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혁신
한때는 혁명적이었던 칼 카우츠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2. 20. 11:40
근래 국제적 좌파들 사이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칼 카우츠키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 카우츠키를 "배신자"라고 한 레닌의 그 유명한 비난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카우츠키의 저술에 실제로 관여하는 것을 오랫동안 좌절시켜 왔다. 그리고 이것은 카우츠키가 남긴 유산과 그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실질적으로 철저하게 평가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돼 왔다. 그러나 레닌이 카우츠키의 후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민주주의 전투에 결정적 역점을 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담긴 카우츠키의 초기 저술에 대한 그의 큰 존경 때문이었다. 여기서 인터뷰한 벤 루이스(Ben Lewis)는 연구자, 번역가, <위클리 워커>의 기고자이며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많은 연구와 저술을 남겨왔다. 특히 그는 독일어로 된 1차자료에 대한 조사를 통해 카우츠키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해 온 것으로 유명하고, ‘열린대학’(Open University)에서 독일어 부강사로 일하고 있다.(번역: 두견)
출처: https://www.jacobinmag.com/2020/10/karl-kautsky-ben-lewis-marx-lenin
"마르크스주의의 교황" 또는 레닌의 유명한 말인 "배신자"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9세기 말엽 독일사회민주당(SPD)과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유명한 대중적 보급자였던 카우츠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가가 되었다.
그리고 레닌주의에서 파생된 주요 경향에 의해 저주받았다. 카우츠키의 저술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역사학자들로부터 다시금 주목받았지만, 이러한 재평가들은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하며, 초기 혁명적 시기를 되찾으려는 시도에서부터 카우츠키적인 반볼셰비즘에 대한 긍정적 묘사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벤 루이스는 독일어로 된 마르크스주의 고전 저술들을 영어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번역 프로젝트’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자이다. 그는 또한 2019년에 역사유물론 북 시리즈로 ‘헤이마켓’에서 출판된 <칼 카우츠키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번역가 겸 편집자이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카우츠키의 이해, 그가 민주공화정의 요구에 특정한 강조점을 둔 것, 그리고 오늘날 그의 사상에 대한 아주 흔한 그릇된 설명들과 싸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 당신의 소개는, 최근의 다른 학문적 조류와 마찬가지로 카우츠키가 개혁주의자라는 신화를 거부한다. 라스 리(Lars Lih)처럼 1918년에 레닌이 '배신자 카우츠키'를 맹비난한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때"라는 이전 기록과 정확히 대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1914년 이전 노동운동에서 카우츠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말해주겠는가? 나는 특히 그의 '계승자'나 '대중적 보급자'로서 역할이 마르크스 사상의 타락을 수반했다는 주장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 관심이 있다.
사상가로서의 카우츠키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의 역할은 매우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출판을 위해 마르크스의 초고 여러 권과 편지(예컨대 일반적으로 <자본>의 제4권으로 보는 <잉여가치학설사> 등)를 정리하며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대중화시켰고,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도달했던 위치보다 훨씬 더 넓은 국제적 청중에게 그것을 가져다 주었다.
1883년에서 1918년 사이에 그는 거의 40권의 책과 500여 편의 학술 논고, 그리고 300여 편이 넘는 신문 기사를 썼다. 그의 저술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1891년 SPD의 에어푸르트 강령(Erfurt Program: 영어로는 '계급투쟁'이라는 요약된 형태로 이용 가능한)에 대한 해설이 걷잡을 수 없는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베벨-카우츠키' 경향의 주목받는 이론가로 떠올라서 조직화 전략과 전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국제적인 도달은 주로 1917년까지 카우츠키가 편집한 엄청나게 인기 있는 마르크스주의 주간 이론지 '다이에 자이트'(Die Neue Zeit: 신시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학술지는 독일 제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 연구되고 논의되었다. 러시아에서 카우츠키는, 종종 그 나라의 전략과 전술 문제에 대해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의 볼셰비키 분파와 같은 편에 섰다는 이유로 '명예 볼셰비키'로 여겨졌다. 러시아에 관한 그의 저술은 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서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카우츠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동맹을 일관되게 옹호해 왔으며 러시아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의 어떠한 타협에도 단호히 반대해 왔다. 이 "비타협주의적" 접근법은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볼셰비키의 성공을 이끌었다. 라스 리가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듯이 10월 혁명은 2월 혁명과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연속이었다.
