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과 레닌주의를 돌아보며 – 2
댄 라 보츠(Dan La Botz)
번역: 두 견
이 글의 필자인 댄 라 보츠는 미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저술가이자 1960년대부터 활동해 온 미국 급진 좌파의 대표적인 현장 노동운동가다. 1970년대 미 트럭운송노조(Teamsters) 내 상부 관료제와 부패에 맞서 현장 노동자 중심의 민주화를 이끈 혁신 조직 'TDU'의 창립 멤버이며, 독립 좌파 조직 '연대(Solidarity)'와 계간지 <새로운 정치>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는 미국 최대 좌파 조직인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트럭운송노동자들의 반란>, <세자르 차베스와 농민운동> 등 수많은 책과 글들을 집필했고, 특히 라틴아메리카(특히 멕시코) 노동자 계급의 자율적 투쟁사에 정통했다. 그는 억압받는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일관되게 옹호하며 스탈린주의 및 교조적 사회주의를 비판해 왔고, 의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한계 역시 비판해 왔다. 글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고 이것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글이다.
출처: https://links.org.au/goodbye-lenin-and-leninism

제헌의회 해산
1917년 11월과 12월, 러시아 전역의 인민들은 제헌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조직한 선거에서 투표했다. 임시정부는 3월에 여성에게 출마권과 투표권을 부여했으므로 진정한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많은 여성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약 4,700만 표가 투표되었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역사적으로 농민의 정당이자 농민 조직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당(SR)은로 주로 농촌 지역에서 약 40%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볼셰비키는 주로 도시 지역에서 약 24%를 얻었다. 멘셰비키는 2-3%를 얻었고, 자유주의 자본주의 정당인 카데트(Cadets)는 약 5%를 얻었다. 다른 소수 정당들이 나머지를 나누어 가졌다.
우파 사회혁명당이 지배한 제헌의회는 2월 부르주아 혁명의 연속성을 대변했다. 의회는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레닌은 자신의 볼셰비키 적위대를 좌파 사회혁명당 및 아나키스트 동맹자들과 함께 동원하여 1918년 1월 19일 제헌의회를 폐쇄했고, 공화국 수립이라는 당의 역사적 요구를 팽개쳤다. 10월 24-25일의 쿠데타와 1월 19일의 제헌의회 해산 사이에 볼셰비키는 혁명의 다음 단계를 수행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리아자노프는 이번에도 제헌의회 해산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레닌주의자들은 이것이 권력을 노동자 계급의 손, 즉 소비에트의 손에 쥐여주었기 때문에 영리한 전략적 결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소비에트가 공화국, 즉 노동자 공화국이자 더 높은 형태의 민주주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비록 볼셰비키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손에 권력을 쥐여준 쿠데타에 대해 표결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사회혁명당이 상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대의원들을 선출한 전국 선거를 통해 선택된 제헌의회는 파괴되었다. 제헌의회가 이틀만 더 늦게 소집되었더라도 레닌의 당은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도 정부를 구성할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레닌주의자들은 제헌의회가 혁명을 방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반혁명이 뒤따랐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레닌은 자신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여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갖도록 확실히 해두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볼셰비키당은 4월과 10월 사이의 엄청난 사건들을 거치며 당원 충원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부 좌파 멘셰비키, 좌파 사회혁명당, 트로츠키의 '메쥐라이온치(Mezhrayontsy)' 및 다른 좌파들이 합류하면서 변모했다. 이것이 초기에는 볼셰비키 내부의 더 많은 정치적 다양성을 의미했으나, 레닌과 그의 가장 가까운 핵심 진영이 계속 지배력을 유지했다. 당의 위신, 조직적 일관성,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회적 기반은 다른 집단들이 당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기보다 볼셰비키 내부로 흡수되었음을 의미했다.
