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김제혜 – 혁명, 사랑, 고통, 그리고 생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https://blog.naver.com/vladimir_tikhonov)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제가 김제혜(金濟惠)라는 한국 여성 독립 운동가를 처음 만난 것은 마트베이 김의 <원동에서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조선 국제주의자> (1979)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제목은 좀 생소한 (?) 느낌을 주지만, 이 책은 소련 학계에서 러시아 원동 고려인들의 러시아 내전 시절 (1918-1922년)의 역할, 그리고 초기 조선 사회주의자에 대한 거의 최초의 본격적 소개 중의 하나였습니다.
마트베이 김이라는 분은 스스로 수청 (수찬) 출신의 2세 고려인으로 1921년에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학습하고 <자본론>의 조선어역을 시도하는 등 이 선구자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마트베이 김은 3번이나 스탈린 수용소에 끌려가는 등 스탈린 시절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초를 겪었지만, 1983년까지 생존했습니다. 초기 조선 사회주의자 중에는 가장 오래 살았던 축에 속한 것이죠.
그는 김제혜라는 자신의 오랫동안의 동지를 1899년10월5일생, 원산 부근 마을 출신으로 소개했습니다. 그의 기억으로는, 김제혜는 15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 본인 스스로 교사 일을 보다가 서울의 한 여고보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의 재학 중에 3.1운동을 만나게 되고, 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결국 중퇴하여 함흥 근방의 한 소학교 선생으로 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마트베이 김은 반세기 넘어 기억했던 것은, 김제혜가 그에게 1920년대에 알려준 자신의 망명 동기였답니다. 그녀는 <동아일보>에서 자신의 과수원에서 땅에 떨어진 사과 하나를 주워서 먹은 조선 아이의 이마에 «도둑»이라는 낙인을 찍은 한 일본 정착민의 이야기를 읽고, 조선 독립 없이는 정상적인 삶도 육아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조선 혁명가들의 피안처로 이름 높았던 상해를 향해 1920년에 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유의 이야기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회고 속에서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동시 시인 이원수 (1912-1981)가, 마산에서 자라면서 어느 지방의 일본인들이 일본인 집 뽕나무에 올라 오디를 따먹으려 했던 조선 어린이를 붙잡아 이마에 염산으로 «도둑»이라는 낙인을 찍었단 기사를 그 당시 한 지방지에서 읽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童詩(동시)의「꽃대궐一生(일생)」 「고향의 봄」두고간 李元壽(이원수)씨>, 동아일보 1981년 1월 27일). 한데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고 해서 꼭 망명과 투쟁을 택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맘 속 투지가 아주 강하고 분노와 함께 정의감이 강해야 그런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김제혜는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녀는 상해에 언제 갔을까요? 국내 신문에서 김제혜에 대한 최종의 소식은 <동아일보>, 1920년 8월 25일에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그 날 함남 고원의 청년회 주최 강연회에는 «이 시기는 어떤 시기냐» (此時何時), 그리고 «반도여자» (半島女子)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것입니다. 강의 주최측의 성격이나 다른 강사들의 강의 주제 등으로 미루어보면, 그녀가 조선에서 있었을 때 속했던 소사회에는 이미 초기 사회주의 사상과 여성해방 이데올로기 등이 어느 정도 전파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상을 가슴에 품고 1921년 8월말이나 9월초에 상해 망명길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히 부유한 집안의 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해에 가서 그녀는 섬유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조선 독립, 그리고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사상 실천의 길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해의 국제조계나 프랑스조계는 여러 나라 혁명가들에게 비교적 안전적인 구역으로 인식돼 조선의 초기 사회주의자들도 상해를 그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러시아 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직접 지원했던 이르쿠츠크파 중심으로, 1921년3월19일에 상해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상해회가 창립됐습니다. 그 유명한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트로이카는 바로 그 소속이었다는 것이죠. 김제혜는 거의 맨처음부터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직하러 모스크바에서 파견 나온 조선 혁명가 조훈 (趙勳, 1897-1938)과 사랑을 나누게 됐습니다. 조훈은 그녀보다 불과 3세 위였습니다 (마트베이 김은 김제혜를 1899년생으로 기억했지만, 그녀 관련 코민테른 문서에 따르면 그녀는 1900년 10월 5일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인생의 고통들을 너무나 많이 맛봤습니다. 만주에서 비밀결사 광복단 참여,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에서의 학습, 제1차세계대전 시절 러시아 우랄 지역 벌목장에서의 노예 같은 노동, 그리고 내전 속 러시아에서의 혁명 운동...소설 같은 삶을 이미 24세에 다 살았던 것이죠.
그런 조훈과 김제혜는 1921년 상해에서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됐습니다. 미리 말을 해두자면, 조훈은 1938년1월, 나이 41세에 스탈린 숙청의 광풍 속에서 죽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한데 그의 부인 김제혜는 그것보다 거의 두 배 더 오래 살아서 결국 조훈에 대한 기억을 살려내는 것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할 겁니다.
