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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옛 볼셰비즘’의 아이러니한 승리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12. 21.

- ‘4월 논쟁과 그 논쟁이 1917년 볼셰비키의 전략에 미친 영향

 

 

역사학자인 라스 리(Lars Lih)가 레닌과 ‘4월 테제를 둘러싼 그 간의 통념에 도발적 문제제기를 하는 글이다. 그동안 정설로 인정되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신화 해체를 시도하는 이 글은 레닌주의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고민과 논의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라스 리는 레닌주의에 대한 주요 신화를 해체한 방대한 저서인 <레닌의 재발견: 맥락에서 본 무엇을 할 것인가?’>(Lenin Rediscovered: “What Is to Be Done?” in Context, 2005)의 저자로 유명하다. 번역해 준 김민재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https://johnriddell.wordpress.com/2015/06/01/lars-lih-the-ironic-triumph-of-old-bolshevism/

 

 



부정적으로 들리는, 이 이야기의 제목은 꼭 필요한 출발점이다. 1917년과 레닌의 4월 테제 사이의 옛 볼셰비즘’[예전의 낡은 정식에 매달려 변화에 뒤쳐진 고참 볼셰비키 활동가들]은 우파 진영만큼이나 좌파 진영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주로, 이미 지나갔고 안전하게 폐기될 수 있는 단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옛 볼셰비즘을 방어하지 않고, 좋게 말해도 우리 시대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오해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레닌이 19174월에 새롭고 살아 있는 현실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연구하는 대신 기계적으로 외운 공식만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함으로써 우리 당의 역사에서 정말 개탄스러운 역할을 한” ‘옛 볼셰비크[볼셰비키 활동가]에 대해 혹평하면서 옛 볼셰비즘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을 때 모욕으로서 역사에 등장했다. 그래서 그 용어는 먹구름 속에서 탄생했다.

 

1980년대에 박사논문을 쓰고 있을 때 나는 이 인용구를 보았고 레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옛 볼셰비즘이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걸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나서, 마침내 나는 옛 볼셰비즘이 완전히 폐기되었다는 통상적인 생각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 옛 볼셰비즘은 무엇이었는가? 옛 볼셰비즘이 실제로 형성된 1905년 혁명 이전 1903~1904년 분당의 기원에 대해서만 사람들이 너무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상태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소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정식에 너무 빠져 있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식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고, 이 정식이 볼셰비크들의 행동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프리즘도 아니었다.

 

옛 볼셰비즘은 전략이자 관점으로 정의될 수 있다. 레닌 스스로가 1910년 혹은 1911년에, ‘볼셰비즘이 하나의 경향이 된 것은 1905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우리가 이 시기에 추진되었던 전략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강력한 힌트이다. 첫 번째로, 옛 볼셰비즘은 민주주의 혁명의 비전과 전략이었고,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러시아어로 do kontsa) 밀고 나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한다는 그 구절이 아마도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에 흔하게 쓰이던 구절이었지만, 소련 번역가들이 영어로 번역하면서 이 구절을 다른 말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매번 다른 말을 썼기 때문에 이 구절의 사용은 잊혀지게 되었다. 이 말이 이러한 초기 텍스트들에서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내가 깨닫게 된 것도 한동안 분석을 하고 난 이후였다.

 

그 말에 담긴 생각은 차르가 무너지기 직전이고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혁명일 것이며, 그 결과는 무엇일 것이며, 얼마나 진전될 수 있는 것인가? 볼셰비키의 전략은 이렇게 끓어오르는 기간 동안 기회가 있을 때 노동계급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제헌 의회는 2, 4년 혹은 5년 후에 들어설 것이었고 그 사이의 목표는 광범한 사회 변혁이었다. 슬로건은 사유지 몰수, 농지 개혁, 민주 공화국과 8시간 노동일로, 농민과 노동자와 모든 시민들을 아우르는 개혁이었다.

 

그러한 슬로건들 뒤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레닌과 다른 이들이 최소강령이라고 칭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소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이다: 강령은 원대했고, 야심찬 것이었고, 시행될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이 개혁들은, 특히 사유지 몰수와 농노 해방은 러시아를 거꾸로 뒤집어 버릴 것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사회에서의 주요 권력층이었던 토지소유자 계층의 존재 기반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을 청산하기를 원했다. 민주주의 혁명은 일종의 과정으로 여겨졌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레닌의 이후 저작들에 나오는 두 번째 혁명이나 혁명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구절들을 잘못 해석한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은 언제나 민주주의 혁명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었다.

