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돌아보기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였는지 돌아보자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11. 11.

[이 글에 원래 달려있었던 각주들을 여기서는 모두 생략했다필요하면 오프라인 글을 참고하라.]


전지윤

  

이 글은 2013년말부터 2014년초까지 다함께에서 벌어진 분파 투쟁의 출발점이 됐던 글이다. 나는 이 글의 초안을 20131126일에 완성했고, 여러 동지들의 조언과 지적을 반영한 최종본을 20131223일에 다함께 대의원협의회에 제출했다. 이 글은 그 최종본이다.



나는 오랫동안 우리 단체의 운영위원회와 신문 편집부에서 일해 왔다. 그 과정에서 동지들의 과분한 지원과 도움도 받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는 혁명적 원칙뿐 아니라 수많은 주요한 쟁점에서 공통의 인식과 판단을 공유해 왔다. 이 점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 나는 몇 가지 중요한 쟁점과 우리 단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현 지도부에 이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논쟁 과정에서 편집자와 운영위원과 상근기자로서의 임무를 중단했다. 아마 일부 동지들은 내 태도가 너무 갑작스럽고 무책임하다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머리 속에서 계속 커지는 이견을 억지로 눌러두고 기존에 해 오던 임무를 수행할 수는 없었고, 그것은 진정으로 책임 있는 자세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방향을 운영위나 신문편집부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을 상대로 주장하고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 이견과 생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토론하고자 하는 게 필요하고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체의 회원으로서 행동 통일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어떤 동지들은 왜 이런 이견을 더 진작부터 제기하지 않았냐고 비판할 것이다. 그런 비판에 대해서는 사실 면목이 없다.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큰 차이는 아닌 것 같다는 핑계로, 제기했다가 강한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비겁한 생각으로 주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용기를 내서 이견과 주장을 숨기지 않고 개진하려 한다.


어떤 동지들은 철도 파업으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굳이 별로 중요치 않은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느냐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지금의 철도 파업의 파장과 안녕열풍 속에서 큰 기대와 흥분을 느끼며 적극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협의회 토론 기간은 단지 철도 파업만이 아니라 더 넓은 시기를 돌아보는 때다. 더구나 나는 내가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며 지금의 정세와 투쟁과도 관련 깊다고 생각한다.


먼저 간략히 요약하자면 내 주장은 크게 4가지다.

첫째, 종북몰이의 핵심인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에서 우리 단체가 내란음모 사건 초기에 폈던 적극적 방어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지난해 진보당 경선부정 사태에 대한 우리 단체의 입장이 옳지 않았다는 점을 자성적으로 돌아보고 공개 표명하자는 것이다.


셋째, 진보정당이 분열한 상황에서 그 중의 일부만을 포괄하며 몇 가지 문제를 보여주는 노동·정치·연대에 참가하는 것을 재고하자는 것이다.

넷째, 계급투쟁에 개입하면서 구체적 정세와 변화를 분석하면서 핵심 고리를 잡아내고 투쟁들을 연결시키며 적절한 전술적 변화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많은 동지들이 내 주장에 진지한 관심과 토론으로 응해줄 거라고 생각하며 글을 시작하겠다.


  황당무계한 마녀사냥

 

내가 처음 우리 단체의 방향에 의문을 품으며 문제제기를 시작한 출발점은 내란음모 마녀사냥쟁점이었다. 이 사건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마녀사냥이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소위 ‘RO’ 조직원들에게 유사시에 대비해 총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준비한 총기로 국내 주요시설에 대한 타격 준비 내용까지 지시했다는 게 공안당국의 주장이었다.

“RO는 남북한 간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KT혜화지사와 분당인터넷데이터센터(IDC) 등 대규모 국가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군수물자 이동과 민간인 이동을 차단, 지연시키기 위해 경부선 호남선 등 주요 철도 시설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선거 부정 문제로 궁지로 몰리던 박근혜와 국정원의 국면전환용이고, 노동운동을 위축·분열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은 명백했다. 오늘은 친북좌파가 사냥감이 됐지만 내일은 더 넓은 세력에게 마녀사냥이 확대될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대응은 굼떴다. 특히 829일에 이석기 녹취록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혼란이 커졌다. 진보진영에서는 너도나도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진보당과 선 긋고 거리 두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는 우파와 함께 진보당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정의당이 국회에서 새누리당, 민주당과 손 잡고 체포동의안을 통과시킨 배신 행위였다. 당시 심상정은 역겹게도 국민은 헌법 밖의 진보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낡고 위험한 시대착오적인 세력이 있다면 법에 의해서 단죄돼야한다고 말했다. 노회찬은 이번 기회에 진보정당 전체가 혁명론과 같은 극단주의는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이는 박노자 교수가 지적했듯이 왕따 놈에게 너도 같이 침을 뱉지 않으면 너도 왕따 된다!”는 압박에 굴복한 것이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이 우리는 저 주사파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안달하던 시기에 우리는 달랐다. 우리는 원칙있는 혁명가답게 마녀사냥에 단호히 반대했다.


우리는 사건이 터진 828일 즉각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며칠 후 촛불집회 때 같은 내용을 리플릿으로 배포했다. 나는 이 때 우리 조직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모두가 무지막지한 탄압과 여론의 눈치를 보며 입 조심을 하고 있을 때, 용기 있게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녀사냥의 광풍 속에서 흉측한 마녀의 손을 잡기를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소 다른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성명과 리플릿의 제목이 마치 진보당처럼 보인다’, ‘우리 리플릿을 진보당원들이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 찜찜하다’, ‘진보당이 역겨운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하는 데 왜 비판하지 않나’, ‘이석기 의원이 물질·기술적 준비나 정치·군사적 준비 등의 발언을 한 것은 사실 아니냐.’


94일 운영위 회의에서 내가 다른 운영위원들에게 받은 문제 제기들도 비슷했다. 그리고 그날 운영위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신문에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제목에 진보당이나 이석기 의원을 직접 거명하며 우리가 진보당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지 말자. 글의 서두에서 진보당에 대한 좌파적 비판을 먼저 언급하자. 진보당이 거짓말, 말 바꾸기를 하고 농담이라며 대응하는 것을 비판하자. 왜곡·과장이라고는 말해야 하지만 조작이라고는 말하지 말자.’


또 내가 그날 아침에 올린 온라인 기사를 내려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드러나는 과장, 왜곡, 조작, 날조...”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국정원의 왜곡, 과장, 날조를 조목조목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서 특히 녹취록에 따르더라도 총기 발언은 없었다는 부분과 조작이라는 규정이 문제가 됐다.


나는 반론을 폈다. 그러나 다수결로 결정이 내려졌고, ‘계속 그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편집자를 맡겨둘 수 없다는 경고를 받았다. 나는 동의가 되진 않았지만, 내 의견을 더 고수하진 않았다. 기사는 즉각 내렸고, 결정된 내용대로 신문을 편집하겠다고 약속했다.

 

  커지는 이견과 의구심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111호 신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견은 풀리지 않았고 더 발전해 갔다. 나는 먼저 마녀사냥 속에서 우리가 진보당처럼 보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동의할 수 없다. 마녀사냥의 의도와 효과가 바로 진보당과 거리 두기와 선 긋기를 하도록 압박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하고 농담이었다고 넘어가지 마라고 비판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고 본다.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마녀사냥 속에 당황한 사람들이 보인 빈틈을 탓해야 하는가? 그 틈을 부각할수록 우리 편의 사기는 저하되고 그 틈을 노리는 적들의 공세는 강해질텐데 말이다. 지하에서 내란을 음모한 RO라는 모임은 존재하지도 참석한 바도 없다고 한 것을 거짓말과 말 바꾸기라고 탓해야 하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뻔한 상황에서?


당시 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국정원의 녹취록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폭로하는 장문의 기자회견을 해도, 그것의 취지를 보도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리고 농담이라는 한 단어만 남아서 조롱거리가 됐다.


많은 진보 인사들이 그 조롱 대열에 동참하고,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비판했다.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고 있고 광기 어린 여론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당시 상황은 정말 끔찍했다. 진보당 당사에 우익들이 난입해 폭력·난동을 벌였고, 길거리에서 이정희·이석기 허수아비 화형식과 전기 톱으로 목 자르기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일부 진보 인사들은 진보당 활동가들을 사이비 종교 집단’, ‘정치적 발달장애라고 비아냥대며 말 바꾸거나 거짓말하지 말고 사실을 솔직히 말해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우리는 시류를 거스르며 이 분위기에 조금치도 타협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94일에 내가 쓴 온라인 기사를 내리기로 한 운영위 결정도 동의할 수 없다. 그 기사에서 나는 녹취록에 따르더라도 이석기 의원은 총기 발언을 한 바 없고 오히려 총 가지고 다니지 마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고 썼다.

국정원이 흘린, 이 녹취록의 신빙성은 처음부터 매우 의심스러웠다. 국정원도 한국일보에 준 적이 없다고 발뺌했고, 인터넷에는 취사선택해서 과장된 요약본만 돌아다녔다. 나는 이것의 전문(62페이지 가량)을 구해 읽어 보며 국정원의 조작을 더 확신하게 됐다.


노무현 NLL 대화록도 마사지한 자들 아닌가. 녹취록을 공개한 <한국일보> 기자도 이석기 의원 언급 가운데 총기발언은 없었다. ‘총기를 준비하라는 언급도 없다고 인정했다. 이런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결국 내란음모재판 과정에서 조작 의심은 사실로 드러났다. 국정원의 조작은 이런 식이었다. “전쟁 반대 투쟁을 호소하고전쟁에 관한 주제를 호소하고”, “구체적으로 준비하자전쟁을 준비하자”, “절두산 성지결전 성지”, “준비 정도와 상관없이정규전과 상관없이”...이것이 조작이 아니면 무엇인가.


녹음파일에는 이석기 의원이 칼 갖고 다니지 마시라. ? 총 갖고 다니면 안돼 우리는 죽자고 싸우는 게 아니에요라는 말을 한 것도 사실로 드러나 있다. <한국일보>에 실린 녹취록에도 나와 있던 말이니 놀랄 것도 없다.

따라서 이 마녀사냥과 RO에 대해 조작이라고 표현하지 말자는 주장은 틀렸다. ‘RO라는 지하조직이 내란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명백히 조작이다. 경기동부연합 경향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거기서 비슷한 토론을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무시한 내란음모를 꾸민 지하조직으로 몬 것은 왜곡, 과장일 뿐 아니라 분명히 조작이다. 영남위원회, 민혁당, 일심회 때도 그랬다. 매번 공안당국은 부분적인 사실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사건을 조작했다.

