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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혁신

젠더에 대한 고찰 2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3. 29.

신치아 아루짜Cinzia Arruzza

번역: 두견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구조적 관계에 대한 몇가지 대표적인 이론과 분석들을 깊이있게 검토하고 평가하면서 억압과 착취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연결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한 분석과 이론을 찾으려는 시도이며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다. 3.8 여성의 날이 있는 3월을 기념하며 이 글을 번역 소개한다. 이 글의 필자인 신치아 아루짜는 이탈리아 급진좌파 조직인 ‘시니스트라 크리티카’의 주요 멤버였고 현재 뉴욕의 ‘뉴스쿨 오브 소셜 리서치’에서 철학 조교수이자 페미니스트 및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적 재생산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연구와 저술을 해 왔고 저서로는 <99%를 위한 페미니즘>, <위험한 접촉: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혼과 이혼> 등이 있다. 글이 상당히 길어서 2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 글은 두 번째이다.

출처: https://viewpointmag.com/2014/09/02/remarks-on-gender/

 

1편에서 이어짐

III.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잘못인가?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독립적인 체제로서의 가부장제라는 개념이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가장 널리 퍼져 있다고 썼다.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현실을 반영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외형적 형태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실과 반대되는 환상적인 현상을 자본의 현실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외형'이란 자본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소외와 지배의 관계가 바로 그것의 논리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한다.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가 말했듯이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자본의 그늘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경제적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허위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경험의 방식, 즉 현실에 대한 우리 인식의 파편화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복잡한 담론이지만,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경험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상품의 물신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부분을 참조해야 한다. 우리의 인식은 단편적이고 젠더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자본과 다른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경험하고 인식하기 때문에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내에서 독립적인 체제라는 견해에 대한 부정은 필연적으로 거부와 의심에 직면하게 된다.

가족의 변화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역사적 차원과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가부장제가 독립적인 체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과 권력 관계는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이러한 현상에는 자체의 독립적이고 합당한 논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젠더 억압이 자본주의에서 비롯된다는 불합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옹호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구체적인 특성과 관련된 다른 주장이다. 자본주의가 이전의 생산 양식을 대체한 사회는 가족의 심오하고 급진적인 변화로 특징 지어진다. 가족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토지의 몰수, 또는 인구의 많은 부분을 생산 및 생활 수단(토지)에서 분리시킨 원시적 축적의 결과이고,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농민 가족의 붕괴를 유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도시화 과정을 가져왔다.

그 결과 가족은 더 이상 이전의 농업 사회에서 만연했던 특정한 가부장적 관계를 통해 일반적으로 조직되는 특정한 생산적 역할을 가진 생산의 통일성을 대표하지 않게 되었다. 이 과정은 자본주의 관계가 성립된 모든 국가에서 서로 다른 순간에 시작되었고 서로 다른 형태를 취했다. 가족과 생산의 장소가 분리되면서 생산과 재생산(생물학적, 세대적, 사회적 재생산의 의미에서)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요점이 있다. 비록 젠더적 지배의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그들은 자율적인 논리에 따라 독립적인 체제가 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왜냐하면 가족이 생산 단위에서 상품 생산과 시장 밖의 사적인 장소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지배관계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예를 들어, 이러한 변형 중 하나는 성적 지향, 구체화된 정체성, 젠더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과 관련이 있다(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성의 역사>에서 푸코의 작업,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저작, 또는 더 최근에는 케빈 플로이드Kevin Floyd와 로즈마리 헤네시Rosemary Hennessy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젠더적 억압이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취하는 형태가 이후에도 동일하게 유지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욱이, 젠더 억압이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사실이라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생각은 많은 "2의 물결" 페미니스트에 의해 강력하게 옹호되었지만 최근의 인류학 연구에 비추어 수정되어야 한다. 사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식민주의와 함께 젠더 억압이 도입된 다양한 무계급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 관계와 젠더 간의 권력 관계 사이의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미국의 노예 제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인종과 계급

