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과 주장

박노자) "주변"으로부터 본 소련의 건국사(1: 서언)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11. 2. 13:08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방법론적으로는 역사를 "중앙"으로부터 볼 수 있는가 하면, "주변"으로부터 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중앙"으로부터 본 한국 현대사라면 정부 주도의 공업화 정책, 서울에서의 근대적 변화와 수도에서의, 명문대에서의 민주화 운동, 결국 정부의 수립부터 작년의 내란의 시도까지의, 주로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역사일 것입니다.

"주변"으로부터 본 역사는 이와 상당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북 탄광에서의 착취와 저항의 역사, 부산 영도조선소에서의 민주노조운동, 제주 귤농사의 역사와 5.18로 이어지는 호님에서의 급진적인 민주화 운동의 역사 등은 훨씬 더 부각될 것입니다. 한국처럼 비교적 국토가 작고 단방제의 단일국가의 경우에도 "중앙" 아니면 "주변"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이와 같은 큰 서술의 차이가 발생됩니다.

소련 같은, 거대한 국토의 연방제 국가라면 "중앙"으로부터의 서술과 "주변" 중심의 서술은 아예 각각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레닌이 "민족들의 감옥"이라고 옳게 불렀던 1917년의 러시아 제국은, 계급 모순 못지 않게 민족 모순들은 첩첩히 쌓여 있었습니다. 러시아 중심의 제국이었지만, 그 총인구의 다수, 즉 약 55%는 비러시아인들이었습니다.

그 비러시아인들의 사정은 각각 달랐습니다. 예컨대 약 2백만 명의 독일계 주민들은 비록 귀족과 상인, 고숙련 수공업자, 자본가, 부농 등을 포함했지만, 1차 세계대전 때에 상당한 수준의 종족적 탄압을 당했습니다. 러시아 총인구의 5% 정도를 구성하는 유대계는 (그 당시 러시아는 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제일 많이 사는 나라였습니다!) 아예 탄압을 받지 않는 날은 애당초부터 없었습니다.

비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평등한 대우를 받은 적도 없었으며, 특히 자본주의 발달이 본격화된 1870년대 이후부터 사회적 모순들이 격화된 상황에서 상당수 슬라브계 주민들이 극우 성직자 등의 사주를 받아 그 쌓이고 쌓인 세상에 대한 원한을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학살 ("포그롬")"화풀이"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진 시온주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초기 발달을 했던 것이죠. , 피정복민으로서 상당히 폭력적으로 통치됐던 중앙아시아에서는 1916년에 제정 정부가 노동부대에의 징병을 선포하자 대대적인 우즈벡, 카자흐, 키르기스 인민들의 반란이 일어나 1917년 혁명의 "서곡"이 된 것이기도 했죠. , 거기에서는 민족 모순들은 이미 1917년 이전에 본격적으로 폭발된 것입니다.

이런 민족적 차별, 배제, 폭력, 탄압, 모순의 도가니에서는 저항운동 역시 민족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 혁명 세력 사이에서는 비러시아계는 그 총인구에서의 비중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한데... 꼭 볼셰비키당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당은 대도시, 특히 "중앙"이라고 할 상트-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 대공장 숙련공 중심의 정당인 만큼은 일단 "중앙"의 러시아계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1917년말 볼셰비키당 당원 수는 약 40만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는 러시아계는 약 70-75% 정도나 됐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의 러시아계의 비중보다는 훨씬 높았던 비중이죠. 러시아계 다음으로 가장 많이 대표됐던 종족 집단은 바로 유대계 (10-12%)이었습니다. 가장 차별을 받았던 마이너리티가 이처럼 많이 입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 "중앙"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받고 자란 고학력 유대계 출신들의 경우에는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 등 "한참 먼" 주변의 소수자들은 "동류 소수자"라기보다는 "후진적인 교화의 대상자"로 충분히 보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리 보이틴스키 (1893-1953) 등 고민테른의 유대계 고위직 간부들을 상대해야 했던 그 동갑의 김철수 (1893-1986) 등 비주류 (서상파 등)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종류 ("유럽인 특유의 오만함")의 불평을 종종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917년말 볼셰비키당 당원 명부를 보면 예컨대 우즈벡인의 이름을 약 50명 이상 발견할 수 없는가 하면, 야큐트 등 시베리아 소수자들의 이름은 아주 특별한 몇 명의 개인 (러시아 학교 졸업자) 이외에는 아예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 우즈벡인들이나 야쿠트인들이 사는 지역의 소비에트화는, 처음부터 주로 "중앙"에서 파견된 타민족 간부나 현지 정착민 출신의 러시아인 등 타민족 간부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이 소비에트화 과정에서의 비해방적인, 즉 다소 타율적인 측면들이 당연히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의미했습니다.

