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블랑Eric Blanc
번역: 두견
몇 년 전에 사망한 저명한 좌파 이론가인 레오 파니치Leo Panitch의 작업을 기반으로 해서 사회민주주의의 역사, 장점, 단점, 한계, 모순 등을 다루며 재평가하는 글이다. 이를 바탕으로 근래 영국의 제레미 코빈이나 미국의 버니 샌더스가 보여 준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하며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활동가들이 지속해야 할 고민과 해결할 과제들도 짚어보고 있다. 좌파정치에 대한 중요한 논점들을 다루고 있는 이 글의 필자인 에릭 블랑은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SA) 소속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다. 역사사회학자로서 <혁명적 사회 민주주의: 러시아 제국의 노동계급 정치 1882-1917> 등 러시아 혁명과 레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해체하는 논문과 저작, 글을 써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나아가 적극적인 활동가로서 미국에서 교사파업에 연대하고 새로운 좌파적 정치대안을 건설하는 문제에도 매우 활발하게 개입하고 있다. 글이 상당히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서 싣는다. 이 글은 두 번째이다.
출처: https://muse.jhu.edu/article/839377/pdf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화를 방지하기
지난 10년 동안 파니치는 매우 약한 노동계급 조직화의 맥락에서 급진적인 선거 도전자들이 직면한 딜레마에 지적 에너지를 집중했다. 비록 계급 세력의 균형이 단기간에 경제의 지배적 고지를 장악하게 하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의 중심 과제”는 계급 형성 과정을 재점화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화”를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경험은 현재 상황의 가능성과 위험을 모두 보여준다. 2010년 이후 폭발적인 파업, 점령, 시위의 물결이 여론조사에서 시리자의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2015년 1월에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이 부과한 파괴적인 긴축을 중단하라는 대중적 명령으로 선출된 시리자는 그리스 노동자와 국제 좌파의 기대치를 극적으로 높였다.
그러나 그해 7월까지 당의 최고 지도자들은 그들이 뒤집기위해 선출된 것과 똑같은 정책을 확고히 하는 "세 번째 각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파니치는 동료 사상가인 샘 긴딘Sam Gindin 및 스티브 마허Steve Maher와 함께, 이것을 단순히 시리자 지도부의 배신으로 규정하는 것은 패배의 더 깊은 뿌리를 놓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적 원자화 이후, 당의 지도부와 급진적 비판가 모두 진보적인 정책을 위해 싸우고 국가를 민주화하기 위해 대중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방법을 찾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이미 당의 선거 승리 직전에 문제가 되었지만, 시리자가 집권하면서 특히 심각해졌다.
그에 따라 그리스의 대중 운동과 노동자 조직이 해체되어 있고 해외 세력과의 관계에서 정부가 현저히 약화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총리가 결국 트로이카에 무릎을 꿇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 주목하는 것이 당 지도부의 결정을 변호해 줄 수는 없었지만, 파니치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좌파 정부가 오늘날 자신의 의제를 실행하려면 대중적 노동자 운동에 의존해야 하고 대중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역량을 구축하여 국가를 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주의Bennism의 정치적 계승자인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2019년 선거에서 의기소침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시리자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는지 여부는 궁극적으로 시험대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파니치에 따르면, 노동계급 조직을 재건하고 사회민주주의화를 극복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기본적인 문제들은 영국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2015년에 급진파들이 노동당 최고 지도부를 차지한 이후에도 노동당의 의회부문, 지역의 간부들, 노동조합적 기반은 대부분 바뀌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주로 ‘모멘텀’Momentum(노동당 안팎의 코빈 지지자들로 구성된 외곽조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젊은 회원들의 유입은 놀랍도록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경험이 없고 뿌리가 없는 활동가들에게는 그 작업이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사회주의적 공약은 세대별, 지역별, 계층별로 매우 불균등했기 때문에 노동계급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는 조직화 작업이 필요했다.
코빈이 2019년 말에 패배한 여러 가지 겹치는 이유 중 특히 브렉시트Brexit에 대한 양극화만이 아니라 강력한 노동운동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다고 파니치는 강조했다.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는 계급 지향적이었지만 계급적 기반은 부족했다.
