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과 주장

[박노자] 소피아 박 – 한 고려인 여성 인테리의 운명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6. 9. 27. 12:44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사학에서 최근에 각광을 많이 받는 분야 중의 하나는 미시사입니다. 미시사 중에서도 제게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에고도큐먼트(Ego-document, 자기 문서: 일기, 편지, 자서전, 회고록, 수기 등)의 연구입니다. 개인의 삶과 의식에서 반영되고 굴절된 한 시대의 상 (像)을 보면, 그 시대의 성취와 동향, 갈등과 모순 등에 대해 훨씬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거시사가 자꾸 놓치는 부분들을, 미시사를 통해 챙겨 한 시대, 한 사회에 대한 그 당시에 개개인이 체험했던 현실에 더 가까운, 핍진감이 있는 이해를 해볼 수 있습니다.

제게 지난 몇년 간 가장 흥미로웠던 미시사 차원의 에고도큐먼트 중의 하나는 바로 박걸운/소피아 박이라는 고려인 여성 관련의 RGASPI (러시아 사회정치사 국립 문서보관소) 문서들입니다. 일단 한 가지 점을 먼저 분명하게 하겠습니다. «박걸운»이라고 네이버에서 검색하셔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박걸운의 남편 김상택 (1900-?)은 사회주의 경향의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사에서 알려져 있어도, 박걸운은 거시적인 ‘역사’에 그 이름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한데 그녀 관련의 문서를 들추다 보면 혁명의 급류를 헤엄치고 있었던 그 당시 제1세대 고려인 인테리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고통을 당하고 무엇을 욕망했는지 실감 있게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체험사 (體驗史)를 통해 ‘공식적인’ 거시사를 보완하지 않으면 그 거시사에서는 뭔가가 계속 부족할 것입니다.

박걸운의 인생이 재미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인생 속에서 각종의 극적인 ‘이동’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리적 이동들도 그렇고 계급간의 사회적 이동들도 꽤나 많았습니다. 박걸운은 1902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도급업자이자 상점 주인, 즉 소기업인이었지만, 소수자의 영세기업이란 늘 불안했습니다. 1908년, 즉 박걸운이 6살 때에는 아버지의 가게가 화재로 소실되고, 부도난 아버지는 살 길을 찾아 캄차카 반도의 수도인 페트로파블로브스크-캄차스키로 이동했습니다.

지금도 캄차카에 가는 사람들이 흔치 않지만, 1900년대의 캄차카란 조선인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인들에게도 «가장 먼 땅», «땅끝»이었습니다. «땅끝»인데도 식민주의와 가난, 차별에 쫓겨 어떻게든 «팔자를 고쳐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고려인들이 그 머나먼 캄차카까지 찾아갔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은 박걸운의 아버지와 그 가솔들이었습니다.

그 캄차카에서 나름 뿌리를 내리게 된 1910년에는 캄차카 거주의 고려인 총수는 84명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박걸운의 아버지는 거기에서 관청에 장작을 날라주는 작은 사업을 시작하여 결국 본인 소유의 주택과 말 두 마리, 그리고 소라는 재산을 피나는 노력으로 축적했습니다. 그 당시 고려인 다수의 궁핍한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 정도는 거의 중산층으로 간주됐을 겁니다.

뼈 빠지게 일했던 아버지의 덕이겠지만, 박걸운은 캄차카에서 러시아 중학교를 나와 러어를 거의 원어민처럼 할 수 있는 이중언어 화자가 됐습니다. 혁명가가 된 최성우, 남만춘, 한명세, 김만겸 같은 고려인 2세들은 거의 대부분 그녀와 같은 러시아 태생의 이중언어 화자들이었습니다. 한데 아버지의 소득이 모자라서인지 박걸운은 16세에 중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취직해야 했습니다. 그녀가 찾은 일자리는 인쇄소의 문선공(文選工)이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문선공의 임금은 노무자 중에서는 제일 높았는데, 이 일을 하는 전제조건은 인쇄의 언어인 러어에 대한 완벽한 구사였습니다. 소수자로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박걸운이 이 문턱을 넘어 문선공이 됐습니다.