 

노동자-농민의 동맹이라는, 옛 볼셰비즘의 두 번째 측면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혁명(, 민주주의 그 자체보다 더 나아간 것)을 앞당기는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해 있었다. 농민들은 비록 매우 혁명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긴 하지만 아무튼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 여겨졌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서 기인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농민들은 그들 자신의 강령을 실행할 수 없었고 노동계급의 지도를 필요로 했다.

 

세 번째 측면은 혁명적 권력(power)’, 또는 영어 단어보다 더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는 러시아어 단어로 vlast의 중요성이었다. Vlast는 준국가적 의미에서 정당한 권위에 대한 주장과 물리력을 사용할 권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vlast는 정부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이는 온전한 국가이거나 최소한 국가의 힘이 나오는 원천이다.

 

그래서 옛 볼셰비키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밀고 가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권력을 잡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905년과 그 이후에, 소비에트는 이러한 계급 권력의 필수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의 형태로 여겨졌다. 그때 볼셰비크들은 레닌이 이후에 <국가와 혁명>에서 말했던 관점, , 그것이 우리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민주적인, 영구적인 국가 형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소비에트들은 그보다는 노동자-농민 동맹의 과업을 수행할 국가권력 즉 vlast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1918년에 출간되어서 러시아 혁명과는 거의 별다른 관련이 없는 <국가와 혁명>을 읽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의도한 의미는 계급 권력의 형태였고, 그들은 너희 계급이 아니라 우리 계급이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 주로 주목했다.

 

이는 1905~1906년 당시에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계급 권력은 전국적인 혁명적 임시정부(러시아어로 일시적인’temporary잠정적인’provisional은 같은 단어이다)의 형태를 취할 것이었다. 혁명적 임시정부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1917년에 세워졌던 실제 임시정부의 개념이 아니었고, 볼셰비크들은 곧바로 이를 알아차렸다.

 

스탈린은 3월에 분명하게 그런 말을 한다: “[지금의 저] 임시정부는 분명 [우리가 생각한] 혁명적 임시정부가 아니다.” 그 구절의 의미가 바뀌기는 하지만, 임시정부는 아마도 수년 동안 계속되더라도 일시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런 부르주아 공화국은 노동자들이, 대체로 사회주의자가 아닌 농민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한에서만 지속될 수 있을 것이었다.

 

19174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4월에는 바뀐 것인가? 그리고 논쟁의 쟁점들은 무엇이었는가? 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 볼셰비키 활동가)은 레닌이 왜 옛 볼셰비즘을 그렇게 소리 높여 공격했는지를 궁금해 했다. 칼리닌은 레닌의 새로운 테제들이 그 어떤 핵심적인 측면에서도 옛 볼셰비즘과 상충된다고 보지 않았다. 이러한 진술들은 볼셰비크들이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경악하다가 두 손 들어 항복했다는 일반적인 그림에 손상을 입힌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비록 내가 이후에 다룰, 견해 차이들은 있었지만).

 

2월 혁명 동안에 나타나서, 4월에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핵심적인 일들을 한 스탈린, 카메네프와 다른 이들에 대한 질문도 남는다. 통상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이 지도자들이 한 가지 방향으로 상황을 통제하고자 했으며, 임시정부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볼셰비크들이 감시하는 상태에서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것에 만족했는데, 레닌이 돌아와서 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실제 일어난 일은 사뭇 다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스탈린, 카메네프와 다른 이들은 임시정부가 반혁명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몇 달 후면 임시정부가 소비에트 정부로 대체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임시정부를 찬성한 게 아니었다.(물론 그때 볼셰비키 중에는 임시정부가 광범위한 개혁을 할 것이라고 믿으며 정부에 대한 지지를 옹호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를 들어 이후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흥미로운 회고록을 썼던 블라디미르 보이틴스키Wladimir Woytinsky같은 사람은 레닌이 도착하기도 전에 신속하게 떠났다.)

