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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세상읽기 – 우크라이나/ 한반도/ 페루/ 마약/ 조지 오웰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1. 1.

전지윤

우크라이나 휴전의 조건과 푸틴의 거짓 선전이 먹히는 이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전쟁은 분명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으로 구성된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간접적 대결의 측면이 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지정학적 이익의 계산 속에서 이 전쟁에 끼어들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전쟁의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성격은 강대국 러시아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와 그것에 대한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민중은 최악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계속되는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주요 도시마다 전력, 수도, 난방 공급이 끊기고 있다. 영하 15~20까지 떨어지는 한 겨울에 전기, 수도, 중앙난방까지 끊긴 상황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누구나 조금만 상상해 봐도 그 고통을 알 것이다.

푸틴과 러시아군은 이런 폭격과 최악의 고통이 우크라이나 민중을 무릎꿇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겠지만, 그 효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침략당한 동부지역의 영토를 양보하고라도 하루 빨리 휴전을 하자는 입장에 대한 우크라이나 민중의 반대 여론이 압도적일뿐 아니라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 영토를 양보하고 휴전하자는 주장은 곧 러시아의 폭력에 항복하자는 뜻이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사회주의자 데니스 필라쉬Denys pilash우크라이나가 항복한다면, 단순히 영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 강간 및 온갖 폭력이 지속되는 러시아의 점령 하에 남겨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지금 침략자인 러시아가 아니라 피참략자인 우크라이나에게 무조건적 휴전을 권하면서 평화를 말하는 것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력으로 빼앗긴 영토를 포기하라는 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남북 베트남을 분할한 상황에서 민족해방전선에게 무조건적인 휴전을 말하는 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얼마 전 우크라이나가 드론으로 몇 차례 러시아 본토의 군사기지를 공격한 것만 비난한 사람들도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다. 지금도 매일같이 벌어지는 우크라이나 본토에 대한 러시아의 폭격과 그것이 낳는 파괴와 살상은 외면해 오다가, 러시아가 받은 공격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러시아 본토의 군사기지는 바로 우크라이나로 날라와서 기반시설을 파괴하고 민간인을 살상하는 러시아 폭격기들이 이륙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가 그 곳을 타격하고 싶어 한 이유는 설명이 가능하다. 결국 여기서 우크라이나만 비난하는 것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지만, 그 반대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밖에 안 된다.

물론 우크라이나가 비록 한두번이라도 러시아 본토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런 흐름이 더 강화, 확대되면서 만약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넘어서 장거리 미사일과 전투기까지 제공하며 직접 참전하기 시작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면적 국제전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우익 민족주의자들이나 이번 기회에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하자는 미국의 전쟁광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 자결권을 지지하는 반전, 반제국주의적 좌파들도 이 선을 넘어서는 것까지 지지하긴 어렵다.

가장 좋은 것은 국제적 반전여론과 운동의 힘으로 러시아의 침략과 전쟁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최선은 러시아 국내에서 반전여론과 운동이 푸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너무나 명백한 참상에도 불구하고 왜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거짓 선전을 믿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유럽의 대부분 스탈린주의적 좌파들마저도 지금의 러시아는 소련 사회주의의 계승자가 아니라 노동권도 보장하지 않는 독점 자본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라크 전쟁 때도 미국 시민들 대다수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독재자 후세인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해서 이라크를 민주화하고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자는 미국 정부의 거짓 선전을 오래 동안 믿었다.

지금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윤석열 정권의 부패하고 폭력적인 노동귀족들에게서 하층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개혁’, 특수부 정치검찰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검수완박 저지라는 거짓 선전을 믿고 있는 것하고도 비슷하다. 그러나 돈과 힘을 가진 이들의 프레임이 사람들의 눈과 진실을 가리는 것은, 어디서든 일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무인기, 더탐사 구속영장, 신현영 의원 조리돌림

요즘 저녁 뉴스를 보다보면 정말 기가 막히고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이 계속 들 수밖에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복지, 의료, 문화, 외교 등 곳곳에서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오기 때문이다. 정권과 주류언론들은 민주노총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고 전장연도 심각한 공격을 당하고 있고 여가부는 해체될 위기다. 건강보험 보장성은 삭감되고 국민연금도 개악될 가능성이 갈수록 커진다. 공공부문 인력 감축으로 지난 정부에서 힘겨운 투쟁으로 가까스로 자회사 정규직화라도 얻어냈던 노동자들은 해고되게 생겼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커녕 존재하던 지역 인권조례들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요며칠간 특히 더 기가 막히고 대부분의 언론이 다른 목소리는 잘 소개하지도 않아서 들리지도 않는 이슈 3가지가 있다.