미국 매카시즘 시기에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마녀사냥 때도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일부 사소한 간첩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건 자체는 분명한 조작이었다.


하지만 우리 단체 지도부는 이 점에서 여전히 분명치가 않다. 예컨대 <레프트21> 최근 관련 기사를 보면 조작이라는 표현과 규정을 한사코 피하고 있다. 조작 여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부족한 것은 방어였다

 

그러면 당신은 진보당을 무비판적으로 방어하자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우선적 강조점은 압도적으로 방어에 있어야 했다. 진보당에 대한 비판은 부차적이고 비중이 클 수 없었다. 비판적 방어에서 방어에 훨씬 더 강조점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리 나와 생각이 다르고 얄미운 동지라도, 그가 물에 빠졌을 때는 일단 구해놓고 보는 게 우선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비판의 칼날이 우선 향해야 할 곳은 물에 빠진 동지 옆에서 야유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즉 진보진영 내에서 마녀사냥에 타협하는 세력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녀사냥 반대 기사의 서두에서 먼저 진보당에 대한 비판을 하자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지막지한 탄압을 받고 있는 시점에, 왜 그들의 오랜 문제점을 우선 비판해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아무리 좌파적 비판이더라도 말이다.


지금도 이해 가지 않는 것은 마녀사냥이 시작되고 단 며칠 후에, 우리 내부에서 왜 마녀사냥 당하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냐는 반응이 나온 점이다. ‘마녀사냥에 타협하는 사람들을 더 강력 비판해야 한다는 제기가 아니라 말이다. 이미 진보당에 대한 비판은 전 사회적으로 차고 넘치고 있었다.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비판하고 나서서 더 보탤 여지도 별로 없었다.


우리의 리플릿을 진보당 당원들이 너무 좋아해서 찜찜했다는 반응도 마찬가지다. 광기 어린 마녀사냥 속에 고립되던 희생자들이, 방어 목소리에 반가움을 느끼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이것이 어째서 우리 주장의 문제점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될 수 있는가?


이런 태도가 진보당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며 마녀사냥 반대 주장을 펼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오히려 진보당에 대한 탄압이 왜 우리 모두를 겨냥한 것인지, 이 탄압이 왜 진보당의 정당한 주장과 활동에 대한 탄압인지, 진보당에 대한 이견 때문에 방어를 회피하는 자세가 왜 문제인지를 주장해야 한다.


진보당이 아닌 다른 단체들도 자기 일처럼 적극 이런 주장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진보당이 아닌 사람들도 저렇게 나서는 것을 보면 이것이 정말 중요하구나하고 느끼지 않겠는가. 실제로 우리 단체가 가장 먼저 이런 입장을 발표하고 나서, 인권운동사랑방, 보건의료단체연합, 동성애자인권연대 등이 차례로 비슷한 입장을 발표했다.


이 단체들의 성명은 모두 제목에서 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과 탄압을 중단하라고 말하고 있다. 또 진보당에 대한 비판을 강조해서 앞부분에 하고 있지도 않다. 마녀사냥에 타협하는 목소리를 더 비판하고 있다. ‘진보당이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하고 농담이라고 피하려 한다는 지적도 없다.


나는 이런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우리 단체의 초기 입장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은 그 동안 송두율, 일심회 사건 등 마녀사냥 때마다 지속돼 온 입장이다. 근래 해방연대 사건이나 한길자주노동자회(철도) 사건, 새시대교육운동(전교조)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마다 우리 단체는 매번 단호하고 굳건하게 마녀사냥에 반대했다. 언제나 우리는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끝까지 함께 싸울 것이다는 볼테르의 격언대로 행동했다.


우리가 그 단체처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 단체와 우리의 차이점을 먼저 분명히 밝히자, 그 단체가 탄압에 직면해 거짓말을 하거나 말 바꾸는 것을 비판하자, 이 마녀사냥을 조작이라고 표현하지는 말자는 등의 제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예컨대 송두율 교수의 북한 노동당 가입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고 말을 바꾸냐고 송 교수를 탓하지 않았다. ‘사상과 정치 활동의 자유이지 그게 뭐가 문제냐고 우파를 공격했다. 이 나라에서 북한 노동당 가입 사실을 솔직히 밝힌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명백했기 때문이다.


일심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 기사들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탄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방어에 강조점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마녀사냥에 타협하는 전진’, ‘자율과 연대’, 일부 자주파에 대한 가차없고 신랄한 비판이 많았다. 일심회 동지들에 대한 비판은 매우 부차적이고 비중이 크지 않았다.


일심회에 대한 비판도 이런 식이었다. ‘물론 우리는 북한 체제에 대해서 이 동지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 탄압이야말로 이런 이견을 자유롭게 토론하기 못하게 한다. 이 동지들이 북한에 당원 정보를 넘겼다면 문제다. 그러나 공안당국보다는 동지들의 항변을 믿어야 한다. 나아가 이 문제는 일단 탄압을 막아내고 나서 따질 문제다.’


이런 정도의 비판은 이번 마녀사냥 초기에 나온 우리의 성명과 기사들에도 반영돼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 여러 제기가 나온 것이다. 이미 당시 마녀사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말과 글머리에 나는 이석기와 생각이 다르지만’, ‘나는 진보당이 아니지만을 덧붙이고 있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도 이 점을 지적했다. “2013828이날 이후로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를 말할 때 나는 종북이 아니다’, ‘나는 통합진보당에 반대한다는 등의 말을 깔아놓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우리도 이런 흐름에 일부 영향을 받는 듯이 느껴져서 매우 불편했다.

 

  태도 변화의 분기점


이런 의구심과 이견들을 고민해 나가면서 나는 진보당에 대한 우리 단체의 태도가 매우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거듭 느꼈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일심회 때와는 사뭇 달랐다. ‘진보당의 대응을 보면 역겹다’, ‘일부 종북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는 반응이 우리 단체 지도적 동지들 사이에서 수시로 나왔다.


여기에는 물론 진보당을 주도하는 자주파의 패권적이고 잘못된 행태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사회주의강령 후퇴와 참여당 통합 반대 과정에서 자주파와 격하게 충돌했다. 자주파의 잘못된 정치와 패권적 행태도 생생하게 경험했다. 김지윤 동지의 청년비례후보 출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실 패권적 행태로 따지면 평등파도 못지 않았다. 우리는 평등파가 주도권을 쥘 때의 패권성도 많이 겪어 봤다. 따라서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았다. 결국 나는 지난해 진보당 경선부정 사태가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 당시 진보당 당권파는 종북·부정·폭력으로 똘똘 뭉친 추악한 집단으로 낙인 찍힌 바 있다.


마녀사냥이 명백한 종북은 쟁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경선부정과 중앙위 폭력문제는 달랐다. ‘진보당 당권파가 의원 자리에 눈이 멀어 체계적·조직적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이를 덮고 책임지지 않기 위해 동지를 향해 조직적 폭력까지 자행했다는 게 당시 진보진영의 대체적 인식이었다.


이런 행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보의 원칙과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이런 짓을 한 집단은 응분의 책임을 묻고 도려내져야 했다. 나도 당시에 여기에 동감했다. 우리 단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진보당 신당권파가 주도한 진상조사위의 발표와 처방을 거의 수용했다.


이 선거는 정당성과 신뢰성을 완전히 잃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순위 경선에 참여한 비례후보들은 모두 사퇴해야 한다.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비례대표 후보 순위 경선 자체가 총체적 부실부정 선거였다.”


<레프트21>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진상조사위가 발표한 사실들만 놓고 봐도 이 선거는 정당성과 신뢰성을 완전히 잃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었다.”

특히, 중앙위 폭력 사태 이후, 우리의 분노는 대단했다. “5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회의석상의 폭력 난동 사태는 아연실색과 비애만을 안겨 준다. 12일의 행위는 막장 양아치나 할 짓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개무시는 스탈린주의의 특징이다.”

당연했다. 부정을 저지른 집단이 그걸 덮기 위해 폭력까지 저질렀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런 비판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분석과 연결시켰다.


통합진보당 부정 선거의 핵심은 온라인 투표다. 누군가 수 차례 소스코드를 열어 봤다는 것이고, 이것이 투표 결과에 모종의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선거 부정이다. 그것도 스탈린주의자들(NL)이 선거주의에 눈이 멀어 합법적 대중 정당 안에서 저지른 선거 부정이다.”


스탈린주의는 당과 계급을 동일시할 뿐 아니라 당과 국가도 동일시하므로 자신들의 운동이 낡은 국가 안에서 새로운 국가를 창출하는 과정으로 여긴다.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억압적인 자세가 나타나는 이유다. 또한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자행된 선거 부정도 목적은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스탈린주의의 실용주의적 도덕관과 관계있다.”


나도 당시에 이런 입장을 공유했고, 편집자로서 이에 바탕 해 신문을 기획하고 편집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계기는 중앙위 폭력 파행 직후에 일어난 진보당 박영재 당원의 분신 사건이었다.

덤프 노동자였던 고인은 중앙위 폭력 파행 때 격분한 표정으로 조준호 대표의 멱살을 잡았다. 그 장면은 조중동 1면을 장식했다. 사람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며 목숨을 던지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때 나는 저들의 항변도 다시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계기는 지난해 6월말 김인성 보고서가 나왔을 때였다. 이 보고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사실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운영위 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고 확신이 부족했던 나도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 후에도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은 계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이 사건을 기억하던 나는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기존의 온갖 예단을 걷어내고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이 사건을 되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이 사건의 진실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총체적 부정과 부실?

 

이 사태의 출발점은 오옥만 후보와 윤금순 후보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당시 오옥만은 온라인 투표에서 앞섰지만 현장 투표에서 역전 당해 윤금순에게 순위 1번을 주고 9번으로 밀렸다. 국회의원직을 얻지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자 오옥만은 윤금순 측의 현장 투표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진보당 지도부는 일단 총선을 치른 후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부정이 확인되면 윤금순 후보를 사퇴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오옥만의 온라인 투표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되기 시작했다.


총선 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부정 의혹을 받고 있던 쪽의 사람들로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가 구성된 것이다. 양자로부터 독립적인 사람들로 구성하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이렇게 구성된 진상조사위는 막상 윤금순, 오옥만에 관련된 의혹을 조사해서 밝혀내지 않았다.