소비에트 정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는 '인민위원평의회'라고 불리는 소비에트의 첫 지도 기구를 수립했으며, 이는 처음에 전적으로 볼셰비키로만 구성되었다. 레닌은 멘셰비키 및 우파 사회혁명당이 의회 정부보다 소비에트가 우월하다는 원칙을 수용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과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거부했다. 그러나 레닌은 정부가 농민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는 1917년 12월에 좌파 사회혁명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를 농촌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을 도왔고 대지주의 재산을 농민에게 재분배하는 일을 조직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 연정은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문제를 두고 결별한 1918년 3월까지만 유지되었다. 레닌은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헌가리,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단독 조약 체결 협상을 강력히 지지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레닌에서 스탈린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빌헬름 2세가 진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에 레닌은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의 혁명을 희생시키는 덜 유리한 평화 조약에 서명하라는 결정을 중앙위원회에서 강행했다." 그 조약은 영토와 인구 면에서 막대한 양보를 감수해야 했으나,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켰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그 조약이 너무 많은 양보를 했으며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믿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조약에 서명하지 않고 그냥 전쟁에서 이탈해야 한다고 믿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조약에 격렬히 반대하여 이를 사보타주하려는 시도로 독일 외교관을 암살했고, 이어서 소비에트 정부를 상대로 봉기를 주도했다. 봉기는 실패했고,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폭력적 반대에 가담한 좌파 사회혁명당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의해 소비에트 지도부에서 배제되어 볼셰비키가 정부 내의 유일한 정당으로 남게 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일당제 국가로 변모했으며, 이후 역사 전체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실천에서 거대한 농민층이라는 인구학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자 계급을 우대했다.
1917년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가 정부가 되면서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의 힘을 기계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작업했다. 소비에트의 간접적이고 다단계적인 선거 제도에서 지역 소비에트 수준에서는 노동자나 병사 1,000명당 1명의 대의원이 배정된 반면, 농민은 5,000명당 1명의 대의원만이 배정되었다. 1918년 헌법은 도시 투표자가 농촌 투표자보다 더 많은 가중치를 갖는 시스템을 확립했다(도시 투표자 25,000명당 대의원 1명 대 농촌 투표자 125,000명당 1명). 지역 대의원들이 지방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투표하고 이들이 다시 국가 입법부인 최고 소비에트에 투표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우위는 배가되었다. 이것이 노동자 계급의 선거적 지배를 확립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온전히 민주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었다. 정부를 통제한 레닌의 볼셰비키가 선거 제도를 만들고 감독하기도 했다.
같은 해인 1918년, 레닌과 볼셰비키는 제1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대회를 소집했다. 이는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가맹당들이 자신들의 반전 결의를 위반하고 각자의 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수치스럽게 붕괴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었다. 전쟁과 이어진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세계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분열시켰고, 새로운 공산당들이 출현하여 이제 새로운 인터내셔널 안에서 연대하고 레닌의 볼셰비키주의를 모델로 삼았다.
1인 경영제
소비에트 정부는 1917년 11월에 처음에 노동자 통제하에 산업 국유화를 시작했다. 1918년 중반에 이르러 산업과 운송 모두에서 국유화 과정이 완료되었다. 1918년 4월 에세이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업>에서 레닌은 공장이나 다른 시설에서 관리자나 전문가의 개인적 통제를 주장했으며, 고용된 이들이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바쳐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이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른 체제 내에서 당시로서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공장에는 관리자, 전문가, 노조원 또는 다른 노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있었다. 1919년 9월에 레닌은 대신 위원회의 규모를 축소하고 '1인 경영제(edinonachalie)'를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1920년 1월에 그는 '개인 경영'이 효율성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1921년 제10차 당대회 기간 동안 '노동자 반대파' 정파는 경제의 민주적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 선출된 산업 위원회와 생산자 대회를 요구했다. 레닌은 당과 국가가 공장 관리자와 작업장 감독자들을 통해 운영하며 산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입장에 격렬히 반대했다. 레닌과 그의 볼셰비키가 논쟁에서 승리했다. 그리하여 이제 정치를 지배하게 된 상부로부터의 중앙집중화된 통제 모델이 산업에도 적용되었다.