* 북한 무인기 문제로 지난 3일간 엄청 시끄러웠다. 먼저 북한 정권이 이런 군사적 긴장고조를 유도한 것은 분명 유감스럽고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대응을 보자니 이런 코미디도 없다. 조잡한 저속 무인기의 출현에 초음속 전투기와 아파치 무장헬기까지 20대를 출동시키더니, 거기서 무인기에 대고 경고방송을 했다고 한다.

무인기이면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음성 인식 인공지능 로보트가 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경고 방송인가? 더구나 둘째날은 북한 무인기가 나타났다고 난리를 치며 또 전투기와 무장헬기가 출동하고 주민들에게 재난문자까지 발송했는데, 알고보니 새떼였다고 한다. 하마터면 새떼에게 발포를 할뻔한 것이다. 셋째날도 또 초음속 전투기가 출동했는데 알고보니 풍선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헛웃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확전을 각오하고 대응하라는 윤석열의 지시가 있었다는 소식이다. 이에 따라 우리 군도 무인기를 북한으로 보냈고 <조선일보>다음에는 평양 김정은 집무실까지 보내자고 설치고 있다. 윤석열은 어제는 한수 더 떠서 '원점 타격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무인기 공방이 상호간의 비례적 군사대응 속에 전면적 전쟁으로 발전해도 감수하자는 말이다.

또다시 전쟁도 불사하자면서 전쟁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들만 쏟아지고 있다.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인지가 전쟁에 대한 최고의 전략이라는 것을 아무도 떠올리지 않는 것 같다. 왜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5년간은 북한이 무인기를 보내지 않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는다. 최근 한미일의 첨단 스텔스 정찰기들이 계속 시험비행을 하며 북한 지역을 정찰한 결과가 이런 상황을 낳은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 윤석열이 국무회의에서 어떤 고통이 따르는지 보여줘라고 말한 이후에 <더탐사> 사무실과 기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이 무려 10차례 넘게 계속되더니 어제는 구속영장까지 발부됐다고 한다. 물론 더탐사의 성향과 취재와 보도 내용에 대해서 서로 다른 평가와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특히 청담동 게이트 취재와 보도에 대해서 여러 논란과 이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과 법무장관에 대해서 그런 의혹 제기를 했다고 해서 이 작은 언론사를 상대로 이렇게 계속 압수수색, 소환조사, 구속영장까지 나아갈 일인가?

언론사와 기자가 공인과 정치인들을 상대로 사무실이나 집에 찾아가거나 동선을 쫓아가는 것은 사실 탐사 취재 방식 중에 하나다. <뉴스타파>, <PD수첩>, <시사직격>, <그것이 알고싶다> 등을 오래 봐 온 사람은 그런 방식이 너무 흔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방식이 좀 과하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탐사 취재를 즐겨보다가도,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이더라도, 나같으면 기분이 어떨까 싶고 저건 좀 심하다가는 거부감이 든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이런 식으로 언론사와 기자들을 최고 권력자와 국가기구가 무지막지하게 탄압하는 것을 보고도 거의 어떤 다른 언론사도 문제제기하지 않고 못본척 넘어가는 상황은 정말 적응하기 어렵다.

무관심과 외면만이 아니라 가끔 더탐사는 진보 가세연이라고 비웃으면서 오히려 정권의 탄압에 명분을 실어주는 것 같은 태도를 보게 된다. 그러나 더탐사가 아무리 좀 과한 면이 있더라도, 가세연처럼 상대 진영 정치인의 가족과 자녀까지 멋대로 직장과 병원까지 찾아가서 괴롭히고, 그런 괴롭힘 때문에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도 집 앞에까지 찾아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고 이런 적은 없다. 더구나 그런 짓을 한 것 때문에 가세연이나 <조선일보>등이 압수수색과 소환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나 언론은 정권의 탄압으로 입이 막히고 사라져도 모른 척하면 되는 것인가? 안그래도 마음에 안들었는데 꼴 좋다고 볼 일인가? 요즘 조선일보 등은 서울의 어떤 식당이 '중국의 비밀경찰서'라는 보도를 계속 내보내며 혐중선동에 이용하고 있는데 별다른 교차 검증과 충분한 사실 확인도 없이 그러고 있다. 하지만 <더탐사>의 청담동 게이트 보도에 대해서 어떻게 교차검증과 충분한 사실확인도 없이 섣불리 보도할 수 있냐, 언론과 기자로서 자격도 없다고 흥분하던 그 많던 이들이 여기서는 조용할 뿐이다.