1920년대는 소련의 혁명 이후 «진보의 시대»였습니다. 여성, 소수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의 혁명적인 열망에 힘입어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은, 일단 본래의 혁명적 의제를 어느 정도 실천에 옮겨야 했습니다. 여성이자 소수 피억압 종족 출신의 김제혜는 그 정책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자기 실현'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1922년 10월 25일, 일본 간섭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즉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완충 국가 격인) 원동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접수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수많은 조선인 좌파들에게는 그야말로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대체로 그 때쯤에 김제혜는 해방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의 신한촌에서 조선에서 하던 대로 선생님 일을 보고, 가능할 때에 남편 조훈과 부부 생활을 즐겼습니다. 1923년초에 이 부부에게 아들 빅토르가 태어납니다. 빅토르의 어원은 «승리» (영어 victory)죠. 대체로 일본 간섭군의 시베리아로부터의 후퇴, 전세계적 좌파 운동의 앙양,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정권의 정착 등은, 이 부부 같은 혁명가들에게는 그야말로 «승리»로 보였을 것입니다.
코민테른의 여러 산하 조직 중의 하나는 저명한 독일 여성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 지도하의 국제여성비서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적색 페미니즘 신문과 잡지를 여러 나라에서 발행하고, 독일에서는 “Dein Körper gehört Dir” («너의 몸은 너의 것이다»)라는 구호를 내걸어 낙태 자유를 위한 켐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소련은 1920년 이후로 낙태를 자율화했는데, 독일에서는 공산주의 여성과 사민당 여성 조직의 대대적인 투쟁이 있고 나서야 1926년에 낙태 관련 법률들이 부분적으로 완화됐습니다.
당시에는 세계적인 좌파 여성 운동의 중심지라고 할 이 여성비서부는 1924년 7월에 모스크바에서 제3차 국제대회를 열었는데, 거기에서는 김제혜는 조선 여성을 대표하여 참석했습니다. 같은 1924년 2-5월에 조선에 잠입하여 활약했던 남편 조훈이 이미 돌아와서 살고 있었던 모스크바로, 아들을 데리고 간 이상 김제혜는 더이상 원동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1924년가을에 그녀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을 하고, 거기에는 1927년까지, 즉 3년간 공부합니다.
그녀의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학교 측 평가는 «당원으로서 규율을 잘 지키고 열심히 하지만, 병과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건강 문제와 육아 부담 등으로 그녀는 벽신문 편집 이외에는 학교에서 당을 위한 일이라고 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아이는 탁아소, 그다음에 유치원에 다녔지만, 그래도 «가정 형편상» 학교에서 그 무슨 과외 활동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중국 망명, 러시아 원동에서의 어려운 생활 등의 영향이었겠지만, 그녀는 기관지염에다 빈혈증이 있었으며, 그 이유로 휴양소에 몇 번 갔다오고 보다 많은 식량을 배급 받을 수 있는 조치의 혜택도 받았습니다. 한데 전쟁과 혁명 이후에 이농 (離農) 현상이 발생되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쇄도한 모스크바의 주택난이 비상해서, 코민테른 산하 청년인터네셔날 집행위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직함을 달고 있었던 조훈의 부부마저도 모스크바 안에서 아파트 배정을 받지 못하여 그 부근에서의 별장을 주택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여러모로 생활이 어려웠던 삶이었지만, «새로운 세계의 성장통»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김제혜의 학교 성적은 «보통»이고 재학시절 활동 경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녀가 졸업하고 나서 받을 수 있었던 직장 배정은 원동에서의 고려인 학교 선생님 정도였습니다. 한데 타고난 «선생님 기질»을 가졌던 그녀는 별 반대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원동에서 고려인 아이들을 가르쳤던 사이에, 조훈은 1928년에 코민테른 산하 청년인터네셔날 일을 그만두고 국제레닌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초에 거기에서 그는 갓 입학한 조선인 학생 박헌영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데 그 뒤로는 조훈은 부인이 있는 원동으로 당간부 보직 임명을 받아 역시 모스크바를 떠납니다. 부부가 다시 원동에서 재회하고, 거기에서 함께 살다가 1931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 거기에서 부부 동반으로 나리마노프의 이름을 가진 동방학 연구소에 입학을 하고, 김제혜는 거기에서 1934년까지 공부하고 조훈은 1935년까지 공부합니다. 학부생이 아닌 대학원생 자격으로 입학을 한 것이죠.
