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트럼프, 오바마와 바이든의 계승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트럼프는 많은 면에서 미국 정계의 비주류 인물입니다. 공무원 내지 군인 경력이 없는 대신에 34건의 중범죄 혐의와 작년의 유죄 판결 등이 있는 사람입니다. 무려 27명의 여성들로부터 성추행, 희롱, 내지 폭력, 폭행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죠. 그의 '콘크리트' 지지층이란 총기류 소유 활동가와 백인 인종주의자, 백인 우월주의 민병대 등이며, 그의 발언 상당수는 아예 1930년대의 유럽의 파시즘이나 미국의 극단의 고립주의를 연상케 합니다.
저런 사람이 공화당에서 득세하여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미국의 경제, 사회, 정치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트럼프의 일부 정책은 그의 극우적 배경과 신념을 반영하면서 기존의 정책 흐름과는 상당한 괴리를 보입니다. 예컨대 2024년만 해도 680억 달러 어치의 미국의 대외 원조는, 2025년에, 국제개발처가 거의 해체되고 나서 170억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고립주의라는 트럼프의 핵심 의제를 반영한 정책인데, 산업화된 부유한 나라가 이처럼 대외원조를 돌연히 4배 정도로 줄인 것은... 최근 세계사적으로 전례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외에 미국 국립보건원 (NIH) 예산의 약 40% 삭감이나 미국 국립과학재단 (NSF) 예산의 약 55-57% 삭감은, 역시 트럼프 특유의 반지성주의적 의제를 반영한, 다소 전례 찾기 어려운 정책들입니다. 이런 정책들은 장기적으로 첨단기술 대국으로서의 미국의 '국가 자살'의 성격이 짙은데, 극우들은 그걸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 다소 전례 없는 정책들이 트럼프에게 다수 있는가 하면, 그는 극우 포퓰리스트답게 일종의 "극장 국가"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이민세관단속국 (ICE)이 카메라 앞에서 이민자를 "사냥"하듯이 단속하고 군 운송기에 "화물"처럼 실어 엘살바도르에 있는 수용소에 "보낸다"는 것은 인종주의적 색채가 짙은 미국의 극우들이 엄청나게 좋아할 하나의 "쇼"에 가깝습니다. 단, 본인의 승락 없이 이 "인간 사냥 드라마"에 사냥 대상의 역할을 맡게 된 이들의 인생들은 "진짜"로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부의 트럼프 특유의 극우 정책과 "쇼"의 요소를 제외하면 트럼프의 정책의 상당부분은 오바마나 바이든 시절과의 상당한 지속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즉 트럼프라는 비주류의 등장으로 인해서 미국의 보호주의적 행보나 중-미 대립이 가속화, 심화되긴 했지만, 대체로 이 방향으로 미국이 어차피 - 천천히 - 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단 사항 별로 정리하자면:
보호 무역. 사실 "자유 무역"의 룰을 깡그리 무시하는 국내 산업 진흥책을, 이미 바이든이 구사했습니다. 2022년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나 <CHIPS and Science Act> 등은 미국의 반도체 내자 청정 에너지 관련 기술 생산자들에게 세액공제와 현금 보조금 지급을 약속했습니다. 이건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 만한 보호주의 사례인데, 바이든 정권은 세계무역기구 상소기구 (Appelate Body) 판사 임명에 협조하지 않아 그 분쟁 해결 기능이 사실상 정지됐습니다.
그러니까 글로벌 무역 룰의 파괴를, 바이든이 시작하고, 트럼프의 고율 관세 부과 등이 그 정책의 흐름을 이은 것입니다. 미국의 산업 경제가 상대적으로 쇠락하는 만큼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보호주의로의 선회는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고, 결국 "정도"의 문제였습니다.
미등록 이민자 단속. 지금 "자유주의 황금기"로 종종 기억되는 오바마 행정부 시대에는, 사실 거의 트럼프 이상으로 미등록 이민자들을 훨씬 더 많이 추방했습니다. 2013년에는 438,421명이나 추방한 것인데, 한 작은 도시의 인구 정도 될 것입니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약 20만 명을 추방한 것인데,이 속도로 가면 아마도 2025년말에는 추방 피해자의 종합적 숫자는 2013년에 약간 못미칠 듯합니다.
트럼프는 아마도 더 많이 추방하고 싶어하겠지만, 이민세관단속국의 행정력은 여기까지일 뿐입니다. 진짜 큰 차이는 "홍보"의 수준입니다. 자유주의자 오바마는 이런 이민자 단속을 "업적"으로 크게 내세우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카메라 앞에서 "인간 사냥"의 쇼를 벌이게끔 만드는 것이죠.
중국과의 대립. "아시아로의 회귀"를 시작한 것은 오바마이었으며, 그 정책이 뚜렷해진 원점은 약 2011년으로, (습근평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이 나오기도 전에)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된 시점이었습니다. 단, 오바마는 그 대립의 차원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TPP)을 통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각 국의 경제들을 미국에 더 강하게 연결시켜 중국을 고립시키려 했는데, 한국이나 일본 등을 경제적 경쟁자로 인식하는 트럼프는 - 필패일 수밖에 없는 - 미국의 국가 단위의, 단독의 대중국 대립 전략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시 대립의 강도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민주-공화 양당 사이의 차이가 있으나 중국을 "전략적인 경쟁자"로 보는 데에 있어서는 미국의 주류 정계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역시 러시아에 친화적으로 접근하여 러시아를 중국으로 약간이라도 떼려는 정책도 이미 오바마가 시도한 것입니다. 대러 관계에 있어서의 "리셋" (새 설정) 개념을 처음으로 국무부 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2009년에 도입했으며, 2010년에 신전략무기감축협정 (New START)을 체결하는 등 나름의 성과도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예컨대 이스라엘에 대한 불변의 지원 등 트럼프의 정책이란 기존의 정책 틀의 계승과 발전으로만 보입니다. 단, 미국의 패권 쇠락이 심화되고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요구가 극단적인 만큼, 그 기존의 정책들도 눈에 띄게 극단화됩니다. 예컨대 바이든 때인 2024년에 미국의 평균 수입 관세율은 2,5%에 불과했는데, 지금은...지금은 협상이 잘 타결돼도 15% 정도로, 적어도 6배나 오른 것입니다.
즉, 바이든이 조심스럽게 시작한 "자유 무역" 틀의 해체를, 트럼프가 엄청나게 급진적인 방식으로 본격화한 것이죠. 그런데 이와 같은, 급격한 '룰 깨기'는 결국 규범 권력의 대국 (normative power)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망가뜨려 미국의 세계 패권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효과만 발휘할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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