* <조선일보>의 아니면 말고 식의 충분한 검증과 사실 확인없는 카더라식 몰아가기와 조리돌림이 빛나는 또 하나의 이슈는 신현영 의원과 닥터카 문제이다. 이 문제는 처음에는 아무 이슈가 돼지 않았고, 오히려 정부가 실종돼 있던 이태원 참사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서 도우려고 한 의사 출신 현역 의원들 중에 하나로 신현영 의원을 칭찬하는 보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집요하게 신현영 의원이 이태원 참사 현장에 가게 된 과정에 대해서 파고들어 하나하나 꼬투리잡고 모든 것을 의혹으로 만들어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치 신현영 의원을 이태원 참사에서 비극을 막지 못하게 하고 희생자들의 구조를 방해한 핵심 주범인 것처럼 몰아가기 시작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 관련 소식과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저 밑의 구석에 작은 기사로만 취급하던 조선일보가 갑자기 이런 뉴스들을 헤드라인과 탑으로 뽑아서 일주일 넘게 보도하면서 바람을 잡아가니까, 그리고 국민의힘이 그것을 받아서 더 크게 소리치니까 금새 분위기는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 이것이 너무 심해서 엊그제 국정감사장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이태원 진상규명은 안하고 신현영 이야기만 물고 늘어지냐며 국민의힘에게 강력 항의했다. 이것 역시 민주당이나 신현영 의원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한 문제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참사가 이미 벌어진 이후에 도움을 주려고 현장에 간 야당 의원 한 명이 설사 크고 작은 실수를 했더라도 그것이 참사를 더 크게 만들거나 구조를 방해한다는 것은 너무 과장된 프레임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좌표를 찍고 조리를 돌리면 없던 사실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왜 대장동 수사하는 검사들을 좌표찍고 조리 돌리냐’, ‘왜 청담동 문제를 충분한 검증과 확인도 없이 섣불리 제기하냐고 흥분하던 공부 많이 한 전문인들은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다.

조지 오웰 - ‘정의와 자유의 이상을 되찾아야 한다

조지 오웰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점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정해진 틀을 넘어서서 사고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많은 책들 중에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0년대 영국 북부산업지역에서 목격한 것을 르포한 내용이 주된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주의적 이상이 직면한 어려움과 돌파구에 대한 고민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내용과 고민들은 오늘날의 좌파들에게도 비슷한 문제를 돌아보게 하고 영감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먼저 그는 사회주의가 왜 대중적 기반을 잃고 오히려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탓하기 보다는 왜 그런 거부감에 생기게 됐는지 진심으로 듣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회주의가 마땅히 지반을 얻어야 할 바로 그곳에서 지반을 잃는다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이것은 주로 선전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 우리에게 제시된 사회주의 형태에 무언가 본질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떼지어 사회주의를 옹호해야 마땅할 바로 그런 사람들을 쫓아 버리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가 왜 그 매력을 잃게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현재의 혐오감을 우둔함의 산물이라거나 퇴폐적인 동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이 그 혐오감을 제거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견해를 공감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보기에 주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대중적 운동이 아니라 소수의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다수의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해 위로부터 전달하는 무엇으로 그것을 보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수많은 자칭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이란 자신들이 동료로 삼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영악한 존재들이 ‘그들’이라는 낮은 계급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일련의 개혁을 뜻한다는 것이다.”

최근 엘리트의 책무를 말하면서 윤석열 지지자로 변신해 화물연대를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자한지원 씨의 <조선일보> 인터뷰를 보면서 다시 이런 식의 사회주의관의 위험성을 확인한다. 그래서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와 개념을 쓰면서 어려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무엇이 진정한 정통인지 다투는 식의 방식에 큰 거부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런던에서 독립노동당의 지부 모임에 참석했을 때 느꼈던 공포 분위기가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들의 특수 용어는 수학교재가 그런 것처럼 일반 언어에서 동떨어져 있다.... 공산주의와 로마 카톨릭간에 한가지 유사점은 오로지 ‘교육받은’ 자만이 완전한 정통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이 진정한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조금만 생각이 다르고 정통에서 어긋난다고 자신들이 판단한 누군가를 계속해서 찾아내고 이단이라고 낙인찍는 풍토에 대해서 한탄하며 냉소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가짐이 서로 다른 모든 좌파 인사들이 서로 다른 점을 털어버리고 함께 뭉치는 것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의 대부분은 이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저 마지못해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이런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을 때, 그보다 더 그들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사회주의 운동 전체는 그들에게 일종의 신나는 이단 사냥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결국 그는 사회주의의 핵심은 어렵고 복잡한 이론과 교리나, 조직들 간의 영역과 노선 다툼이 아니라 그 이상주의에 있다고 강조한다. 온갖 불평등, 부조리, 불의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정의롭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향해 고동치는 심장, 그것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조지 오웰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그 이상을 거의 완전히 잊었다. 그것은 공론가가 유식한 척하는 것, 당의 시시한 싸움, 그리고 설익은 ‘진보주의’의 켜 밑에 묻혀 왔다. 마치 오물의 산더미 밑에 감추어진 다이아몬드처럼 될 때까지 말이다.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그것을 다시 캐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이것이야 말로 세계 전역에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이다.”

