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혁신

신파시즘, 제국주의, 중동에서 전쟁과 혁명 – 1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5. 10. 21. 13:21

이 글에서 인터뷰한 질베르 아슈카르(Gilbert Achcar)는 레바논에서 성장했으며 파리, 베를린, 런던에서 거주하며 강의했고, 런던대학교 SOAS의 명예교수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야만의 충돌>(2002, 2006),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공저한 <위험한 힘: 중동과 미국의 외교정책>(2007), <아랍인과 홀로코스트: 아랍-이스라엘 서사 전쟁>(2010), <마르크스주의, 오리엔탈리즘, 코스모폴리타니즘>(2013), <민중의 바람: 아랍 봉기의 급진적 탐구>(2013), <병적 증상: 아랍 봉기의 재발>(2016), <신냉전: 코소보에서 우크라이나까지 미국, 러시아, 중국>(2023)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가자 대재앙: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집단학살>을 출간했다. 국제적 정세와 중동의 상황을 설명하는 이 인터뷰가 지난 2년간의 가자 집단학살을 더 깊이있고 폭넓게 이해하고 전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번역 소개한다. 글이 매우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첫 번째이다.(번역: 두견)

출처https://newpol.org/issue_post/neofascism-imperialism-war-and-revolution-in-the-middle-east/

국제적 관점으로 본다면, 제국주의의 전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중국과 미국 간의 무역 경쟁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 제국주의의 종말적 위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보다 낙관적인 일부는 이미 새로운 국가들을 포함하도록 확장된 BRICS 이니셔티브를 지지해왔다. 반면,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와 같은 이들은 좌파 내 진영주의의 부활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다. 따라서 질문은 현재 강대국 간의 대립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다. 이는 제국주의 간 대립과 같은 것인가? 신냉전인가? 이것이 우리의 첫 질문이다.

우선, 미국 제국주의의 종말적 위기를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음을 강조해야 한다. 불행히도 미국 제국주의는 죽기는커녕 멀쩡히 살아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변형이다. 종말을 맞이한 것은 내가 '대서양 자유주의 질서'라고 부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체제다. 이는 나토, 워싱턴과 일본, 워싱턴과 한국 간의 조약과 같은 정부 기관들을 포함한다. 이 국제적 자유주의 질서는 '규칙에 기반'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언제나 큰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서구 강대국들, 특히 미국은 자신들의 규칙 외에는 어떤 규칙도 진정으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이 자유주의 국제 질서, 즉 대서양 자유주의의 붕괴의 시작이다. 이는 많은 이들이 믿는 것과 달리 도널드 트럼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이든과 가자 전쟁은 그 결정적 순간이었다. 특히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취한 태도와 가자에 대해 취한 태도의 극명한 대조 때문이다. 이는 소위 대서양 자유주의의 위선과 모순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정부를 네오파시스트로 묘사될 수 있는 러시아 정권에 맞서 방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네오파시스트와 네오나치 연합이 벌이는 집단학살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정부의 진정한 본질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네오파시스트, 리쿠드당, 그리고 이타마르 벤-그비르(Itamar Ben-Gvir), 베잘렐 스모트리치(Bezalel Smotrich)와 같은 네오나치들로 이루어진 연합이다. 이 엄청난 모순은 대서양 자유주의, 즉 소위 국제적 자유주의 질서의 관에 마지막 못을 박았다.

트럼프가 하는 일은 이 과정을 극단으로, 궁극의 논리적 결론으로 몰아가며 자유주의라는 어떤 가식도 제거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유주의적이거나 인권을 지지한다는 가식을 전혀 하지 않는다. 냉전의 자유 세계이데올로기는 트럼프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 그는 '자유'롭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행정부는 밀레이(Milei), 보우소나루(Bolsonaro),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그리고 물론 모든 유럽 네오파시스트들을 포함한 국제 극우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

이는 엄청난 역사적 변형이며, 절대적으로 중대한 변화다. 내 관점에서는 이것이 냉전의 종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냉전이 끝난 후 25년간 새로운 냉전이 이어졌지만, 지금 우리는 국제 관계의 완전한 재구성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가 들어선 것은 내가 네오파시즘의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다. 1930년대에 파시즘의 시대가 있었듯이, 지금 우리는 네오파시즘의 시대에 있다.