진상조사위는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어떤 부정을 저질렀는지 밝혀내지 않았다. ‘이런 부정을 저지른 어느 선본의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지 않았다. 대신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총체적 부정·부실이니 경쟁명부 후보는 모두 사퇴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진상조사위원장이자 진보당 공동대표인 조준호는 당권파를 겨냥한 폭로전과 언론 플레이에 나섰다. ‘소스코드가 조작됐다, 데이터를 수정한 것 같다, 누군가 서버로 접근한 직후 이석기 득표가 수직 상승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똑같거나 2000000으로 된 유령 당원들이 있다, 투표 용지가 뭉텅이로 붙어있었다, 당원 수십 명의 거주지가 한 중국집으로 돼 있다...’


당권파에 대한 이런 공세는 종북색깔론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참여당 출신의 진보당 부산 금정구의원인 이청호는 진상조사위 발표 전부터 검찰 고발을 운운하며 TV조선에 나와 당권파를 공격했다. 유시민도 “‘당신 당은 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가세했다.


조중동은 물론 신이 났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체제인 북한을 옹호하고 대변해온 세력답게 부정투표로 당원들의 권리를 유린하는 정치행태 역시 북한을 닮았다.”

<한겨레><경향> 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겨레>부정을 저지른 주체가 당권파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면서도 당권파한텐 안됐지만 이제 정치의 현장에서 벗어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주사파식 접근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이유였다.


부정의 진상은 아직 모르겠지만, 종북 이미지 때문에 야권연대에 도움이 안 되는 진보당 당권파는 빠져줘야 한다는 거였다. 진보당 안팎의 진보 인사들도 이런 분위기에 힘을 실어줬다. 그래서 거의 범국민적인 진보당 당권파 도려내기 분위기가 형성됐다.민노당에 지하지도부가 있었던 게 아닌지 의문이라는 유시민 등의 발언은 절묘한 추임새였다.


감히 당권파를 편드는 목소리는 찾기 힘들었다. 진보당 당권파는 이미 여론재판에서 부정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다. 중앙위 폭력 사태는 여기에 완전히 못을 박았다. 당권파에 대한 전 사회적 혐오감은 극대화됐다. 이들은 시대착오적이고 패권적이고 부정과 폭력도 서슴지 않는 집단이 됐다.


반면 유시민과 심상정이 주도하는 신당권파는 이런 당권파를 견제할 주체로 부각됐다. 심지어 운동권의 낡은 관행에서 자유로운 참여계 덕분에 곪은 관행이 드러났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검찰은 거리낌없이 진보당 서버와 당원 명부를 탈취해 갔다. 진보당 신당권파는 이것을 사실상 방조했다고 한다.


이어서 신당권파는 사퇴를 거부하는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과 출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부정에 책임이 있다는 증거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는 객관적인 조사 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답이 더 많았지만 무시됐다.


사태는 도의적 책임에 따라 사퇴를 권고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두 사람에 대한 제거는 무엇보다 우파의 요구였다. 박근혜는 당시 기본적인 국가관이 의심을 받고 있는 [두 사람이] 자진 사퇴하지 않으면 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두 사람을 진보당이 스스로 쳐내라고 강력 주문했다.

동시에 신당권파는 진보당의 정책과 노선을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이미 유시민은 대한민국 실정과 세계사적 조류에 맞도록 [노선을] 현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운을 띄우고 있었다.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가 만들어졌고 한미동맹의 해체로 오해 받고 있는 지점에 대해 재검토”, “‘재벌해체론은 현실성과 타당성 면에서 재검토”, “비례대표 100% 전략공천”, “정파등록제 도입등의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상정은 “2008년 혁신의 실패로부터 오늘의 사태는 예고된 것이라며 혁신의 과제를 매듭지으려고 [돌아] 온 것이라고 했다.


새로나기 특위는 조중동의 지지도 받았다. <조선일보> 고문 김대중은 통합진보당 새로나기 특위의 혁신파들을 지목해 대한민국의 주류가 포용해야 할 정통 진보 세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진보당 신당권파가 일사천리로 추진하던 이런 조치들은 걸림돌에 걸리고 만다. 의원 총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제명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된 것이다. 이미 한 지붕 두 가족이던 진보당은 그 후 급속하게 쪼개졌다.

 

  드러나는 진실

 

이 모든 사태는 진보당 당권파가 체계적·조직적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전개됐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이런 의혹들과는 다른 사실들이 거듭 밝혀졌다. 지금부터 이 점을 살펴보자.

먼저 조준호의 진상조사위는 형상관리프로그램이 없어서 부정의 구체적 내용과 책임 소재를 밝히기 어렵다고 했었다. ‘당권파가 투표 시스템에 형상관리프로그램을 두지 않은 것 자체가 부정을 저지르고 밝힐 수도 없게 하려는 의도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투표 시스템에 누가 접속해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담고 있는 것은 로그 기록이었다. 1차 진상조사위가 이것을 확인하지 않은 것은 교통 사고에서 블랙박스를 열어보지 않은 격이었다.

반면 2차 진상조사위는 로그기록을 확인했다. 2차 진상조사위는 그 임무를 외부 전문가인 김인성 교수의 팀에 맡겼다. 김인성 교수는 특히 디지털 포렌식전문가로 이명박의 디도스 공격과 민주당 대선후보 당내경선 논란 때도 민주당의 의뢰로 문제를 해결했었다.


김인성 교수팀은 로그기록 조사를 통해 그 동안 제기된 많은 의혹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냈다. “소스 코드 조작을 통한 투표값 조작, 특정 후보의 득표값 고의 누락, 데이터 베이스 접근을 통한 투표 결과 조작 등 모든 의혹은 투표값 열람을 통해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김인성 교수는 서버를 열어 본 것은 선관위 관련자였고 투표 시스템의 정상적 운영을 위해 시스템 오류를 해결한 것 외에 다른 조작을 가한 흔적은 없다고 밝혔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똑같거나 2000000으로 된 유령당원 의혹, 투표 용지가 뭉텅이로 붙어있던 현상, 당원 수십 명의 거주지가 한 중국집으로 돼 있던 것 등도 그 후 조사 과정에서 부당한 의혹 제기인 것이 밝혀졌다.

결국 총 투표의 87퍼센트를 차지한 온라인 투표에서 당권파의 조직적·체계적 부정은 없었다. 그런데 김인성 교수는 조사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로그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을 본 저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여계 오옥만 후보가 온라인 투표에서 벌인 체계적·조직적 부정을 발견한 것이다. 오목만 측은 콜센터와 대포폰까지 동원해서 부정을 저질렀다. 부정은 공식 투표소도 아닌 제주도에 있는 고영삼의 건설업체 사무실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선관위 관리자 아이디를 도용해 미투표자 조회를 6천 번 실시하고, 밝혀진 것만 수백 건의 대리 투표를 한 것이다.


이것은 큰 후폭풍을 낳을 수 있었다. ‘부정의 소굴로 묘사된 당권파가 아니라, ‘부정 척결의 주체로 보여지던 신당권파의 참여계가 오히려 문제였으니 말이다. 오옥만은 시민주권모임운영위원이자 노무현재단기획위원으로 유시민의 측근이었다. 심지어 고영삼은 경선부정 1차 진상조사위 위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2차 진상조사위는 김인성 교수의 이 온라인 투표 시스템 분석 보고서를 폐기해 버렸다. 진상 조사가 아니라 진상을 은폐한 것이다. 이 폐기를 주도한 사람은 2차 진상조사위 간사이던 참여계 이정훈이었다.

2차 진상조사위는 또다시 부정의 주체를 밝히고 부정이 얼마나 있었느냐를 따지고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부정은 부실에서 싹터났으며 부실은 부정에서 만연했다는 모호한 결과를 발표했다.


2차 진상조사위 김동한 위원장(성공회대 법학과 교수)은 이 결과를 동의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부정을 저지른 자들이 다른 집단에게 누명을 씌우고,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온갖 방해를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김인성 교수가 밝혀낸 진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시사평론가 유창선은 이렇게 논평했다.


“[진보당] 혁신비대위, 그리고 대한민국의 언론들[] 그렇게 경선부정의 실상에 목소리를 높이다가, 막상 그 경악할 증거가 발견되었다니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침묵하거나 동문서답하고 있다. 진실은 이제 자신들이 가려는 길을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장애물에 불과할지 모른다.”

 

  검찰도 만들어내지 못한 꼬투리

 

이제 부정선거 논란의 칼자루는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탈취해 간 서버와 당원명부 속에는 13년 동안 입·탈당한 각급 노조와 시민단체 소속 20만 명의 기록이 담겨있었다. ‘앞으로 10년간 공안기관의 밥벌이는 해결됐다는 말이 나올 만 했다.


게다가 검찰이 가져 간 서버에는 당내경선에서 당원들 각자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까지 담겨있었다. 이것은 1차 진상조사위와 유시민, 조준호, 심상정 공동대표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은 당권파의 부정을 입증하기 위해 당원 개개인의 투표값을 열었다. 당시 조준호 진상조사위 위원장은 투표 시스템 제공 업체에 당원 개개인이 투표한 내역 데이터의 제출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냈다. 이것을 검찰이 탈취해 간 것이다.


검찰은 당연히 당권파의 부정을 잡아내기 위해 먼지털기식 수사를 했다. 전국 14개 지방검찰청 공안부 검사가 총동원돼서 반년 동안 수만 명을 수사 대상으로 삼고 무려 1735명을 소환 조사했다. 검찰은 당원들의 개인 정보, 휴대폰 사용기록, 문자 메시지까지 다 들여다봤다.

그러나 검찰도 소스코드 조작, 서버 접근과 데이터·투표값 조작 등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오옥만 등이 저지른 조직적 부정은 검찰도 알아냈다. 결국 지난해 연말 검찰은 20명을 구속 기소하고 442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구속 기소자는 오옥만, 고영삼, 이정훈 등 대부분 콜센타·대포폰까지 동원해 수백 건의 대리투표를 한 참여계였다. 이들은 부정 의혹을 앞장서 제기했을 뿐 아니라 진상조사위원 노릇까지 했었다. 이영희, 이경훈 등 일부 노조 관료들도 구속됐다. 반면 부정 의혹 때문에 제명과 출당까지 당할뻔한 이석기·김재연은 아무 혐의가 없어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불구속 기소 442명 중에는 당권파 당원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부모, 배우자, 친구, 동료 등의 부탁을 받아 온라인 투표를 대신해 준 혐의였다. 이것은 기소 자체가 억지였다. ‘강도·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놓고 증거가 없자, ‘그래도 이 사람들이 무단 횡단은 했다고 우기는 꼴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진보진영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영화배우 김여진 씨는 진상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억울해 했다.


