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세상읽기 - 이준석/ 미얀마/ 마녀사냥/ 한강 대학생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1. 6. 13. 12:15
전지윤
● 이준석 당선 - 축하할게 아니라 성찰할 일
‘축하’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뜻으로 인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준석의 당대표 당선을 우리는 축하해야 하는가? 그의 앞날을 지켜보고 잘해줄 것을 촉구할 일인가? 어쨌든 정치권의 ‘관행’이나 ‘예의’가 그러니까? 그런 것 따지지 않고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기준은 왜 또 이럴 때만 실종되는가?
젊은 사람이 나이들고 노회한 정치선배 앞에서 눈치보지 않고 직설적이고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모습은 평가할만 하지 않냐고? 2012년 대선 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정말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티비토론을 보다가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대로다.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그 당은 없어졌고, 정치 생명은 끝장났다. 왜 젊은 남성의 거침없음과 직설적 화법은 ‘당당함과 용기’이고 젊은 여성의 그것은 ‘싸가지없음과 왕재수’가 되는가? 더구나 당시 이정희 후보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고, 지금 이준석의 말은 덕지덕지 혐오가 묻어나는데?
이준석이 당선 소감에서 ‘공존과 변화’를 말했다고? 기존의 우파적 가치와 자신이 제기한 새로운 우파적 가치의, 주호영과 나경원와 이준석의 ‘공존’을 말하는 것이고, 기득권 우파가 다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자’고 했다.
전체 맥락을 보면 명백하고 내가 색안경을 쓰고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다. ‘잘못된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말라’는. ‘흡수통일은 북한 체제를 지우는 것’이라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자유롭고 공정하다’던 그의 입장은 그대로다.
박근혜 탄핵을 긍정하지 않았냐고? 기득권 우파와 특권카르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지배와 권력이 유지되는 것이고, 거기에 도움이 안 되면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다. 2016년에 가장 먼저 박근혜에 등을 돌렸던 세력 중 하나는 바로 <조선일보>였다.
어제 벌어진 일은 우파의 전진이고 백래시의 전진이고 한국사회의 후퇴이다. 지금 누가 기뻐하고 있는가? 문정부가 사회주의이고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남성들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광광거리던 사람들이, 이대로 가면 중국이 한국을 먹어버릴 거라던 사람들이, 소수자들이 할당제로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난리치던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다.
반면 이것은 차별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혐오에 시달리던 소수자들에게, 돈없고 빽없고 소위 '능력과 실력'과 학벌이 부족해 서럽던 사람들에게 반가울 수 없는 소식이다. 기성정치권의 문맥을 벗어난 정치신인이 일으키는 돌풍은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는데, 버니 샌더스나 제레미 코빈이 일으킨 감정이 기대와 희망이었다면,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이 일으킨 감정은 우려와 공포였다.
전자가 기성체제가 외면해 온 계급적 분노를 연대로 연결시켰다면, 후자는 그것을 혐오로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왜 한국사회에서는 전자가 나타나지 않고 후자가 나타나고 있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축하가 아니라 이에 대한 성찰이다. 이 현상은 우리가 대중의 계급적 분노와 절망을 급진적 희망의 해법으로 연결해내지 못한다면 계속될 것이고 더 악화할 것이다.
● 이준석 돌풍이 보여주는 것
계급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독점한 채 다수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소위 ‘1:99’, 또는 ‘20:80 사회’라는 말은 이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순수하게 작동한다면 99 또는 80이 힘을 모아서 소수의 지배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억압과 지배를 당하고 있는 80은 정치, 이념, 세대, 지역, 젠더 등에 따라서 분열돼 있다. 99또는 80을 대변한다는 진보좌파 정당이 오히려 소수의 지지만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재보선 이후에 민주당이 부동산, 세금, 검찰과 언론개혁 등에서 계속 후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뜻보면 ‘상위 5%도 안 되는 집부자들을 위해서 부동산 정책을 후퇴시키는 것은 다음 선거를 위해서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재보선 결과 자체가 ‘노골적으로 상위 5%의 이익을 옹호’하는 국힘당의 승리였다.
그 후 정세와 의제 설정의 주도권은 더욱 우파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다. 국힘당 지도부 선거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이준석 돌풍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세대교체와 변화를 상징하고, 색깔론과 지역감정 선동에 의존하던 구우파와 다르다는 이준석의 장점만 부각되고 있다.
장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그의 문제점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차별의 대상을 ‘변화’시키고 혐오선동의 주제를 ‘혁신’할 뿐이라는 점, 더욱 강경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지상주의라는 점, 철저한 엘리트주의일뿐 아니라 ‘아빠찬스’를 이용한 불공정의 장본인이라는 점들 말이다.
오히려 그의 하버드 학벌은 가장 좋은 무기가 되고 있다. 왜냐면 한국사회와 주류언론 자체가 엘리트적 학벌주의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치밴드의 예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할때마저도 따라붙는 게 ‘서울대 출신들’이라는 후렴구이다.
지난해 <조선일보>가 정의당 김종철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빼놓지 않고 언급했던 것도 ‘당신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데...’라는 것이었다. 주류언론들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을 인터뷰하거나 보도하며 항상 은근히 강조하는 것은 ‘명문대를 중퇴’했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대학을 거부하고 중퇴를 해도 그것이 명문대일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 시험성적이 우수했고 학벌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사회의 주류적 질서와 가치관, 규범들을 잘 학습하고 수용했다는 의미이기 쉽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학교와 교육제도가 가르치는 것은 기존의 질서, 권위, 가치, 규범에 대한 복종이고 학생들은 이것을 얼마나 잘 내면화했는지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특히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명문학교일수록 문제는 더 심각한다. 그런 학교는 목표 자체가 기존체제의 지배계급 엘리트들을 육성하고 배출하는 것에 두게 된다. 예컨대 대표적 명문고인 민족사관고의 올해 학습 주제 중에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결정문의 이해’가 포함돼 있었다.