체카와 적색 테러
1918년 8월 30일, 사회혁명당원 패니 카플란(Fanny Kaplan)이 레닌을 암살하려 총격을 가해 그에게 중상을 입혔다. 직후 새로 창설된 소비에트 지도 기구인 인민위원평의회는 '계급의 적들' 및 '반혁명 분자들'과 싸우기 위한 비밀경찰 조직인 '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즉 체카(Cheka)를 창설했다. 다른 정당들도 체카에 참여했으나, 1918년 3월 러시아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 볼셰비키가 인민위원평의회를 통제했고, 평의회가 다시 체카를 통제했으며, 체카는 수천 명의 요원과 나중에는 20만 명의 군대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체카는 재판 없이 사람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권리와 재산을 박탈하며, 처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반란, 폭동, 봉기의 위협 속에서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Felix Dzerzhinsky)는 1918년 9월 5일 적색 테러를 발동하여 우익분자, 아나키스트 및 기타 정치적 적들에 대한 대량 체포와 대량 처형을 단행했다. 체카는 그 짧은 역사 동안 수만 명을 사살했다. 1922년에 체카는 GPU가 되었고, 이어서 OGPU가 되었으며, 30년대 중반에는 NKVD가 되었는데, 이 기구는 동일한 종류의 많은 권력을 유지했고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볼셰비키가 된 전직 아나키스트 빅토르 세르주는 자신의 저서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체카의 창설이 음모, 봉쇄, 개입으로 인해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이성을 잃었던 1918년에 저지른 가장 중대하고 허용될 수 없는 오류 중 하나였다고 믿는다. 모든 증거는 대낮에 공개적으로 작동하고 변호권을 인정하는 혁명재판소가 훨씬 적은 남용과 타락만으로도 동일한 효율성을 달성했을 것임을 가리킨다. 종교재판의 절차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요했단 말인가?"
전시 공산주의
1918년 6월에서 1921년 3월까지 지속된 러시아 내전은 주로 소비에트 정부의 적군과 알렉산드르 콜차크(Alexander Kolchak) 장군 휘하의 전 차르 제국군 우익 장교들로 구성된 반혁명 백군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르 마흐노(Nestor Makhno) 휘하의 아나키스트 군대('마흐노 운동(Makhnovshchina)')와 사회혁명당에 동조하는 녹군을 포함하여 다른 세력들도 내전에 개입해 있었다. 코카서스의 이슬람군 같은 지역 세력들도 있었다. 14개의 외국 국가들도 적군에 대항하여 개입했다. 도처에서 옛 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이 내전을 기회 삼아 독립 국가를 창설하려 시도했다. 궁극적으로 700만에서 1,200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의 사상자로, 혹은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혁명을 좌절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이 복잡한 갈등 속에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1918년 6월 '전시 공산주의'라는 경제적·정치적 체제를 수립했고 도시의 노동자 계급과 적군을 먹이겠다는 목표 하에 농민들로부터 식량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는 징발과 배급을 훨씬 가로질러 넘어섰다. 정부는 관할 하의 모든 산업을 국유화했고, 사기업을 금지했으며, 모든 대외 무역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정부는 철도의 통제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철도에 대한 준군사적 경영 체제를 만들었다. 모든 곳에서 파업이 금지되었고 노동자 계급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노동 의무가 부과되었다. 일당제 공산주의 국가가 이제 경제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다.
