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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 여자> - 세 여자의 꿈과 투쟁, 삶과 사랑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8. 10. 8.

전지윤





지난 여름 휴가는 조선희 작가의 <세여자>와 같이 보냈다. 세 여자의 꿈과 투쟁, 삶과 사랑을 쫓아가면서. 한세기 전이었기에, 당연히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여성 차별은 여전했을뿐 아니라 더 심했다.

 

차별없이 평등하자면서 이게 뭐야? 조선공산당이나 공산청년회 간부 중에 여자가 한명도 없잖아. 멀쩡히 같이 토론하다가도 밥 먹을 때 되면 여자들한테 밥해오라 그러고 말이야”, “밥하고 빨래는 여자들 시키는 혁명이라면 나는 사양하겠어요.”

 

차별과 불평등 속에서도 인간적 감정과 사랑은 싹트지만, 굴곡진 시대 속에 많은 위안만이 아니라 커다란 슬픔도 따르기 마련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는가. 작품 속에서 여운형이 고명자에게 하는 조언이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지나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무르네... 금석처럼 굳세고 단단할 것 같은 관계가 어이없이 깨지기도 하네. .. 억지로 어쩌려다보면 집착이 되고 그게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도둑질해 가버린다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게.”

 

평양에서 고민하던 고명자가 윤동명을 떠올리며 남쪽으로 돌아온 것도 그런 생각이었을 듯. 그래서 나중에 전쟁통에 고명자와 약속을 깨고, 끝내 돌아오지 않은 윤동명이 참 미웠다. 박헌영과 주세죽이, 김단야와 고명자가 어긋나고, 김단야와 주세죽이 서로에게 기대는 과정도 너무 슬펐지만, 그만큼 나중에 주세죽을 외면한 박헌영이 미워졌다.

 

경험 때문인지 가장 많은 울림을 자아낸 부분은 조선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 벌어진 파벌 다툼과 코민테른의 구실, 그것이 낳은 비극들이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화요회와 북풍회, 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 만주파와 연안파, 서로 자신이 정통이고 상대는 이단이라는 다툼은 끝이 없었고 결과는 참담했다.

 

다들 똑같이 민족해방한다고 객지에 나와서 생고생했고 또 가까이서 보면 인간적으로 매력있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처음 당을 만들 때 서로 갈래가 달랐던 것 때문에 죽어라고 서로를 미워했다.”

 

당을 합쳐라, 없애라, 들어가라... 코민테른은 모스크바에 앉아 지시를 내렸고, 이런 각종 테제들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바이블이 됐다. 코민테른은 전능한 신도, 완벽한 천재도 아니고 결국은 인간들이었기에, 그것은 조선의 구체적 현실 문제들의 정답일 수 없었다. 위에서 내리는 아무리 뛰어난 지침도, 아래에서 부딪히고 활동하며 배우고 만들어낸 해법보다 나을 순 없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의심은 쉽지 않았고, 엄혹한 식민지에서 잘못된 노선과 결정은 곧 탄압, 투옥, 죽음으로 연결됐다. 그래도 함께 배곯으며 대안 권력을 세우기 위해 싸우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주어지면서 비극의 규모와 성격까지 달라졌다. 김단야와 주세죽의 30년대 모스크바에선 어제의 혁명가가 오늘은 나치첩자로 몰려 공개처형당했다. 친구나 가족에게도 솔직한 생각을 말하기 어려웠고, 결국 김단야도 일본밀정으로 몰려 죽고, 주세죽은 시베리아로 쫓겨간다.

 

인생을 건 꿈이 실현된 결과가 이런 것일 때, 다른 갈 곳도 없는 처지일 때 그 아득함은 가늠하기 어렵다. 인민군 간부에게 철두철미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전향과 자아비판을 강요받는 고명자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3명의 주인공 모두 역사와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너덜너덜해지지만 특히 주세죽이 가는 길이 가장 먹먹했다. 특히 그녀가 하나남은 딸에게까지 진실과 진심을 전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녀는 스탈린에 대한 증오를 딸이 눈치챌까봐, 증오가 전염될까봐, 운명이 대물림될까봐, 철저히 감추었다. 유형 온 사실조차 숨겼다... 아버지 대원수를 험담했다가 딸에게 고발당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가장 가깝고 믿었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 믿지 못하게 되는 비극, 평양에서 허정숙이 마주한 상황도 비슷했다. ‘8월 종파사건이후 허정숙의 전남편 최창익은 파렴치한 종파주의자로 몰렸고, 허정숙은 공개 석상에서 최창익의 역사적 죄악을 낭독하며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이런 일을 거치며 인간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당이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때로 숙당작업이 불가피하겠지요. 한데 온갖 개인 감정과 파벌적 음모가 끼어들면서 활동가들이 개죽음한단 말이지요. 그걸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인간성이란 원천적으로 진화가 불가능한 걸까요.”(허정숙)

 

어쩌면 김일성이나 스탈린 같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소. 이상적인 제도를 감당하기에 우리 인간이 너무 이기적인 존재인지도... 우리는 결국 미국을 보지 못한 콜럼버스들이었소.”(최창익)

 

한세기 전의 일이고 이제는 다른가. 뒤풀이에서, 가족여행에서 한 말들이 동지에 의해, 가족에 의해, 왜곡되고 부풀려져 칼날로 돌아온 장면들을 목격한 뒤론, 3시간 동안 앉아서 29명에게 계속 공개적 비난을 당하며 자기비판을 요구받은 뒤로는, 쉽게 단정하지 못하겠다. 첨예한 상황이 오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기회주의자라는 딱지가 무엇으로 발전할까.

 

하지만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에 굴복할 생각은 전혀 없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것, 옳다고 믿었던 걸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 ‘정답에 도전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 건 소중한 것이다. 해결책은 끝내 찾아질 것이고, 후회는 있을 수 없다. 마지막이 돼버린 만남에서 주세죽이 허정숙에게 한 말이 맞다.

 

그동안 땅 밑이 꺼지는 것처럼 힘들 때도 많았고 죽고 싶은 적도 있었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바깥이 춥다고 껍질 속으로 도로 들어가겠니? 죽도 밥도 아닌 그런 인생은 생각하기도 싫어.”

 


(기사 등록 2018.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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