1930년대 초반, 스탈린주의 분위기가 점차 짙어져갔던 모스크바에서는 가장 취약했던 비주류인 상해파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탄압의 고배를 마십니다. 그들이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민족주의적 기원이 있었던 만큼 소련에 대한 충성심을 결여한다는 의식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체제 공고화 시절인 1920년대에는 소비에트 정권은 상해파 같은 민족주의 계열 좌파와의 '협력'을 지향했지만, 이미 체제가 정착됐으며 상해파 베테랑들을 대체할 젊은 고려인 간부들이 양성된 뒤인 1930년대 초반에는 상해파에 대한 «폐기처분»이 시작됐습니다. 장진원, 김영만, 김규열 등 상해파 계열 운동가들이 이미 1933년에 검속되고 일부는 아예 처형됩니다.
한데 조훈이 속했던 주류의 이르쿠츠크파는 여전히 간부로서의 위치를 간직하고, 중앙의 권력자들에 의해 중용돼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1934년에 조훈에 대해 행해진 코민테른의 평가를 보면, «목회자의 아들»이자 «종파 분자»라는 흠결이 있어도 «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숙청의 분위기가 강해져갔던 나라에서 김제혜도 조훈도 계속 활용됐습니다. 김제혜는 글라블리트 (Glavlit), 즉 검열 담당 부서에 배정돼 일문 및 조선문 신문 내용을 사전 검열하는 중책을 맡았는가 하면, 조훈은 1935년가을부터 외국인노동자출판부 (즉, 코민테른 출판기관)의 편집자가 되고 1936년2월부터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간부과 직원 일도 겸직하게 됩니다. «비밀누설시 재판없이 총살될 수 있다는 점을 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의 각서에다 서명을 하고 그 직을 갖게 됐는데, 일단 이 정도면 이 부부는 당의 신임을 여전히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1932년에 딸 클라라가 태어나기도 하고 해서, 조훈-김제혜 부부로서 그래도 나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의 신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외국인노동자출판부 안에서의 조선인 편집자 중에는, 1937-8년 대숙청 시절에는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상해파 (박진순), 서울파 (이성태) 출신의 편집자들이 이르쿠츠크파인 조훈에 대한 밀고장을 당국에 보내는 등 경쟁 계파 사이의 «상잔»도 있었지만, 일단 정치적 독립성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고참 고려인 당원들을 도륙하고, 스탈린주의 교육을 완벽하게 체득한 신진 당원들을 대신 키우는 데 대한 스탈린 지도부의 판단이 있어서 상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같은 운명에 처해 있게 돼 있었습니다. 조훈은 1937년 12월 1일에 체포되고, 1938년 1월 3일자 총살됐습니다. «수사» 같은 요식 행위마저도 거의 없었던, 그야말로 «도륙» 수준의 숙청이었습니다. 김제혜는 남편 없는 집에서 두달 가량 살았다가 1938년 2월 10일자 체포되어 «조국 배반죄 죄인의 가족»이라고 하여 8년징역형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조훈의 부인이었다는 죄 (?)로 끌려간 것은 모르도비아 (Mordovia) 지역의 템니코브스키 (Temnikovsky) 수용소였습니다. 사실상의 «관노비» (官奴婢) 격으로 봉식, 제화 (製靴) 부문에서 노예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는 고리끼지역의 크냐지노 (Knyazhino) 마을의 고아원으로 강제 수용됐는데, 도중에 그 개인 문서들이 유실돼 아들은 아예 «토카레브»라는 다른 성씨로 표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까지 바뀐 아이들은, «조국 배반자» 부모를 하루 속히 잊어 «위대한 스탈린 수령»이 다스리는 조국의 선량한 공민이 돼야 됐습니다.
이 끔찍한 스토리의 끝은 그래도 «헤피엔드»는 아니더라도 대숙청에 휘말린 수천 명의 다른 고려인에 비해 약간 덜 불행합니다. 김제혜는 살아남았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 5년 뒤에 가석방되고, 그 다음에 본래 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한 체첸 공화국에 이주하여 거기에서 그로즈느시에서 살았습니다. 딸과 일찍 조우하여, 딸이 같은 체첸 지역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병든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 고려인 숙청 피해자들의 건들이 재심되어 1957년에 조훈의 명예가 회복됐습니다.
김제혜는 1958년에 당 중앙에 청원하여 본인과 남편의 공적 사실 (조선에서의 지하 활동 등) 들어 모스크바 이주와 개인화된 높은 연금 등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모스크바에 가서 여생을 당원을 위한 요양원에서 보내고 아들과 재회하고, 아들은 재판을 하여 본래 성씨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1990년까지 생존했는데, 그녀가 한 때에 충성을 다 바치고 사랑했던, 그러나 결국에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그 남편을 죽인 소련의 해체를 거의 볼 수 있을 뻔했습니다.
그녀는 과연 말년에 그녀 젊은 시절의 이상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대숙청에 아버지를 잃고 형이 수십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던 제 스승인 미하일 박 선생의 평가는 «이상은 대단히 좋았지만, 후진국 러시아에서의 일국 (一國) 혁명은 결국 관료 국가 성립과 잔혹한 통치로밖에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였는데,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기사 등록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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