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박노자] 엡스타인 스캔들이라는 거울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7. 25. 12:42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요즘 트럼프에게 엡스타인이라는, 미성년자 성추행, 성학대 등으로 악명을 얻었다가 감옥에서 자살을 한 - 내지, 일부의 추측에 의하면 "자살을 당한" - 미국 금융업자와의 관계라는 "과거"가 새로운 문제가 됐습니다. 트럼프에 대해 각종의 성추행, 성학대, 강간 등을 당했다고 고발 내지 주장한 여성들은, 그의 첫 부인을 포함해 25명 정도 되지만, 아무래도 미성년자 성착취는 또 그 죄질이 많이 다른 행위입니다.

거기에다가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트럼프의 대중적 기반을 이루는 극우 고립주의자들의 운동으로서의 MAGA의 많은 "민초" 성원들에게는, 저들의 ""으로 설정한 "글로벌리스트"의 모습이란 바로 미성년자 성애 등에 탐닉하는 "국제 금융 엘리트"들입니다. 그 모습에 딱 맞는 것은 엡스타인과 엡스타인 "셔클"에 속했던 이들인데, "셔클"의 핵심에 그들이 믿고 따랐던 그들의 지도자 역시 속했다는 건 그들에게는 "멘붕"입니다.

결국 트럼프야말로 개인적으로 그들이 증오하는 "엘리트"의 화신이라는 점은, 그들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현실이죠. 이미 무역 질서 교란으로 인한 인플레이 가속화에다가 이란 폭격, 우크라이나 지원 지속 등 고립주의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대외 적극 정책으로 인하여 트럼프로부터의 그 "콘크리트 지지층"의 민심 이반 조짐이 있었는데, 엡스타인 문제로 "MAGA의 반란"은 어쩌면 탄력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MAGA 지지자들과 달리 엡스타인 관련 이야기를 들으면 별로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각종 편법으로 엄청난 규모의 불로소득을 챙기는 이들이 그 사생활에서 도덕적일 것이라는 걸, 아무래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의 착취를 당한 노동으로 그 배를 이 정도로 불린 이들이 성을 착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고요. 한데 이런 스캔들들은 "사회학 교재"가 되는 차원에서는 상당히 유의미합니다.

평상시에 그다지 노출되지 않는 한 사회의 "속살", 대개 각종의 "게이트", 스캔들 속에서 드물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미국 사회만도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당연하죠. 예컨대 노무현 시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신정아 게이트라는 사건을 기억하시죠? 학력이 위조된 신정아 라는 분은, 노 대통령의 비서실 정책 실장(이자 경제 정책의 주된 설계자)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결국 모 불교대학 교수가 되고 모 비엔날레 총감독이 된 것입니다.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비서실 정책 실장이 해당 대학의 이사 등 "실세"들에게 청탁을 한 정황이 밝혀졌는데, 그 덕에 우리가 한국에서 사립대 교수로 임명될 수 있는 하나의 루트를 알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언론에서 나온 건진밥사 불당의 아마테라수 숭배 이야기 역시, 최고 권력층과 연결된 무속인들의 어떤 중요한 특징 (일본 신도 내지 신흥 종교들과의 지속적 관계 등)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알기도 어려웠을 것 같은, 이런 부분들이죠.

그러면 엡스타인이라는 거울에서 비추어진 신자유주의 시대 미국의 모습이란 어떤 건가요? 일면으로 보면 엡스타인이라는 인물은 거의 "아메리칸 드림"의 권화로 보일 정도입니다. 브루클린에서 비교적 가난한 정원사의 자녀로 태어나고, 학력이 "대학 중퇴"인 사람이 결국 "세계적 부호"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한데 그의 경력을 자세히 보면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신기술 개발이나 신상품 생산 등등의 경력이란 전무하고, 사실 그의 활동은 "생산"과 아무런 관련성도 없었습니다. 엡스타인은 베어스턴스라는, 결국 서브프라임 사태로 망하고 모건사에 합병 당한 투자은행의 하위직으로 일했다가 잘리고, 그 다음에 금융 사기 관연의 "컨설팅"으로 부를 모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객 중에서는 사기 피해자도 있었지만, 처벌 회피를 노렸던 사기 가해자도 있었던 것이죠. 1980년대 후반부터 그의 직장은 타워스 파이낸셜 코퍼레이션이라는 채권 회수 업체이었는데, 그 업체는 사실 폰지 사기를 그 주된 활동으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는 엡스타인 부가 나온 또 하나의 원천은 부호들의 "재산 관리", 즉 투자 상담이었답니다.

생산과 별 관계 없이 돈을 놓고 돈을 버는, 그것도 상당부분 투기나 사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레이건 이후 규제가 풀린 월가가 아니라면 이런 캐리어 (career)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엡스타인은 성범죄자이기 이전에 레이건 시대, 그리고 레이건 이후 월가의 화신 그 자체죠.

규제야 풀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시장에서 철수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실 엡스타인의 캐리어에서도 "국가", 정확히 이야기하면 "국가들"과의 "커넥션"은 핵심입니다. 엡스타인이 2000년대부터 미성년 성 착취 등으로 수사를 받았는데, 2008년에 플로리다 남부의 연방 검사 아코스타에 의해 불기소 합의가 된 사유 중의 하는 엡스타인이 "정보 기관 출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엡스타인 범죄의 죄질로 봐서는 이 불기소 합의란 거의 상상을 초월하는 "솜방망이 처벌"이었는데,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건 그 명분이었습니다. 그 실체는 그것보다 더 복잡해 보입니다. 엡스타인은 1980년대에 중동에서의 미국산 무기 거래를 대리했던 사우디 기업인을 위해 일한 적이 있지만, "국가를 위해" 일한 것보다는 "국가 지도급 인사"들과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던 것이죠.

트럼프 이상으로 클린턴과 친교가 두꺼웠던 모양이고, 공화당 이외에 특히 민주당에 기부를 더 많이 한 셈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일부 학자들이 아시아에서의 정경유착을 두고 "정실 자본주의"라고 명명해 왔지만, 사실 신자유주의 미국에서의 엡스타인이라는 "지도급 인사들의 유흥 책임자" 격인 "재산 관리자"의 케리어야말로 "정실 자본주의" 내지 "국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보면 됩니다.

레이건 이후 국가 권력이 사실상 사유화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엡스타인이 그 일부를 이용한 것이죠. 여기에서 "국가"란 미국만도 아닙니다. 전직 이스라엘 특수부대 장교가 총지배인이었던 이스라엘 스타트업에 투자한 엡스타인은, 전직 이스라엘 총리 버락과도 절친한 걸로 알려져 있죠. 사실 엡스타인과 같은 "정치 자본가"들은 이 두 국가 사이의 수많은 "가교" 중의 하나였습니다.

"엡스타인 사건"은 미국 관련의 아주 많은 신화들을 해체시키는 데에 기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의 하나는 "법치 국가 미국"이라는 신화죠. 정말 "법치"가 살았다면 불기소 합의나 개인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준 "초호화 수감" 등등은 과연 가능했겠어요?

사실 "엡스타인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한국과 비교해도 법치를 포함한 공공성이 훨씬 더 취약한 사회입니다. 본래 다수의 노예주 농장주를 포함한 부호들로 구성된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 정치로 출발한 미국은, 신자유주의 시대 말기에 다시 그 과두제(oligarchy) 사회로 회귀한 것 같습니다. 과두제 사회에서는 공공성이란 설 자리가 없죠

(기사 등록 202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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