● 윤석열 정권과 한반도 문득문득 식은땀이 흐른다

윤석열 정권 아래서 가장 걱정되는 것 중에 하나는 이 정권이 민생, 경제, 치안만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있어서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남북관계를 군사적 대결로만 몰고가는 이 정권의 태도와 북한의 무모한 군사적 대응이 상승작용하는 것을 지켜보자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어리석은 판단과 우발적 요인 등이 결합해 어마어마한 재앙을 부른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 속에서 같이 통곡하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세월호와 이태원에서 우리가 목격한 고통과 슬픔이 수천 수만배의 크기로 우리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이 위험을 우리가 직시할 수 없게 만드는 너무나 강력한 진영논리다. ‘내편이면 잘못도 감추고, ‘니편이면 잘못만 보려하고, ‘내편이 하면 옳지만 똑같은 행위를 니편이 하면 무조건 욕하는 진영논리가 이보다 더 강력할 수가 없다.

진영논리를 욕하면서 결국은 윤석열을 도와준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철저한 내로남불이 가장 강력한 분야기도 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그렇게 비판하던 지식인들도 남한 국가의 편에서 보고 말해야 한다는 압력을 가장 심하게 받는 분야기도 하다.

물론 분단, 전쟁, 냉전, 독재를 거쳐 온 이 나라에서 만들어진 금기와 편견을 벗어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솔직히 이 문제를 말할 때면 혹시라도 내가 북한편이라는 오해를 살까봐 항상 걱정하고 자기검열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굴욕적 심정으로 나는 북한 정권과 체제에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좌파라는 점을 항상 먼저 강조하고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남한에 사는 국민이라고 무조건 남한을 편들고 서로 다른 잣대로 남북한의 행동을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에서 어느 국가의 편이냐가 아니라 오로지 무엇이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느냐만 봐야 한다.(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나는 이 글에서 어떤 의도도 없이 북한과 구분하는 의미로 남한이라는 용어를 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도 어떤 진영논리나 양비론도 떠나서 러시아의 침공을 우선 비판하고 철군을 요구해야 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볼 때 지금의 한반도 긴장과 위기 상황이 지난 대선 때부터 시작해 윤석열 정권 집권 이후에 본격화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윤석열은 이미 대선 선거운동 때부터 남북화해와 대화를 추구해 온 문재인 정부를 북한의 주사이론을 배워서 마치 민주화 투사인 것처럼 지금까지 자기들끼리 끼리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온 그 집단들이라며 종북몰이를 했다.

그리고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선제공격을 운운했고, 당선 직후에는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호전적 발언들을 쏟아냈다. 윤석열의 이런 발언은 미국 바이든 정부의 북한에 대한 압박과 무시정책과 연결됐다. <워싱턴 포스트>남한이 미국에 반가운 쪽으로 돌아섰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윤석열이 북한에 대해 화해를 추구하고 미국과 거리를 두려는 전임 문재인의 노력을 끝내겠다고 약속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삼아 동북아에서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며 더 많은 군사력을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늘리는 것이 지금 미국의 구상이다. 그것의 핵심 목적은 자신의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을 포위하고 봉쇄하는 것에 있다. 미국의 이런 의도와 그것에 윤석열 정권이 충성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전 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더욱 더 분명해졌다.

그래서 요즘 미국과 남한의 고위당국자와 정부 입장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파괴”, “종말”, “최후이런 단어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단지 말이 아니다. 지난 4년여 동안 어느 정도 중단됐던 한미 군사훈련(전쟁연습)이 윤정권 집권 직후부터 다시 시작됐다. 더구나 훨씬 더 자주 더 길게 더 강하게 진행됐다. 지난 반 년 넘게 거의 두 달에 한번 꼴로 대규모 군사훈련이 벌어졌다.

게다가 한미만이 아니라 한미일 합동훈련으로 발전했고,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의 공군력,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의 해군력, 한국의 육군력이 결합돼서 육해공에서 북한을 압박하는 방식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이제 국방비 대폭증액과 적기지 반격 능력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선제공격과 한반도 군사개입이라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언론이 워낙 한쪽 편에 서서 북한의 위협만 강조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일 세 나라의 국방비 총액을 합하면 8500억 달러이고 북한은 16억 달러이다. 5백 배의 차이이다. 그 속에서 세 나라의 온갖 최첨단 무기들이 총출동해서 자신들을 겨냥한 군사훈련을 할 때 상대방이 느낄 위협을 생각해 보자. 서있는 곳에 따라 풍경은 달라지는 법이다.

