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착취,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기해방을 믿는 활동가는 무엇보다 끝없이 듣고 배우면서 설득해야 한다.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이론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끈기있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으려 하고,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제시하고 설득하려 해야 한다.
이런 소통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말과 글이다. 따라서 말을 듣는 것과 하는 것, 글을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사회변혁 활동가에게 필수적 무기다. 나는 이 글에서 특히 글 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글을 더 자주 또 잘 쓰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 다루고자 한다. 내가 특별히 글을 잘 쓰지는 않지만, 부족하나마 그동안 경험하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써 보겠다.
먼저 ‘글을 왜 쓰는가’부터 보자.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명확하게 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는지, 내 생각이 어떤 부분에서 막혀 있고, 어떤 부분에서 모순인지 아는 가장 좋은 길은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려고 앉아서 머리를 굴리는 과정에서 막혀 있던 부분이 풀리고 모순된 생각이 정리되곤 한다. 글은 내 생각을 정리해서 저장해두는 구실도 한다. 내 머리 용량의 한계를 확장시켜 주는 일종의 ‘외장하드’와도 같다.
글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내 생각을 가장 효과적으로 주고받게 만들며, 다른 사람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설득하기 위해서도 가장 효과적이다. 난상토론 속에서 얽히기만 하던 두 사람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글을 통해 쉽게 정리될 수 있다. 몇 시간 동안 수많은 말로도 설득되지 않던 사람이, 내가 고심해 쓴 한 장의 글로 바뀌는 경우도 많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타고난 글재주나 문법과 언어 능력, 학식이 중요한가? 아니라고 본다. 그런 것을 갖추었다는 사람들이 쓴 글도 딱딱하고 읽기는 어려운 데 쓸데없이 길기만 한 경우를 많이 봤다. 그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의 글재주와 지적 능력, 독서량을 뽐내는 데에 정신 팔려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자세이다. 다른 사람에게 듣고 배우려는 자세이기도 하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본다. 이를 출발점 삼아 세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글이 누구를 설득하려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주변 동료인가? 친구인가? 부모인가? 페친인가? 정치적 성향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들은 어떤 것에 관심있고 무엇을 궁금해 하는가?
둘째, 자신이 설정한 청중과 공감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를 보고 진정으로 눈물 흘려 온 사람만이,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동력)는 분노이고 비판의 본질적 노동은 고발”이라고 했다.
셋째,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왜 말하려는 것인가? 즉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이 글을 써서 보여주려는 목적이 폭로인지, 반박인지, 호소인지, 설명인지, 함께 교훈을 배우자는 것인지 분명해야 한다.
머리 속에 그려보자
위의 세 가지를 위해서 효과적 방법은 내가 이 글을 통해 설득하려는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앉아있다고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이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 쉽게 내 생각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어떻게 말을 풀어갈까? 어떤 사례나 통계를 제시할까? 계속 고민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트로츠키도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쓸 때, 당신의 기사가 당신의 직장이나 당신 옆 직장 또는 근처의 다른 공장에서 큰 소리로 낭독되고 있는 장면을 가능한 한 선명하게 마음속에 그려 보라. 열댓 명의 노동자들이 당신의 기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기사가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거나 또는 거부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나는 예전에 편집자로 있을 때 기자들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밥을 먼저 씹어서 먹기 좋게 만들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듯이 글을 쓰라’고 조언했다. 내 주장을 독자가 잘 소화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행동하는 것을 돕겠다는 자세로 쓰자는 것이다.
독자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란 게 아니다. 독자의 사고 능력과 잠재력을 믿자. 레닌은 “사고하려 하지 않는 독자를 가정하지 말라. 아직 미숙한 독자라도 그에게 진지한 의도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가 중대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인도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글을 쓰기 위한 5가지 단계를 보자.
1단계는 ‘쟁점 잡기’다. 무엇을 소재와 주제로 삼아서 글을 쓸지 정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라크 공습, 홍콩 우산혁명 등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청중으로 삼는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인지 등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뭐고, 어떤 방향 제시가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이다. 즉 ‘필요할 때 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래 지금 상황에서 저 문제에 대한 이런 주장을 듣고 싶었어’ 하면서 귀를 기울여 줄 것이다.
2단계는 ‘자료 모으기’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취재’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홍콩 우산혁명에 대해 쓰려면 일단 주요 일간지의 관련 기사들을 뒤져봐야 한다. 우파 언론과 진보 언론을 비교해 보며 어떤 쟁점과 주장 들이 제기되는지 검토한다.
또 중국과 홍콩에 관한 책(예컨대 <천안문으로 가는 길>)도 들쳐봐야 한다. 외신도 한두 개 찾아 더듬더듬 읽어보면 국내 언론으론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자세를 단어로 표현하면 “샅샅이”, “탐욕스럽게”라고 할 수 있다. 자료와 사실, 정보, 논점들을 최대한 모아보려는 자세다.
3단계는 ‘뼈대 잡기’다. ‘목수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듯이 차근차근 논리적 순서와 구상에 따라 사실을 짜나가야’하는 것이다. 나는 보통 쓰려는 쟁점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 키워드를 뽑는다. 처음에는 컴화면 위에 그냥 그 키워드들을 죽 늘어놓는다.