보다 나은 조건을 찾아 그녀는 1920년에 그녀의 탄생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보수적인 러시아 근왕주의자들의 신문사에 문선공으로 취직했습니다. 온갖 편견들이 많았을 것 같은 그 쪽에서 그녀를 받아준 걸 보면, 그녀의 러어 구사는 완벽에 가까운 만큼 언어적으로 이민자의 ‘티’가 거의 나지 않았을 겁니다. 한데 1922년에 블라디보스토크가 붉은 군대에 함락돼 그녀가 다녔던 인쇄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실업자가 된 그녀는 창고 노동자가 됐다가 «러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고려인 여성 노동자»라는 차원에서 지역 공산당 간부들에게 스카웃됐습니다.

연해주의, 시베리아의 14만 명의 고려인들에게 «당적 교양»을 주고 그들을 대표하면서도 당의 입장에서 «관리»를 할 줄 아는 고려인 민족 간부가 시급히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특히 고려인 여성들은 공산당과 소비에트 당국의 영향에 거의 노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중 90% 이상은 문맹이었으며 러어를 거의 해득하지 못했습니다. 당 간부들의 입장에서는, 문선공이 될 정도로 유능했던 박걸운은 향후 당과 고려인 여성 사이의 가교 (架橋)가 될 훌륭한 ‘재목’이었습니다. 스카웃된 그녀는, 지역당의 파견으로 바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갔습니다. 그녀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직전에 공산주의청년단 (공청)에 가입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그래도 모스크바로 파견한 걸 보면 그녀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소수자, 특히 그 중에서도 소수자 여성 출신 간부 양성은 혁명의 가장 바람직한 측면 중의 하나라고 여겨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한데 혁명의 파도를 타서 여태까지 생각하기 어려웠던 «출세»를 향해 가게 된 이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출신 지역이나 계파 등도 달랐지만, 또 제한된 자원 (고려인 사회 내지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권력과 권위)을 놓고 벌이는 «동류의 경쟁»도 적지 않았습니다. 박걸운이 공산대학에서 보낸 1923-6년 사이 역시 풍파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거기에서 그 남편이 된 김상택이라는 혁명가를 만나 결혼도 하고 1925년에 학생 신분으로 딸 마야도 출생했지만, 김상택은 특히 연해주 상해파 내지 간도 출신의 일부 학생들에게는 얄미운 투쟁 대상이었습니다. 러어 구사가 완벽하고 당의 신뢰를 많이 받아 당세포의 3명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 된 김상택의 파워가 지나치다고 봤던 것입니다. 김상택에 대한 미움은 박걸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해서, 그녀는 학생 시절에 아픈 경험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박걸운과 김상택은 과연 어떻게 맺어졌을까요? 러시아에 1912년에 온 1900년, 평양 태생의 김상택은 러어 구사가 잘 되는 등 러시아 사회에 상당히 잘 편입된 «경력이 있는» 조선 이민자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1912년 이후 주로 모스크바에서 거주했습니다. 1921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 문을 열자마자 거기에 입학을 한 김상택은 1923년4월부터 그 해 가을까지 최성우 등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또 다른 고려인 학생과 함께 연해주로 출장차 파견됐습니다. 그 때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내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조직해야 했을 코르뷰로 (고려부)도 활동중이었는가 하면, 러어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한 고려인 간부들이 일단 지역당 차원에서 대단히 필요했던 시기라 김상택은 이렇게 ‘지원’ 차원에서 파견이 된 모양이었습니다. 아마도 박걸운을, 그가 그 파견 기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만났을 것입니다. 박걸운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정식 입학한 것은 1923년10월25일이었는데, 이는 대략 김상택이 블라디보스토크 출장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시기와 같습니다. 둘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인연을 맺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모스크바까지 같이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박걸운이 어떻게 해서 김상택의 눈에 들어가게 됐을까요? 유망한 공산당 당원이며 훈련 중인 후보 간부였던 김상택은 아마도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서 상당히 가시성이 있었던 존재였을 것입니다. 한데 박걸운의 가시성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1년4-6월에 저명한 독립운동가 이강 (李剛)이 인솔한 연해주의 조선학생음악단이 조선을 방문하여 경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방 도시에서도 공연을 했는데, 그 단원 중의 한 명은 바로 박 소피아, 즉 박걸운이었습니다. 음악단은 노래와 춤을 선보였는데, 박소피아는 «흉아리» (匈牙利), 즉 헝가리 춤을 무대에서 추었던 것입니다 (양민아, «1920년대 러시아한인예술단 내한공연의 무용사적 의미: 디아스포라 문화연구의 관점으로», 무용역사기록학, 34집, 2014에서 확인).