특히 근래 '비질런트 스톰' 훈련에서는 핵항모와 F-35B, B-1B 핵폭격기를 앞세워 수백 대의 전투기가 동시 출격해 북한 전역에 대한 정밀타격 훈련을 했다. 이 규모와 위력은 한미일 동맹역사상 50년만에 최고 수준이었다. 얼마나 큰 위협으로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북한만이 아니라 그 등 뒤의 중국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북한이 어떤 군사적 압박에도 반전평화와 비무장의 이상주의적 원칙을 지키는 진보적 체제와 정권이라면 이런 앞에서도 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북한은 그런 사회가 아니다. 4년간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하고 제재 해제, 북미 수교, 종전협정 등을 기대했던 북한의 인내심은 계속 줄어들었다.

얼마 전 공개된 김정은-트럼프 친서를 보면 이미 2019년부터 북한은 자신들이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지 불만에 가득차서 묻고 있다. “각하께서 해주신 것이 무엇이며, 나는 우리가 만난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북한의 태도는 바이든 취임 이후와 문재인 정권 말기부터 바뀌고 있었다. 북한은 남한은 누리호 인공위성도 발사하고 세계 6위 국방대국으로 올라서면서 우리만 가만 있으라는 거냐이중적 태도를 격렬하게 비난했고, 지난해 북한 8차 당대회에서 자력갱생을 통한 경제건설과 고도화와 다종화를 통한 핵무력 건설이라는 병진노선을 선포했다.

이어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고 4년만에 한미일 군사훈련이 다시 시작되자 결국 북한도 시동을 걸고있던 미사일 발사 시험들을 본격화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몇 달전에 북한이 발표한 핵무기 법제화이다. 여기서 북한은 윤석열의 선제공격발언을 겨냥해 선제 핵무기 사용의 조건을 법적으로 공식화했다.

이제 북한의 미사일 시험과 무모한 군사적 대응은 계속되고 있고, 한미는 더 많은 첨단무기, 더 길고 강력한 군사훈련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악순환적 상승작용이다. 더구나 이것은 남북간의 소통 통로가 막혀있고, 어떠한 완충장치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북한으로 발사한 미사일이 남한 군사기지 유류창고로 떨어지거나 중간에 포탄이 폭발해버리는 사고도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한반도에서 한미일 초대형 군사훈련이 계속되는 상황이 주변에서 이것을 지켜보는 중국(과 러시아)의 어떤 해석과 반응을 낳을지도 걱정되는 일이다.

이 상황에서도 다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한미일 군사훈련의 중단을 말했던 윤미향 국회의원은 곧바로 국민의힘에게서 또 하나의 북한이라는 공격을 당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진보정당에서도 윤미향 의원의 옆에 서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눈치보지 않고 소신을 밝히며 다수와 다른 목소리를 낸다고 칭찬받던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종북몰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효과이다. 이 나라에서 이 문제는 오로지 남한 국가진영의 편에 설 것만이 강요되고 어떤 다른 목소리도 용납될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에 본 한국영화 중에서 오랜만에 계속 낄낄거리면서 본 것은 <육사오>였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휴전선의 남북한 병사들은 서로 공중 포격 발사 경쟁을 한다. ‘저쪽에서 50발을 쐈습니다라고 하면, ‘그럼 우리는 100발을 쏘라고 지시한다. 그 다음은 200발이다.

지난번에 북한 전투기 100대가 출동하자 한미는 250대의 전투기를 출동시켰다. 북한이 동해안에 미사일 1발을 쏘자, 윤석열 정권은 3발의 미사일로 맞대응했다. 영화에서 우리를 웃게 만든 우스꽝스러운 어리석은 행태가 현실에서는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이런 정권에게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 맡겨져 있다니 문득문득 식은땀이 흐른다.

(* 아래 그림을 보자. 이처럼 세계 국방비 지출과 무기수출 상위 10개국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3개 나라에게 압박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누구도 상상해 보지 않는다. ‘내편이 아니니까.)

마약과의 전쟁 자체는 필요하지만’ - 과연 그런가?