더욱이, 전위주의적 폭동론자의 혐의를 쓴 레닌과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알려진 카우츠키 사이에 괴리를 일으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은 사실상 합헌적이었다. 이것은 차르 체제 붕괴 이후 그들의 실질적 주권을 어떻게 가장 확고히 할 것인가에 대한 소비에트 내부의 견해 변화를 반영했다. 임시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교체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발전에서 결정적 요인은 볼셰비키의 강력한 '비타협주의' 메시지였다. 그들은 카우츠키의 뒤를 따라서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환상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며,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혁명적 권력에 대한 지원을 일관되게 요구했다. 결국 이 메시지가 승리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것을 바라본 카우츠키는 10월 혁명을 쿠데타의 한 형태로 보고 초기 러시아 국가에 대한 몇 차례의 격렬한 비평을 썼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시절"의 카우츠키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계승을 구체화하면서 역사적 실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흐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정당하게 강력 비판된 "배신자" 정도를 넘어서서 카우츠키의 이름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본질을 납작하게 하거나, 저하하고, 천박하게 만들거나 제거했다는 비난으로 끝없이 얽매여져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책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혐의는 그의 저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이러한 부재는 20세기에 그의 사상이 주변화되었던 역사적 조건화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카우츠키 해석의 세 학파가 그의 일생의 업적에 대한 경멸적 바라보기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동구블록의 마르크스주의 조악화(및 트로츠키주의의 거울 이미지), 서구의 친자본주의적 냉전 역사학,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헤겔주의적 해석. 이들 세 학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장일치로 카우츠키를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어떤 긍정적 영향도 미치지 않은 숙명론적이고 기계적인 사상가로 보고 있다.
더구나 서양의 신헤겔주의적 해석과 특히 동구권의 역사학에서는 카우츠키의 숙명론적 수동성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것에 기반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 후 이러한 해석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속류화한 인물이라고 주장한 1956년 이후의 뉴 레프트 사상에 반영되었는데, 엥겔스주의-카우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이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연구를 하는 동안, "속류화" 논지는 정밀한 검증을 견뎌내지 못했다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정치 경제, 역사, 민주주의, 혁명 전략 등에 관한 카우스키의 방대한 저술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후의 역사에서 이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 얼마나 불공정하게 취급되어 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의 이론적 산출물과 절정기에 있었던 카우츠키의 결론 중 몇 가지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차적으로 국가적 사건이라는 생각, 그가 1890년대를 질적으로 "새로운" 제국주의 국면이라고 파악한 것,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단결을 우선시하려던 그의 평생의 경향 등. 그러나,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를 - 의식적이든 아니든 - 납작하게 만든 것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앞선 이들의 미완성된 지적 산출물에 비판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을 보여 준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을 단순히 재활용하고 반복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영웅들의 방법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권리를 가진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때때로, 이것은 그들의 예측을 갱신하고 다른 사람들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카우츠키는 훌륭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에 심지어 제국(Kaiserreich)의 헌법 질서 안에서 사회주의를 창조한다[국가사회주의]는 다양한 관념이 존재해왔으며, 카우츠키는 종종 기존의 국가 기구를 파괴할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얼버무린다는 비난을 받는다. 1891년 SPD의 에어푸르트 강령을 둘러싼 논쟁은 어떻게 그러한 독해를 반박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젊은 카우츠키가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내기를 회피했다는 - 또는 전기 작가 딕 기어리(Dick Geary)의 말에 따르면, 카우츠키의 혁명적 격변의 "전제조건"에 대한 강조가 "혁명적 상황에서도 (혹은 아마도 특히) 주체적인 무대응을 정당화할 정도로 너무나 철저했다"는 - 개념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의 생각을 비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사상가로서 거짓되게 일축한 것의 산물이다.
1890년대 초에 에어푸르트 강령을 둘러싼 논쟁에서 특히 매우 흥미로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SPD 지도부가 얼마나 진지하게 강령과 그것의 이론적 기반을 정식화하기 시작했는지 명백했다는 것이다. 출발점은 당시의 주어진 시점에 유행하는 요구나 아이디어를 쇼핑 리스트로 삼은 것이 아니라, 반동적인 제국의 완전한 해체의 일환으로 SPD가 어떻게 집권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개요였다.