교회에 맞선 전쟁
1921년, 레닌의 볼셰비키당은 차르 치하 러시아에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이었던 정교회를 상대로 전쟁을 개시했다. 러시아에는 수만 명의 사제, 수녀, 수도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막대한 부를 지닌 종교적 카스트로서 차르에게 충성하고 귀족 지주들과 결탁해 있었다. 교회에 맞선 전쟁은 두 가지 수준에서 전개되었으니, 교회 재산에 맞선 전쟁과 정교회 종교에 맞선 전쟁이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당시 발생한 참혹한 대기근을 이유로 교회의 모든 금, 은, 보석을 요구했다. 교회는 그 가치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하며 타협을 시도했으나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지역 예배당에서 자행된 몰수 조치는 정부 당국과 정교회 기독교인들 사이의 폭력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공산주의 국가는 교회의 토지, 건물, 부를 강탈했다. 정부 수반으로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총살(처형)하는 데 성공하는 반동 성직자와 반동 부르주아지의 대표자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왜냐하면 이 '청중'에게는 바로 지금, 향후 수십 년 동안 그 어떤 저항도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정교회의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꺾기 위해 8,000명의 사제를 살해했다. 레닌이 사망한 후에도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League of Militant Atheists)'은 정교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근절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하며 수천 개의 교회, 시나고그, 모스크를 폐쇄했다. 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124조는 이론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으나, 이는 실천에서 거부되었다. 종교에 대한 박해는 스탈린과 흐루쇼프 치하를 거쳐 1960년대와 그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러시아의 낙후성
앞서 논의했듯이,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은 자국의 미미한 노동자 계급과 거대한 농민층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소비에트를 통제하던 볼셰비키는 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로 노동자 계급에게 소비에트 내에서 불균형적으로 많은 대표권을 부여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산업이 거의 없고 노동자 비율이 낮은 국가의 문제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문제는 어떻게 교정될 수 있었겠는가? 레닌은 높은 산업 발전 수준, 거대한 노동자 계급, 강력한 노동조합과 막강한 사회주의 정당을 가진 국가인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러시아의 불균형이 교정될 것이라 믿었다. 공산주의 독일이 공산주의 러시아를 도우러 올 것이었다. 그는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 혁명을 구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확신했으며, 1918년 3월에 표현했듯이 "독일 혁명이 없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라고 보았다.
노동자 계급의 국제주의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쓴 이래로 당연히 사회주의자들의 핵심 가치였다. 그리고 1918년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연쇄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은 확실히 엿보였다. 그러나 독일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만이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레닌의 주장은 자국 내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에서 새로운 난제를 대변했다. 그러한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할 수 있었겠는가?
1919년 3월에 이르러 레닌과 볼셰비키는 가맹당 대부분이 세계대전 참여를 지지했던 기존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주의 운동을 배신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볼셰비키의 조직적·정치적 원칙에 기반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확장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에서 그 활동은 독일에 집중될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령 독일 혁명이 일어난다 한들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는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가로막고 있었다.
레닌이 생각한 해법은 러시아 혁명을 폴란드로, 이어서 독일로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미 1919년에 러시아 군대는 차르 제국이 해체될 때 폴란드가 장악한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폴란드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레닌은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이 그곳에서 혁명을 촉발할 것이며, 그것이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독일로 가는 '교량'을 제공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적군이 폴란드에서 환영받을 것이라 믿으며 폴란드와의 전쟁을 옹호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에 의해 예속되었던 폴란드 인민들은 1795년부터 1918년까지 유럽 지도에서 지워져 있었다. 엄청난 폴란드 민족주의 정서와 대중 운동이 존재했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가 이를 사로잡고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의 지도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1918년에 폴란드의 국가 수반이자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강력한 폴란드 국가 건설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확장주의적 목표를 가지고, 당시 여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간주되던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대한 폴란드의 공격을 이끌었다. 이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지 속에 1918년 3월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했다.
레닌은 적군과 폴란드 노동자 및 농민이 단결하여 폴란드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에 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것을 예견했다. 레닌은 자신의 연설인 <폴란드 전선으로 떠나는 적군 장병들에게 보내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곳의 폴란드인들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를 통해 여러분이 노동자와 농민 공화국의 군인이라는 점을, 즉 침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임을 증명하라."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군을 정복자로 보았고 그들에 맞서 싸웠다. 혁명을 확산시키려는 열망에 눈이 멀어 레닌의 판단은 실패했다. 그는 이보다 더 틀릴 수 없었다.
