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라 보츠(Dan La Botz)
번역: 두 견
이 글의 필자인 댄 라 보츠는 미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저술가이자 1960년대부터 활동해 온 미국 급진 좌파의 대표적인 현장 노동운동가다. 1970년대 미 트럭운송노조(Teamsters) 내 상부 관료제와 부패에 맞서 현장 노동자 중심의 민주화를 이끈 혁신 조직 'TDU'의 창립 멤버이며, 독립 좌파 조직 '연대(Solidarity)'와 계간지 <새로운 정치>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는 미국 최대 좌파 조직인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트럭운송노동자들의 반란>, <세자르 차베스와 농민운동> 등 수많은 책과 글들을 집필했고, 특히 라틴아메리카(특히 멕시코) 노동자 계급의 자율적 투쟁사에 정통했다. 그는 억압받는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일관되게 옹호하며 스탈린주의 및 교조적 사회주의를 비판해 왔고, 의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의 한계 역시 비판해 왔다. 글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 싣고 이것은 첫 번째이다.
출처: https://links.org.au/goodbye-lenin-and-leninism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그는 러시아 혁명에서 보여준 주도적 역할, 정평이 나 있는 전략적·전술적 명확함, 그리고 칭송받는 정치 이론으로 인해 현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여전히 서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격동적이고 복잡한 시대와 그 이후에 벌어진 모든 일로 인해, 레닌을 평가하는 것은 복잡한 과제다. 소련에서는 찬양받고 다른 곳에서는 비방을 받았기에, 레닌의 사상과 업적이 지닌 의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 점을 생각해 보라. 1924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그는 사실상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붉은 광장에 있는 그의 무덤 속 열린 관에 안치된 방부 처리된 시신은 수천만 명의 공산주의 신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의 사상 역시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소련 국가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들을 사실상의 성스러운 텍스트로 삼아 수많은 언어로 수십만 부씩 발행하여 여러 국가에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배포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명칭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소련 전역과 그 후의 동유럽, 그리고 전 세계 국가에서 레닌의 저작을 읽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교리 문답의 핵심이 되었다. 마오주의자들과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처럼 정통 교리에 반대하거나 경쟁 관계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조차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별칭을 채택했으며, 레닌은 그들의 교조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레닌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신격화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즉,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국가 종교의 신이 된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연히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국 인민에게 강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와 개발도상국의 혁명가 지망생들이 열정적이고 자발적으로 채택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1960년대에 좌파 진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를 기억해보면, 내가 만난 좌파 청년 집단들은 대개 매우 수동적인 방식으로 레닌을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현대 혁명 사상과 조직의 아버지인 레닌의 가르침을 비판 없이 수용했다.
결국 우리 젊은 활동가들이 레닌을 읽은 이유는 그가 러시아 혁명을 이끈 혁명 정당인 볼셰비키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어떤 나라든 간에 우리 자신의 국가에서 혁명 정당을 건설하여 조국의 혁명을 이끌고 국제 혁명에 기여하기를 원했다. 그 시절 전 세계의 급진적 집단들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으며, 레닌을 읽고 레닌주의자가 되었다. 그 경험은 오늘날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의 젊은 좌파들 사이에서 비록 더 작은 규모일지라도 반복되고 있다. 이 에세이는 그들을 위한 경고의 글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레닌을 공부하던 좌파 학생인 우리는 대개 그의 저서 중 몇 권만을 읽었다. 사회주의 정당을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책인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조합과 정당 내부에서 활동할 필요성을 다룬 에세이인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현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를 분석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담은 <국가와 혁명>이 그것이다. 이 책들을 읽고 토론한 후, 우리는 혁명을 이끌 것이라고 믿는 정당이 무엇이든 이를 조직하고 선전하며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젊은 레닌주의자들은 레닌이 항상 옳았다면 왜 일이 그토록 잘못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거의 던지지 않았다. 물론 일부 진골 신봉자들은 그 어떤 것도 잘못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당시 공산당원들은 소련이 언제나 성공적이었다고 믿었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으며, 그 체제가 동유럽, 중국, 베트남, 북한, 그리고 나중에는 쿠바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주의자들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별하고 소련을 '자본주의 길'에 올려놓았다고 봤지만, 마오쩌둥의 중국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 경로를 유지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진행 중이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소련이 근본적으로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지만,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 경제가 국유화된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사회 혁명이 아니라 지도부 교체를 의미하는 정치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 모두는 레닌의 곁을 지켰다.