이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제국주의 강대국이 네오파시스트 연합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1930년대에 미국은 영국과 함께 파시즘의 부상에 맞선 자유주의의 보루였다. 이제 이는 죽었다. 미국의 역할로서 이는 완전히 죽었으며, 이는 정치적, 이념적, 생태적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이들은 기후 변화를 부정하고 화석 연료를 지지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당신이 언급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당신은 또 다른 영국 마르크스주의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와 위기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는 새로운 대재앙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관점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21세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단계를 특징짓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질문은 캘리니코스가 묘사한 새로운 시대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다. 이 새로운 시대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지, 아니면 그 기원이 훨씬 이전에 있다고 보는가? 또한, 이 시대가 레닌이 1914년에 선언한 전쟁과 혁명의 시대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선, 대재앙의 시대라는 표현은 수사적 공식이다. 이는 현재 일어나는 일을 정치적으로 특징짓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많은 재앙에 직면해 있다. 기후, 팬데믹 등등. 오늘날 지구는 매우 큰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이를 새로운 대재앙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저자의 문학적 선택이다. 내가 네오파시즘의 시대라고 말할 때는, 20년에 걸쳐 발전한 과정의 정점으로서 트럼프의 두 번째 대통령직에서 실제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극우 세력, 극우 정부, 극우 정권의 부상과 그들 간의 수렴이다.

우리는 미국의 트럼프와 러시아의 푸틴 사이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트럼프와 그의 행정부는 젤렌스키나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유럽의 자유주의 정부들보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더 많은 이념적 친화성을 가진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할 핵심이다. 전쟁과 혁명에 대해 말하자면, 솔직히 우리는 불행히도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있지 않다. 우리는 혁명 없는 전쟁의 시대에 있다. 지금 지평에 혁명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1930년대의 상황과 더 비슷한가?

아니다. 당신이 언급한 1930년대나 1914년에는, 유명한 전쟁과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 보듯, 여전히 사회주의적이었던 거대한 노동자 운동이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나중에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반자본주의 노동계급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강력한 세력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러한 세력들이 부상했고, 특히 러시아 혁명, 독일 혁명, 헝가리 혁명, 그리고 다른 봉기들이 있었다.

1930년대에는 파시즘의 부상이 있었지만, 파시즘에 맞서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운동이 있었고, 양자 간의 충돌이 있었다. 물론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짧은 휴전 기간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격렬히 대립했다. 그리고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엄청나게 성장하여 중국, 베트남, 한국에서 권력을 잡았고,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공산주의 정당들이 거대해지며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황을 그때와 비교할 방법은 없다. 노동자 운동, 특히 조직된 노동자 운동은 어느 때보다 약하다. 이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매우 낮은 노조 가입률로도 나타난다. 강력한 노동계급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좌파의 대부분은 완전히 신자유주의적 변형으로 갔으며, 이는 사회민주주의에도 적용된다. 다른 이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기 위한 갱신(aggiornamento)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붕괴와 그로 인한 교훈을 진정으로 얻지 못했다.

생태, 젠더, 정체성 정책, 반인종차별에 대한 청년 운동의 고무적인 부상이 있다. 하지만 1968년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끌었던 전 세계적인 거대한 학생 운동과 비교해보라. 오늘날의 청년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우리는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나는 현재의 네오파시즘 시대가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설명하는 글을 썼다. 왜냐하면 세력 균형이 1930년대보다도 더 나쁘기 때문이다. 나는 네오파시즘의 시대에 대한 내 글에서 이를 썼다.

새로운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을지 모르지만, 인류에 대한 주요 위협인 글로벌 기후 위기에 대한 네오파시즘의 영향은 엄청나다. 다른 모든 퇴보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이 원조를 줄여 수백만 명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일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시대에 있으며, 이를 매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물론 희망은 새로운 세대, 즉 젊은이들이 교차적으로 모든 투쟁을 포괄하는 대중 운동,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종, 젠더, 기후 문제를 계급적 관점, 반자본주의적 관점과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세력 균형은 상당히 약하다. 튀르키예에서 에르도안의 네오파시즘적 전환에 대한 대중적 저항과 같은 고무적인 신호들이 있다. 대중 운동이 이길지, 아니면 이 네오파시즘 정권이 이길지 지켜봐야 한다. 이는 고무적인 신호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네오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운동의 출현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중동의 제국주의와 반혁명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특히 당신의 저서에서 사용하는 개념에 대해, 이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다. 이 개념은 두 세력 간의 대립을 묘사한다: 첫째는 제국주의, 둘째는 많은 경우 제국주의 자체에서 기원한 근본주의 세력이다. 우리는 야만의 충돌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개념을 우리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가? 또한 중요한 측면이 있다: 당신이 이슬람 근본주의 요소를 정의할 때, 수니파 지하디스트 운동만을 고려하는가, 아니면 이란이 지원하는 호메이니스트 운동도 포함하는가?