“[그 동안 우리가] 들었던 이름은 오로지 이석기, 김재연 뿐이었다. [이런 사실이 진작 알려졌다면] 억울하다고 분신까지 하는 그런 일은 없었지 않았겠나 싶다. 나 역시 조금 다른 감정을 갖게 되었겠지 그토록 환멸에 가까운 배신감을 갖진 않았겠지 징그럽다는 듯이 바라보지 않았겠지.”


<경향신문> 원희복 선임기자는 뒤늦게 사과했다. “부정경선을 가장 먼저, 가장 가열차게 제기한 세력은 유시민계인데 막상 그들이 부정의 주범이었다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데 우리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분위기에 매몰돼 하이에나처럼 물어뜯기 바빴지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 드립니다.”


<오마이뉴스> 최규화 기자도 반성했다


부정경선, 당권파, 경기동부, 종북 세력, 폭력 집단 . 확인하고 검증할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온 말들은 제대로 걸러지지 못하고 날마다 헤드라인을 달궜습니다. 한쪽에서는 목숨까지 걸고 저항했지만, 이미 확신에 찬 언론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언론 역시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반성합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가려지기도 전에 부정선거의 장본인으로, 패권주의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심지어 종북주의 세력으로 낙인 찍힌 이들에게 사과합니다.”


이 외에도 <미디어 오늘> 백병규 전 편집국장, <천안함 프로젝트>의 신상철 씨 등이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물론 대부분의 개혁·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살인강도는 안 했지만 무단횡단은 했다?

 

살인강도범은 아니었지만 무단횡단범 이기는 하다는 검찰의 기소도 얼마 후 빛이 바래고 말았다. 서울중앙지법이 이 부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검찰의 442명 불구속 기소에 따라 전국 40여 곳 지방법원에서 같은 사안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법원은 그 재판들을 일단 중지시키고 서울중앙지법에서 집중 심리를 진행해 기준을 마련하려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온라인 투표시스템 전문가, 진보당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자, 진보당 선관위 관계자 등을 증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그리고 서울지역에서 불구속 기소된 47명 전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진보당 당내경선 온라인 투표에서 조직적 부정은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다음으로 인터넷 미숙이나 시간 부족 등 때문에 가족·친척·동료 한두 명의 투표를 대신해 준 것은 도의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무죄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 정도의 위임투표는 나 자신도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있으면서 간혹 했다. 파트너와 집에 있다가 한 대밖에 없는 컴퓨터를 쓰던 사람이 두 사람의 투표를 연달아 처리한 경험은 다른 동지들도 있을 것이다. 서로 의사를 확인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부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부정을 밝혀내지 못하자 이거라도 걸고 넘어지려 한 게 억지였다.


한편, 이 판결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재판부는 투표 의사를 위임 받지도 않고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진행한 대리투표는 처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즉 오옥만 등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진보당 당권파가 굴레처럼 쓰고 있던 부정선거 의혹은 1년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벗겨졌다. 1년 전에 그토록 융단폭격을 쏟아 붓던 사람들이 지금은 대부분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다.


그래서 당권파는 여전히 부정의 낙인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진보당 무죄 판결 이후 조중동은 종북 판사, 종북 판결운운하며 판사 이름을 공개해 버렸다. 이에 밀려 얼마 후 광주지법에서는 똑같은 사안에 대해 관습법에 따라유죄 판결을 내려 버렸다.


1128일에 대법원에서도 관련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자 언론들은 진보당 대리투표 유죄 확정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정말 악의적 보도였다. 왜냐하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람들은 바로 참여계 오옥만의 부정을 도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진보당 당원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언론은 마치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보도했다.


결국 나는 지난해 진보당 경선부정 사태에 대해 우리 단체도 돌아볼 게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운영위원이자 편집자로 있으면서 사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 내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가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비겁하게도 끝까지 제기하지 않고 침묵했다.

물론 경선부정에 대한 문제제기가 마녀사냥과 연결되는 것에 우리 단체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특히 우리는 처음부터 검찰을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했다. 검찰이 진보당 서버를 침탈했을 때도 우리는 강력한 규탄 목소리를 냈다.


신당권파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는 유시민, 심상정 등을 믿지 말라고 거듭 경고했다. 신당권파가 추진한 강기갑 비대위 구성안도 지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지도부 선거에서도 당권파와 신당권파 어느 쪽에도 투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들은 분명히 옳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또한 당권파가 선거에 눈이 멀어서 조직적·체계적 부정을 저질렀고, 이를 책임지지 않기 위해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는 프레임을 공유했다.


이처럼 당권파의 선거부정을 기정사실화하며 우리는 목적은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스탈린주의에서 원인을 찾았다. 반면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는 기본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중시한다. 그래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절차의 핵심인 선거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진보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이석기·김재연 제명과 출당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진보당 새지도부 선거에서 강기갑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강기갑 지도부가 최우선 혁신과제로 제시한 이석기·김재연 제명은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두 의원 제명이 혁신이라면, 제명의 실패는 혁신의 실패가 된다. 우리가 두 의원 제명 실패 이후 공개 탈당을 선언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먼저 726일 진보당 의원총회에서 제명안이 부결됐다. 우리는 그 직후 729최소한의 혁신마저 불가능해진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우리는 두 의원 제명이 진보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당의 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처조차 실패해 버렸다. 이 당 안에서 진보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기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탈당하기에 적절한 시점과 명분이었는가

 

물론 우리가 진보당 탈당을 고민했던 것은 오래된 일이다. 우리 단체는 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 때부터 입당·가맹 전술을 펴왔다. 독자적인 혁명 정치와 조직을 포기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특히 2008년 분당 이후에는 더욱 독자적인 조직 건설과 활동이 강조돼 왔다. 입당·가맹 전술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뿐 아니라, 2008년 촛불항쟁과 세계 경제 위기를 거치며 우리의 과제도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2011사회주의 강령후퇴와 참여당과의 통합을 겪으면서 이런 문제의식은 더욱 깊어졌다. 친자본주의 세력과 합쳐져 진보당이 만들어진데다 인민전선 전략의 폐해가 예고되고 있었다. 따라서 입당·가맹 전술을 통해 우리가 이익보다 손해를 볼 거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돌아보면, 우리의 입당·가맹 전술은 진작에 끝났어야 했다


특히 참여당과의 통합이 결정된 시점에서는 더 미루지 말고 탈당해 나갔어야 했다. 많은 언론과 개혁주의자들이 그리는 계급연합(인민전선)의 장밋빛 미래에 비판과 경고를 던지며 발을 뺏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후에 진보당에서 벌어진 재앙에서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점을 놓쳤고, 결국 두 의원 제명 실패 이후 공개 탈당을 하게 됐다. 그런데 이 때는 시점과 명분이 적절치 않았다. 당시 두 의원 제명은 누구보다 우파가 바라고 자유주의자, 개혁주의자들이 수용하는 의제였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종북은 발붙일 수 없다는 상징 의식이 돼 있었다. 진보당에서 두 의원이 제명되면 민주당·새누리당이 국회에서 두 의원을 제명하는 것이 더 손쉬워 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진보당 의원총회에서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파는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민주당은 일찌감치 선을 긋고 있었고, 참여계와 심상정 쪽도 진보당에서 탈당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은 혁명가들이 신발을 고쳐 신기 적절한 시점이 아니었다. 아무리 진작에 벗겨져 거슬리던 신발이었어도 말이다.


물론 당시 종북·부정·폭력의 이미지로 전 사회적 왕따가 된 진보당에 남아있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이 인기 없는 당에 남아 우리에게 올 실리는 거의 없었다. 우리 회원들과 주변 노동자들로부터 왜 아직 남아있냐라는 의문이 제기될 만 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단지 단기적 실리만 보고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대의와 명분, 노동운동 전체의 장기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했다. 그렇게 볼 때 두 의원 제명은 혁명가들이 지지할만한 의제가 아니었다. 제명 실패도 혁명가들이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히 우파가 주도하고 민주당이 닦달하는 종북 도려내기프로젝트였다. 우파는 이를 통해 우파를 결집하고 진보를 위축·분열시키려 했다. 민주당은 종북과 선을 그으며 우파에 굴복하고 있었다. 진보당 신당권파는 야권연대의 걸림돌이라며 두 의원을 솎아내려 했다.

우파는 이대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대선까지 이 국면을 끌고 가려 했다. 실제로 상황은 그렇게 됐다. 결국 위기와 분열 속에 지난 대선에서 진보의 독자적 목소리는 사라졌다. 우리는 매우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문재인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가서야 진보당 당권파의 부정은 종북몰이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누명이었던 게 밝혀졌다. 물론 종북’, ‘부정과 달리 폭력은 명백히 진보당 당권파의 잘못이었고 옹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폭력은 당시의 구체적 맥락과 동떨어져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 맥락 때문에 더 괘씸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부정을 저지른 자들이 그것을 덮고 책임지지 않기 위해 계획된 폭력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유시민은 매우 잘 준비하고 현장에서 아주 조직적으로 지휘해서 폭력사태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부정의 진실은 사뭇 달랐다. 따라서 김인성 교수의 지적처럼 폭력 사태는 당원들의 억울함이 표출된 우발적인 사고로 보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이런 내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며 폭력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그런 맥락이 있었어도 폭력은 사용하지 말았어야 하며,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


결국 우리가 그 상황과 조건에서 공개 탈당한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일부 사람처럼 이 주장을 영원히 탈당하지 말자는 주장이고 진보당에 재입당하자는 것이라고 곡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지난해 검찰의 진보당 서버 침탈 시기에 지금은 탈당의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영원히 탈당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던가? 마찬가지다. 나는 거듭해서 제명 실패 시점에 그것을 명분삼아 탈당한 것이 적절했냐를 묻는 것이다.


나는 우리 단체가 기존 분석과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그와 어긋나는 사실들을 직시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혁명적인 조직이라도 잘못된 판단과 전술을 택할 수 있다. 무오류의 조직 따위는 없다. 그러나 오류를 직시하고 교정할 줄 아는 것이 혁명 조직이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잘못을 저지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기, 잘못을 바로 잡을 방법을 깊이 생각하기 - 그게 바로 진지한 당임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당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그릇된 수치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오류에서 나 자신도 결코 자유롭지 않고 큰 책임이 있다.