다행히도 나는 당시 핼 드레이퍼(Hal Draper)가 이끌던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만났다. 우리 역시 레닌을 읽었지만, 다른 좌파들처럼 숭배하는 마음으로 읽지는 않았다. IS는 진정한 급진주의자, 이단아, 그리고 성상 파괴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카를 마르크스, 레닌, 레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를 읽는 동시에, 이들에 대한 비판가들과 다른 사회주의 및 아나키스트 전통에 속한 이들을 포함하여 다른 이들의 글도 읽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몇 년 동안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한 동지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영향 아래 우리는 정치적 소수 정파는 지도부에서 대변되지 않는 본격적인 '민주주의 중앙집중주의' 형태의 조직을 채택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잠시 그 접근 방식을 수용했으나, 이내 제정신으로 돌아와 소수 정파의 권리를 회복시켰다. 나 역시 당시에는 레닌에게 지나치게 경의를 표했고 너무 비판적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오늘날 나는 그가 비범한 정치 지도자였음을 인정하지만(누구나 인정해야 하듯이), 더 이상 나 자신을 레닌주의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에세이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많은 저자가 러시아 혁명 초기에 존재했던 에너지, 흥분, 창의성,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훌륭한 책들을 저술했다. 그러한 저자와 저서로는 마르셀 리브만(Marcel Lieberman)의 <레닌 치하의 레닌주의>,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의 저서인 <혁명의 전주곡>과 <볼셰비키의 집권: 1917년 페트로그라드 혁명>, 샘 파버(Sam Farber)의 <스탈린주의 이전: 소련 민주주의의 흥망성쇠>, 카르멘 시리안니(Carmen Sirianni)의 <노동자 통제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소련의 경험>, 그리고 S.A. 스미스(S.A. Smith)의 <혁명 속의 러시아: 위기의 제국 1890-1928> 등이 있다.
이 뛰어난 책들은 러시아의 영웅적인 혁명과 민주주의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이 그 민주주의 정신을 소멸시키고 10년도 지나지 않아 일당 독재의 출현을 가져왔는가이다. 단 하나의 답은 없으나, 일련의 특정한 결정들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혁명을 변모시켰다.
레닌의 삶과 업적은 사상, 정치 투쟁, 혁명, 그리고 국제주의에 관한 일련의 결정들을 대변하며, 이는 사회주의 운동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한 가지 일은 다른 일로 이어지며, 어느 날 우리는 전혀 예견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정당 조직, 권력 투쟁, 러시아 내전, 그리고 승리에 필요한 조치들에 관한 초기 결정들은 때때로 필사적인 상황에서 내려졌으며, 각각의 결정은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다음 결정과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쳤고 종종 이를 결정지었다.
외교관들과 사회학자들은 이를 부르는 명칭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이를 '레페 클리케(L’effet cliquet)' 또는 '클릭 효과'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래칫 효과(ratchet effect, 역진 저지 효과)'라고 부른다. 래칫 메커니즘은 한쪽 방향으로만 앞으로 회전할 수 있게 하며, 매번 클릭 소리가 난 후에는 뒤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들이 내려지는 것이다. 정당에 대한 레닌의 구상은 처음에는 되돌릴 수 있었으나,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제헌의회 해산,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양은 그렇지 않았다. 레닌의 정치적·전략적 결정 중 몇 가지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즉, 래칫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레닌의 핵심적인 정치적 결정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고 본다.