그 다음에 ‘오려두기’, ‘붙이기’하면서 이리저리 배열해 본다. 어떤 순서로 배열해야 물 흐르듯이 글이 이어지면서 좋은 글이 될지 생각하며 이렇게 해봤다가 저렇게 해봤다가 한다. 백지를 놓고서, 쓰려고 하는 글의 개요를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때 ‘폭로, 분석, 과제’라는 3가지 요소를 녹아들게 하는 게 효과적이다. 예컨대 홍콩 우산혁명에 관한 글이라면, 홍콩 사회 불평등에 대한 ‘폭로’, 중국 반환 이후 홍콩에 대한 ‘분석’, 이후 투쟁이 나가야 할 ‘과제’ 등을 포함시키며 뼈대를 잡아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쓰려는 글의 기본 골격을 잡아두면 글은 이미 반 이상 쓴 것이나 마찬가지다.
4단계는 ‘살 붙이기’다. 앞서 구성한 뼈대를 바탕으로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철사로 뼈대를 만든 후 거기에 찰흙을 붙이고 매만지고 다듬으며 사람 모양을 만들어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뼈대를 일부 변경하고 조정할 수 있다. 막상 글을 써보면 다른 구성이 더 글을 매끄럽게 만든다는 점을 깨닫기 때문이다.
5단계는 ‘다듬기’다. 뼈대에 살을 붙여서 다소 거칠게 완성된 글을 보면서, 더 읽기 좋게 다듬는 것이다. 보통 3교를 보는 게 좋다. 문장 하나하나 다듬고 고치며 한번 보고, 다시 전체적으로 죽 읽으며 툭툭 걸리는 부분을 고치고, 마지막으로는 출력해서 읽으며 펜으로 고친다.
이 과정에서 군더더기 등을 삭제해 글의 분량을 가능한 더 줄이고, 한문투의 표현도 고쳐서 읽기 편하게 만든다.(예: 대동소이한 내용을 중언부언해 -> 같은 말을 되풀이해) 문장은 가능한 1~2줄 정도로 짧게 끊어 준다. 기본적으로 문장이 3줄 넘어가면 읽기가 힘들다.
오타, 틀린 사실과 정보, 수치 등도 잡아내야 한다. 더 좋기로는 주변 동료에게 초안을 한번 읽고 의견을 달라고 부탁해 보라. 그러면 훨씬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물론 ‘선별적으로 글을 배포하면서 동지를 이간질하고 조직을 파괴하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
내가 이 단계에서 강조하고 싶은 8글자는 ‘간단명료 단순명쾌’이다. 잘난 척하거나 멋 부리지 말고, 길게 늘리지도 말고, 어려운 말과 전문 용어를 섞지도 말고, 오로지 상대방을 쉽게 이해시키겠다는 진정성을 가지고 쓰자.
2가지 필수 요소
마지막으로 사회변혁 활동가의 글쓰기를 위한 2가지 필수 요소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명확한 정치적 관점이고, 둘째는 생생하고 보석같은 사실이다. 이 두 가지가 잘 결합되면 정말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토니 클리프는 레닌이 이것을 잘했다고 말한다.
“레닌이 쓰는 기사들은 언제나 사실로 이루어져 있었고, 논쟁하고 있는 한두 가지 사상에 반복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열망으로 모든 글을 썼다. 언제나 뚜렷한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정치적 관점이 분명하면,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지 않더라도 사실을 잘 꿰어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오히려 정치적 관점만 추상적으로 늘어놓는 글은 설득력이 없다. 트로츠키는 “독자들의 멱살을 잡고 당신의 결론으로 끌고 가지 말라. 독자들이 스스로 사실들을 보고 판단하도록 하라”고 했다. 즉 ‘사실이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주장은 그것 자체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위 2가지를 갖추려면 지름길이 없다. 일상적으로 탐구하고, 정세를 추적하고, 실천 속에서 사람들과 대화·토론해야 한다. 책도 읽고 신문도 읽으면서 기억, 메모, 저장해야 한다.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의 글을 보고 흉내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보는 사회변혁 활동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글 쓰는 법에 대한 글을 열 번 보는 것보다 글을 직접 한번 써보는 것이다. 어떤 글이어도 좋다. (‘정해진 기간도 아니고, 지금 필요한 주제와 내용도 아닌 데 왜 글을 쓰고 실어달라고 하냐’며 가로막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글 쓰는 사람 따로 있고 글 읽는 사람 따로 있지 않다. 이 사회와 교육이 우리의 잠재력을 억누르고 자신감을 낮춰 온 것이다. 우리 모두 글을 잘 쓸 수 있고 또 써야 한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 http://anotherworld.kr/16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중한 벗, 김득영 동지를 떠나보내며 (12) | 2015.09.09 |
---|---|
토론회 광고 - 한국사회와 종북몰이 (0) | 2015.05.14 |
몇 가지 용어에 대한 단상 (0) | 2014.09.11 |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0) | 2014.06.13 |
박근혜는 하야해야 하고 저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1) | 201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