대로 처벌하고 청산하지 않고 반성과 사과도 없이 섣부른 ‘용서와 화합’을 추진하면 단기적, 장기적으로 언제든 다시 반동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2년만에 다시 일어선 수단의 민중이 이번에는 반드시 독재와 학살의 뿌리를 제거하고 승리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SudanCoup #ThereNoWayBack #AgainstMilitaryCoup #SudancivilDisobedia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