이러한 노동계급 통치를 위한 투쟁은 "성이나 출신에 대한 구별 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의무를 위하여 계급 통치와 계급 그 자체의 폐지"로 나아가는 단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에어푸르트 강령은 인민을 무장시키고 군주제를 해체하며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등의 사상을 선포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둘째로, 1848년의 공산주의자 선언이나 1880년의 노동자당 강령(Program of the Parti Ouvrier)과 같이 그와 마르크스가 집필한 초기의 강령적 전통 속에서, 그 강령을 부끄럽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적 존재 중 하나로 만드는데 엥겔스가 얼마나 중심이었는지가 명백하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런던에서 기사를 발행하고, 강령 초안에 대해 논평을 내고, 카우츠키와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같은 지도층 인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내에서 국가사회주의적 환상에 패배를 가져다주려 했다. 나는 엥겔스의 주된 관심사는 당이 스스로 국가와 사회의 변혁에 대한 민주적 공화주의의 접근법을 받아들이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카우츠키의 글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왜 이것은, 단순히 과거 반사회주의 법(Anti-Socialist Laws)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할 공간을 방어하는 문제 이상으로 민주주의적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에어푸르트 강령이 민주주의적 요구에 집중한 것은 두 가지 차원이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독일의 노동계급이 조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조직화하고 번창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카우츠키의 더 기억에 남는 구절 중 하나에서, 정치적 자유는 노동계급의 "빛과 공기"로, 그 자신의 이미지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고 했다.
SPD는 10년 이상 불법화되었었고, 1890년대에 다시 그것을 금지하려는 몇 번의 다른 성공하지 못한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는 국가의 혁명적 전복에 대한 강령적 약속 때문에 당은 합법성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고, 반대파는 그 합법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문제의 끝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앞서 내가 언급했던 마르크스주의적 공화주의의 의의로 되돌아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민주공화국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민주공화국을 위한 싸움에서 노동계급이 "대자적 계급(class for itself)"이 되어 권력을 잡게 되는 셈이다.
최초의 노동자 정부인 파리 코뮌의 경험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국가가 단일한 입법 및 행정 위원회, 판사를 포함한 모든 관료들의 정기적 선출, 소환 가능성, 관료들에게 노동자 평균임금 지급, 민병대 등 몇 가지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했다. 엥겔스의 열정에 의존하는 에어푸르트 강령 자체에도 이러한 민주주의적 요구가 다수 존재했다.
엥겔스의 비판은, 그러한 강령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가 쓴 초안에 대한 비판으로서, 명시적인 강령적 목표로서 민주 공화국의 부재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었다.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초안의 정치적 요구는 한 가지 큰 결함이 있다. 그것은 말했어야 하는 것이 정확히 부족하다. 만약 10가지 요구가 모두 승인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더 다양한 수단을 가져야 하지만, 그 목표 자체는 결코 달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불법화의 위협이 크게 나타났고, 엥겔스는 민주공화국의 선언으로 당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면, 그 때 대안적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엥겔스의 비판은 민주주의적 요구나 강령의 전체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령의 최소요구에서 흘러나오는 목표 - 노동계급의 정치 권력 - 에 대한 모호하지 않은 선언이 없다면 국가-사회주의적 이탈에 대해 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 마시모 살바도리(Massimo Salvadori)와 같은 저술가들은 최소 강령(SPD가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최소 근거)과 최대 강령(사회주의 사회)의 구별을 사회주의적 관점의 협소함으로 제시해 왔다. 사회주의의 최종적 목표가 전략적인 "위험지대"에서의 즉각적인 요구로부터 분리되어, 미지의 미래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요구와 공화주의적 요구는 두 가지를 연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최소' 강령이라는 생각 자체가 오해받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방향으로 작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최소강령은 실제로 크게 오해받거나 잊혀졌다. 다양한 역사적 이유로 <공산주의자 선언>, 에어푸르트 강령, 1903년 RSDLP 강령, 1917년 RSDLP(볼셰비키) 강령 등 최소 부문 강령의 혁명적 내용이 간과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10월 혁명의 경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 등에 - 방법론적으로 완전히 다른 - 레온 트로츠키의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과제>를 몰역사적으로 투영하는 경향이 있는 1938년부터의 트로츠키주의 전통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당신은 살바도리를 언급했지만,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접근방식에서 단서를 얻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독일 혁명에 관한 권위있는 작품의 저자인 존경받는 역사가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é)이다. 일련의 공허하고 최소한도의 일상적인 요구라는 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운동가들이 오늘날 최소강령을 보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이 강령을 어떻게 망원경의 잘못된 끝을 통해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 운동의 역사적 후퇴와 카우츠키의 유산에 대한 참조를 통해 다시 한 번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SPD는 결국 엥겔스, 카우츠키 등으로부터 비판받은 합법주의적이고 국가-사회주의적인 접근법에 더 가까운 쪽으로 표류했다. 이런 경향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이 지속적으로 침식되는 것을 수반하며, "최소"요구는 점차 대중에게 너무 진보적이거나 지나치게 인기가 있다고 간주됐다. 이들은 상급의 정치와 사회주의가, 로자 룩셈부르의 적절한 표현대로 “멀리 길잡이 별”처럼 미래로 더 밀려나게 되면서 점점 더 "최대 요구"로 변모했다.