  재앙의 뿌리 - 인민전선 전략

 

지난해 왜 이런 난장판이 벌어졌던가. 역설적이게도 비극은 진보당 당권파가 앞장서 추진한 강령 후퇴와 참여당과의 통합에서 비롯됐다. 특히 이석기 의원 자신이 가장 적극적으로 이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전국회의 김장호 의장은 참여당과 통합만 하면 원내 20, 30석도 가능하고 연립정부도 갈 수 있을 거라는 과도한 정세인식과 주관적이고 선거공학적인 판단이 우경화의 시작이었다고 후회했다.


자랑스럽게도 우리 단체는 이런 후퇴에 맨 앞에서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것이 낳을 결과에 대해서도 가장 날카롭고 명확한 분석을 제시했다. 우리는 당권파의 인민전선 전략이 스스로의 무덤을 팔 것이라고 봤다. 재앙은 우리의 예측보다도 훨씬 크고 빠르게 다가왔다.


통합 직후, 총선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경선을 앞두고 진보당은 당비 한 번만 내면 당권을 주는 규정을 마련했다. 그리고 무려 35천여 명이 새로 밀려 들어왔다. 명백히 당내경선을 위한 쪽수 늘리기였다. 여기서 부정의 불씨가 마련됐다.

인민전선적 졸속 통합은 곧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 세력은 권력의 배분방식과 배분내용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어차피 상대방은 도구화됐기 때문에 동지적 문제제기와 결과 수용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이정희 대표 또한 이렇게 돌아본다. “뜻이 맞아서,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뭉치는 게 아니었다. 저도 그랬고, 그분들도 그랬다. 욕심, 출세, 야권단일후보만 되면 나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어, 그런 마음들이 확 일어났다. 그런 마음에 대한 벌이었다고 이제는 생각이 든다.”

·대선에서 야권연대와 연립정부까지 바라 본 3자 통합은 진보당을 권력 투쟁의 장으로 만들었고, ‘고삐 풀린 권력투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참여계가 기대와 달리 겨우 국회의석 한자리를 얻으면서 비극은 예감됐다.


대의가 아닌 실리를 위한 결합은 실리를 못 챙긴 쪽에서 불만을 낳았다. 화학적 결합은 없었기에, 상호 불신은 극에 달했다. 아마 참여계는 자신들처럼 당권파도 부정을 저질렀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정을 책임지고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요구했다. 유시민, 심상정 등은 당권을 쥐고 대선 대응과 연립정부 구성을 주도하려 했을 것이다.


당권파의 종북성이 야권연대와 대선 승리에 도움에 안 된다고 보고 있던 자유주의 언론·지식인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당권파의 패권적 행태에 피해를 입고 상처받아 온 사람들도 굳이 당권파를 방어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오옥만 측이 못된 장난을 쳤다. 오옥만 측은 스스로 부정을 저질러놓고, 진상조사위에 들어가서 진상을 은폐하며 당권파의 부정으로 사태를 몰아갔다. 어느 시점에는 유시민, 조준호, 심상정 등도 진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마 당원 개개인의 투표값까지 강제로 열어 본 후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미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들의 논리는 부정을 누가 얼마나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로 바뀌었다. 김인성 교수는 오옥만이 자신의 범죄 행위를 유시민 씨가 언제 인지했는지 밝히는 순간 유시민 씨의 모든 것은 끝장날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이 파국이 노동운동에 끼친 해악은 매우 크다. 사실 진보당의 의석 수는 민주노동당 때보다도 늘었다. 지방의원 수까지 합치면 몇 배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부터 이 사회 곳곳의 진보당 당원들은 어디 가서 진보당을 지지한다거나 당원이라고 말도 못하게 됐다.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게 됐다. 노동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곳곳에서 분열의 골이 깊게 파였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의원이 이 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현장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현장에 가보면 활동가들 어깨가 바닥까지 쳐져 있다. 조합원들이 후원금 돌려달라, 탈당한다 난리란다. 가족들한테도 쪽 팔린다 한단다. 회사 관리자들까지 비웃는단다.”

 

  우파 결집과 진보 분열 속에서

 

이 상황에서 우리는 최대한 진보의 분열에 맞서며 단결을 촉구했다. 진보당에서 탈당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단체는 행동강령을 중심으로 공동의 투쟁과 선거 대응을 위한 진보정치연합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우리는 진보의 분열과 우경화를 부추기는 참여계는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본적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하나의 전술로서 진보대연합을 제안한다. 유시민처럼 진보가 아니고 민주당 왼쪽 날개도 대안일 수 있다는 세력들을 빼고 급진좌파부터 민주노총,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진보적 NGO까지 광범한 진보진영과 노동운동 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진보진영에 끼어들어 온 참여당계는 이번 기회에 떨쳐내야 한다. 행동강령적 투쟁 과제를 중심으로 연합을 구성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박근혜가 당선한 대선 직후에 우리가 강조했던 것도 이것이다. 당시 우리는 지배계급과 우파는 결속한 데 반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은 투표 외엔 사분오열 된 결과라고 대선 결과를 평가했다. 그리고 노동계급 정치조직들은 공동전선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당시 우리 신문의 헤드라인도 고통전가를 위한 지배계급의 결집에 노동자 단결로 맞서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호소는 메아리 없는 울림이었다. 한 쪽에는 여전히 참여당과의 통합 추진 등을 반성하지 않는 진보당이 있었다. 패권적으로 추진된 이 인민전선 전략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가 생겼는데도 말이다.


이석기 의원은 나는 여전히 대중적 진보정당의 노선은 옳았다고 본다. 문제는 노선이 아니라 노선을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민중의 소리>통합진보당을 건설한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했다. 올해 정책당대회에서도 진보당은 진보통합과 야권연대를 변함없이 추진해야 된다“5년 늦어졌을 뿐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런 태도는 참여계와의 통합 이후 벌어진 온갖 끔찍한 사태로 진절머리가 난 사람들이 혀를 차게 만들 뿐이었다.


다른 쪽에는 참여당과의 통합을 현실에서 유지하고 있는 정의당이 있었다. 심상정 등이 한때 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했던 것은 자주파를 견제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심상정은 현실적 노선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와 시장 통제에 대해 분명한 전략을 갖고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자, 이 연대세력이 잘 융합[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구당권파[] 대중정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낡은 요소라고 저주했다.


이 두 진보정당은 민주당과는 서로 손을 잡고자 하면서 서로 간에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독립적 관점에서 구체적 사안에 따라 적절한 연대 전술과 단결을 추구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진보정치 재구축 문제에서 진보당 맞은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우리 단체가 처음 노동정치연석회의에 발을 디딜 때는 이것이 분명치 않았다. 국민파, 중앙파 노조 관료들이 주도하는 이 기구는 진보정치 연합을 위한 추진체로 보였다. 당시 우리는 민주노총 전현직 리더들이 새로운 노동계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에 들어서면서 이 기구는 진보당이 아닌 진보정치 세력을 묶어 세우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이라는 구상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발생한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의 분화에서 개혁주의의 정치 공간을 메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진보당까지 포함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진보당에 대해서는 특정 쟁점을 놓고 사안별 연대라는 처방을 내놓았다. 반면 정의당에 대해서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과제를 대변하고자 하는 새 정당의 목표에 진보정의당은 동의하는지 여부를 시험대에 올려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노회찬 대표가 얼마 전에 박근혜에게 제안한 전략적 동맹은 매우 위험하고 아주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정의당은 그 후에도 이 시험대위에서 거듭 부적절한 태도를 보였다. 참여계 출신 정의당 천호선 대표의 행태는 예상대로였다. 문제는 진보신당 출신인 심상정, 노회찬의 변신이었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대선 때 “NLL내가 집권한다고 해도 실효적 지배가 유지될 선이라며 안보 논리에 타협했다.


정의당이 박근혜에게 전략적 동맹을 제안할 당시, 노회찬 전 의원의 주장도 문제가 많았다. “비정규직 있어도 되는 거 아니냐? 노동자들도 서로 고통분담해야 하는 것 아닌가?”,공약의 우선순위를 정해 못 할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사과하고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야당과 국민의 동의를 구하면 된다.”

박근혜가 노동자 증세안을 던졌을 때 심상정 의원의 태도도 문제였다. 심상정 의원은 증세가 필요하다고 국민들께 솔직히 설명하는 것이 정치의 본분이라며 사회적 대타협을 제안했다.

 

  시험대 위에서 거듭 헛발질하는 정의당

 

무엇보다 정의당은 종북 마녀사냥에 거듭 굴복하며 동지의 등에 칼을 꽂았다. ‘내란음모마녀사냥 때 심상정의 헌법 밖 진보발언은 충격이었다. 심상정은 이석기 사태는 진보정치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분명하게 정리했다는 면에서 중요한 전기라고 평가했다. 이석기 체포동의안을 새누리당, 민주당과 함께 처리한 것이 이 배신적 태도의 절정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런 심상정 의원을 연일 소신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며 칭찬했고, 새누리당 김무성은 심상정에게 자신이 꾸린 연구모임 퓨처라이프의 공동대표 자리를 제안했다. 이런 정의당의 언행은 분명히 박근혜와 각을 세우며 탄압받고 있는 진보당보다 더 오른쪽이었다. 물론 진보당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개혁주의 정당으로서 여러 한계를 보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참여하고 있던 노동정치연석회의는 이런 정의당과 노동당을 묶어서 연합정당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계속 나갔다. 근래 열린 토론회에서 양경규 노동정치연석회의 소집권자는 노동당과 정의당의 강령을 모두 읽어봤는데 결정적 차이가 있냐며 연대를 호소했다. 이에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연석회의의 결성 취지와 제안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양경규 소집권자는 이석기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낡고 교조적인 이념은 수정되기도 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기도 했다고 논평했다. 노동정치연석회의는 111노동·정치·연대로 정식 출범하면서 6대 과제를 제시했는 데, 그 중에 하나로 북한에 대해 자주적 독립적 태도 견지가 들어갔다.


노동·정치·연대는 노동자대회 때도 방향을 재확인했다. “진보정치의 미래를 열어갈 방안들을 찾기 위해 민주노총, 노동당, 정의당, 학계 등과 소통하고 교류 중입니다.”

노동·정치·연대는 지난 123일에도 진보당만 빼고 나머지 진보정당과 단체들에 진보정치의 연대와 통일을 위한 원탁회의구성을 공개 제안했다.