그녀의 책 <여성, 인종, 그리고 계급>에서,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는 노예 노동의 특정한 형태뿐만 아니라, 가족의 파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 사이의 모든 친족 관계가 노예들 사이의 젠더화된 권력 관계를 실질적으로 전복시키는 방법을 강조한다. 이것은 여성 노예들이 여성으로서 특정한 형태의 억압을 겪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그들은 심한 고통을 겪었는데, 그러나 동료 노예가 아니라 백인 노예 소유자의 손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젠더 관계의 지속성과 분명함은 사회적 조건, 계급 관계,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와 복잡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 억압에 대한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관점은 이러한 정교함과 차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

가내 생산방식의 지속성

내가 위에서 썼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이전의 생산양식을 대체하고 가족과 가족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나라들에서는 젠더 간의 권력관계가 더 이상 독립적인 체체를 형성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변형되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주변부에 남아 있는 생산 구조를 가진 국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클로드 메이야수Claude Meillassoux는 프롤레타리아화(농민과 토지의 분리) 과정이 상당히 제한적으로 남아 있던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가내 생산 방식"이 지속되는 측면에 대해 기록했다.

그러나 가내 생산방식이 유지되는 곳에서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합으로 인한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천연자원 약탈, 세계시장 경제의 객관적인 압력 등의 영향은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는 사회적, 가족적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흔히 여성 착취와 젠더 폭력을 악화시킨다.

모순된 총체성

이제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 돌아가 보자. 가부장제가 독립적인 체제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테제에 대한 고전적인 반대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환원주의적이라는 것이다. , 권력관계의 환원 불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사회의 다원적 복잡성을 단순한 경제법칙으로 환원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 반대는 두 가지 조건 하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가 잉여가치 추출의 엄격한 경제적 과정으로만, 따라서 이 과정을 결정하는 경제적 규칙의 집합체로만 이해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권력 관계를 잉여가치 추출 과정의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진실은 이러한 유형의 환원주의가 마르크스 사상의 풍부함과 복잡성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며, 심지어 마르크주의 이론 전통의 상당 부분이 지닌 비범한 정교함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이 자본주의 사회가 무엇인지를 잉여가치 추출의 관점에서만 설명하려는 것은 심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함으로써 인체의 해부학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착취와 소외의 관계와 함께 끊임없이 움직이는 다방면적이고 모순적인 총체성이다. 비록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 가치가 실제 주제인 반면 자본가와 개인은 구조의 사절이나 담지자의 역할로 축소되는 과정 - 가치의 가치화에 대해 명백히 자동적인 성격을 부여했지만, 그것은 논리적 범주로서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분명해지는 것은 <자본> 3권이 되어서이다. 자본주의는 몰록(고대의 우상 Moloch), 숨겨진 신, 꼭두각시 또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관계가 경계선을 추적하고 다른 모든 형태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제약을 부과하는 사회적 관계의 살아있는 총체이다. 이 중에서 우리는 젠더, 성적 지향, 인종, 국적, 종교와 관련된 권력 관계도 발견할 수 있으며, 모두 자본 축적 및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종종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모순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자본주의는 여성 억압에 "무관심"한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의견은 젠더 억압을 자본주의에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전의 사회적 구성에 의해 생성된 젠더 불평등의 형태를 갈취하거나 이로부터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우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관계이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젠더 억압에 의존하지 않으며, 여성은 자본주의 하에서 다른 역사적 시대와 비교할 때 전례 없는 수준의 자유와 해방을 달성했다. 요컨대 자본주의와 여성해방 프로젝트 사이에는 적대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여러 학파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므로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엘렌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가 쓴 기사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녀의 기사 "자본주의와 인간 해방: 인종, 젠더,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우드는 자본주의와 그 이전의 생산양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정체성, 불평등 또는 경제적, 정치적, 법적 차별들과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 그 정반대이다. 잉여가치의 추출은 법적 또는 정치적 지위의 차이 없이 형식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젠더 불평등을 조장하는 경향이 없으며, 그러한 차이를 의문시하고 인종 및 젠더 정체성을 희석시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

내재적인 관계인가 또는 기회주의적 관계인가?