* 나중에 볼셰비키당이 되고 이어서 공산당이 된 볼셰비키 정파의 조직
*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을 폭발시킨 볼셰비키 쿠데타의 조직과 실행
* 1918년 1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헌의회의 폐쇄 및 해산
* 곧 단독 볼셰비키 정부로 전락한 볼셰비키 주도의 연립 소비에트 정부 수립
* 소련 산업에서의 '1인 경영제' 확립
* 정치 경찰인 체카(Cheka)의 창설과 적색 테러의 발동
* 내전 승리를 위한 전시 공산주의 수립과 사회의 군사화
* 패배로 이어진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 전쟁
*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
* 러시아 공산당 내 정파 금지
* 레닌의 스탈린 권력 강화
첫 번째를 제외하고 모두 되돌릴 수 없었던 이 결정들은 소수의 엘리트 정치 지도부에 의해 내려진 결정들이었으며, 이 결정들은 차례차례 민주주의를 말살했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결정들 중 상당수가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강요된 상황이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대안이 없었다는 점까지 양보할 수는 없다. 이제 처음부터 시작하여 각각의 결정들을 살펴보자.
레닌의 정당 구상에 대한 비판
지적이고 실천적인 면을 모두 포함한 레닌의 경험, 삶, 그리고 업적은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들과 갈등을 빚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 결정들이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단절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끈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비민주적 특성 중 많은 부분이 당시의 객관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다른 특성들은 의식적인 정치적 결정의 결과였다. 레닌은 자신의 확신과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최선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것이 그의 권위주의 성향을 뒷받침한 개인적 심리적 기반이었다.
활동가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접하는 에세이인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이 글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조직화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불법 신문 <이스크라(Iskra)>(불꽃)를 발행하던 조직을 위해 1902년에 집필되었다. 레닌은 1880년대 후반 학생 연구 모임과 이어서 노동자 집단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후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03년 벨기에에서 소집되었다가 경찰의 압박으로 런던으로 장소를 옮겨 재개된 RSDLP 제2차 당대회의 대의원 중 한 명이었다.
연방주의적 접근 방식을 채택하기보다 하나의 중앙집중화된 정당을 형성하기로 한 당대회의 결정에 따라, 레닌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민족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이라고 간주한 조직인 '유대인 노동자 총연맹(General Jewish Labour Bund)'의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을 사실상 배제했다. 분트(Bund)의 배제는 레닌의 추종자들이 이제 다수파, 즉 볼셰비키가 되었음을 의미했고, 율리우스 마르토프(Julius Martov)의 지지자들은 소수파인 멘셰비키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분트 지지자들이 배제되자 레닌은 자신의 정당 조직 계획인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시했고, 이는 마르토프 및 그의 추종자들과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마르토프는 레닌처럼 하나의 포괄적인 문서를 작성하지는 않았으나, 당의 강령을 수용하고 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당의 "조직 중 하나의 지도 아래" 활동하는 운동 활동가들의 정당을 옹호하는 주장과 수정안을 내놓았다. 반면 레닌은 독일 사회민주당을 모델로 삼아 '직업적 혁명가'들로 구성된 헌신적이고 규율 있는 당원들을 통제하는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조직을 주장했다. 레닌주의 정당과 자주 연관되는 두 용어인 '민주주의 중앙집중제'와 '전위정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등장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중앙집중제'라는 용어는 원래 멘셰비키가 먼저 고안해 냈으며 두 집단 모두가 사용했다. 레닌은 당 내부에서 쟁점에 대한 공개 토론을 거친 뒤 민주적 결정을 내리고, 결정이 내려지면 행동의 통일을 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해당 당대회에서 <이스크라> 편집위원회 구성을 두고 두 가지 제안이 나왔다. 6명의 동지(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 파벨 악셀로드(Pavel Axelrod),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 레닌, 마르토프, 알렉산더 포트레소프(Alexander Potresov))를 포함하자는 안과 3명(플레하노프, 레닌, 마르토프)만 포함하자는 안이었다. 레닌이 제안한 3인 편집위 안이 표결에서 승리하고 마르토프가 그 결정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면서 분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분열의 기저에 깔린 것은 정당 규율의 문제였다. 마르토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레닌의 권위주의라고 본 것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RSDLP는 1903년에 두 개의 조직으로 나뉘었고, 1912년에 결정적으로 두 개의 라이벌 정당으로 갈라섰다. 두 집단은 곧 실천에서 차이를 보였다. 볼셰비키는 고도로 중앙집중화되었고, 멘셰비키는 다소 대수롭지 않게 느슨해졌다. 볼셰비키주의는 중앙집중화와 정당 규율이라는 문제로 정의되기에 이르렀다.