 

그렇다면 견해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내 생각에 두 가지 형태의 ‘kontrol’이 존재했다. 영어 단어 통제’(control)와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러시아 단어를 썼다. 러시아어에서 이 단어는 실제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의미이다


통제, kontrol이라는 이러한 전략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었다. 한 가지 동기, 내가 생각하기에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의 동기는 소비에트 권력 즉 소비에트에 기반을 둔 권력(vlast)이 필수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메네프, 스탈린과 다른 이들의 생각은 그 반대였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kontrol 전략을 원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하겠다고 주장한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고,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정부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다. 레닌의 반대자들에게, kontrol은 그저 이것을 보여주는 방식이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카메네프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 점을 지적했다. 이는 레닌이 돌아온 후 그들이 control 전략이 좋은지 아닌지를 논쟁하고 있을 때였다.

 

카메네프는 말했다


내가 비밀조약을 공개할 것을 정부에게 요청할 때, 사람들은 나에게 말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밀류코프[임시정부 수반]가 내 말에 화답하여 조약을 공개할 것이라고 기대해서 그런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이런 요구 정책은 대중의 발전을 위한 선동적 도구이고, 구치코프[임시정부 국방장관]와 밀류코프가 이걸 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이 비밀조약의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이 평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한 방법이기에 나는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는 대중에게, 그들이 정말 국제적인 차원에서 혁명적 정책을 만들어 내고 싶다면 권력(vlast)이 소비에트의 손으로 넘어가야만 함을 보여주는 도구이다.”

 

당시 레닌에 반대했던 볼셰비키들은, 카메네프처럼 임시정부에 대한 그의 반대가 너무 공허하고 너무 형식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저 저것은 제국주의 정부라고 말하며 가만히 앉아 있는 꼴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물었다: 제국주의 정부가 나쁘다는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이 정부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요구들을 해 보자. 더 구체적인 전술을 통해서 지역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는 볼셰비크들을 돕자.

 

그래서 이 논쟁 전체에 대한 내 주장은 이것이 일종의 오해였다는 것이다. 레닌은 kontrol에 대해 신문에서 읽었고 화가 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소비에트 권력의 필요성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는 것이라고 레닌이 말하는 것을 듣자, 다른 이들은 지금은 혁명적 상황이고 무언가 실제로 일을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반응했다. 그것이 이 논쟁 전체의 다소 역설적인 측면이었다.

 

이 옛 볼셰비키들은 오히려 레닌이 수동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닌이 말한 것 중 일부를 읽어보면, 그들이 왜 자신들의 지도자(레닌)가 실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 했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 논쟁이 알려진 것만큼 중요하지 않고, 양쪽 모두 같은 노선의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그저 구체적인 전략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목표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나는 내가 이 논쟁에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주의적 목표의 필요성에 대한 얘기는 전혀 찾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화나게 만들 문제는 이것일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어떻게 서방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리코프(Rykov)의 논평과 같은, 몇 개의 논평들을 발견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그런 논의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논쟁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카메네프는 레닌의 계획과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이해가 훌륭하고, 그 전략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너무 도식적이며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으로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레닌은, 거대한 사회주의적 변혁으로 나라를 뒤집어 놓아야 한다고 답하지 않았다. 그는 은행 국유화와 같은 몇몇 구체적인 경제 조치들을 내놓았고, 사회주의는 시기상조이므로 그런 조치는 안 된다며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4월의 당내의 여러 논쟁들에서의 중심 이슈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 서서히 접근하게 된다. 이 논쟁에서 몇몇은 곧바로 레닌 편을 들었고, 칼리닌과 같은 다른 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것은 교리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전략과 연결되어 있는 쟁점이었다. 그것은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끝났는가, 끝나지 않았는가의 문제였다.

 

카메네프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음을, 이는 그가 [임시]정부에 대해 어느 정도 유화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입각하여 [이 문제의 재검토를] 시작한다: 1905년부터 1913년까지 카메네프의 글을 모은, 그의 700페이지짜리 책을 나는 갖고 있다.

