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혁명과 문학: 글로벌 사회주의 문화의 궤적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아래에는 제가 2026년 4월 2일 홍콩대에서 주최한 학술회의 (Afterlives of Socialist and Leftist Culture: Transnational Movement beyond East Asia)에서 발표한 기조 연설문 (영문: Revolution and Literature: The Trajectories of Global Socialist Culture)의 간추린 국역본입니다. 동료 분들의 많은 비판과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1. 마르크스의 예술관과 문학 이해
마르크스의 예술관은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 조건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예술이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매력을 지니는 이유를, 그것이 자본주의적 소외 이전의 사회에서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찾았다. 즉, 예술은 특정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인간 경험의 총체를 반영하며, 그 원형적 성격이 후대에도 지속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예술을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는 인식의 장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는 발자크의 사실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작동 원리를 탁월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찰스 디킨스와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생산' 개념을 확장하여, 예술이 단순히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까지 생산한다고 보았다. 즉, 예술은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과 인식 구조를 형성하는 능동적 장치이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이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이른바 혁명적 예술 개념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2. 레닌의 문학관: 반영과 형성의 이중성
레닌의 문학관은 문학을 현실의 반영이자 동시에 의식 형성의 도구로 이해하는 이중적 관점에 기반한다. 그는 레프 톨스토이를 정치적으로는 비판하면서도, 농민 의식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높이 평가하였다. 톨스토이는 농민의 고통, 교회와 국가의 위선, 계급 사회의 폭력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레닌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1906년)를 통해 문학이 계급 의식 형성과 정치적 주체의 탄생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작품은 평범한 개인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며, 노동자 계급의 교육과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평가되었다.
레닌은 또한 국내외 고전 문학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해야 한다고 보았다. 알렉산드르 푸시킨, 이반 투르게네프, 니콜라이 고골 등 기존 문학 정전은 미학적 가치뿐 아니라 변혁적 잠재력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다만 당에 소속된 작가들은 높은 미학적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당파성 ("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결국 레닌에게 문학은 미학적 현상이자 사회정치적 실천이며, 대중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형성하는 핵심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3. 사회주의 문학의 보편성과 종교적 요소
사회주의 문학은 단순한 계급 문학을 넘어 보편적 인간 경험을 포괄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기독교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혁명적 주체를 일종의 세속적 성인으로 형상화한다. 이는 초기 볼셰비키 문화 정책의 핵심 인물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와 함께 전개된 ‘신(神) 구축주의’ (God-building)사상과 연결된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주의를 새로운 보편성의 형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자기희생과 집단적 구원 서사는 고대 신화(프로메테우스) 및 원형적 서사 구조와 연결되며, 이는 사회주의 문학이 인류 문학 전통의 보편적 모티프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트로츠키와 사회주의 문화론
레프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를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계급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필요성은 제한적이며, 오히려 기존의 문화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 자신은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배척 당하여 결국 암살됐지만, 그의 문학론은 이후 소련 문학 정책에 일정 부분 계승되었으며, 특히 혁명 이전 중산층 출신 작가들(‘동반자’)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들은 이후 소련 문학 정전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5. 1920~30년대 소비에트 문학: 다양한 혁명 서사의 전개
초기 소비에트 문학은 혁명 프로젝트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였다.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는 혁명 유토피아의 실패와 존재론적 불안정을 드러낸다. 그 주인공들은 예수 (알렉산드르 드와노프)나 돈키호테 (코펜킨) 등을 연상케 하고, 작가는 그들을 동감하면서도 그 실천의 불가피한 한계를 드러낸다. 동시 체벤구르라는 유토피아의 시도는 16세기 독일의 뮨스터 코뮨 등 기존의 종교적인 "지상낙원" 건설 시도들을 연상케 한다.
○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은 혁명을 역사적 불가역의 힘이자 비극적 충돌 과정으로 묘사한다. <일리아드>처럼 이 작품에서도 분명한 악인도 선인도 없고, 충돌과 동족상잔은 불가피한 "비극"으로 묘사된다.
○ 보리스 필냐크 역시 혁명을 자연적 격변과 같은 혼돈으로 표현한다.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초기에는 혁명적 낙관을, 이후에는 관료주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낸다.