몇몇 주요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의 팸플릿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같은 다른 저작들을 읽고, 레닌과의 개인적 친분, 그리고 볼셰비키에 대한 그의 지도력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레닌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다비드 B. 리아자노프(David B. Riazanov),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막심 고리키(Maxim Gorky)는 모두 레닌의 견해에 대해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오랜 기간 노동조합 조직가이자 사회주의 활동가이며 마르크스주의 학자였던 리아자노프는 RSDLP 전당대회에서 배제된 러시아 사회주의 집단인 '보르바(Bor’ba)'의 일원이었다. 그의 지적 전기를 쓴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리아자노프는 보르바가 당대회에서 배제된 것이 제시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스크라> 그룹이 의견 차이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꺼렸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는 레닌과 마르토프 모두가 지도부가 당원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당원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정당 조직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민주적 원칙이 없고 개인숭배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잘해봐야 종파를 만들 뿐 정당을 만들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리아자노프는 볼셰비키나 멘셰비키 정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무소속 RSDLP 당원으로 남았으며, 여전히 당이 재통합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나중에 볼셰비키가 되었으나 권력 장악, 제헌의회 해산,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을 포함하는 정부 수립의 실패 등 많은 볼셰비키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룩셈부르크는 때때로 <마르크스주의냐 레닌주의냐>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한 1904년 논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레닌의 명제는 당 중앙위원회가 당의 모든 지역위원회를 지명할 특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위원회는 제네바에서 리에주까지, 톰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모든 지역 기구의 실질적 집행 기관을 임명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또한 그들 모두에게 당이 미리 만들어 놓은 행동 규칙을 강요할 권리도 가져야 한다. 지역 조직의 해산 및 재구성 같은 문제에 대해 상소 없이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중앙위원회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최고 당 기구의 구성을 결정할 수 있다. 중앙위원회는 당 내에서 유일하게 사고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집단은 그의 집행 팔다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레닌이 요구하는 극단적 중앙집중주의는 감시자의 메마른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정신이 아니다. 레닌의 관심은 당의 활동을 더 결실 있게 만드는 데 있다기보다는 당을 통제하는 것, 즉 운동을 발전시키기보다 좁히고, 통합하기보다 묶어두는 것에 있다." 볼셰비키가 혁명을 이끌고 권력을 잡은 후에도(그녀가 전적으로 지지한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룩셈부르크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계속 비판했다. 그녀는 1918년 저서 <러시아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선거에 의해 창출된 대의 기구 대신, 레닌과 트로츠키가 소비에트를 전국적인 정치 생활의 유일한 진정한 대변자로 규정함에 따라, 소비에트 내의 삶 역시 점점 더 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총선거가 없고, 언론과 집회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없으며, 자유로운 의견 투쟁이 없다면 모든 공공 기관에서 삶은 소멸하고, 관료제만이 활동적 요소로 남는 외형상의 삶만 남게 된다. 공적 생활은 점차 잠들고, 지치지 않는 에너지와 무한한 경험을 가진 수십 명의 당 지도자만이 지시하고 지배한다. 그들 중 실제로는 단지 10여 명의 뛰어난 인물들만이 지도력을 행사하며, 노동자 계급의 엘리트들은 때때로 회의에 초대되어 지도자들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제안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하게 된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확실히 독재다. 프레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아니라 단지 한 줌의 정치인들의 독재, 즉 자코뱅파의 지배라는 의미에서의 부르주아적 의미의 독재다(소비에트 대회를 3개월 주기에서 6개월 주기로 연기한 것을 보라!). 