그 무서운 1937년에, 소련의 비밀 경찰들에게 총살 이전의 취조를 당하면서 박걸운은 그 당시의 모국 방문은 «내 인생의 유일한 외국 나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한데 그녀는 음악단에서 정기적으로 참여했다면 아마도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고향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종종 노래와 춤의 무대에 섰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김상택과 처음 만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혁명가이자 당의 간부가 되려면 야심 많은 청년과 문선공 출신의 아마추어 무용가가 1923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서 한 쌍의 커플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리고 나서는 박걸운이 김상택과 함께 모스크바행 기차를 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가 지역당의 정식 파견으로 모스크바의 공산대학에 갔지만, 그녀의 공산대학 입학을 둘러싼 잡음은 비상했습니다. 공산당원 오창우와 만주와 연해주에서 공청활동을 벌였던 주청송, 박윤세 등은, 아예 서명을 받아 «공청에 정식 입단조차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아직 하지 못했던 처녀 박걸운양»이 «무자격»이라서 입학이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걸운이 비록 러어 해득 등 공부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다 해도 그 어떤 좌파적 활동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특수 대학인 공산대학에 들어가서 안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투서 활동’의 이면에서는, 김상택과 박민영 (박 니키포르) 등 공산대학의 조선학부에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게 된 «러시아화된 조선인» 당원에 대한 일부 학생들의 반감도 작용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와 또 다른 부분은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의 ‘연줄’, ‘정실 인사’에 대한 널리 퍼져 있었던 거부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같이 후진적이고 가난한 사회가 바로 ‘사회주의’로 진입할 것이라는 걸 현실적으로 기대하기가 어려워도, 혁명은 과거의 무수한 피억압자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엄청난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타서 신분상승하는 것이 본인의 «경력» 내지 «노력»에 걸맞아야 하며 단순히 개인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안된다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요청이었습니다. 혁명으로 ‘기회’를 얻은 대중들은 ‘공공성’의 실현을 요구했습니다. 한데 동시에는 현실 속에서는 밑바닥에서부터 공산당의 최상층까지 «출세»와 «개인적 연줄»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습니다. 고려인 사회만 해도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이영선이 연해주 도당 소수민족부 고려과 과장이 되어서 자기 «인연»들을 챙긴다는 여론이 있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학생 사이에 불만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데 박걸운이 단순히 «신랑을 잘 만나서 개인적 추천의 힘으로 공산대학 입학이라는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기에는, 공부 과정이나 그 뒤에 그녀가 발휘한 그녀 실력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녀는 «열성적이고 규율적이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레닌주의나 경제학에 약했지만 지리학 등의 과목에 좋은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간부직 취임에 아직 부적절»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일단 퇴학을 당하지 않고 3년간 공부한 것만 봐도 공부에 열망과 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공부»를 좋아한 젊은 고려인 여성의 삶은 곤란이 적지 않았습니다.