 

1905년부터 1913년은 그가 옛 볼셰비즘의 주요 대변자들 중 하나였던 시기이다. 이런 글들을 썼던 사람이, 1917년이 되자 , 좋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를 둡시다. 이건 부르주아 혁명이고 임시정부는 부르주아 정부이니까 우리는 정부를 이대로 두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갑자기 볼셰비즘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그런 뜻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혼란은 내가 도입부에 언급했던 구절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민주주의 혁명은 끝까지 왔는가? 카메네프에게, 그리고 그 주변에 있었던 모든 다른 이들에게, 당연히 그렇지 못했다. 남은 것이 많았다: 토지 개혁, 전쟁에서 철수하는 것, 경제 개혁, 기타 등등.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하는 과정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이 쟁점은 그저 교리적인 것도 아니었고 그저 딱지붙이기를 위한 것도 아니었으며, 핵심적인 전술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만약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지 않았다면, 농민 전체와 계속 함께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완수되었고 끝났다면, 빈농하고만 함께해도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걸려 있는 문제는 이것이다: 다가오는 몇 달 후에 누가 우리의 계급 동맹군이 될 것인가?

 

이 논쟁들에서 한 볼셰비크가 한 말이 나에게는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민주주의 혁명이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까? 농민들은 아직 땅을 갖지 못했습니다!’ 카메네프가 말한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미완이므로 임시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저 정부는 파산했지만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는, 레닌이 왜 저 주장을 거부했고 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끝났으며 더 이상은 전체 농민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좋은 질문이다. 내 생각에 그 답은, 레닌은 사회주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농민들이 실제보다 더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관점이 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농민 내부에서 실제보다 더 많은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단히 볼셰비키답지 않은 행동을 할 정도로 강력하게 그것을 믿고 싶어 했다: 농민에 대해 단념하자, 그들은 우리를 지지해 주지 않을 것이며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게 넘어가서 전쟁을 지지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잊어버려야 하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전체로서의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을 기각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특히 자신들 소유의 땅을 경작하는 이른바 쁘띠부르주아 농민층에 대해서 그랬다.

 

나는 정확히 왜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그랬다. 그리고 그가 이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는 몇 년이 더 걸렸다. 그것이 논점이었고, 기본적인 전략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가 옛 볼셰비키와 함께 계속 노동자-농민 동맹에 걸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제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논쟁은 이에 대한 것이었다. 최소한 레닌에 반대했던 옛 볼셰비키들이 그걸 이해한 방식은 이것이었고, 나는 이것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경악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 볼셰비키들이 레닌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100%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알 수는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질문이었다. 나는 또한 레닌이 틀렸으며, 그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는 이 논쟁에서 몇가지 이유(나에겐 특별히 설득력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끝났다고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후년에 가서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훨씬 더 지난 후까지 끝나지 않았었다고 똑같이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1918년 말에 그는 ‘191710월 혁명이 온전한 민주주의 혁명을 시작했을 뿐이며 이제부터 비로소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다가 조금 지난 1921년에 레닌이 대략 이렇게 말하는 논평을 하나 찾았다: ‘, 최소한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실행했고, 최소한 그 정도는 성취했다. 우리는 아직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도달할 것이다.’ 이는 매우 명백하다.

 

그래서 19174월에 카메네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고, 레닌은 끝났다고 했다. 나중에 레닌은 사실은 19174월에 끝나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레닌은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이고 사실상 카메네프가 옳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19174월 그의 주장은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 중 하나이다.

 

비록 19174월에 레닌이 잘못 알았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가 나중에 보여준 유연성은 칭찬하고자 한다. 나는 그가 이 쟁점에 대해서는 틀렸고 이것이 19174월의 논쟁의 근원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관점을 조정했다. 그는 자신의 태도를 당에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로지 빈농으로만 구성된 소비에트를 건설하기 위한, 그가 지지하던 전략은 시행되지도 않았고 심지어 시도된 적도 없으며, 레닌이 그것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고집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없다.

 

요약하자면, 누구보다도 더 옛 볼셰비즘의 전략을 만들어내는 데 많은 일을 했던 레닌이 이 시점에서 그들이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다. 그에 대응하여, 그와 대립각을 세웠던 옛 볼셰비키들은 그것이 훌륭한 전략이기 때문에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옳았다. 그것은 훌륭한 전략이자 그들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전략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말한 것은 이 논의의 부정적 측면이었다. 나는 레닌이 19174월에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며 당을 설득했다는 관념이 심각하게 결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임시정부 문제에서 그들은 설득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들이 가장 분열되어 있었던 이슈에서 물러선 것은 카메네프 같은 다른 지도적 볼셰비크들이 아니라 레닌이었기 때문이다.