특히 북부의 탈산업화된 지역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패배와 강력한 노동당 또는 노동조합 구조의 실종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너무 체념하고 원자화되어서 코빈의 야심 찬 메시지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권자들의 문을 두드렸을 때 자원봉사자들은 노동당이 공약을 이행할 수 있겠는가라는 이해할 수 있는 회의론에 직면했다.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반란이 패배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몇 년의 짧은 캠페인만으로는 실행 가능한 대안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2019년 노동당의 패배는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당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 줬다. 코빈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노동운동의 약점과 온건한 노동당 의원들의 내부적 반대는 엄청나게 강력한 자본가 계급과 싸우면서 극복해야 할 어려운 장애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코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파니치가 1970년대와 1980년대보다 노동당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훨씬 더 지지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의 마지막 인터뷰 중 하나에서 파니치는 자신의 세대가 "기존 사회민주주의 정당 밖에서 대중적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노동당을 계급투쟁의 운송수단으로 만드는 것은 여전히 멀어 보이지만 “앞으로 어떤 다른 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판적 평가
파니치의 글은 계급의 형성, 국가의 민주화, 자본의 탈취에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정치적 토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연한 “규제된 자본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미화 - 버먼, 워렌 및 이에 상응하는 국제적 동조자들이 부활을 목표로 하는 접근 방식 - 에 맞서 그는 전후 협정의 본질적인 불안정성과 노동의 쇠퇴와 신자유주의의 부상에 기여한 사회민주당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 작년에 사망할 때까지 파니치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적 사회주의 정치를 구축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이 직면한 주요한 전략적 과제를 냉철하게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파니치가 표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비교조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정신에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그의 저작들에 있는 간극에 대한 논의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선견지명이었지만, 파니치가 사회민주주의의 긍정적인 기여를 거의 강조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는 이것이 정당화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은 좀 더 균형 잡힌 의견을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모순되고 다양한 성격과 씨름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가 직면한 전략적 딜레마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다.
파니치의 작업 중 많은 부분이 영국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는 설명은 사회민주당과 복지국가의 다양한 국가적 궤적을 항상 충분히 설명은 고사하고 구별하지도 못했다. 예를 들어, 영국 노동당과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정치는 어떤 면에서 근본적으로 유사하거나 구별되었는가? 계급 형성과 지속적인 탈상품화에서 후자의 더 큰 성공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까지 노조 조직률, 복지 제공률,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산업화된 세계 전역에 걸쳐서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에스핑 앤더슨Gøsta Esping-Andersen, 발테르 코르피Walter Korpi, 그레고리 뤼베르트Gregory Luebbert와 같은 급진적 학자들은 1930년대의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당이 농민들(그리고 이어서는 사무직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 주도의 동맹을 왜 어떻게 맺었는지, 그리고 노동계급의 단결을 강화하고 자본주의적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더 많은 전망을 열어준 보편주의적 "비개혁주의적" 개혁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가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는지 조사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켰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지배에 심각하게 도전할 만큼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나아갔지만, 1970년대 경제 위기가 경제 민주주의를 향한 그들의 열망을 당면한 의제로 삼았을 때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중 어느 누구도 궁극적으로 자본가 계급과의 결정적인 대결의 위험을 감수할 의향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북유럽 국가에서도 곧 자리를 잡았다.
결국 선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어떤 사회주의 정당도 자본주의와의 파열적 단절에 내기를 걸 만큼 충분히 급진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비개혁주의적 개혁을 쟁취한다는, 바늘을 실로 꿰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복지국가의 조직화된 힘과 정치적 지향의 변화는 수백만의 삶과 노동과 자본 사이의 힘의 균형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기후 변화의 위협이 계속 증가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그린뉴딜 정책을 쟁취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는 가운데, 좌파가 향후 수년간 통과하도록 돕는 정책의 상대적 견고성은 아마도 사회적 붕괴와 생존의 차이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사회민주주의적 변화에 대한 이러한 불충분한 탐구와 관련하여 파니치는 각각의 선거 체제가 노동계급 정당의 궤적과 긴장을 형성하는 방식을 거의 분석하지 않았다. 그가 수십 년 동안 국가의 민주화에 집중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선거 규칙과 선거 개혁에 대한 상대적인 관심 부족은 놀라운 일이다.
사회과학적 탐구와 활동가들의 경험은 비례대표제가 어떻게 광범위한 복지국가의 창출을 촉진하고 정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그들의 정치를 온건하게 할 동기를 감소시키는지 확인시켜 주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승자독식(단순다수: 최다득표자만 당선되는) 선거 제도가 사회민주주의자와 급진주의자를 한 세기 넘게 같은 정당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후자가 노동자에게 자신의 비전을 명확하고 일관되게 표현하며 그들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차단했다.
파니치는 종종 1980년대 초 그리스와 프랑스 좌파의 선거 승리를 급진적 강령을 가지고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증거로 지적했다. – 그러나 두 승리 모두 승자독식 선거제도가 없는 국가에서 발생했다. 미국에서 독립적인 노동당을 건설하는 것이 비례대표제의 획득을 통과할 필요성이 있는 것처럼, 영국에서 노동당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건설하자는 파니치의 오랜 요구를 성공적으로 이행하려면 선거제 개혁을 추진해야 했을 것이다.
파니치는 또한 사회민주주의가 계급 형성에 미치는 모순적인 영향을 경시했다. 국민적 통합에 대한 그들의 흔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은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조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보수당의 공격은 이들이 계급 정당이고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대중적 인식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파니치는 1971년 영국 노동당의 통합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서 최근 설문조사의 결론을 인정했다. “노동당은 노동계급 지지자들에게 압도적으로 노동계급의, 노동계급을 위한, 노동계급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을 지적했지만 파니치는 보다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노동계급 대표기관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거의 조사하지 않았다.