1924년9월에 폐결핵이 발견돼 휴양소에 가야 했으며, 1925년2월부터 첫 아이 임신을 하여 임신한 채 수업 들어야 했습니다. 소련은 «약자를 챙기는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만큼 폐결핵에 걸리면 휴양소에 무료로 보내주고, 임신하면 추가적인 식량 섭취를 보장하는 등 나름의 혜택이 있었습니다. 결국 딸 마야를, 1925년말에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휴학도 거의 하지 않고 공부하면서 출산한 것이었습니다. 한데 삶은 궁핍해도 아주 궁핍했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침대 시트마저도 없어 1926년에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나왔을 때에 기숙사에서 사용했던 침대 시트를, 기숙사 행정관에게 부탁하여 가져가야 할 정도로, 기본적 소비품이 부족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공공성에 대한 열망과 사실상의 ‘연줄 사회’, 복지 국가의 초보적 발전과 상당한 궁핍함이 다 공존했던 1920년대의 소련…캄차카 소녀 박걸운의 모스크바살이에서는 이 부분들이 골고루 다 보였습니다. 한데 과거와 비교했을 때에 확실히 모습이 다른 사회였습니다. 조선 남학생들이 여성 앞에서 쌍욕을 해댄다 하여, 그들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여 이런 «공산주의적 여성관의 결핍»에 대한 «동지적 재판»을 열 수 있었던 것은 공산대학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물론 남성이 여전히 주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남녀평등이 선포되고 여성은 이제 동등한 «동지»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습니다. 원칙상 졸업 이후 남자 못지 않게 «사회주의 건설 참여»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1920년대는 재소련 고려인 사회로서 희망찬 시기였습니다. 소비에트 정권은 소수자들을 중요한 지지기반으로 인식하는 만큼 그들 관련 각종 문화, 교육 진흥책에 상당한 예산을 책정하고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문맹 퇴치는 가장 대표적인 사업 분야였습니다. 1920년대 초반 같은 경우 연해주 고려인들의 문자 해독율은 조선 국내와 크게 다르지 않아 21,7%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박걸운이나 그 남편 김상택처럼 러시아 고교까지 나온 젊은이들은 고려인 사회에서 그 당시로서 보기 드문 «최고 지식인»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데 지역 당국의 집중적 노력 덕에 1930년에 연해주 고려인들의 90%나 문자 해독이 가능했습니다. 문자 해독 가능자가 22%에 불과했던 그 당시 조선에 비해서는, «붉은 연해주»는 그야말로 «대안적 문명», 보다 나은 근대의 변종으로 보일만도 했습니다.

소비에트 당국이 고려인 등의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책을 내놓는 만큼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특히 젊은 고려인 식자들의 충성도 역시 높았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졸업생이라면 아예 혁명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일했던 사람들은 다수였습니다. 김상택 역시 개인적 권력욕도 없지 않았겠지만, 혁명적 열정은 결코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1925년, 김상택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조선 국내로의 밀파 명령을 받았습니다. 조선 국내로 밀파되어, 그는 거기에서 고려공청의 사업을 서울 등지에서 해야 했습니다. 1925년에 조선으로 밀파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생들은 박니키포르 (박민영), 전정관, 이지탁, 김상택, 한응갑, 조희창, 한익주, 고광수, 이병무, 김호반, 박원희, 노상열 등 김상택을 포함해 도합 12명이었습니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1926년의 기념비적인 6.10운동을 이끈 이지탁과 박니키포르 등 4명은 결국 1927년 이전에 이미 잡혀 가서 일제의 감옥에서 야만적인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도 위험한 일이기에 김상택은 박걸운을 소련에 남기고 조선으로 혼자 떠나야 했던 것이죠.