영국에서 최고위 관료들을 배출하는 귀족학교인 이튼스쿨의 2011년 입학시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중동 석유 위기로 휘발유가 고갈 된 후 런던 거리에서 일어난 폭동을 군대가 진압하면서 시위대 25명이 사망했다. 당신이 총리라면 이 결정이 불가피한 도덕적 선택이었던 이유를 설명하라.’
박근혜 키즈로 한나라당 비대위원이 된 이준석이 2011년 당시에 전국철거민연합의 집회에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진짜 미친놈들”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이런 교육과 가치관 수용의 결과였을 것이다. 물론 이준석과 이준석 돌풍은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 촛불과 탄핵 이후에 구우파가 빠져들던 위기와 분열을 벗어나려고 하면서 만들어진 현상이다. 강경하고 단단했지만 확장성의 한계가 뚜렷했던 구우파는 신우파들로 얼굴, 간판, 세력을 교체하면서 외연 확장과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 신우파의 대표주자가 이준석이고 그들의 특징과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2019년 ‘검찰대란’ 국면의 개천절에 대학로에서 열린 청년학생 집회였다. 참석자는 압도다수가 청년남성이었고, 중간에 여성들의 응원 춤공연이 있었다. 발언자는 전부 명문대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능 고득점과 학벌을 과시하며 ‘조국 딸은 대가리로 대학간 것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이준석은 이 집회의 기획에 깊숙이 관여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준석은 그 후 ‘문재인 정부가 친중국 사대를 하고 있고 중국몽을 꾼다’며 혐중 선동을 하는데서도 두드러졌다.
그런 이준석이 이번에 극우파들에게 ‘아버지가 화교 아니냐’라는 공격을 당한 것은 참 역설적이다.(그같은 혐중 선동을 주도한 극우유튜버들이 아니라 그것을 비꼰 개그맨 강성범이 더 집중적 비난을 당하고 즉시 사과한 것은 기막힌 부조리지만, 조중동이 지배하는 언론시장에서는 항상 반복되는 일상이다.)
역설은 그것만이 아니다. 신우파로 변신중인 진중권이 이준석과 페미니즘 논쟁을 벌이고, 나경원이 반차별의 논리로, 주호영이 반신자유주의의 논리로 이준석을 비판하는 웃픈 풍경이 펼쳐졌다. 이준석을 지지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우파들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울타리 내부로 가둬지고 있는 셈이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관련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0415374073655
● 미얀마 민중항쟁은 끝나지 않았고 결코 패배할 수 없다
6월 10일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한국시민사회단체모임’은 포스코센터 앞에서 ‘미얀마 연대의 밤’을 진행했다. 여러모로 의미있는 행사였는데 특히 ‘행동하는 미얀마 청년연대’의 활동가가 미얀마 현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다. 4개월 넘게 피의 학살과 희생이 벌어지는 속에서 힘겨운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미얀마의 활동가는 그 편지에서 ‘혁명가는 죽일 수 있어도 혁명은 죽일 수 없다’고 했다.
미얀마 '봄의 혁명'은 지금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반세기 넘게 유지되 온 군대와 국가가 일체화된 미얀마 정치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고, 중국은 군부를 돕고 있고, 서방의 강대국들도 미얀마의 민주주의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NUG)가 연방연합군을 결성한다고 해도 병력 규모나 무기 등에서 비교가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투쟁은 물리력으로만 승부가 나는 게 아니다. 역사적 대의와 정당한 명분으로 무장한 민중은 총칼로도 짓밟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미얀마 군대 내부에서 탈영 소식에 주목하고 이런 균열이 더 확대되길 희망하고 기대한다.
아웅산 수찌, NLD, 국민통합정부(NUG)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쿠데타 군부 테러집단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당연히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미얀마에서 투쟁에 함께하고 있는 평범한 민중들 속에서도 찾아보면 많은 한계와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처음부터 완전하고 무결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온갖 편견과 한계와 인간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들고 일어나 세상을 바꾸고 자기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다.
이미 많은 역사적 전진들이 나타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NUG)는 군부독재를 뒷받침해 온 기형적인 2008년 헌법 폐기를 선언했고, 모든 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는 민주연방제를 약속했고, 최근에는 로힝야에 대한 시민권 부여도 발표했다. 이 모든 것은 미얀마 민중의 투쟁이 낳은 역사적 변화와 성과이다.
미얀마 민중의 목소리와 혁명의 과제를 대변하는 한 국민통합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각국의 기업들이 미얀마 군부에 대한 투자와 지원, 협력을 중단할 것을 계속 요구하고, 각국의 정부에게 군부가 아니라 국민통합정부를 인정하고 지지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군부에 맞서서 민족과 부문, 경계를 넘어서 더 큰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지만, 제국주의가 뿌려놓은 분열의 씨앗, 군부가 계속 조장해온 분열, 수찌 정부가 보여온 한계와 그것이 낳은 불신, 중국과 미국 등 강대국들의 문제, 소수민족 일부 지도자들의 잘못된 태도들이 결합돼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결국 미얀마 민중은 길을 찾을 것이라고 믿고 끝까지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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