자본주의적 발전은 또한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조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회적 조건을 창출했다. 이것은 이전의 역사적 시대에는 전례가 없다. 생산적인 목적을 위한 노예제도가 보편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폐지론적 입장이 사실상 결여된 그리스-로마 문학을 다시 생각해보면 된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이전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기존의 차이를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착취당하는 계급의 더 유리한 부문과 덜 유리한 부문 사이에 계층 구조를 만들기 위해 젠더와 인종 차이가 사용된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그들의 본질, 즉 자본주의 경쟁 논리의 산물이라는 것을 가린 채 자연적 차이의 결과로서 전달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의식적인 계획이 아니라, 자본가 입장에서 젠더와 인종의 평등이 유리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일련의 관행과 정책의 수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젠더 억압을 도구화하지만 그것 없이도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계급 착취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드의 글의 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얻을 수 있거나 얻을 수 없는 경제외적 이득 및 혜택의 유형에 관한 일련의 기본적인 정치적 질문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의 출발점은 사회적 투쟁에 대한 관심이 경제적 영역에서 비경제적 문제(인종 및 젠더 해방, 평화, 환경 건강, 시민권)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문제가 있다. 내가 우드의 틀을 언급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글이 자본의 논리적 구조와 그것의 역사적 차원 사이의 날카로운 분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결국 이 동일한 수준들을 융합하게 되고, 따라서 불행하게도 우드의 글의 명제에 동의할 많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작업에서 흔한 고전적 혼란을 재생산한다.

이 점을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자본의 논리적 구조와 그것의 역사적 차원 사이의 이러한 구별을 받아들이자마자, 우리는 잉여가치의 추출이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지위의 차이를 전제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자유롭고 동등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들 사이의 관계의 틀 안에서 일어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추상화, 즉 논리적 구조의 수준에서만 가능하다. 구체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급격하게 변화한다. 이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겠다.

1. 사실로부터 시작하자: (다양한 형태로) 젠더적 억압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이 과정에서 기존의 불평등을 사용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훨씬 더 미묘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사회에서 젠더적 위계의 도입에 기여했다.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은 여성이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재산과 중세 전성기를 통해 유지할 수 있었던 직업으로부터 동등하게 중요한 몰수를 수반했다. 노동의 여성화와 비여성화 과정의 교대는 가족 관계의 지속적인 재구성에 기여하여 젠더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창출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젠더 정체성 구체화의 도래는 여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억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이성애 규범적 매트릭스의 강화에 기여했다.

다른 예를 들 수 있다. 이 체제가 이러한 해방 과정을 허용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만 여성들이 그때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공식적인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성이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실제로 노동계급 전체에 대해서도 정확히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만 하위 계층의 정치적 해방을 허용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고 이 계급이 중요한 민주적 승리를 달성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 없이도 쉽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다. 여성이 얻었거나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언급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 여성이 무언가를 얻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와 함께 사회적 조건이 대중적 사회 운동과 현대적 정치의 탄생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계급에게도 마찬가지이다.

2. 자본주의에 기능적인 것인지와 그것의 필수적인 결과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두 개념은 다르다. 높은 수준의 추상화에서 젠더 억압이 자본주의의 내적 작용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지속적으로 차이와 불평등을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추상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불평등이 반드시 젠더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순수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즉 본질적인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자본주의를 분석한다면 아마 우드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가 그 구체적인 기능의 결과로 반드시 젠더 억압의 다양한 형태를 끊임없는 재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3. 마지막으로 논리적 수준과 역사적 수준의 구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논리적 관점에서 가능한 것과 역사적 과정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고유한 역사를 지닌 구체적인 사회 구성체로 존재한다. 이미 말했듯이 이러한 사회 구성체는 젠더 억압이 지속적이고 만연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사고 실험으로 이러한 노동 분업의 위계가 다른 형태의 불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늙고 젊음, 뚱뚱한 이와 마른 체형, 인도 유럽어를 사용하는 사람 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또한 임신과 출산이 완전히 기계화되고 감정적 관계의 전 영역이 민간 서비스에 의해 상품화되고 관리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간단히 이 모든 것을 가정해 보자. 이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그럴듯한 비전인가? 젠더 억압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정신에 깊이 뿌리내린 다른 유형의 위계적 관계로 쉽게 대체될 수 있을까? 이러한 시나리오는 타당성이 의심스러워 보인다.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을 위하여

결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하에서 여성의 자유와 해방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한 매우 추상적인 분석의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의 수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여기서 우드의 실수뿐만 아니라 (주요한) 착취와 (부차적) 억압 사이의 위계 개념에 맹렬히 집착하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오류를 발견한다.