 

 

191710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회의적 시선으로 고찰한 후, 나는 이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10월 혁명이 옛 볼셰비즘의 승리로 여겨질 수 있는가? 옛 볼셰비즘은 유효한가? 이치에 맞는가? 이는 보다 사변적이며 해석적인 것이다. ‘4월 논쟁의 경우에서처럼 그저 나는 기록들을 읽었고 당신들은 읽지 않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10월 혁명을 쟁취한 전략은 옛 볼셰비즘이 예측했던 바로 그 전략이었다: 차리즘에 맞서는 혁명이 발발했고,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망설이던 세력들이 그 혁명이 너무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며,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보다 온전하고 완성된 변혁을 위해 그것을 밀어붙였다.

 

인민에게 그들이 보낸 메시지는, 그들이 계급 권력을 갖지 않는다면, 저 자유주의자들과 엘리트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혁명의 가장 기본적 과업조차 성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치에 맞았다. 볼셰비키는 다수파가 되었고 권력을 잡았다. 이것이 첫 번째다. 나는 191710월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주요한 이유는 그들이 10년 전에 정식화한 전략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는 볼셰비키가 인민에게 보내던 메시지였다. 이 또한 매우 흥미롭다. 나는 1950년대 초기, 스탈린 사망 직후에 맥길 도서관(McGill library)에서 러시아어로 된 책을 하나 발견했다. 그 책은 볼셰비키 당의 모스크바 조직에 의해 출판된 리플렛들의 모음집이었다. 그 리플렛은 그냥 몇 개의 슬로건을 담고 있는 양면 인쇄된 A4용지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8페이지, 가끔은 심지어 10페이지 정도의 작은 인쇄물로 출판돼 있었다. 그냥 한 묶음의 슬로건들이 아니라 글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 때 볼셰비키들이 대중에게 보내던 실제 구체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이는 우리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생각할 때 잘 떠올리지 않는 질문이다. 정말로, 이 때 볼셰비키 리플렛을 읽어 본 사람이 우리 중 몇 명일까?

 

4월 테제에 대한 표준적인 이야기는 레닌이 망명에서 돌아와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선전하도록 당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50년대 소비에트 편집자가 그 리플렛 모음집의 머리글에서 주장하려던 바도 정확히 이것이다. 하지만 내가 리플렛들의 샘플에서 찾은 것은, 1917년 초여름에, 그들은 사회주의를 약간만 강조했고, 사회주의가 쓰인 줄에는 언제나 매우 조심스러운 말로 그것이 그저 시작일 뿐이라고 적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정말로 놀라게 한 것은 군사령관 코르닐로프의 쿠테타 시도 후 8월 말에, ‘사회주의도 함께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9월과 10월의 매우 급진화된 시기에 사회주의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볼셰비키 메시지만 이런 게 아니다. 사실, 이 시기 레닌의 저작을 보면 이상하게도 사회주의에 대한 주장이 별로 없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확신은 없지만, 나는 그 메시지가 효과가 없다는,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사람들은 이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만델(David Mandel)1917년에 대해, 노동자들은 볼셰비크들이 사회주의자들이고 그래서 모든 필요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어서 그들을 지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인민의 호민관이었고 대담한 것들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주의를 도입할지 말지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19174월의 이야기가 맞다면, 그 리플렛들은 우리가 기대한 것들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리플렛들이 분명히 강조한 것은 계급 권력이었다. 그들이냐 우리냐. 볼셰비크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고, 경제는 무너지고 있고, 농민들은 땅을 갖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찾은 한 좋은 문단은 대략 이런 식으로 갔다: ‘은행가들에게 경제 개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장군들에게 평화 정책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들을 쓸어 버리고, 노동자와 농민, 민중, 인민(the narod)의 계급 권력으로 대체합시다.’ ‘계급 권력이 핵심 문구였다. 그리고 이는 그 당시의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제시되었다.