핼로윈 축제에 안전 관리를 위한 인력배치가 아니라 마약 단속을 위한 사복 경찰 배치에만 신경쓴 것이 10.29 이태원 참사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방향을 주도한 것이 윤석열 대통령과 권력2인자인 한동훈 법무장관이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 두 사람은 근래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하면서 검찰과 경찰을 독려하고 분위기를 몰아갔던 장본인들이다.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이렇게 깃발을 흔들면 국가 억압기구의 구성원들은 당연히 너도나도 그 방향으로 달려가며 충성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마약이 우리 사회 곳곳에 파고들고 있다며 공포심을 조장하고 미래세대를 지키기 위해서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며 나팔을 불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보면서 노태우 정부 때를 다룬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떠올렸을 것이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에 이것을 비판하는 많은 지적들이 있지만, 동시에 대부분 마약과의 전쟁은 물론 필요하고 해야하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의심하기 어려운 듯한 상식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도전할 필요가 있다.

과연 그런가? 이것이 과연 미래세대를 위한 전쟁인가? 마약을 무조건 단속, 수사, 처벌하는 게 대안인가? 사실 마약의 위험은 상당히 과장돼 있다는 지적들이 존재한다. 현실에서 훨씬 더 많은 이들의 건강을 해치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불법적인 마약보다는 합법적인 흡연, 음주, 알콜 중독 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범죄의 대부분은 마약과 상관없이 일어난다. 많은 역사와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범죄는 대개 빈곤, 실업, 소외, 사회구조적 부패 등과 연관이 있다. 마약 중독은 범죄의 원인이기 보다는 이런 원인들에서 나오는 또 다른 파생 결과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약을 불법화해서 강력하게 단속하고 처벌할수록, 그 역효과가 큰 경우가 많다. 불법으로 음성화되니까 웅덩이처럼 썩기 시작하는 것이다. 범죄조직이 개입해 위험을 감수한 돈벌이를 하고, 비싸게 몰래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뒷골목의 불결한 조건에서 투약하고, 드러내 놓고 예방과 치료도 하기 어렵고, 그것이 더 많은 중독자를 낳고..

반면 마약을 부분적으로 양성화해서 관리하고, 안전한 사용과 위험들을 교육하고, 남용과 중독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이 각 나라들에서 오히려 마약의 부작용을 감소시켰다는 여러 경험적 통계가 존재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치명적이지 않고 중독성이 약한 마약의 비범죄화를 권고하는 것은 그것 때문일 것이다.

강력한 마약 단속으로 유명한 미국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대마초 합법화와 치료와 예방으로 강조점 이동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얼마 전 방영한 <시사직격 마약청정국은 끝났다> 편은 앞부분에서 선정적인 접근이 좀 아쉬웠지만 후반부에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마약에 취해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유는 현실이 고통스럽고 희망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즉 많은 이들은 쾌락을 즐기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마약을 찾는다. 일자리와 복지를 늘리고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마약 단속만 강화하면 늘어나는 것은 마약 범죄 전과자일 뿐이기 쉽다.

그런데도 왜 많은 권위주의적 우파 정부들이 흔히 마약과의 전쟁에 매달릴까? 그것이 가져오는 다목적 효과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먼저 대중적 지지와 공감을 얻기 쉽다. ‘마약으로부터 미래세대를 구하고 지키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따라서 야당도 반대하기 어렵고, 초당적 지지와 입법이 가능해진다.

마약은 기성언론들도 좋아하는 주제다. 마약, 연예인, 재벌 3, 고위인사 자녀 ... 선정적 보도로 클릭수를 높이는 데 이만한 주제도 없다. 결국 이것은 검찰, 경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의 인력과 예산과 힘을 늘리는데 아주 좋은 명분이 된다. 또 방향을 이렇게 잡으면 어떻게 일자리와 복지와 삶의 질을 높일 것인가보다는 게으르고 마약이나 찾는 개인들을 탓하면 된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고 비도덕적이고 뭔가 불결한 행동이라는 뿌리깊은 혐오감정과 편견이 깔려 있다. 사실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뭔가 기분이 좋고 즐거운 상태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적 본능일뿐 아니라 전혀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대마초를 한 연예인들은 낙인찍히고, 감히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매장 당한다.

그래서 마약은 정치적으로도 악용하기 좋은 주제다. 대표적으로 80년대 미국 우파 정권은 마약과의 전쟁을 이용해서 권력을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적 개입을 정당화했다. 이것은 <대부><와이어>같은 뛰어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다뤄진 내용이다.