김상택에게 운이 따르기도 하고 그의 지하 작업 수완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덕에 그는 다치지 않고 1925년과 1926년의 대부분을 경성에서 보내면서 지하 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 검경의 자료에 그 이름이 그다지 나오지 않기에 그는 저들의 마수를 잘 피해갈 수 있었던 셈입니다. 그는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 안에서 활동하면서 북풍회와 고려공청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고려공청 지도부는, 그의 운동 수완을 높이 사서 그를 만주로 파견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만주에서 그만큼 경험 있는 운동가들이 시급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한데 1926년6월10일 독립 시위 운동 이후 일제의 검거 선풍이 심하게 불어 김상택은 결국 1926년말에 조선을 떠나 소련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상해파의 지운 김철수 (遲耘 金綴洙, 1893-1986) 등이 «도피»했다고 그를 꾸짖고 코민테른에게 그에게 벌을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코민테른은 벌 대신에 김상택을 최고 지도자들의 양성소인 국제레닌학교로 보냈습니다. 일단 조선에서의 지하 운동을 잘했다는 내부적 평가가 있었다는 것이죠. 참, 김상택이 조선으로 간 김에 러시아에 갔다가 1914년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 부모들을, 평양에 가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실업자였고, 어머니는 빨래 등 품을 팔면서 담배팔이 같은 일을 해야 입에 풀질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부모들의 궁핍한 처지를 본 김상택은, 아마도 마음 속으로 자신의 인생의 선택이 옳았다는 다짐을 다시 했을 것입니다. 이는 그와 그 부모 사이의 마지막 조우였습니다.

김상택이 조선에서 목숨을 내놓고 지하 활동을 벌였던 동안 박걸운은 소련에서 남편을 기다리면서 뭘 했을까요? 일단 그녀는 공부를 조금 더 오래 해서 1926년에 와서야 졸업을 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일단 그녀는 정식 졸업을 하고, 1926년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지역의 공청에서 중급 간부로 보직을 받았습니다. 출산을 하고 나서 1년 뒤에 바로 취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터인데, 소련의 젊은 공산주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 당시에는 ‘육아’와 ‘일’을 겸하는 것은 당연시되고, 당국들도 그걸 나름대로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먼 지방에서 1년 동안 공청 일을 한 뒤에, 박걸운은 남편과 모스크바에서 같이 있고 싶어하기도 하고 «재충전»의 필요성도 느껴서 아이를 데리고 모스크바로 돌아와 거기에서 «라브파크» (rabfak), 즉 노농병 (勞農兵)을 위한 예비학부에 들어갔습니다. 노동자와 농민, 제대 병사 등 여태까지 공부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이들을 속성으로 학습시켜 대학 입학 자격을 갖추게끔 만들어주는 이 «라브파크»들은 소련의 «노농대중 출신 신분 상승 보장»을 위한 가장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였습니다. «라브파크»를 거쳐 대입에 성공하고, 대졸이 된 뒤에 간부로 발탁되는 기층민 출신의 «신진 간부» (vydvizhentsy)들은 소비에트 정권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박걸운은 공청 활동가이며 김상택은 당 간부였지만, 이 젊은 부부의 삶은 결코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같은 모스크바에서 공부와 당 활동을 하고 나중에 공산당 총서기가 된 니키타 흐루쵸브의 회고록을 보면, 그 당시 모스크바의 중급 간부의 생활 수준은 혁명 이전의 숙련공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소비에트 공화국 자체는 아직은 대단히 가난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박걸운은 1927-30년에 «라브파크» 공부를 하면서 <볼셰비키>라는 유명한 제빵 공장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 공장에서 그 전에 공청 단원이었던 그녀는 1928년에 후보당원, 그리고 1929년에 정당원이 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1929년 그 당시, 공산당 당원은 소련 총인구의 1%에 불과했습니다.

«출신 성분»부터 «활동», 보증인 2명 등 입당 조건도 까다로웠으며, 또 많은 이들이 소련 정권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회의하면서 당원증을 갖는 데에 대해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한데 혁명으로 인해서 종족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해방’된 것처럼 느꼈던 박걸운은, 공산당과 한 배를 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활동과 공부에 열성적이었던 그녀의 모습은, 드디어 사회의 ‘주인’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느꼈던 그 당시의 많은 소수민족 출신의 «신진 간부»들과 대단히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 해방의 순간은 매우 소중했지만, 박걸운의 승승장구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처럼, 193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시련기를 만나게 됐습니다…..