요컨대, 진보정당의 위기와 분열은 계속되고 있고, 이 속에서 정의당은 갈수록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왜 우리가 진보정당 중에서 정의당과 노동당을 묶으려는 시도에 힘을 실어야 하는가? 그것도 민주노총 내에서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 노조 관료들의 일부가 주도적인 시도에 말이다. 그것이 과연 진보의 단결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까? 이것이 내 문제의식이다.


만약 조직 노동 대중의 다수가 이 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얘기는 또 다를 것이다. 그 속에서 활동하고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현재 진보당은 당원 수가 104692명이다. 노동당은 11644명이고 정의당이 6750명이다.

진보당은 [올해 218일 현재] 의원 6, 기초단체장 2, 광역·기초의원이 118명이다. 정의당은 의원 5, 기초단체장 2, 광역·기초의원이 41명이다. 노동당은 광역·기초의원만 13명이다. 민주노총 산별노조 및 지역본부 대의원 설문조사에서도 진보당 지지자는 24.9퍼센트, 정의당 지지자는 8.8퍼센트, 노동당 지지자는 8.5퍼센트였다.


진보당은 여전히 노동운동에 큰 기반을 가지고 있다. 최근 화성 재보선에서도 진보당 홍성규 후보는 8퍼센트를 득표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RO 조직원이라고 공격받으면서도 말이다.

올해 투쟁을 해 왔고, 투쟁을 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노조, 건설노조, 철도노조 등에도 진보당은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런데도 우리가 진보정치 재구축 과정에서 진보당과는 선을 긋고 있는 움직임을 따라가야 하는가?


이런 내 주장을 또 진보당 재입당하자는 것 아니냐고 왜곡하지는 말아야 한다. 행동강령을 중심으로 진보진영 공동의 투쟁과 선거 대응을 촉구하는 입장은 유지돼야 한다. 진보의 분열과 우경화를 촉진하는 행태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계속돼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구체적 사안에 따라 적절한 연대 전술을 펴면서 진보의 단결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부정 선거 규탄과 촛불운동 국면


이것은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의 정세를 어떻게 분석하고, 무엇을 정세의 핵심 고리로 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쟁점과 주장을 강조하며 노동운동에 개입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박근혜 출범 초기에는 장관·내각 인선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권의 부패, 모순, 공약 먹튀 등에 대한 정치 폭로가 중요했다. 대선 결과에 대한 낙담과 잇따른 노동자 자살 속에서 사람들의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말이다.


4월에는 미국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긴장을 부추기는 것에 대한 폭로와 반대가 중요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를 최첨단 무기의 전시장으로 만들며 선제공격 연습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운운한 박근혜가 긴장에 부채질만 하고 있음도 공격해야 했다.


국정원 선거부정 문제가 불거지며 촛불운동이 시작된 후에는 여기에 개입하며 정치 폭로와 주장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쟁점과 운동은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을 뒤흔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쟁점과 운동이 커질수록 우파는 분열하고, 반면 노동운동은 자신감을 얻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는 박근혜 정권 출범 초기에 우리가 분석·전망했던 바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강성 정권의 정치적 위세가 현저히 약화된 것을 보고 노동계급 대중의 자신감이 올라 결국 큰 투쟁이 분출하는 그림[의 가능성이 크다.] 물론 특정한 경제적 투쟁이 정치적 투쟁으로 급성장하는 시나리오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의 개혁주의적 영향력을 아래로부터 돌파할 만한 현장 노동자들의 자신감은 당장은 충분치 않을 것 같다.”


사실 국정원 게이트 자체가 지배계급과 우파 내부의 균열을 보여 줬다. 권력의 보루인 검찰이 국정원과 대립하며 정권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파 결집 과정의 무리수가 낳은 파열음이었다.

이는 곧 2008년 이후 최대 규모의 촛불시위를 촉발했다. 621일에 5백여 명이 모였던 촛불시위는 72725천여 명 규모로 커졌고, 810일에는 5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매 주말마다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대학가 등으로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박근혜 지지율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세제개편안 발표는 하락 추세를 더 가파르게 했다. 우리 예측보다도 더 빠르게 박근혜 정권이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촛불운동에 적극 개입하며 운동의 확대·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실제 우리는 그렇게 했고, 이 운동을 제한하려는 NGO·개혁주의 지도자들도 강하게 비판했다. 매 집회 때마다 참가해서 리플릿을 배포하고 신문을 판매했다.


그런데 운영위원회의 다수는 이 운동의 발전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이미 대선이 끝나고 한참 지난 상황에서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규모도 2008년 촛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봤다. 운동의 구성인자도 젊은 청년보다는 친노 성향의 중년층이 많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개입 수준과 방향에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운동 초기에 내가 구상해서 우리가 만들었던 팻말 구호들은 박근혜 OUT, 국정원 해체, 몸통은 박근혜등이었다. 나는 2008년 촛불이나 한미FTA 반대 촛불 때처럼 이런 구호를 손팻말로도 배포하자는 의견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도, 운동의 성격을 급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 봤다.


런데 이런 구호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정원 해체는 공상적 구호이고, 박근혜가 몸통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단체는 당시 공동전선 회의에서도 박근혜 사과를 요구로 제안했다. 집회 초기부터 일부에서 박근혜 하야국정원 해체구호가 나오고 있었고, 민주당 일부에서도 박근혜 몸통론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촛불운동에 대한 논의는 우리 단체의 일꾼회의나 운영위 회의에서도 갈수록 후순위이거나 비중이 작은 안건이 됐다. 나중에 일부 운영위원들은 당시에 박근혜가 위기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박근혜가 위기라는 나의 주장은 과장이었고 일종의 의기양양주의라는 것이었다. ‘지배계급이 분열하거나 국가기구의 일부가 마비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위기인가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검찰총장이 정권에 반기를 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것이 지배계급의 분열과 국가기구의 일부 마비가 아니면 무엇인가. 무엇보다 박근혜 집권의 정통성이 의심되고 있었다. 지배계급 분열은 그 후에도 복지부 장관이자 친박 측근인 진영의 항명·사퇴 파동으로 나타났다. 채동욱 찍어내기와 윤석열 항명 사태도 그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결국 박근혜는 위기가 아니었던 게 아니라 위기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예정된 과정도 아니었다. 박근혜는 선거부정 문제를 덮고 촛불이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주력했다. 온갖 물타기와 물귀신 작전이 있었다.

NLL 포기 논란과 대화록 공개가 있었다. 촛불에 기름을 부을 수 있던 세제개편안은 즉각 철회됐고, 철도 민영화 일정은 뒤로 미뤄졌다. 채동욱 찍어내기는 선거부정 문제를 덮기 위한 공작이었다.


가장 강력한 물타기 카드는 김기춘이 기획했을 내란음모마녀사냥이었다. 이 사건과 함께 공개된 녹취록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국면은 전환됐다. 코너로 몰리던 국정원은 사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어서 전교조 법외노조화 통보도 강행했다.

 

  박근혜의 국면전환용 물타기 전략

 

박근혜의 전략은 분명했다. 진보의 분열과 위기를 이용한 종북 몰이로 반박근혜 세력을 위축시키려는 거였다. 우파를 결집해서 위기를 벗어나고 다가오는 선거를 대비하려는 거였다. 무엇보다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한 길 닦기를 하고자 했다. 물론 더 큰 배경에는 한국 자본주의와 국가가 처한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가 있었다.


지리멸렬한 민주당은 박근혜의 전략이 관철되는 데 최상의 조력자 노릇을 했다. 민주당은 찬물을 끼얹고 뒤통수를 치면서 촛불이 사그라질 짓만 했다.

NGO·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문제도 지적해야 한다. 이들은 민주당을 추수하고 쟁점 확대를 한사코 거부하면서 촛불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다. 내란음모 사건 이후에는 철저하게 두 사안을 분리시키며 운동의 김을 빼버렸다.


정의당은 처음부터 촛불에 소극적이었고, 진보당은 촛불운동 건설에 적극적이었지만, NGO·개혁주의 지도자들을 추수하며 제대로 비판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촛불은 이제 작아져서 힘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신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답해야 한다.촛불이 좀 더 커지고 파장이 더 지속됐다면 이후 이어질 각종 투쟁에도 더 효과적인 디딤돌이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선 선거부정 의혹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교조 조합원들은 규약시정명령을 거부하며 박근혜에게 한방 먹였다. 우리 단체와 전교조 조합원인 회원들은 자랑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내란음모 사건의 약발도 약간씩 떨어질 즈음, 박근혜는 내친 김에 헌정 사상 초유의 폭거라는 진보당 해산청구까지 치달았다.

내란음모 사건에서 진보진영의 사분오열을 보며 약한 고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태 발전이었다. 단지 진보당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전체를 분열·위축시키려는 공격이 명백했다.


법무부는 이미 진보당 해산 청구를 위한 TF를 만들면서 정당뿐 아니라 반국가·이적 단체 등 위헌 단체 문제까지 함께 연구해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팀이라고 규정했다. 실제 진보당 해산 청구에 이어서 새누리당은 종북을 빌미로 진보적 시민사회단체까지 해산하는 법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진보당 해산 청구와 함께 정당 활동 금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그 직후에는 공무원노조 서버가 검찰에 강제 침탈당했다. 며칠 후에는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인터넷 매체인 자주민보에 대한 폐간 심의를 법원에 청구했다.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 관련자들에 대한 압수수색과 소환조사, 구속이 며칠에 한 번씩 벌어졌다.


강원도에서는 경찰청 보안수사대가 교찾사 소속의 전교조 활동가와 현장파 경향 민주노총 활동가까지 종북으로 몰아 공안사건을 조작하려다 발각됐다. 임승수 씨의 수업을 듣던 경희대 학생이 그를 수상하다고 국정원에 신고한 것, 진보개혁 인사의 강연이 연달아 불허된 것도 이 분위기 속에 벌어진 일이다. 정말이지 진보당 다음에는 우리 차례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이었다.


박근혜는 지난해부터 계속된 진보진영의 분열과 갈등, 반목을 이용하려 했다. 진보당을 공격해도 다른 진보진영이 방관하도록 유도하고, 그것이 분열의 골을 더 깊게 하면서 진보진영 전체를 사기 저하·위축시킬 것이라고 본 것이다.

노동운동 속에 두려움과 자괴감, 무기력이 퍼지도록 만들고, 급진적 주장을 할 때 스스로 눈치 보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진보당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애써 못 본 척했고, 진보당과 거리 두기를 하려 했다.