1920년 바르샤바 전투 이후 폴란드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어 1920년 10월 휴전과 1921년 3월 리가 조약 협상이 뒤따랐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현재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에 속한 토지에 대해 상당한 영토적 양보를 감수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레닌에서 스탈린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폴란드의 노동자와 농민은 봉기하는 데 실패했으며, 이는 혁명이 총구 끝에 실려 외국으로 도입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폴란드-독일을 잇는 사회주의 지대의 꿈을 당분간 포기해야 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러시아 혁명과 내전은 러시아 인민에게 거대한 고난을 가져다주었다. 일부 지역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300마일 떨어진 탐보프에서 농민들이 식량 징발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탐보프 반란군들은 8만 명의 게릴라 군대를 형성하여 체카 및 적군과 싸웠다. 그것이 가장 큰 규모의 봉기였으나, 당시 체카는 그러한 반란을 118건 보고했다. 어떻게 상황을 통제 하에 둘 수 있었겠는가? 1917년에 당원이 약 23,000명에 불과했던 왜소한 볼셰비키당은 1918년까지 10만 명으로 성장했으나, 이는 1억 인구 국가의 0.1%에 불과했다.
우리가 보았듯이, 볼셰비키는 러시아가 해체되어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체카의 적색 테러와 전시 공산주의, 즉 엄격한 제한, 힘, 폭력을 사용했다. 볼셰비키는 언제든 반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거대한 불안과 우려를 겪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불과 30마일 떨어진 코틀린섬의 크론슈타트시에서 노동자, 군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볼셰비키는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렸다. "백군이 크론슈타트를 장악했다." 이는 백군 반혁명 분자들이 곧 외국 침략자들과 결탁하여 러시아 수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때까지 혁명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던 바로 그 군인, 수병, 노동자들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제 볼셰비키의 눈에 그들은 반역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들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크론슈타트 반란 직전인 1921년 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식량 공급 개선과 지역 시장의 재개설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표현과 언론의 자유도 요구했다. 이에 대응하여 볼셰비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업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2월 26일, 함대 총회가 크론슈타트 수병단 일행을 페트로그라드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게 했고 이들은 이틀 뒤 돌아왔다. 옛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한 대표자들의 보고를 들은 수병들은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작성했다.
* 소비에트의 즉각적인 재선거 실시. 현재의 소비에트는 더 이상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선거는 비밀투표로 진행되어야 하며, 선거 전 자유로운 선거 운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 노동자와 농민, 아나키스트, 그리고 좌파 사회주의 정당들을 위한 표현과 언론의 자유 보장.
* 집회의 권리, 그리고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의 자유 보장.
* 늦어도 1921년 3월 10일까지 페트로그라드, 크론슈타트, 페트로그라드 구역의 무소속 노동자, 군인, 수병들의 대회 조직.
* 사회주의 정당들의 모든 정치범, 그리고 노동자 계급 및 농민 조직에 속한 수감된 모든 노동자와 농민, 군인과 수병들의 석방.
* 교도소와 수용소에 구금된 모든 이들의 기록을 조사할 위원회의 선출.
* 군대 내 모든 정치 부서의 폐지. 그 어떤 정치 정당도 자신의 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특권을 누리거나 이를 위해 국가 보조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정치 부서가 있던 자리에는 국가의 자원을 지원받는 다양한 문화 집단들이 신설되어야 한다.
* 도시와 농촌 사이에 배치된 군사적 파견대들의 즉각적인 폐지.
* 위험하거나 유해한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제외한 모든 노동자들의 배급 평등화.
* 모든 군사 집단 내 당 전투 부대들의 폐지. 공장과 기업 내 당 경비대 폐지. 경비원이 필요한 경우, 노동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지명해야 한다.