그렇다,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러한 조건들은 필연적으로 공적 생활의 야만화, 즉 암살 기도, 인질 총살 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또한 다음과 같이 썼다. "정부 지지자들만을 위한 자유, 오직 한 정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그들이 아무리 다수라 할지라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그리고 예외 없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자유다." 트로츠키 역시 유사한 우려를 공유했다. 그는 1904년 팸플릿 <우리의 정치적 과제>에서 레닌의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당의 내부 정치에서 이러한 방법들은 우리가 아래에서 보게 될 것처럼, 당 조직이 당을 '대체'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체하며,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1917년 8월 레온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그는 자신의 에세이를 부인했으며 그 글은 거의 재판되지 않았다. (뉴 파크 출판사(New Park Publications)가 1970년대에 영어 번역본을 출판했으며, 현재는 Marxists.org에서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볼셰비키 지도부의 후계 투쟁과 스탈린주의의 발흥이 뒤따른 후, '참된 교회'에 뒤늦게 합류한 사람으로 취급받던 트로츠키는 열렬한 레닌주의자가 되었다. 교황보다 더 가톨릭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트로츠키 자신은 1904년의 발언을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 스탈린,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과 모방자들 치하에서 벌어진 후속 발전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초기 견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볼셰비키였던 막심 고리키는 더 신랄하게 썼다. "레닌, 트로츠키와 그들의 무리는 이미 권력이라는 독약에 취해 있으며, 이는 표현의 자유, 개인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가 투쟁해 온 권리 무리에 대한 그들의 수치스러운 태도로 증명된다... 레닌과 그 시종들은 자신들이 모든 범죄를 저지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레닌은 전능한 마술사가 아니라 명예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생명도 개의치 않는 냉소적인 요술쟁이에 불과하다...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의 저서 <레닌에서 스탈린으로>에서 인용)"
볼셰비즘은 더 넓은 운동과 사회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당원들이 자신들이 활동하는 모든 조직, 즉 노동조합, 농민 조직, 사회 운동 등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시도할 것을 기대했다. 레닌의 저작집인 <레닌과 노동조합>에서 레닌은 혁명 전후를 막론하고 당이 모든 작업장의 모든 노동자 조직과 모든 조합을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어떤 노동자 집단이나 노동조합도 독립성을 행사해서는 안 되었다. 당, 즉 중앙위원회가 노조와 그 조합원들에게 그들의 과업을 고지할 것이었다. 당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학생 조직, 여성 조직, 스포츠 및 레크리에이션을 통제했다. 체스 클럽조차도 독립적일 수 없었다. 당에 반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어떤 조직도 독립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것 전체가 쓸려 나갔다.
조직된 반대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독립적인 사상에 대한 거부는 처음부터 존재했다. 1922년 레닌 정부는 약 220명의 지식인을 검거하여 유명한 '철학자 선박'에 태워 러시아에서 추방하여 독일의 슈테틴, 라트비아의 리가, 터키의 이스탄불 등 적절한 항구로 보냈다. 이들은 신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언론인, 시인 등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확실히 보수적이었고 일부는 완전히 반동적이었지만 대부분은 정치 활동가가 아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집권 볼셰비키당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썼으며, 그것이 문제였다. 문학과 문화 영역에서 레닌은 '파르티노스트(partinost)', 즉 당파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이를 채택하여 교조로 굳혔다. 이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작업에서 당의 노선을 따라야 함을 의미했다. 나중에 문학 영역에서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개념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긍정적 영웅과 혁명적 낙관주의라는 공산주의 미학적 기준을 규정했다. 정당에 대한 레닌의 구상은 처음부터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당 지도부를 지배한 인물로서 그 자신이 최종적인 권위였다. 그러한 경향은 당이 직면한 일련의 변화하는 객관적 조건들의 도전에 의해 더욱 강화될 뿐이었다.