예컨대 그나마 진보당 방어 입장이라는 노동당은 마녀사냥이 한참인 상황에서 <한겨레> 신문 1면 하단 통광고를 냈다. “종북에 묶인 시대착오적 진보도, 국정원도 우리를 절망스럽게만 합니다.” 그리고 낡은 진보를 넘어선 새로운 진보를 표방했다.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는 “[녹취록을 보면] 흡사 사이비 종교의 집회나 다단계 회사 행사를 연상시킨다며 이석기 의원 등과 선을 그었다.


조심스럽게 방어에 나서는 사람들마저도 약속이나 한 듯이 꼭 나는 이석기 의원에 비판적이지만, 나는 진보당이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래서 종북 공격은 우파의 꽃놀이패가 됐다.

어느 운동이나 집단이든 종북이고 진보당과 관련있다고 하면 분열·위축 효과가 나타났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에서 벌어진 일은 상징적이다. 밀양 투쟁에 진보당이 연대하자 조중동은 진보당 의원들이 와서 구덩이를 파고 자살을 권유했다며 마녀사냥했다.


이제 진보당은 오면 반갑기보다는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존재가 됐다. 이상규 의원은 “[국정원 선거 개입] 대책위 분들도 진보당이 많이 와주는 건 좋은데 당 깃발은 내리고 오면 안 될까라고 말한다. [오더라도] ‘티는 내지 말아 달라고 한다고 토로했다.

국정원 내란음모 정치공작 공안탄압 규탄 대책위한 관계자도 이렇게 말한다


같이 모여 공동 대응해야 할 사안에서도 서로 따로 대응하거나 함께 모인다 하더라도 분란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집회에 통합진보당이 결합하는 걸 경기를 일으키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통합진보당측에 깃발 같은 거 너무 많이 들고 나오지 말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이다.]”


국정원 내란음모 정치공작 공안탄압 규탄 대책위에는 여전히 주요 시민사회단체가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름을 올린 단체들도 방어 행동에는 소극적이다. 이 대책위가 방어 집회를 열어도 참가자는 거의 진보당 당원들뿐이다. 이것은 평소 진보당의 행태가 낳은 업보라거나, 진보당과 다른 단체들의 정견의 차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공안 탄압과 진보의 분열·위축

 

그 점에서 우리 단체의 대응에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우리 단체는 4월에 한반도 긴장 국면이나, 78월의 촛불운동 국면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내면서도 좀 더 진보당과 연대를 모색할 여지가 있었다. 진보당은 반제국주의와 반전 평화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촛불운동을 기층에서 확대하려는 데서도 그랬다. 반면 다른 좌파들은 분명 이런 문제에 열의가 적어 보였다.


물론 반제국주의나 촛불운동에서 진보당과 우리의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북한에 대한 태도, 민족주의 문제, 인민전선 전략 문제, 촛불운동에서 쟁점 확대의 필요성 등. 그런 차이점은 날카롭게 비판하고 토론하면서도 공통점을 중심으로 행동은 함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점은 적극 고민돼지 않았다.


촛불운동에서 진보당이 뒤늦게 쟁점 확대에 동의하고 나섰을 때도, 우리의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 때 우리는 진보당이 쟁점 확대를 말하면서, 결국 민주당과의 야권연대(계급연합)로 나아가려 할 것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했다. 진보당의 인민전선 전략은 경계해야 하지만, 이런 논리면 진보당이 무슨 변화를 보여도 우리가 협력할 여지는 별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당시는 마녀사냥의 광풍이 몰아치던 상황이었다. 물론 마녀사냥 국면에서 우리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것에 반대했다. 우리는 진보당 방어 대책위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책위가 주관하는 집회에 회원들을 동원한 경우는 드물다.


특히 내가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진보당 해산 청구 국면에서 우리 단체가 보인 태도였다. 일단 우리 단체는 이것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지 않았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속에 이런 문제에 소홀한 단위 노조조차 성명을 내던 상황인데 말이다.


그 직후 나온 신문에서 진보당 해산청구와 일련의 공안 탄압 공세는 헤드라인은 고사하고 뒤로 멀찍이 밀렸다. 반면 이 국면에서 우리 신문의 헤드라인과 신문의 강조점은 시간제 일자리, 공공요금 인상과 공공부문 구조조정, 퇴직금 누진제 폐지 등에 맞춰졌다.

내가 이에 대한 이견을 제기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반론은 이 문제가 중요하고 사람들의 관심도 많다는 것이었다. 나도 물론 이것들이 중요한 문제들이라고 본다. 사람들의 관심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밀양 문제도, 학비 파업도, 쌍용차 문제도 다 중요한 문제이고 사람들의 관심도 많다. 그러나 정치와 정치 신문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다. 필요한 것은 중요한 문제들의 나열이 아니라 정세의 핵심 고리를 잡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1월 첫째 주의 구체적 국면에서 정세의 핵심 고리가 시간제 일자리와 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진보당 해산과 잇따른 공안 탄압 속에 노동운동이 제대로 단결해서 대응하지 못하며 위축되는 게 문제 아니었는가.


당시 민주노총도 이 문제를 부각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특히 삼성전자서비스 최종범 조합원 자결,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등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는 시기에 올해 들어 최대 규모의 대중적 집회를 통하여 박근혜 정권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고자 함.”


따라서 일부 사람들처럼 나에 대해 시도 때도 없이 진보당 방어와 공안 탄압 문제를 제기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11월 첫째 주의 구체적 시기와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했는가를 제기하는 것이다.

당시 내 주장이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며 위기감을 부추기는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촛불의 성장과 박근혜 위기 국면 때는 내 주장이 너무 낙관적이고 의기양양주의라고 비판 받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내 입장은 구체적이고 일관된 것이다. 나는 박근혜는 강력하지만은 않고 온갖 모순을 품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때 이른 위기에 빠졌었고 앞으로도 위기는 반복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박근혜의 위기가 자동으로 우리 편의 기회가 될 수는 없다. 노동운동도 위기와 분열을 쉽게 극복하지 못해 왔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위기와 분열에서 충분히 헤어나지 못하다면, 박근혜는 얼마든지 다시 우파를 결집하며 자신의 의제를 추진할 수 있다. 이명박이 온갖 위기와 악재에도 불구하고 정권 재연장까지 성공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운동이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토니 클리프도 영국 대처 정권에 대해 평가하면서 비슷한 지적을 한 바 있다. 클리프는 대처가 이데올로기 전투에서 승리했는가?”라고 묻고는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취약점과 모순 때문에 대처는 거듭거듭 궁지에 몰렸지만 그때마다 [당시 노동당 지도자] 키녹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클리프는 1984년 광부 파업의 패배마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며 노조 관료들과 노동당의 비겁함, 배신을 비판한다.


따라서 나는 공안 탄압에 노동운동이 단결해서 대처하는 게 중요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피한 세력을 강력 비판했던 것이다.

 

  무게중심과 약한 고리

 

내 주장에 박근혜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노동운동인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것도 번지수가 틀린 것이었다. 이런 반박은 두 가지를 놓치고 있다.


첫째, 이 주장은 시간제 일자리, 공공부문 구조조정 등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것만이 노동운동인 것처럼 가정하는 듯하다. 왜 부정선거 문제를 제기하고 공안 탄압에 맞서는 것은 노동운동이 아니라고 가정하는가? 오히려 노동운동만이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이것에 맞설 수 있고 또 이것을 막아낼 힘이 있다.


둘째, 공안 탄압에 맞서는 투쟁과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투쟁을 분리시켜서 생각하고 있

. 과연 공안 탄압 속에 노동운동이 분열·반목하는 것이, 주요 활동가들이 위축·마비되는 것이 다른 투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노동운동이 정권·자본의 공격에 단결해서 투쟁하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 진보당,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탄압은 바로 이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학비노조 명예조합원이고, 학비노조 위원장과 철도노조 위원장이 진보당 당원인 상황이었다. 정권이 한길자주노동자회(철도) 사건, 새시대교육운동(전교조) 사건 등을 조작해 낸 이유가 뭐겠는가.


적의 약점을 파고들고, 적이 집중해서 추진하는 공격을 잘 막아내야 받아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또 잘 받아칠 수 있는 법이다. 전교조를 보자. 전교조 조합원들은 통쾌하게도 9명의 해고자와 거리를 두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방어해냈다. 박근혜야말로 불법과 부정을 저지른 법외이고 대통령 아님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면서 단결과 투쟁의 분위기가 고조됐고, 강력한 지지 속에 반격할 기회가 생겼다. 결국 법원은 이런 압력 속에 전교조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공안 탄압에 제대로 단결해서 맞서지 않으면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투쟁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유럽에서 인종주의에 맞서는 투쟁이 긴축에 맞서는 투쟁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민주노총의 곳곳에 포진해 있는 진보당 당원과 활동가들이 위축·마비돼 있고, 다른 경향의 활동가들과 반목하고 있는 것이 투쟁에 도움이 되겠는가. 반면 박근혜의 부정선거 문제가 더 밝혀지고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운동은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술은 해당 시기의 정세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적의 무게중심은 무엇인지, 우리 편의 약한 고리는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그것을 두들겨야 한다.

레닌도 전략과 전술은 계급관계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뒤에 결정하는것이며,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새로운 정치 사건들에 비추어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당면한 시기에 가장 중요하고, 대체로 고리를 쥐는 사람이 사슬 전체를 쥐게 하는 고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클라우제비츠도 비슷한 점을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양측을 지배하는 관계를 계속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에서 특정한 무게중심, 힘과 운동의 중심이 형성되는 데 이것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래서 적의 이러한 무게중심을 겨냥해 집중 타격을 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단체가 올해 구체적 정세와 그 변화를 분석하면서 핵심 고리를 잡아내고, 투쟁을 연결시키며 적절한 전술 변화를 추구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올해 우리 단체는 노동운동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고, 지금이 경제 위기 상황이므로 주로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서는 투쟁에 주목하자고 본 것 같다. 우리 단체가 노동조합 운동에 두고 있는 기반이 아직 충분치 않고, 그간 조직 노동자 회원에 대한 정치적 지도가 부족했다는 점도 이런 강조점을 두는 데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우리 단체는 올해 초부터 주로 철도 민영화 쟁점과 투쟁을 건설하는 데 베팅을 했다. 이런 방향에 함께 투신해 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것이 대체로는 옳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단체 지도부와 회원들은 정말 이 방향에 뛰어들어서 최선을 다해 헌신적으로 운동을 건설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지들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보여 준 열의와 기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예측대로 연말에 철도 파업이 벌어졌고, 이 파업은 박근혜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세의 핵심 고리가 됐다.