* 농민들이 스스로 가축을 돌보고 고용 노동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자신의 토지에서의 행동 자유와 가축 소유 권리의 부여.
* 모든 군 부대와 사관생도 집단이 이 결의안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 언론이 이 결의안을 제대로 보도할 것을 요구한다.
* 이동식 노동자 통제 집단들의 설치를 요구한다.
* 임금 노동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수공업 생산을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반혁명의 강령이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 프로그램이었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3월 1일에 시작되었다. 볼셰비키는 당 기관지를 통해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지는 일이 반혁명 운동이라는 주장을 지속했다. 레닌, 트로츠키 및 다른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트로츠키가 이를 수행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고 제르진스키가 공격을 조직했다. 볼셰비키는 3월 5일까지 조건 없는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조금씩, 이제 그 거짓이 끝을 모르던 언론이 쳐놓은 연막을 뚫고 진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언론, 우리 혁명의 언론,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언론이었으며, 따라서 역사상 최초의 부패하지 않고 편견 없는 언론이었다. 확실히 과거에도 그것은 때때로 어느 정도 선동(그러나 따뜻하고 진심 어린 종류의)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곤 했고 반대자들에 대해 폭력적인 언사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게임의 규칙 내에 머물렀고, 어쨌든 이해할 수 있게 행동했다. 그러나 이제 거짓말은 그것의 확정된 방침이 되었다."
세르주는 그 공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해빙이 오기 전에 반란을 청산해야 했다. 최종 공격은 3월 17일 [미하일 투하체프스키(Mikhail Tukachevsky) 장군]에 의해 개시되었고 대담하게 쟁취한 승리로 귀결되었다. 유능한 장교도 없이 싸운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자신들의 포병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일부는 핀란드로 탈출했고, 일부는 요새에서 요새로, 거리에서 거리로 야만적인 방어전을 벌였으며 "세계 혁명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다. 일부는 심지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만세!"라는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수백 명이 페트로그라드로 압송되어 체카로 넘겨졌는데, 체카는 몇 달 후에도 범죄적이고 어리석게도 그들의 소집단을 여전히 총살하고 있었다. 이 포로들은 몸과 영혼 모두 혁명에 속해 있었으니, 그들은 러시아 인민의 고통과 의지를 표현했던 것이며 그들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NEP[신경제정책]가 존재했다! 게다가 그들은 내전에서 포로로 잡힌 것이었으며, 자신들의 지지자가 될 용의가 있는 적대자들에게 사면을 오랫동안 약속해 온 정부에 의해 잡힌 것이었다. 제르진스키는 이 끝없는 학살을 주도했거나, 최소한 방조했다."
크론슈타트는 래칫 효과의 결과였으니, 정당 조직, 제헌의회 해산, 전시 공산주의, 체카와 적색 테러, 폴란드와의 전쟁에 관한 일련의 초기 결정들이 1921년 3월의 사건들을 사실상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크론슈타트에서 양측의 수천 명의 적군 군인과 수병들이 사망했으며, 양측 모두 자신들이 혁명을 방어하고 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오직 한쪽, 즉 반란군들만이 그러했다.
정파 금지
제르진스키가 크론슈타트 진압을 감독하고 있을 때,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제10차 당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소집되었고, 이제 정치적 위기를 다루기 위해 다른 조치들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이었다.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 시기를 종식시키는 신경제정책(NEP)을 제안했다. NEP는 징발을 끝내고 농민들이 작물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경제 전체에 대한 국가 통제가 종료되어 소규모 사업과 소매 판매가 허용되었다. 이는 국가가 운영하는 산업 및 무역과 나란히 존재하는 혼합 경제이자 자유 시장이었다. 그것이 당근이었다.