이것은 실로 전략적인 "황무지"의 출현이었다. 스탈린주의자가 민중전선주의의 정치를 정당화하고 '진보적' 부르주아지 세력과 동맹을 맺기 위해 최소강령을 악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요점은 그것이 마르크스나 엥겔스, 또는 카우츠키의 마음 속에 있는 최소강령의 본래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기회주의적인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내버려서는 안 된다.
처음에 당신이 말했듯이, 내 연구에서 나는, 그 초기 관점의 혁명적 성격을 결국 어기게 된 사람으로 카우츠키를 본 레닌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1차적 기초 자료를 가져와서, 카우츠키가 - 또는 심지어 “배신자 카우츠키”가 -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을 최저강령으로 축소하는 데 중추적 역할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05년과 1918~1919년의 그의 공화주의적 저술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1919년 카톨릭 중앙당, 자유당과 함께 공공연히 부르주아 정부에 들어가려는 SPD의 결정을 카우츠키가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로 색칠해 주는지 보여준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혁명적 사상가로서의 그의 몰락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이며, 유감스럽게도 기존의 학계나 좌파에서 너무나 자주 그렇듯이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가 고정된 변하지 않는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부르주아 연합주의와 밀레랑주의[Millerandism: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부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그것을 포용하는 것으로의 이러한 변화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 거기서 당신은 세기가 바뀔 무렵 제2인터내셔널에서 논쟁의 주요 쟁점이었던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에 대해 언급한다. 카우츠키가 밀레랑에 맞서는 고발을 주도했다면, '자리를 얻는 것'과 '권력을 얻는 것'을 명쾌하게 구분했을까. 그리고 "공화국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정부에 개입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제안했을 때 카우츠키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밀레랑주의의 충격에 대한 카우츠키의 반응은 여러 단계를 거쳤다. 1900년에 그는 그해 파리 국제 회의에서 채택된 부르주아 정부에 사회주의자의 참여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초안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결의안에는 핵심적 약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명백히 "정상적 상황"에서 사회주의적 연합주의를 비난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한 나라가 침략이나 점령을 당한 기간과 같은 극단적이거나 재앙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참여의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보는 사회 민주주의의 "수정주의"적 우파를 기쁘게 했는데, 그들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공직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동시에 그것은, 그것을 "카우츠키 결의안"이 아니라 "고무(러시아어로 카우츠키와 발음이 비슷한) 결의안"이라고 불렀던 <이스크라>(Iskra) 편집부에게 어설프고 그러므로 기회주의적인 성명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903년 드레스덴에서 SPD회의가 열릴 무렵, 카우츠키는 모든 애매함에서 자유로운 정부 참여에 관한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고 극한 상황에 대한 언급을 모두 삭제했다. 그는 드레스덴 의회에서 1900년 결의안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때 나는 원칙적으로 밀레랑에 맞서서 돌아섰지만, 그의 행동을 범죄가 아닌 실수라고 제시하는 방식으로 결의안을 정식화하려고 했다. 나는 원칙적인 관점을 지키고 싶었지만 프랑스인들 사이에 단결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그는 이 때문에 기회주의라는 야유와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