일찍부터 이 문제에 뛰어들어서, 꾸준히 선전과 선동을 해 왔고 기층에서 공동전선 건설에 기여해 온 우리 단체는 이런 성과에 매우 중요한 몫을 했다고 자부할 자격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속된 밀착 개입을 통해 철도 파업의 구체적 국면마다 세부적인 상황과 현장 정서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 전술을 제시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번 개입 과정은 회원들의 결속력과 자신감이 높아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직 철도 파업이 끝나지 않은 지금도, 우리 단체는 헌신적으로 이 투쟁에 연대하며 구체적이고 시의적절한 주장과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노력과 헌신은 분명한 성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투쟁의 상호작용

 

그런데 단지 연말의 철도 파업 국면만이 아니라 올해 전체를 돌아보면서 평가하자면 이 과정에서 나는 일부 과도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첫째는 구체적 정세와 국면 변화에 따른 전술적 유연성이 다소 부족했다. 앞서 봤듯이 올해 정세는 몇 차례나 요동쳤고 그때마다 정세의 주요 고리도 변화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측했던 투쟁에 대한 준비와 개입은 꾸준히 유지하면서도 그런 변화에 따라 전력 배치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단체는 일찍부터 인력과 자원을 주로 철도 민영화 저지 투쟁 쪽으로 배치했고, 일꾼회의나 운영위 회의에서도 갈수록 철도민영화나 노동조합 운동 관련 쟁점들이 주되게 보고·논의됐다.


물론 이렇게 끈질기게 준비했기에 연말 철도 파업 국면에서 우리가 효과적인 개입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것도 대체로 사실이다. 그러나 철도 파업 준비라는 것을 단지 철도 민영화 쟁점과 파업 건설로만 좁혀서 볼 수는 없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에 맞선 더 커다란 투쟁의 일부로서 철도 파업을 봐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올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제기된 각종 쟁점과 운동의 성과들이 자양분이 돼서 지금의 철도 파업으로 이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투쟁의 상호작용을 강조했다.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정치 행동의 물결이 고양된 뒤에는 언제나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즉 부정선거 규탄 촛불 운동, 전교조 법외노조화 저지 운동, 공안탄압 저지 운동 등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그 성과와 한계가 지금의 철도 파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철도파업이 단지 민영화만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 온 불만과 분노가 여기저기서 표출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은 안녕들 하십니까열풍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정세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문제들에 적극 뛰어들어 운동을 최대치까지 발전시키고 성과를 남기는 것이 철도 파업에 대한 진정한 준비이기도 한 것이다. 부정선거 규탄 촛불운동이 더 강력하게 박근혜의 정통성 위기를 제기하고, 공안탄압 저지 운동이 더 단결된 힘으로 박근혜의 공세를 막아낼 때 철도파업도 더 유리한 지반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둘째로는 철도 파업이 핵심 고리가 된 상황에서 우리의 개입도 돌아 볼 점이 있다. 먼저 우리는 이 투쟁이 조직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그래서 이런 강점을 극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전면파업과 대체인력 투입 저지로 물류에 타격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민주노총의 연대파업을 제기한 것도 옳았다. 이것을 단지 철도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 놔두지 않고 민주노총 차원의 전국적 투쟁으로 만들 때 진정으로 정치 투쟁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철도 파업을 이끄는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이런 과제를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물류를 봉쇄해서 국가경제를 마비시키길 부담스러워 한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강경 탄압으로 노조 조직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노조 상층 지도자들은 자기제한적 전술을 택하고 민주당, 친민주당 시민단체들의 중재 구실에 헛된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철도 파업은 막상 철도 운송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크게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전면파업, 대체인력 저지, 연대파업 같은 전술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그것이 왜 더 효과적인지를 말하는 것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서 노조 상층 지도자들이 이런 전술을 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래로부터 압력을 키워야 한다.


이 압력이란 결국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확신이다. , 전면파업을 했을 때 필공 조합원들이 모두 주저없이 동참할 것이라는 믿음, 민주노총이 연대파업으로 자신들을 엄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 결코 쌍용차같은 끔찍한 상황(해고, 손배, 신용불량자 전락, 죽음의 행진)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지금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과 관련있다. 철도 파업이 왜 단지 철도만이 아니라 더 커다란 투쟁의 일부이고 여기서부터 어깨걸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이해 말이다. ‘장성택 처형하는 저 흉측한 북한 때문에 불안한데 파업이나 하는 종북세력이 문제라는 논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말이다. 이것은 현장 노동자들 속에서 이런 정치적 주장을 선전선동하며 투쟁을 건설할 조직네트워크의 필요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


존 몰리뉴도 이 점을 지적한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할 능력은 그들의 지적 이해력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들의 자신감과 조직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자들에게는 추상적인 주장뿐 아니라 계산의 문제(우리가 여기 X사에 저항하면 Y사를 비롯한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도 우리와 함께 싸우려 할 것인가를 따져보는)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파업의 힘을 극대화할 구체적 전술을 설득력있게 반복적으로 주장할뿐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주장을 더 적극 결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민영화에 맞서는 투쟁을 대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철도 파업이 촉발시킨 안녕들 하십니까열풍이 거꾸로 철도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이는 상호작용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기도 했다. 우리는 항상 특정 부문 노동자의 투쟁을 전체 계급투쟁의 시야에서 조망했다. 2008년 촛불 때는 급진화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가 그들과 대화하고 조직하려 했다. 2009년에는 노무현 사망 정국의 촛불운동과 쌍용차 파업을 연결시켜서 투쟁을 더 고양시키려 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상황 자체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박창신 신부, 장하나 의원 등의 용기있는 행동은 노동자들을 고무했다. 진보당원들이 굳건히 저항하고 내란음모 사건의 조작 사실이 드러나며 종북몰이도 약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철도 파업 집회는 자연스럽게 부정선거 규탄 촛불 집회와 연결됐다. ‘안녕열풍 속에 급진화하는 젊은이들은 국정원 선거개입, 종북몰이, 밀양 송전탑, 삼성전자서비스 등 온갖 쟁점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철도 파업 기간에 나온 신문, 리플릿, 팻말, 구호 등에서 이런 내용을 좀 더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박창신 신부와 장하나 의원에 부끄럽지 않게 민주노총이 박근혜 퇴진을 내걸고 더 큰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안녕열풍 속에 급진화하는 새로운 세대와 노동자 투쟁의 연대를 조직하는 데도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회복되고는 있지만 아직 충분치 않기 때문에 더 고려해야 할 점들이다. 노동운동의 자신감 회복은 일면적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이미 2008년 촛불항쟁 이후부터 노동운동의 자신감 회복을 말해 왔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노동운동의 자신감은 회복될 때도, 가라앉을 때도 있었다.


어떤 요소들은 자신감 회복을, 어떤 요소들은 사기 저하를 부추겼다. 경제 위기의 심화나 지배계급의 공세 등 객관적 조건도 영향을 미쳤고, 노동운동의 대응 같은 주관적 요인도 매우 중요했다.


물론 노동운동의 자신감 회복은 이명박 말기에 더 빨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박근혜 등장과 공안 탄압 속에 자신감 회복은 다소 더뎌졌다. 전교조 투표 결과나 현대중공업 노조 선거 결과는 기대를 갖게 하지만,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상대적 우파 지도부의 등장은 우려도 갖게 한다.

결국, 현재 노동운동은 강성 우파 정부에 맞서서 얼마든지 단결해서 싸우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수준이라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개혁주의 지도부나 노조 관료들의 통제를 제쳐 버리고 나아갈 자신감 수준은 더더욱 아니다.


노동운동의 자신감 회복 수준과 속도는 앞으로 벌어질 정치·경제·이데올로기 투쟁들이 어떻게 판가름 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개혁주의 지도자, 소심한 노조 관료, 초좌파 들은 노동운동의 분열을 조장하고, 패배를 자초하며,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내놓기 쉽다. 올해 진주의료원 투쟁과 촛불운동, 마녀사냥 국면 등에서 봤듯이 말이다.


노동운동의 단결을 고무하고 승리를 앞당기며 자신감을 높일 수 있는 주장과 전술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혁명가들이다. 특히 지금 철도 파업에서 촉발된 운동의 고양은 박근혜에 맞서는 더 큰 투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고 있다. 당장 이 투쟁을 더욱 급진적이고 강력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철도 파업으로 시작된 이 새로운 국면에 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과 평가는 나중의 과제로 미뤄둘 수밖에 없다. 지금은 투쟁에 대해 쓰는 것보다 투쟁에 뛰어드는 게 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결론을 대신해서, 내 문제제기에 대한 반응 중에서 특히 진보당 관련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러냐는 반응에 대해 내 생각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했듯이 이 문제는 결코 철 지난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란음모 사건과 정당해산 청구 문제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문제다. 또 나는 우리 단체가 돌아보기를 철저하게 하고 거기서 교훈과 과제를 끌어내는 것이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나는 90년대 중반부터 18년 가까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국제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해 왔다. 나를 이런 활동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이 끔찍한 체제가 낳은 부조리, 불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적개심이었다.


이런 나에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사회주의 조직은 이 체제에 맞서 싸우고 벗어날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과 대안을 제시했다. 나는 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억압, 착취, 모순에 맞서는 활동 속에서 희망과 해방감을 느꼈다.


인간이 멸시 받고 보잘것없이 취급받고 버려지는 모든 상황에 저항하라는 마르크스의 경구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 없는 의심과 비판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구는 항상 나를 자극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진보당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해 온 이런 가치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 박영재 씨가 목숨까지 버리며 억울하다고 외쳤을 때 나는 그의 항변을 들어보려고 했는가? 곳곳에서 억울하게 욕을 먹을 때마다 송곳으로 심장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진보당 당원의 말을 듣고서도 한 귀로 흘리지 않았던가? 가족, 친척들이 너도 진보당 당원이고 정신 나간 이석기와 북한을 지지하냐고 할 때마다 나는 아니다. 벌써 탈당했다고 손사래부터 치지 않았던가?


나의 기존 분석과 입장을 위협하는 진실이 드러나도 애써 못 본척하지 않았던가? 나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있는가? 나는 거짓과 불의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기존에 해 오던 활동과 주장의 연속성과 안전성을 깨트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우선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 지금의 내 위치를 흔들지 않고 싶어하고 있었다. 굳이 다른 목소리를 내서 선후배, 동료들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나의 청춘과 삶을 투신하게 만들었던 가치들을 고수할 것이다. 이를 위해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내 오류를 돌아보고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을 벌일 것이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http://anotherworld.kr/164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