혁명과 내전, 국제 고립, 아시아로의 혁명의 확산과 같은 상황 속에서는 볼셰비키들은 - 그들이 아무리 러시아인 중심의 당이라 해도 - 소수민족과의 "동맹"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볼셰비키 정부는 초기부터 - 조지아 출신의 스탈린이 인민위원을 맡았던 - 민족 문제 인민위원부를 두고, 그 당시 세계에서 그 유례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의 대대적인 "소수자 우대" 정책을 펼쳤습니다.

"토착화", 즉 소수자 출신 당 및 국가 간부 양성, 소수자 언어로 된 교육의 확산, 소수자 문화 발달 조력 등 매우 진보적인 정책이 집행되어, 그 결과로 예컨대 이미 1920년에 공산당에 가입한 고려인만 해도 약 1천 명, 즉 전체 재러시아 고려인 인구의 1% 정도 됐습니다. 1920-30년대에 고려인들은 고려어로 사무를 처리하는 마을 단위의 민족소비에트부터 고려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고려사범대학의 건립까지, 특히 언어, 문화 차원에서는 여러가지 정책적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소수자 우대 정책"은 어디까지나 실질적 효과가 상당히 컸다는 겁니다. 한데 고려인들의 경우에는 어쩌면 유대인 이상으로 볼셰비키당에 충성이 강했던 소수자 집단이었습니다. 유대인 사이에서는 시온주의부터 분드(Bund)까지 볼셰비키들의 경쟁 세력들도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종교세력도 만만치 않았는데, 고려인 사이에서는 비볼셰비키 세력들이 결국 활동을 중지하거나 러시아 밖으로 이민가는 등 볼셰비키들은 정치적 독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비볼셰비키 세력들이 이미 국가 권력을 확보한 경우, 예컨대 멘셰비키들이 운영하는 조지아 국가나, 다슈나크 (Dashnak) 계열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운영하는 아르메니아, 무사바트 (Musavat)계열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운용하는 아제르바이잔 등의 경우는 과연 어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니면 부하라 에미르국 (Buchara Emirate)처럼, 볼셰비키들이 현지의 민족주의적 근대주의자들을 부득불 주니어 파트너로 삼아 소비에트화 사업을 진행해야했던 경우가 어땠느냐는 문제 역시 재미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이 문제들을 고찰하면서, 주로 소비에트의 군사력에 의거한 "주변부"의 소비에트화는 어떤 문제들을 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결국 이와 같은 소비에트화 과정으로부터 이어진 것은 광의의 "식민성", "식민주의" 극복의 부분적 실패이었고, 그 실패는 장차 소련 말기에는 상당수 "주변부"에서는 분리, 독립으로의 경향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저의 생각입니다. 결국 레닌이 누차 말했던 소수자들과의 "평등한 동맹"이 많은 경우에는 애당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 역사의 교훈은 앞으로도 전세계적 사회주의 운동으로 여러모로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처럼 붓을 들게 된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탄생-1)

우즈베키스탄은 최근 한국으로서도 하나의 중요한 무역파트너이자 투자처가 되기도 하고, 또 고려민족이 1937년의 강제이주 이후에 정착해야 했던 곳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봐도 한국 및 한국인으로서는 참 의미 있는 곳이죠.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란이나 중국, 한국, 일본 등과 달리 단일 국가로서는 우즈베키스탄은 1924년에,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소연방의 하나의 구성 공화국으로서 설립되고 나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우리가 현재로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알고 있는 영토에는 몇 가지 국가체들이 존재했습니다. 부하라 에미르국과 히바 칸국은 1860-7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는가 하면,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여타의 영토는 1860-70년대 러시아 정복 이후로는 러시아 제국의 직할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이 직할 식민지 영토와 부하라, 히바의 영토가 결국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는 그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혁명""제국의 재창조" 사이에서의 경계선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참 궁금하게 됩니다. 그리고 "혁명"이라고 하면 그 혁명의 성격부터 역시 궁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는 영국령 인도 등과 여러모로 아주 비슷한, 전형적인 식민지였습니다. 식민 정착민 (, "유럽인")"현지민"들은 거의 서로 "섞이는" 일은 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랬지만, 혁명 세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령 중앙아시아의 볼셰비키 등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전부 러시아(나 러시아화된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 타타르인 등) 계열의 정착민들이었습니다. "현지민"의 경우 무산계급 형성 과정은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으며, 지식인들이 거의 다 유산계급과 유기적 관계를 가진 상황에서는 지식인들의 혁명 내지 개혁 운동은 조선의 개화파처럼 (사회주의 등이 아닌) 총체적인 "근대화"를 지향했습니다.