박걸운과 김상택 부부의 1930년대는 희망차게 시작됐습니다. 1930년은 사실 소련의 역사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초고속 공업화를 위해서는 농업 부문의 잉여를 공업 부문에 투자해야 했는데, 그 잉여를 농민들로부터 뜯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농업 집단화"가 강요됐습니다. 부농들이 "탈부농화", 즉 재산 강탈 정책의 피해자가 되고, 일부 잘 살았던 고려인 농민들도 그 정책에 희생됐습니다. 사실 김상택의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였던, 6.10 만세 운동의 조직책 중의 한 명이었던 박니키포르 (박민영)의 아버지도 "부농"으로 분류돼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한데,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집중적인 수탈을 당해도, 이미 도시로 이사오고 고등교육을 받고 관료기구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던 박걸운과 김상택 같은 젊은 인테리 관료들은 대체로 당의 새 정책을 환영했습니다. 어디까지 환영했느냐 하면, 이 부부에게 1929년에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 그들이 그 이름을 "스탈릭" (Stalik), 즉 "작은 스탈린"이라고 작명했을 정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점에서는 그들이 아들과 함께 초고속 근대화 조치의 수혜자일 것을 믿고 있었을 것이고, 당원 다수가 그렇듯이 초고속 국가 주도 개발을 "사회주의"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김상택은 국제레닌학교에서 3년 정도 학습한 뒤에 더이상 직접적으로 조선 혁명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소련의 '민족 간부'가 되어서 소련 아시아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영화들을 제작해야 했던 "보스톡키노" (Vostok-Kino)라는 커다란 국영기업에서 중간 관리자 자리에 앉았습니다. 1930년에 그 기업은 크림반도, 얄타에서의 지역 촬영소를 인수인계 받아서, 그가 거기에 파견돼 경영 책임자 중의 한 명이 됐습니다. 박걸운과 갓난 아들 스탈릭, 그리고 딸 마야 등이 같이 가서 몇개월간 소련에서 "낙원"으로 인식됐던 크림 반도의 해수욕과 일광욕, 등산 등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1931년에 박걸운은 모스크바에 돌아갔지만, 그녀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른 간부 가족들이 그랬듯이, 김-박 부부 역시 1920년대말부터 "돔라보트니차" (domrabotnitsa), 즉 가정부를 고용해왔는데, 초고속 공업화 정책으로 하층 여성들이 거의 다 여공으로 취직할 수 있어 가정부 구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1932년까지 박걸운은 집과 아이를 직접 돌보고 1932년에 운도 좋게 비밀 경찰 (OGPU) 전용의 특수 병원에서 등록계 업무를 맡게 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이라 하더라도 비밀경찰 시설들은 국가 기간 시설이었는데, 박걸운이 그런 데에 취직할 수 있었던 걸로 보면 그녀에 대한 당의 신임은 아직도 아주 두꺼웠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의 신임과 본인의 향학열이 출중하여, 1933년에 박걸운은 직장을 그만두고 모스크바 동방학 연구소의 박사과정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동방학, 박걸운의 경우 조선 연구는 전략적 연구 분야로, 역시 "아무나" 입학이 가능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 김상택은 모스크바시 소비에트의 고려인과 과장, 즉 재모스크바 고려인 인구에 대한 '책임자'로 일하는 만큼 부부는 같이 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김-박 부부에게 고골레브시키 불바르 (고골 가로수길) 29번지에 아파트가 배정됐는데, 이건 걸어서 약 25분에 크렘린까지 갈 수 있었던 "중심부"였습니다. 이 부부의 성공은, 소련 당 국가 속에서 그 자리를 잡게 된 '민족간부' 계층의 중요성 등을 반영합니다. 당국가 입장에서는 민족간부, 즉 소수자 출신의 간부 없이는 소련 인구의 절반 가까이 구성하는 비러시아인들을 관리하는 데에 핵심적인 연결고리, 가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대우는 상당히 좋았습니다.