더구나 윤석열 정권에게는 이미 마약으로 연예인 때려잡던 박정희와 범죄와의 전쟁을 이용해 공안정국을 만들었던 노태우라는 모범이 있다. 이미 윤석열 신검부정권은 집권 초부터 문재인 종북몰이, 이재명 똥칠하기, 범죄/마약과의 전쟁을 3대 기조로 잡은 것으로 보였다. 나아가 대장동 범죄자 이재명, 불법폭력 집단 민주노총, 마약유통과 조직폭력을 싸잡아 비난하며 범죄와의 전쟁”(국민의힘 대표 권성동)을 말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무모한 돌진이 10.29 이태원 참사라는 비극의 씨앗이 돼버린 지금, 이것을 추진했던 이들은 스스로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칼을 뽑은 상황에서 퇴로는 없고 무조건 앞으로 계속 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을까. 내가 그동안 직간접으로 경험한 윤석열 정권과 비슷한 집단의 특징은 잘못을 인정하고 교정하는 게 아니라, 잘못을 덮기 위해 계속 새로운 잘못을 덧붙이고 키워 나간다는 것이었다.

페루 실패한 친위쿠데타인가 성공한 의회쿠데타인가

팬데믹 뒤에 고물가, 고유가, 고금리가 닥치면서 전세계적으로 곳곳에서 저항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철도와 공공부문 등에서 조직된 노동운동이 투쟁에 나서고 있다면, 조직 결성 자체가 어려운 중국과 이란 등에서는 자발적 대중의 투쟁이 예기치 않은 순간과 쟁점으로 터져나왔다.

지금 몽골에서도 고물가와 민생 위기 속에서 쌓이던 대중의 분노가 전직 대통령, 장관, 의원 등이 연루된 석탄 절도 스캔들로 폭발하고 있다. 영화 2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도 10년만에 최대 규모의 대중 투쟁이 분출하고 있다. 페루의 경우는 저항의 양상이 더 복잡하고 그 성격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카스티요 대통령이 의회 해산을 시도하다가 탄핵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지난 11월 중순 처음에는,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던 독재자가 의회에 의해 저지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후 이어지는 소식과 추가적 분석들을 볼 때는 아무래도 진실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먼저 지금 탄핵 찬성과 반대 진영에 어떤 세력들이 모여들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볼 때 탄핵에 반대하고 분노하며 카스티요의 복권을 요구하며 시위와 행진, 도로 봉쇄를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기층의 원주민, 노동자, 농민들이다. 이 과정에서 페루 군경의 폭력 진압으로 20여명의 시위 참가자가 사망한 상황이기도 하다.

반면에 탄핵을 주도하고 찬성한 쪽의 핵심에는 페루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후지모리 가문과 그 지지자들이 있다. 악명높은 부패한 반공주의 극우 독재자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계승하고 있는 이 세력은 지난 대선에서 가난한 농부이자, 원주민이자, 교원노조 노동조합원 출신의 좌파 카스티요에게 패배한 뒤부터 계속 권력 탈환 기회를 노려 왔다.

물론 이들은 오늘날 남미나 전세계의 대부분 우파가 그렇듯이 시대에 뒤떨어져서 더 큰 반발과 역효과를 낳을 수 있는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사법쿠데타와 의회쿠데타를 추진했다. 그래서 페루의 경찰과 검찰은 계속된 압수수색으로 대학시절 논문까지 뒤지며 카스티요를 파렴치한으로 만들어 갔다. 우리에게도 참 낯익은 풍경이다.

후지모리 지지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의회는 카스티요가 추진한 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 등을 사사건건 막아섰고, 카스티요가 임명한 장관들을 취임하자마자 계속 탄핵해버렸다. 그리고 카스티요에 대해서도 벌써 2번이나 탄핵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지만, 이번에 3번째 탄핵 시도에서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는 카스티요의 문제점과 오류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카스티요는 급진적 개혁을 약속하면서 집권했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한 소수파 대통령으로서 좌충우돌하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며 실망만 낳았다고 한다.

막판에 탄핵에 맞서서 민중에게 방어를 호소하기보다, 의회 해산을 선포하면서 오히려 친위쿠데타라는 비판을 자초하며 탄핵의 명분을 제공하는 악수를 둔 셈이 됐다. 어차피 의회 해산은 가능하지도 않고, 기득권 우파와 긴밀히 연결된 군대, 경찰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도 않을텐데 왜 그런 공허한 선동을 했는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카스티요가 탄핵당한 직후에 미국과 주요 서방 강대국들은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뒷마당이라고 여기는 남미에 계속 반미적 좌파 정부들이 들어서는 것이 불편하던 차에 반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근래 핑크타이드 시즌2’ 속에 들어선 남미의 많은 좌파 정부들은 카스티요의 편에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외적으로 브라질의 룰라 정부와 칠레의 보리치 정부는 탄핵을 인정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중도우파들과 손잡고 좌파적 색깔을 탈색해 온 룰라로서는 상당히 눈치를 보면서, 자신이 더 이상 급진적이고 위험한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근래 개헌투표에 실패하며 더욱 고립된 보리치 정부도 마찬가지다.