객관적 조건: 전제정치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객관적 조건 중 하나는 그들이 전제정치 치하에서 살았다는 점이다. 차르(황제)는 군주였다. 두마(의회)는 실패한 1905년 혁명 이후인 1906년에 이르러서야 개혁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때조차도 차르는 외교 정책과 군사권을 계속 장악했고, 내각 장관을 임명했으며, 두마를 해산할 권한을 가졌고 실제로 1906년과 1907년에 그렇게 했다. 차르는 또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칙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1905년 혁명 이후 채택된 기본법이 두마를 신설하고 이론적으로는 집회와 표현 같은 시민적 자유를 부여했으나,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체포로 이어질 수 있었다. 차르는 군대, 경찰, 그리고 러시아 내부와 파리 등 유럽 도시에 수십 개의 보안국과 수천 명의 요원으로 구성된 러시아 비밀경찰인 오흐라나(Okhrana)를 통제하며 지배했다. 반정부 테러를 저지하고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창설된 오흐라나는 이들을 감시하고,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때로는 암살했다. 악명 높게도 혁명가들은 시베리아 내부 유배형에 처해졌다.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는 민주주의도 시민적 자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르 전제정치는 당의 탄압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된 레닌의 엄격한 중앙집중주의와 규율의 정당화 사유가 되었다. 차르의 탄압은 1905년과 1917년 같은 혁명적 격동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좌파 정당도 전당대회나 대중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전당대회나 대표자 회의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는 중앙집중주의는 있을 수 있어도 민주주의 중앙집중제는 있을 수 없었다. 결정과 행동 방침을 강제한 것은 당 지도부였다. 차르의 탄압을 감안할 때 비밀주의와 지하 활동의 필요성이 존재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었지만, 그러한 조건들은 결과적으로 볼셰비키를 실천에서 더 권위주의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지하 정당은 상부와 레닌이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해외에서 하달되는 명령을 따르는 준군사 조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17년 2월, 전쟁으로 촉발된 민중 혁명이 차르를 타도하고 온건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가 이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민주적 기회들이 발전했으나, 당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권위주의적 지도부를 겪었기에 변화가 어려웠다. 그리고 당은 또 다른 거대한 객관적 조건에 직면해 있었다.
또 다른 객관적 조건: 농민층
가장 완고하게 문제가 된 객관적 조건은 러시아의 인구 구조, 즉 거대한 농민층이었다. 마르크스 사상의 기초에는 첫째, 산업 생산이 재화와 서비스의 풍요를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발생할 것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둘째, 그는 공장 생활에 의해 조직되고 규율을 익히며 도시 생활에 의해 교육받고 더 세련되어진 거대한 산업 노동자 계급이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생산과 사회 생활을 민주적이고 집단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지식과 힘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다.
노동자들의 노동조합과 그들의 사회주의 정당은 그들이 자본주의 지배를 타도하고 경제와 정치 체제를 민주적으로 조직하는 것, 즉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독일은 높은 산업 발전 수준, 거대한 노동자 계급, 강력한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으로 인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사회주의 혁명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널리 간주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뿐만 아니라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 누구도 농민이 혁명을 이끌 수 있다거나 농민이 압도 다수인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층을 혁명적 변화의 발목을 잡는 보수적인 사회 계급으로 보았다.
레닌과 다른 모든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자국의 노동자 계급이 사회의 극히 일부분만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많아야 인구의 10%만이 노동자 계급, 즉 임금 노동자였고, 85%는 농민이었으며, 나머지 5%는 대소 자본가와 지주였다. 1860년대에 봉건제로부터 농민 해방이 있었지만, 러시아 농민 대부분은 여전히 집단적인 '옵쉬치나(obshchina)' 혹은 '미르(mir)'라는 농민 공동체에 묶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내전, 일련의 기근, 그리고 외국 군대(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소비에트 러시아 침공 이후 러시아의 산업 고용 수준은 더욱 하락했으며 노동자 계급의 규모도 감소했음을 덧붙여야 하겠다.