한데 1935년부터 부부의 윤택나는 삶이 삐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당국가는 대숙청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표적 중의 하나는 바로 1930년대 이전에 혁명 경력이 있었던, 그리고 해외에서 이런저런 관계망을 가졌던 민족간부들이었습니다. 스탈린 지도부 입장에서는, 독립적인 정치적 역할을 맡을 만한 역량이 있었던 그들을 걸러내서, 1930년대에 스탈린주의적 교육을 받고, 국경 바깥 세계와 관계없이 살아오고, 오로지 "수령님"에게만 충성할 수 있었던 - 예컨대 동료 고려인 알렉세이 헤가이 (허가이) - 같은 민족간부를 집중 등용시키는 것은 더 좋은 투자였습니다. 그런데 1930년대 중후반의 전국 요새화 분위기에서는 "걸러낸다"는 것은 숙청, 그리고 다수의 경우에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불운은 곧 김-박 부부에게도 닥쳐왔습니다.

1935년에 박걸운은 당에서 출당 당했습니다. 명분은 "아버지가 도급업자였다는 출신 성분을 숨겼다"였지만, 사실 경력이 있는 민족간부에 대한 정치적 불신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원으로부터의 제명은 동방학 연구소에서의 강제 퇴학을 의미했습니다. 당의 신임이 없는 사람은 조선학 연구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퇴학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1937년에 대부분의 고려인 간부들이 그랬듯이 김상택은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10년 징역형을 받았고 결국 1947년에 출옥하고 스탈린이 죽고 1956년 스탈린 비판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1957년에 명예회복이 되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거기에서 - "당 경력이 1921년부터 시작되고 조선에서 지하 운동을 했다"는 공로까지 인정돼 - 개인화된 고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한데 그가 사랑했던 박걸운은 훨씬 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연구소에서 쫓겨나서 사진 촬영소의 노동자로 강등돼 일했던 그녀는, 남편이 잡혀가고 나서 약 두달 뒤인 1937년12월16일에 잡혀갔습니다. 집에는 두 명의 미성년 자녀가 있었는데, 비밀경찰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강제 입원되고, 어머니는 비밀경찰의 루뱐카 감옥으로 직행됐습니다. 수사는 3일만에 (!) 끝났습니다. 1921년에 조선으로 잠깐 갔다오고, 이미 잡혀간 최성우 등 고려인 혁명가들과 친구이었고, 한 두 번 스탈린 정책에 대해 비판적 언급을 했다는 것 등은 다 "범죄행위 증거"가 됐습니다. 1938년1월24일에 박걸운에게 사형이 확정되고, 2월5일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변호사와 배심원이 있는 정식 재판도, 항소의 기회도 없었습니다. 재판이라기보다는, 더이상 당국가에 필요하지 않고 "짐"으로 인식됐던 옛 민족간부들이 "용도폐기"되고 제거된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1958년, 명예회복이 된 김상택은 모스크바에 돌아와서 거기에서 그 딸 마야를 기적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들 스탈릭은 사라졌습니다. 스탈린 시대 고아원 어디에선가 죽었을지, 아니면 부모가 "인민의 적"이라고 생각하여 아예 부모를 되찾는 걸 포기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아파트 배정 청원서를 쓴 딸 마야는 아버지에 대해 "대단히 지치고 아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표현은 대단히 얌전 (?)한 편이었습니다. 부인과 아들을 잃고 10년 동안 강제노동 수용소 지옥에서 보낸 사람의 내면의 풍경은, 사실 상상하기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데 김상택과 마야의 삶이 계속되고, 재소련 고려민족은 시련을 딛고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단, 그 어떤 당 차원과 사법 기관 차원의 "명예 회복"도, 비밀경찰의 총탄에 쓰러진 박걸운을 다시 살려낼 수 없었습니다...

(기사 등록 2026.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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