 

마지막으로, 10월은 옛 볼셰비즘의 최소강령을 시행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듯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는가? 나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그것은 대단히 사회주의적인 것을 할 기회를 당시에 혹은 그 후에도 수 년 동안 갖지 못했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된 민주주의 혁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했던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로부터 배웠던 것이다. 이는 옛 볼셰비즘 관점의 일부분이었다: , 우리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어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보다 민주주의 혁명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들은 언론의 자유, 경쟁 선거, 기타 등등이며 물론 이것들은 볼셰비크들에 의해 꽤 빨리 폐지되었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10월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 민주주의가 이해되었던 다른 방식들이 있다. 옛 볼셰비즘에게 민주주의란 인민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 인민의, 인민을 통한, 인민을 위한 조직을 의미했다. 볼셰비키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커다란 민주주의 혁명을 구성한 5개의 주요 대들보가 있다.

 

1. 전쟁: 사병들과 농민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2. 경제: 경제 위기를 풀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용했다. 레닌의 19179월 팜플렛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정말 혁명적 민주주의정부를 가졌다면 그 정부는 정말로 빈민을 도울 수 있는 조치들을 지금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엘리트들과 그들의 이익 때문이다그래서 레닌의 레토릭을 보면 그는 새롭고, 황당한 사회주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임시정부가 하겠다고 했지만 엘리트들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면서 해내지 못하던 일들을 해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상황에 대한 레닌의 진단이었다.


3. 국가: 국가는 인민이 운영한다는 의미에서 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레닌의 유명한 한 마디는, ‘어떤 요리사도 국가를 다스리고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들을 훈련시킨다면. (덧붙여, 이 은유는 차리즘 하의 교육부 장관의 말을 뒤집은 것인데, 그는 요리사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차리즘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의견이었다.)


4. 대중교육: 아버지가 교육 개혁가였던 레닌은, 과거의 차리스트 권력과 달리, 이제 인민 전체를 교육할 수 있는 권력이 들어섰다고 이야기했다. 그와 더불어 다수의, 대중교육에 대한 재원 투입이 있었고 이는 처음부터 소비에트 정권의 기본 특징이었다.


5. 토지 개혁: 마침내 토지 소유자들의 계급 권력을 분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실제로, 맨 처음부터 볼셰비크들은 그들을 거대한 전국적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들을 시행해야 했다. 가끔 그 조치들은 사회주의적이었고(혹은 최소한 그렇다고 주장될 수 있었고) 또 가끔은 그렇지 않았다. 주로 사회주의적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미 1920년대에 볼셰비키들은 그들이 건설한 경제 체제가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없음을 완벽히 잘 알았다. (1920년의 볼셰비키의 입장과 관련하여 널리 퍼진 오해가 있어서 나는 이를 강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은 새 정부가 인민에 의해 운영되고 헌신적인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는 계급 권력이며 이 계급 권력이 러시아를 변혁했다는 생각은 분명히 했다. 나중에 그들은 그 나라가 사회주의로 이행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10월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서보다는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높게 평가한다 혹은 최소한 이것이 살아있던 초기 10년 동안은.

 

나는 1917년에 권력을 잡은 것이 옛 볼셰비즘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는 아이러니하다. 첫 번째로, 일시적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실제로는 꽤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두 번째로, 옛 볼셰비즘을 대신한 것은 내가 국가 볼셰비즘이라 부른 것이었다. 볼셰비크들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국가를 하나로 지탱하는 접착제 구실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세 번째로, 옛 볼셰비즘은 러시아를 민주주의적으로 변혁하는 사명을 스스로에게 설정했으나, 그들이 이것을 수행하자 또 다른 사명이 주어졌다. 러시아를 거대한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위기로부터 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볼셰비크들이 이 사명을 받아 안았다는 점에서 그들을 존경하지만, 그들은 그럴 계획이 아니었고, 그것을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 일을 하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했고, 많은 영웅적 실천과 비극이 거기에서 기인하였다.

 

한 마디만 더 하고 끝내야겠다. 나는 민주주의 혁명을 강조했고, 이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아마도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대중 민주주의의 다른 측면은 잔인하고, 편협한 모습 등을 보일 수 있는데 이는 수 년 간의 전쟁과 경제적 혼란 이후의 민주주의 혁명이 아름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 역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10월 혁명의 민주주의적 성격은 그래서 방대한 주제이다. 나는 이 주제가 받아야 할 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하는 몇몇 오래된 신화들을 우리가 넘어설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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