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이끄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며, 만약 혁명을 이끈다 해도 농민이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그들의 요구가 노동자들의 요구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민주적인 혁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극도로 가난했고, 대부분 문맹에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세상 물정에 어둡고, 종교적이고 미신적이었으며, 매우 원시적인 도로 체계와 국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밀도가 부족한 철도망을 가진 이 거대한 나라의 수십만 개 마을에 흩어져 있었다. 자신의 사회주의 정당이 혁명을 이끌기를 원했던 레닌이 어떻게 다수의 농민이라는 이 근본적인 객관적 상황을 우회할 수 있었겠는가?
레닌은 1905년부터 고통받는 대중의 봉기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극복하려 시도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될 것이었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이 일시적인 동맹을 맺어 차르 체제를 타도하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이라고 믿었다. 공화국에 대한 요구는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직전까지 RSDLP 강령의 중심에 있었다. 레닌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라는 정식화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승리 이후의 순간으로 연기했을 뿐이며, 그 순간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러시아의 미미한 노동자 계급은 이론적으로 공화국의 의회와 사회 전반에서 농민층 및 부르주아지와 대면하게 될 것이었다.
4월 테제와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
1917년 4월 3일,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다음 날, 그는 러시아 혁명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먼저 볼셰비키에게, 이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에게, 그리고 대중에게 제시했다. 레닌의 테제는 비록 이 문구들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 볼셰비키의 혁명 구호인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와 "평화, 토지, 빵!"으로 요약되었다. 이 구호들은 평화를 향한 국가의 염원, 토지를 요구하는 농민의 요구, 그리고 노동자들의 굶주림에 호응했다. 동시에 레닌의 울림 있는 요구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임시정부에 실망하여 소비에트를 가능한 대안 정부로 바라보게 된 노동자들과 농민들에게 호응했다. 레닌은 사회주의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했듯이 생산과 분배의 사회적 조직화를 요구했다.
7월에 전쟁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지 못하며 굶주린 이들을 먹이지 못한 임시정부에 반대하여 볼셰비키의 지지를 받은 자발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광범위한 정부 탄압으로 이어졌다. '7월 정국' 항의 시위에 대응하여 우익은 좌익을 궤멸시킬 때가 왔다고 결정했다. 몇 달 후인 1917년 9월, 러시아 군 총사령관인 라브르 코르닐로프(Lavr Kornilov) 장군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를 파괴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에 반대하기 위해 공동전선을 주도했으며, 이 동맹에는 멘셰비키, 사회혁명당(SR) 등이 포함되었다. 일주일 만에 코르닐로프는 패배했으나, 이제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라는 이중 권력의 시기가 도래했고, 이는 어느 쪽이 지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모두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기를 원했으나, 대부분은 곧 개최될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릴 때까지 그 정부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정치적 바람이 바뀔 것을 두려워하여 볼셰비키가 즉시 임시정부 타도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핀란드에 다시 숨어 있던 레닌은 중앙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양 수도[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 및 병사 대표 소비에트에서 과반수를 확보한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자신들의 손에 쥘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 인민의 과반수가 우리 편이다." 그는 중앙위원회가 권력 장악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월 23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조직에 찬성 10표 대 반대 2표로 의결했다. 두 명의 주요 볼셰비키인 게오르기 지노비에프(Georgi Zinoviev)와 레프 카메네프(Lev Kamenev)는 그 계획에 반대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반대를 공개하기까지 했으나 쿠데타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리아자노프 역시 이 행동을 '푸치(폭동)'로 간주하며 반대했다.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조직하기 위해 군사혁명위원회를 창설했고, 러시아 제국과 임시정부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의 동궁과 다른 중요한 건물들을 장악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은 사실상 피를 흘리지 않았으나, 모스크바에서는 상당히 피비린내가 났다. 10월 25일, 레닌과 볼셰비키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기정사실을 제시하며, 이제 소멸한 임시정부로부터 권력을 소비에트의 손으로 이양했고,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새로운 정부가 되었다. 볼셰비키 쿠데타는 농민들이 토지를 장악하고 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함에 따라 거대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폭발시켰다.
2편으로 이어짐
(기사 등록 2026.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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