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작가로서 빅토르 세르주
이언 버철(Ian Birchall)
번역: 두 견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는 56세의 나이로 멕시코 망명지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혁명적 격동의 놀라운 연속을 겪으며 살았다. 아나키스트 출신이면서 볼셰비키 혁명에 함께했고 스탈린주의에 맞서면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성찰적 평가를 남긴 세르주의 삶과 작품은 우리가 유럽의 격동적인 20세기를 이해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글은 미첼 아비도르(Mitchell Abidor)가 쓴 <틀을 벗어난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Unruly Revolutionary)(플루토 출판사, 2025)에 대한 서평이다.
출처: https://jacobin.com/2026/04/victor-serge-biography-literature-russian-revolution

많은 독자는 빅토르 세르주의 문학 작품, 특히 소설 <툴라예프 동지 사건>(The Case of Comrade Tulayev)과 매혹적인 자서전 <어느 혁명가의 회상>(Memoirs of a Revolutionary)에 익숙할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20세기 전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불러일으킨 희망,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재앙적인 결과에 집중되어 있다.
이제 미첼 아비도르는 위대한 세르주 연구자이자 번역가인 리처드 그리먼(Richard Greeman)이 수집한 문서들을 활용하고 광범위한 연구를 바탕으로 세르주의 전기(傳記)를 썼다. 아비도르가 <어느 혁명가의 회상>에서 세르주 자신이 제시한 설명을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르주의 정치적 진화를 맥락 속에서 보여주는 흥미로운 세부 사항들을 많이 추가했다.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벨기에에서 빅토르 리보비치 키발치치(Viktor Lvovich Kibalchich)라는 이름으로 러시아계 가정에서 태어난 세르주는 십 대 시절에 이미 놀라운 지적 발전 과정을 거쳤다(그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아나키스트 환경에서 작가이자 편집자로 활동하다가 결국 5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아비도르는 책의 첫 4분의 1을 아나키스트로서의 세르주 시절에 할애한다. 혁명가는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어려움과 모순으로 점철된 경로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세르주는 항상 아나키즘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동정심을 유지했지만, 아비도르는 파리 아나키스트 진영에 깊이 반동적인 요소들이 일부 있었음을 보여준다.
급진적 개인주의의 영향과 사회 변화 가능성에 대한 뚜렷한 비관주의는 세르주가 집단행동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음을 의미했다. 그의 정치 활동에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가져온 것은 훗날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겪은 대중 투쟁의 경험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세르주의 발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대량 학살로 황폐해진 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세르주에게 볼셰비키당의 권력 장악은 희망의 순간이었다. 즉, 완전히 다른 사회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젊은 시절의 세르주는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사변에 몰두했었다. 이제 실제 혁명이 일어났고, 비록 그것이 자신의 이전 생각들과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큰 어려움을 뚫고 유럽을 가로질러 볼셰비키의 대열에 합류했다.
혁명 후의 러시아는 낙원이 아니었다. 주된 이유는 — 아비도르가 더 강조했을 수도 있는 부분인데 — 서구 강대국(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새로운 체제를 전복하고 파괴하며, 그 체제가 체현한 희망이 전 세계 다른 노동자들에게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었다. 외국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하여 국내 반혁명 세력과 합세했으며, 소위 내전은 국가 방위 전쟁이었다. 페트로그라드 무장 방어전에 참여했고 강력한 역사서인 <러시아 혁명 제1년>(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을 쓴 세르주는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비도르가 보여주듯이, 확실히 세르주는 혁명 초기 몇 년 동안 비판과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그의 주된 동기가 혁명을 방어하고 전파하려는 헌신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1921년 볼셰비키에 맞선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을 지지하기까지 했다(비록 나중에 이 생각을 바꾸었지만 말이다). 세르주는 "이중의 의무(double duty)"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즉, 혁명의 외부 적들과 맞서야 할 필요성뿐만 아니라 혁명 내부의 부정적 요인들과도 동시에 맞서야 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세르주는 혁명이 서구로 확산되어야만 살아남고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20년대 중반, 그는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독일 혁명의 성취에 기여하고자 중앙유럽으로 이동했다. 독일 혁명에 대한 희망이 뒤늦게 돌이켜보면 얼마나 환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일지라도, 세르주가 일련의 언론 보도를 통해 묘사한 1923년의 독일은 사회적, 경제적 붕괴 직전에 있었으며 정말로 혁명의 문턱에 선 사회처럼 보였다.
세기의 한밤중
혁명에 헌신한 10년은 어떤 의미에서 세르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는 그에게 이후의 혁명적 변형과 배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이상과 희망의 비전을 제공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상황은 파국적으로 변했다. 레닌은 죽었고 트로츠키는 망명길에 올랐으며, 조지프 스탈린이 소련에 대한 통제력을 점점 더 장악해 갔다.
세르주의 동정심은 트로츠키를 향해 있었다. 세르주는 트로츠키와 의견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정권은 세르주가 혁명의 지지자였다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 아니, 정확히는 그 이력 때문에 — 그가 좌익 반대파를 지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체포되어 가혹한 신문을 받았고, 모스크바에서 9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유배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세르주는 운이 좋았다. 그는 유배되었지만 강제수용소로 보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파에 동조했던 그의 동시대 인물 대부분은 죽음을 맞이했다. 세르주가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에 있는 친구와 동지들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집단이 그의 석방을 위해 격렬한 캠페인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좌파 진영 내의 우군이 필요했던 스탈린은 그를 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국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외국에 수감된 사람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아왔고,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기도 했다. 세르주의 석방은 그러한 캠페인이 적어도 가끔은 효과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르주는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저널리즘과 소설 양면에서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스탈린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다른 위협들이 남아 있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다.