자신들도 최근 대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뒤집으려는 극우세력들의 공격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두 정부 모두 더욱 몸을 사리는 것이다. 이런 식의 타협이 과연 룰라와 보리치 정부의 권력 유지와 개혁 추진에 도움이 될지, 페루에서 반동적 흐름이 계속 될지, 남미의 핑크 타이드 시즌2’가 어떻게 발전할지 모두 지켜봐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다.

존 몰리뉴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나이가 들수록, 내가 많이 영향을 받고 도움도 얻었던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국내외에서 계속 들려오고 있다. 팬데믹의 영향도 있겠지만, 얼마 전 마이크 데이비스에 이어서 며칠 전에는 존 몰리뉴John Molyneux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존 몰리뉴의 책은 한국에도 꽤 번역돼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당>,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등도 기억이 나지만, 역시 가장 좋았던 것은 그의 에세이들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었던 <우리는 왜 월요일을 싫어할까>였다. 이처럼 사회주의에 대한 여러 쟁점과 논점들을 쉽고 재미있고 짧으면서도 명확하게 다룬 책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못 봤던 것 같다.

그래서 그동안 활동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하면서 아주 많이 그것을 모방하고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한국에 왔을 때 강연을 들은 적도 있고, 나아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 한 적도 있는데 영어를 못하니 사실 소통이 됐다고 보긴 어렵고 그냥 직접 만나 얼굴을 본 정도인 셈이다.

그런데 몰리뉴에 대해서 더 특별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나중에 내가 여러 고민과 갈림길에 놓이게 됐을 때, 몰리뉴도 자신이 속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내부에서 오래 전부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고 나서였다.

남성과 여성 노동계급은 똑같이 지배계급에게 억압받는 처지이고 둘 사이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는 기계적 선언만 반복되는 것에 맞서서 그는 그렇더라도 노동계급 남성도 여성 억압으로부터 일부 단기적 이익을 얻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고,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내부적 민주주의가 과연 건강한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당시에 그는 내부 회부에 기고한 글에서 높은 곳에서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지고 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이 조직 내의 모든 정치 토론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처럼 일상적으로 토론이 이뤄지는 조직이 어디있냐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조직 내부 상황에 대한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지도부가 어떤 것을 토론할지 이미 결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공허함을 지적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한참 비슷한 고민을 하고 판단을 내려야 했던 나에게 특히 큰 영감과 도움을 줬다. 하지만 그런 그도 2013년에 핵심 간부가 저지른 성폭력 문제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됐을 때 결국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지도부의 손을 들어주고 조직을 지키는 편에 섰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실망감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가해자들과 가까운 사람들로 구성된 기구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좌파에 대한 부르주아적 언론과 자본주의 국가의 탄압을 돕는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토론은 피해자의 사생활을 들추며 민주집중주의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공허한 강변으로 흐르고... 기득권 사회와 유명인사들의 성폭력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던 좌파가 스스로에게는 그 잣대를 적용하는데 실패하는 모습이 또 반복됐다.

말년에 몰리뉴는 중앙보다는 아일랜드 지역으로 가서 집필, 교육 등에 더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최근에 집중했던 것은 국제 생태사회주의자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정치적 재능과 경험을 통해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탈성장을 둘러싼 생태사회주의 내부 논쟁에서도 그가 적극적으로 주장과 글을 제출하며 활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의 글과 주장을 보면서 여전히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대부분 옳고 많은 것을 답해 놓았다는 태도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과연 그런지는 갈수록 의문이 커진다. 예컨대 트로츠키가 1941년에 쓴 글을 보면 자연을 대상화하면서 인간이 개조할 수 있다고 보는 경직되고 오만한 관점을 숨길 수 없다.

‘사회주의 사회의 인간은 기계를 통해 동물과 자연을 통솔할 것이다. 인간은 강의 흐름을 바꿀 것이고, 바다에 대한 규칙을 세울 것이다... 아마도 덤불과 숲, 호랑이는 남아 있을 것이지만, 사람이 그들에게 남아 있으라고 명령하는 곳에만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도 그에게서 많이 배우고 영감과 도움을 얻었다는 것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의 죽음에 슬프고 추모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내가 배우고 도움을 얻었지만, 견해차이가 커지고 그 오류와 잘못에 실망하게 된 다른 누구일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점과 잘못만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죽음을 애도조차 할 수 없다는 태도는 언제나 불합리할 것이다. 인간과 세상은 언제나 단순하지 않으므로.

(기사 등록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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