부하라의 개화파라고 할 자디드당 (청년 부하라당: Buxoro yoshlari)은 공업화와 근대적인 세속 문화를 원했으며, 대개는 터키에서의 근대화의 성공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자디드당 지도자인 만수로프, 무히트디노프, 호자예프 등은 대개 - 일본 등지에서 근대 교육을 이수한 한국의 초기 근대주의자들처럼 - 러시아 학교에 다녀본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단순한 (터키 등의 방식의) 근대화를 원했다면 러시아인인 볼셰비키들은 대안적인 근대인 사회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일단 "근대"를 다 같이 지향하는 만큼 우즈베크인 자디드당 지지자들과 러시아 볼셰비키 사이에서는 일종의 "공동 분모"는 있었습니다. 일부 자디드당 지지자들은 1917년 혁명 이후 볼셰비키당에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우즈베크 근대 시인인 함자 니야지 (Hamza Niyazi, 1889-1929)는 그런 선구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한데 부유한 약국 주인의 아들이며, 메카로 하지 (성지 순례)를 다녀보고 이슬람 세계 근대화의 모습을 지켜본 함자는 우즈베크 사회의 "특권적인 5%"에 속했습니다.

단발령에 저항했던 1895년 그 당시의 조선인들이 그랬듯이, 대부분의 우즈베크 평민들은 혁명은 물론이고 개혁에도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습니다. 1929년에 38일의 국제여성의 날에 파란자 (paranja)를 벗어난 시골 여성들의 행진을 지도했다가 그 시골 성직자들의 사주를 따랐던 현지민들의 돌판매질에 죽고 만 함자의 비극적인 운명은, 그 저항이 얼마나 극렬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자디드당 지지자인 상인 내지 지식인들에게는 러시아 제국에의 편입은 "새로운 기회"를 의미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현지민"들에게는 러시아 제국의 모습을 띤 근대란 제국주의 침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주의 침략에 이미 치를 떨고, "서방""서방인"을 무조건 불신했던 피식민 지역 주민들에게는 최대의 관용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들의 행위자성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것은 레닌의 지론이었습니다. 문제는, 레닌의 이상론에 스탈린 같은 "현실주의자"들은 대놓고 반론도 제기했지만, 지방 볼셰비키들은 아예 반론도 없이 무시하는 것이 일쑤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없는 근대"를 원했지만, 여전히 "현지민"들을 동반자나 동지 아닌 그냥 "통치 대상"으로 인식하곤 했습니다.

191711월에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그 후의 레닌그라드)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직할령의 중앙아시아에서도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 그 정부는 처음부터 러시아인(과 러시아화된 일부 소수자)들이 주도했으며, "현지민" 대표자들을 아예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 이전까지 "현지민"들을 군에 징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총을 잡기만 하면 적대 행위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인 정부"에 불과한 "투르케스탄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에 맞서 자디드당 등 개혁주의 계열의 "현지민" 지도자들이 191711월말에 코칸드에서 "코칸드 자치 정부"라고 통칭됐던 "투르케스탄 자치 정부" (Turkiston Muxtoriyati)를 구성하자 러시아인들의 소비에트 정부의 지도자인 표도르 콜레소브 (1891-1940)는 군을 이끌고 코칸드를 공격하여 "코칸트 자치 정부"를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레닌은 통탄했지만, 그로서는 중앙아시아 볼셰비키들을 제어할 방법이라고 없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중앙 정부의 압력에 못이겨 중앙아시아 볼셰비키들도 "현지민" 대표자들을 그 정부 기구에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우간,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시발점은 제국주의 시대의 연장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이었습니다. 코칸드가 진압된 뒤에는 다음 타깃은 바로 명목상의 "보호국"이었던 부하라이었던 것이죠.

러시아 볼셰비키들과 중앙아시아의 근대 지상주의자들은 서로를 필요로 했습니다. 아시아를 통해 세계 혁명을 이루려 했던 볼셰비키들은 일단 중앙아사이에서부터 제국주의적 불평등과 폭력 없는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모범"을 보여야 했는가 하면, 자디드당이 외부의 도움 없이 고속 근대화를 이룰 수 없다고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 두 세력은 서로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부터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현지 볼셰비키들의 "대러시아 쇼비니즘", 즉 제국주의적 아비투스가 그 만큼 현저했던 것이죠. 나아가서 이 근대주의자 엘리트와 "현지민" 다수의 관계 수립은 더더욱더 곤란했습니다. 결국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역사의 초기는 연속적인 폭력으로 점철하게 된 것입니다.

(기사 등록 20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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