동시에 레닌은 당 내부의 정파를 금지하는 <당의 통일성에 관하여>라는 결의안을 도입했다. 그것이 채찍이었다. 그는 당 내에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언급하며 이를 정당화했는데, 그는 이 반란이 극단적인 급진 좌익 공산주의자로 위장한 부르주아 반혁명 분자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금지된 정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반대파'와 '민주주의 중앙집중주의' 그룹이었으며, 이들은 산업과 사회에서의 노동자 권력 및 관료제적 국가-정당으로 변모한 체제 내에서의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정파는 해산되거나 출당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집권당 내부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했다. 소비에트와 노동조합의 민주적 삶은 시들어 갔다. 볼셰비키는 이제 공산당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쥐었고, 공산당은 다시 정부, 새로운 혼합 경제, 그리고 사회를 통제했다.
레닌이 스탈린에게 일당제 국가 운영 권력을 부여하다
레닌은 1922년 스탈린이 공산당 서기장이 되는 것을 승인했는데, 이 직책은 그에게 당 행정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그 직책은 스탈린에게 신입 당원을 심사하고 승인할 수 있는 권한뿐만 아니라 당원들을 그들의 당 직책에 배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중요한 직책에 임명했고, 이들과 함께 결탁 세력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결과적으로 1924년 레닌이 사망했을 때 당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쥐게 되었다.
레닌은 스탈린이 제기하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으니, 1922년 12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서기장이 된 스탈린 동지는 자신의 손에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가 항상 충분한 신중함을 가지고 그 권력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1923년 1월 4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스탈린은 너무 난폭하다. 우리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완전히 견뎌낼 수 있는 이 결점이 서기장 직무에서는 견뎌낼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그 직책에서 해임하고, 모든 면에서 스탈린과 다르되 오직 우월함만을 지닌 다른 인물, 즉 더 인내심 있고, 더 충성스럽고, 더 정중하며 동지들에게 더 주의 깊고, 덜 변덕스러운 인물을 임명할 방법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세르주는 <레닌에서 스탈린으로>에서 "사망 직전 레닌은 관료 체제에 적대적이었던 트로츠키에게 당의 민주화를 위한 공동 행동을 제안했다"고 보고한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레닌은 뇌졸중으로 인해 점점 더 무력해졌고, 1년 후인 1924년 1월 21일 사망했다. 그 후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트로츠키, 스탈린 사이에 후계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책략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카드, 특히 당원 카드를 쥐고 있었다. 1929년까지 스탈린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라이벌들의 모든 위협을 제거했다. 여전히 서기장 직함을 유지한 채, 그는 당과 국가의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독재자가 되었다. 스탈린은 또한 곧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세계 공산당들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행사했다. 레닌은 비록 뒤늦은 우려를 표했을지언정 당을 스탈린에게 넘겨준 책임이 있었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이어졌는가?
물론 세르주가 <레닌에서 스탈린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썼을 때 그는 옳다. "그 누구도 전체주의 국가를 위해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죽어갔다. 볼셰비키주의는 대중과 세계를 향해 이전에는 결코 본 적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선포함으로써 승리했다. 스베르들로프(Sverdlov)가 기초한 최초의 소비에트 헌법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모든 자유를 보장했다. 예를 들어, 그 누구도 승리한 봉기 다음 날 언론의 자유를 폐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혁명은 전체주의로 이어졌다. 세르주는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스탈린주의의 싹은 시초의 볼셰비키주의 내에 있었다고 자주 말하곤 한다. 좋다, 나는 이의가 없다. 다만, 볼셰비키주의는 다른 많은 싹, 수많은 다른 싹들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최초로 승리한 사회주의 혁명의 첫해의 열광을 겪어낸 이들은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부검을 통해 시체에서 드러난 죽음의 싹(그리고 그가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싹)으로 살아 있는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나는 이것이 답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부검에서 중요한 질문은 환자가 젊었을 때 얼마나 활기찼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를 죽였는가이다. 그렇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포위당했고, 반혁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내전과 기근으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외국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정황 속에서(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어떤 결정들이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강요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나쁜 결정들이 내려졌으니,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거한 결정들이었다. 