그들의 부인할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복지국가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과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정치적 기대를 자주 높였다. 이것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1970년대 스웨덴과 영국과 같은 나라들에서 급진화에서 볼 수 있듯이, 때때로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
복지국가의 탈상품화가 자본가들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키고 노동자들을 강화함으로써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를 구성했던 것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복지국가 개혁, 거시경제적 재정 정책, 그리고 몇몇 산업의 국유화가 사회주의로 가는 고속도로의 어떤 정거장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파니치의 주장에는 일면적인 요소가 있었다.
40년 간의 공공연한 역주행 이후, 특히 누더기가 된 미국 복지국가 아래 살고 있는 조직가들에게는 왜 사회민주주의의 기여를 당연시해서는 안 되는지가 점점 더 분명해졌다. 신자유주의적 현재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인식을 대중화하기 위해, 오카시오 코르테즈Ocasio-Cortez와 샌더스Sanders가 강력한 복지국가를 통해 생활수준을 향상시킨 사회민주주의의 기록을 긍정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정당하다.
레닌주의자들이 종종 가정했던 것처럼 사회민주주의는 단순히 지배자들이 아래로부터 양보를 하도록 강요당한 결과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일부 복지국가들이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보편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스웨덴은 1930년대 이후 유럽에서 파업률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였다.
복지국가 확대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40년 동안 당시 정부의 지배적인 정치적 색채 - 사회민주주의, 기독교민주주의, 또는 세속적 중도우파 - 는 1980년대 초에 주어진 국가가 어떤 복지국가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다. 포용성, 이전되는 소득의 구조, 제공하는 서비스의 유형과 양에서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변이를 심각하게 침식하고 가장 역동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진보도 가로막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들이 흔히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조합 밀도가 감소하고 고용 불안이 확산되었음에도 복지 국가는 전반적으로 해체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는 대중적 정책이 일단 시행되면 없애기 어렵다.
수십 년간의 공격과 긴축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제공되는 재화는 눈에 띄게 "들러붙어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실제로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복지 지출이 계속 증가했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신용이 있는 곳에서는 신용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 없이, 그리고 기회주의를 낳는 난해한 딜레마를 강조하지 않고, 새로운 세대의 급진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성공과 정치적 지형을 평가하기 위한 도식도 없고, 영원한 행동 지침도 없다는 유감스러운 사실을 완전히 흡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산업화된 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적이 없는 주된 이유는 사회주의자들에게 결의, 인내, 급진적 지도자 또는 훌륭한 계획들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하에서 좌파들이 직면한 본질적인 조직적, 선거적 딜레마와 결합된 고용주들의 힘이 사회주의 승리를 매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아래 살고 있다.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서는 시위와 파업을 통한 대규모 단절이 필요하지만 아직 충분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조직적인 힘을 극적으로 키워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보수화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노동조합과 정당을 건설하는 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급진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를 과도하게 조정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승리하고 변혁적인 개혁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이 있었다면 사회주의는 이미 오래 전에 수립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효과적인 급진적 정치들이 흥정, 실험, 내기를 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며, 여기서 가장 좋은 공식들도 대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증명된 이유다.
다시 말해, 기회주의는 의회라는 조건 하에서 대중적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하려는 조직자와 조직에 내재된 위험이다. 이러한 모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모순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 중 어느 것도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깃발을 사회민주주의의 깃발과 혼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두 경향은 공공부문, 노동조합주의 및 기후 정책을 강화하는 데 협력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급진주의자들이 그들의 구별되는 전략인 계급투쟁이나 뚜렷한 장기적 목표인 경제적 민주주의를 가치절하할 이유는 없다. 이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적 지배가 이 행성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자기 결정권, 복지, 민주주의적 요구를 필연적으로 훼손한다고 믿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단기적 사례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축적 체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급진주의는 긴축, 사유화, 환경 파괴를 역전시키기 위한 보다 실용적인 즉각적 전략이다.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산업화된 세계 전반에 걸친 전후 협정은 이전 수십 년간의 전투적 파업, 급진적 사회주의의 선거 운동, 그리고 반자본주의적 압박의 확실한 위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계급투쟁의 정치는 획득한 새로운 개혁을 시험할 수단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부여되도록 보장할뿐 아니라 경쟁보다는 연대의 구조를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데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여기서, 역사는 다시 교훈적이다: 권력을 얻은 좌파 정당들이 상류계급의 정치적 블록에 가장 의존하지 않는 나라들에서 얻은 이득이 가장 깊고, 가장 널리 분포되고,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이 동역학의 아이러니한 점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계급투쟁은 결국 기업, 금융 자본, 자본주의 국가들을 신자유주의적 궤도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힘의 균형을 충분히 변화시킴으로써 사회민주주의를 되살리는 공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강력한 녹색 복지국가를 위한 투쟁의 주도력은 온건파가 아니라 급진파에게 달려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중심적인 전략적 도전은 노동자들을 조직화하여 자본주의적 지배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열어주는 방식으로 변혁적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파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이 프로젝트는 장밋빛일 수가 없지만 앞으로 나아갈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기사 등록 202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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