이 시기의 문학은 전반적으로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복합적인 태도를 취하며, 인간 존재의 비극성과 종교적 요소를 동시에 탐구하였다.
6.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국가 건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학은 국가 주도의 계몽 프로젝트에 통합되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 노선으로 자리 잡았다. 문학은 혁명적 주체가 아니라 국가가 승인한 소비에트적 주체를 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1934년)의 주인공은 세속적 성인의 형상으로 제시되며, 집단주의적이고 국가 건설에 기여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구현한다. 동시에 그에게 주어진 시련, 유혹 등의 난관이나 "이단과의 투쟁"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충돌 등) 등은, 고전적인 교회 성인전을 방불케 한다.
7. 후기 소비에트 문학: 쇠퇴와 성찰
스탈린 후기 문학은 혁명적 주체 형성보다는 충성스러운 시민의 형상화에 집중하였다. 이후 바실리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 (1959년 탈고, 1980년 해외 출판)은 혁명 이후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인간의 자유와 순응 문제를 중심에 놓는다. 그로스만의 세계에는 "긍정적 주인공"은 없으며, 천년왕국적 "지상낙원"이라는 미래상보다 현재의 무수한 고통과 폭력 속에서의 "작은 선행"만이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로 서술된다.
1970년대에 이르면 유리 트리포노프의 작품들은 혁명 프로젝트의 사실상 종언을 선언하는 양상을 보인다. 혁명적 신념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부정되지도, 긍정되지도 않은 채 형식적으로만 유지된다. 트리포노프의 주인공들은 오로지 "출세"와 "잘 살아보세"만에 진정한 관심을 보이며, 국가의 명분 차원의 혁명 서사를 그저 "교회의 의례" 정도로 인식하고 맘에 담지 않는다. 옌롄커 (阎连科)의 <심경> 같은 최근 작품 속의 오늘날 중국 사회상과 겹쳐지는 사회상이다.
8. 동아시아 혁명 문학과 보편성
동아시아의 혁명 문학 역시 보편 지향의 서사 구조를 공유한다.
○ 조명희의 『낙동강』 (1927년)은 역사 발전과 희생적 영웅 서사를 결합한다. 박성운과 로사 등의 주인공들은 예수와 그 사도를 방불케 하는 점에서 고리키의 영향력을 볼 수 있다.
○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1922년 작품인 은 『 不逞鮮人』은 타자와의 화해를 통해 자기 극복, 공포의 극복, 즉 일종의 "극기"를 그린다.
○ 바진의 『家』 (1931-32)는 가부장제에 대한 반항을 통해 혁명의 은유를 제시한다. 『紅樓夢』에 대한 일종의 근대적 "응답"이라는 차원도 지니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혁명은 단순한 계급 투쟁을 넘어 민족, 젠더, 인간 해방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기존의 전통 (성경 서사, 동아시아 고전 문학 등)의 연장선상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9. 결론
사회주의/혁명 문학은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근대성을 위한 미학적 코드를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기존의 문학, 나아가서 종교의 전통까지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상상하려는 포괄적 프로젝트였다. 초기 사회주의 문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
1. 정전(고전) 전통의 계승
2. 보편적 서사 구조(희생, 구원, 변형)의 활용
3. 종교적 상징과 세속적 이념의 결합
4. 혁명에 대한 비판적·성찰적 접근
이러한 경향은 1930년대 이후 스탈린주의 국가가 강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체제 속에서 점차 국가 중심적 서사로 재편되지만, 1920년대 문학이 보여준 복합성과 긴장은 이후에도 중요한 참조점으로 남는다. 오늘날 특히 한국이나 중국 등의 노동운동과 결합된 문학 등은 혁명 문학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계승한다.
비록 동구권의 붕괴와 중국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의 편입 등 정치적·역사적 변화 속에서 그 동력이 약화되었지만, 이러한 문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탈자본주의적 상상력을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동시에 옌롄커와 같은 현재 중국 문호들은 실천되지 못한 유토피아의 "약속"을 직시하면서 혁명 문학에 대한 매우 성찰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기사 등록 2026.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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