나는 2001911일 이후에 <야만의 충돌>이라는 책을 썼다. 이는 헌팅턴(Huntington)의 문명 충돌론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었다. 내가 책에서 설명한 것은 이것이 문명 간의 충돌이 아니라, 각 문명이 만들어내는 야만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각 문명은 위기의 시기에 지배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야만을 만들어낸다. 나는 당시 일어나던 일을 미국의 야만(소련 붕괴 이후의 오만)과 정치적·이념적으로 심각히 반동적인 이슬람 급진화 세력의 반작용으로 해석했다.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IS)와 같은 지하디스트 세력의 경우 이는 명백하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더 일반적이다.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 세력은 반동적이며, 이슬람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이 반동적임을 즉시 이해한다. 나는 왜 일부 서구 좌파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항상 궁금하다. 모든 근본주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 는 정의상 반동적 이념이다. 사회적, 문화적, 이념적, 정치적으로 그렇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2001년 이후 10년이 지난 2011년에 소위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다. 이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어권 국가들에서 발생한 깊은 구조적 사회경제적 위기의 결과였다. 내 분석에 따르면, 이 깊은 위기는 처음부터 내가 장기적 혁명 과정이라고 부른 것을 만들어냈다. 이 지역은 수십 년에 걸친 장기적 과정에 들어섰다. 이 과정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이는 일반적인 혁명 대 반혁명이 아니었다. 특정한 것이었다: 혁명과 두 개의 반혁명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었다.

하나는 기존 체제를 대표하는 구체제의 반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반동적 성격의 반대 세력이 대표하는 반혁명이다. 이는 전체 그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좌파는 역사적으로 위축되어 있으며 상당히 약하다. 2011년에 좌파는 힘에 비해서 다소 큰 역할을 했고, 2019년에 아랍의 봄 두 번째 물결에서도 다시 좌파가 다소 큰 역할을 했지만, 이는 변화를 이루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사적 실패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혁명 과정이 죽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적 위기, 이 지역에 존재하는 특정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의 위기가 있는 한, 새로운 봉기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위기를 낳을 것이다.

큰 질문은 새로운 세대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운동을 구축할 수 있을지다. 솔직히 이는 매우 큰 도전이다. 낙관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정권들은 잔인하며 미국 제국주의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황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대중 운동의 부상을 보고 있다. 미래는 큰 물음표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위기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개념, '야만 간의 충돌'을 이해했으니, 아랍 맥락에서의 전쟁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서구 언론은 때로 '대리 전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주류 언론에서 유행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는 국가가 적대국에 맞서 제3의 준국가적 세력을 활용하는 대결을 의미한다. 이 세력은 강대국이 훈련시키고 자금 지원을 한 세력이다. 서구 주류 언론에 따르면, 이 기술, 이 대결 방법은 최근 수십 년간 아랍 세계에서 특히 널리 퍼져왔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야만 간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이 개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리 전쟁'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 개념이 지역 행위자의 주체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환원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역 행위자를 외국 행위자가 이용하는 꼭두각시로 묘사한다. 대리 전쟁이 일부 국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곧이어 외국 국가들이 한쪽 또는 다른 쪽 파벌을 지원하며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이 지역에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리비아 전쟁을 보자. 한쪽에는 튀르키예와 카타르가 트리폴리(리비아 서부)를 기반으로 한 세력을 지원하고, 다른 한쪽에는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가 벵가지(동부)를 기반으로 한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가 이끄는 세력을 지원한다. 예멘 전쟁을 보면, 사우디 왕국과 아랍에미리트가 전쟁에 직접 개입했고, 이란은 반대편인 후티를 지원했다. 따라서 이를 대리 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역시 이는 환원주의적이다.

이 전쟁들은 외국 국가들에 의해 대리 전쟁으로 이용되지만, 충돌하는 행위자들의 지역적 주체성도 존재한다. 수단 전쟁도 마찬가지다. 한쪽에는 아랍에미리트와 러시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집트와 사우디가 있다. 최근에는 특히 러시아의 입장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내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한쪽 또는 다른 쪽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스페인 내전을 생각해보면,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프랑코를 지원했고, 미국, 프랑스, 영국, 그리고 물론 소련이 공화파를 지원했다. 따라서 이는 뭔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대리 전쟁이라는 주장은 주로 우크라이나에 대해 제기되었다. 이는 다시 주체성의 부정이다. 만약 이것이 단순히 미국과 나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간의 대리 전쟁이라고 말한다면, 우크라이나인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들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국가가 침략당했다. 그들은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다.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점은 식민주의적이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국가로 존재할 권리조차 부정한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이 전쟁이 러시아와 서구 블록 간의 전쟁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투쟁도 있으며 여기서 나는 구분을 짓는다.

그들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과 인민을 방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물론 평화적 해결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지하며, 나는 민족주의적 극단주의의 논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극단주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영국 같은 일부 유럽 국가들이 이를 지지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2014년 이후 침략된 모든 영토를 해방할 때까지 싸울 권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는 매우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잡한 문제에서 입장의 균형을 찾아야 하며, 단순한 공식으로 해결하지 말아야 한다.

2번째 글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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