레닌과 훗날 레닌주의가 된 것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소멸시키는 데 매우 큰 역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당, 소비에트, 산업 및 노동조합 경영, 그리고 모든 정부 부처를 통제하게 된 볼셰비키는 중앙위원회와 그 수장인 레닌의 명령을 따랐다. 당은 상부에 복종하는 문화에 물들었으니, 초기에는 그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에 기반했고, 이어서 혁명에서 승리하고 이를 방어해야 할 필요성에 기반했으며, 그 후에는 혁명을 위태롭게 할까 두려워 복종은커녕 비판하기를 주저하는 마음에 기반했고, 체카 창설 이후에는 사상이나 행동의 독립성으로 인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공포에 기반했다. 이번에도 래칫 효과였다. 그러한 정당 내에서 민주주의는 죽었고 권위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레닌주의적 이상과 조직 구조는 나중에 소비에트 연방의 탱크에 실려 동유럽으로 운반되었고, 중국, 베트남, 북한으로 수출되었으며, 나중에는 쿠바에 의해 채택되었다. 공산주의 진영은 착취와 억압에 기반한 계급 사회를 지닌 국가들로 구성되었으며, 더 거대한 국가들은 제국주의적이었다. 서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점차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변해 가며 자본주의 정치 체제의 일부가 되었고 체제를 관리하는 데 기여했다.
나중에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추종하거나 모방한 이들은 너무나 자주 권위주의적인 소규모 정당, 교조적인 종파, 혹은 때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유사 종교 집단(cult)을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 중앙집중주의자'라 불렀으나, 이러한 집단들 중 진정으로 민주적인 곳은 거의 없었다. 지도자는 이끌었고 추종자는 따랐다. 이러한 집단들의 내부 삶은 활기를 잃었거나 바람잡이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위적으로 흥분되고 광기 어린 상태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집단들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유인물을 배포하고, 당원을 충원하며,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에서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으나, 그들의 활동은 대개 결실이 없었다. 대부분은 왜소하고 주변부적인 상태로 남았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대안적 가능성들
레닌의 경력과 볼셰비키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다른 궤적이 가능했을 특정 순간들을 볼 수 있다.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감행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대신, 인민이 선출한 의회가 소집되도록 허용하여 제헌의회로서 권력을 잡고 공화국을 수립하게 하거나, 어쩌면 소비에트와 결합된 공화국, 일종의 양원제 정부를 수립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의회 대의원의 25%를 확보하고 있었고 다른 좌파 정당들과 함께 소비에트 내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레닌이 당시 말했던 사회의 '사회적 조직화'를 창출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사회적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초기에 볼셰비키가 보존하고 나아가 확장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었을 다당제 정부가 존재했던 때에 우리는 또 다른 그러한 순간을 발견한다. 어느 경우든, 독일의 지지를 필요로 하던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구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에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크론슈타트 반란 당시, 볼셰비키 정부는 잠재적인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러시아를 계속 방어해 주는 대가로 반란군과 협상하여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레닌주의자들은 항상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하지만 그랬다면 반혁명이 볼셰비키의 초보적인 사회주의 정부를 타도했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스탈린과 그의 공산당의 발흥이 초기 사회주의 정부를 타도했고 1930년대에 이르러 이를 새로운 지배 계급, 즉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제국주의 권력을 관장하는 관료적 집단주의 지배계급으로 대체했다는 점을 사실로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레닌 및 레닌주의와 작별할 시간임을 명백히 해준다. 사회주의자나 혁명가가 되기 위해 레닌이 필요하지는 않다. 사회주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레닌이 필요하지는 않다. 오직 사회주의적 원칙, 민주적 토론, 그리고 구성원들의 헌신과 자기 규율만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의 사회주의 조직들은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진정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민주적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주의의 중심에 있다. 룩셈부르크가 옳았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없으며, 사회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기사 등록 202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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