1939년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입성하며 승리한 후, 프랑스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이라는 파시즘 정권에 의해 삼면이 포위되었다. 그것은 세르주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붙인 표현대로 "세기의 한밤중(midnight in the century)"이었다.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되고 극악한 우익 반유대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세르주는 유럽을 떠나 북미로 탈출하고자 했다.
이것은 망명 신청자로서의 세르주의 단계였다. 아마도 세르주와 같은 정치적 과거를 가졌거나 그와 같은 문학적 재능을 가진 망명 신청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는 배의 좌석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세르주는 그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난민이 직면하는 문제와 고통을 상기시킨다.
세르주는 유럽의 많은 난민을 환영했던 멕시코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레온 트로츠키가 그곳으로 유배되었다가(스탈린주의 요원에게 살해당했다). 세르주는 전후 세계에 대한 다양한 희망과 열망을 품은 유럽 망명객들에 둘러싸여 마지막 몇 년을 보냈다. 그는 출판물과 수첩에 글을 계속 썼다. 그는 1947년, 투쟁과 박해로 점철된 삶에 지친 채 극심한 빈곤 속에서(그의 구두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불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답해지지 않은 질문들
오랫동안 세르주를 존경해 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 아비도르 책의 결론 부분은 아마도 가장 슬픈 대목일 것이다. 아비도르는 세르주가 말년에 쓴 출판 및 미출간 글들을 꼼꼼히 검토했고, 말년의 세르주가 공산주의를 "주적(main enemy)"으로 보았다고 설득력 있게 결론짓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스탈린주의의 폭력은 소련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멕시코의 친스탈린 공산주의자들은 세르주에게 물리적 공격을 가했고 심지어 그를 살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들을 자신의 주적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실 세르주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떻게 변화했을지 알기는 어렵다. 그는 1947년 가을에 사망했는데, 냉전은 미국 대통령이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국가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약속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선포와 서유럽 공산당들의 전투적인 파업으로 전환과 함께 그해 초에야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40년 동안 세계 정치는 미국과 소련 블록 간의 대결에 의해 지배되었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같은 일부 전직 공산주의자들은 서방 진영의 충성스럽고 열정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나 C. L. R. 제임스(C. L. R. James), 핼 드레이퍼(Hal Draper),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 그리고 토니 클리프(Tony Cliff)와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훨씬 더 작은 조류도 있었는데, 이들은 다른 견해를 취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워싱턴과 모스크바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적 경로를 모색했다. 세르주가 한국과 베트남에서 미국인들을 지지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그의 삶을 특징지었던 혁명적 독립의 정신을 고수했을까? 우리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세르주가 직면했던 선택의 범위는 멕시코에서 그와 함께 망명 생활을 했던 몇몇 동료들을 살펴봄으로써 예시될 수 있다. 마르소 피베르(Marceau Pivert)는 1930년대 프랑스 사회당 내 극좌파 파벌의 지도자였으며, 이후 탈당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그룹을 결성했다. 1945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사회당에 재입당했다.
피베르는 프랑스 공산당과의 모든 협력에 반대하면서도, 사회당의 우경화 경향에 점점 더 불만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는 식민지 해방 대의에 계속 헌신했으며 알제리 독립 투쟁에 대한 탄압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는 1958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 사회당 지도부와 최종적으로 결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르주의 또 다른 측근인 훌리안 고르킨(Julián Gorkin)은 다른 길을 걸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그는 스페인 공산당에 왼쪽에서 맞섰던 POUM(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의 지도자였다. 멕시코로 망명한 그는 세르주가 멕시코 비자를 받는 것을 도왔고, 그와 함께 멕시코 스탈린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섰다.
그러나 1948년 파리로 이주할 무렵, 고르킨은 냉전 체제에서 반공주의자로 확고하게 전향했다. 그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금 지원과 통제를 받았던 문화자유회의(Congress for Cultural Freedom)를 대신하여 스페인어 잡지 <콰데르노스>(Cuadernos)의 편집장이 되었다.
희망과 배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르주의 관점이 주로 유럽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비록 그가 1927년 중국 봉기에 대해 매우 통찰력 있는 기사를 쓴 적이 있지만, 그 외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식 식민지 제국의 붕괴는 1945년 이후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였다. 영국은 인도에서 쫓겨났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비참한 전쟁을 치렀다. 세르주가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세르주의 죽음이 답해지지 않은 질문들을 남겼을지라도, 그의 삶은 사회주의 좌파 정치에 대한 놀라운 기여였다. 아비도르의 서술은 매혹적이고 잘 기록된 이야기이며,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세르주 자신의 저작을 읽게 되기를 바란다.
세르주의 모든 삶과 작품은 하나의 모순 — 1917년이 영감을 준 아주 실재적인 희망이 어떻게 스탈린주의라는 배신으로 이어졌는가 하는 방식 — 에 의해 지배되었다. 세르주가 이를 요약했듯이, "우리는 위대한 노동자들의 승리로부터, 생산 수단의 사회주의적 소유라는 토대 위에서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깊이 반사회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정권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20세기 세계를 형성한 것은 바로 이 모순이었다. 우리 자신의 세기에서 한밤중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도 그 유산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 거의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종종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린다. 냉전의 기억과 매카시즘적 반공주의는 우리와 함께 남아 있다. 빅토르 세르주의 삶과 작품으로부터 배울 점은 여전히 많다.
(기사 등록 2026.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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