만약 우리가 이 질문의 정치적 측면을 제기하고 또한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개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사회적 재생산의 개념이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출발점 중 하나이다.

IV. 자본을 다시 생각하고, 젠더를 다시 생각하기

앞 절에서 나는 각각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율적인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서로 다른 유형의 억압과 지배를 제시하는 "분절된 사고"의 한계를 명확히 하려고 노력했다. 나아가, 나는 내가 "관계가 없는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의존해서 자본과 젠더 억압의 관계를 읽는 것을 비판했다. 이제는 "사회적 재생산"의 개념뿐만 아니라 "단일 이론"에 접근해야 할 때이다.

<자본>의 재개념화

이원론적 입장은 종종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오로지 경제적 범주를 통해서만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을 분석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권력 관계의 다양성이나 우리를 주체로 구성하는 담론적 실천과 같은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기에는 부적절할 것이다. 이것이 대안적 인식론적 접근법이 경제학의 영역 밖에 있는 원인을 더 잘 볼 수 있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특수성과 환원 불가능한 특성을 이해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이다.

이 입장은 광범위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에 걸쳐 공유된다. 그들 중 일부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순수한" 경제 법칙에 전념하는 일부와 다른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다루는 다른 유형의 비판적 분석 사이의 "결혼" 또는 절충적 결합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다른 한편, 다른 이론가들은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젠더 억압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분리하는 "언어학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용했다.

두 경우 모두 특정한 지배 및 소외 관계와 독립적인 "순수한 경제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가정이 있다. 비판적으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정이다. 지면상의 제약으로 나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제한할 것이다.

1. 착취의 관계는 언제나 지배와 소외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결코 진정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무엇보다도 살아 있고 생각하는 몸이며, 자신을 개조하는 특정 형태의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쓴 것처럼 생산 과정은 노동-자본의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노동자를 "생산"한다. 각 생산 과정은 항상 구체적이기 때문에, 즉 역사적, 지리적으로 결정되는 측면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각 생산 과정은 노동자 주체가 되어지는 유형을 부분적으로 구성하는 규율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상품의 소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케빈 플로이드Kevin Floyd가 성적 정체성의 형성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준 것처럼 상품 소비는 규율적 측면을 수반하며 성적 정체성의 구체화에 참여한다. 따라서 소비는 주체 형성 과정에 참여한다.

2. 마르크스에게서 생산과 재생산은 불가분의 통일체를 이룬다.

, 생산과 재생산은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고 고유한 특성을 지니지만 필연적으로 연결된 총체성의 구체적인 순간으로 결합된다. 여기서 재생산은 사회 전체의 재생산 과정 또는 알튀세르적Althusserian인 용어로 생산조건의 재생산으로 이해된다: 교육, 문화 산업, 교회, 경찰, 군대, 의료 시스템, 과학, 젠더 담론, 소비 습관 이 모든 측면은 특정 생산 관계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생산 조건의 재생산 없이는 사회 구성체가 단 1년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를 기계적이거나 결정론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총체로 이해하더라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적인" 총체로서 이해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이 총체성의 서로 다른 순간들(예술, 문화, 경제 구조 등) 사이, 또는 특정 순간과 전체로서의 총체성 사이에는 자동적이거나 직접적인 "반영"은 없다.

동시에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이러한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저속한 유물론이나 경제주의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며 마르크스는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저술 외에도 <자본> 자체가, 예를 들어 노동일에 대한 투쟁이나 원시적 축적에 관한 부분에서 이를 증명한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강압, 국가의 능동적 개입, 그리고 계급투쟁이 사실상 순전히 경제법칙이나 기계적 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착취 관계의 구성 요소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가 경제적 개념으로만 자본주의를 이해했다는 생각이 어떻게 지지될 수 없는지를 강조할 수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 환원주의적이거나 속류적인 유물론적 경향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경향이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경제법칙의 물신화에 의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활동이나 인간 관계의 형태가 아니라 정적인 사물이나 추상적인 구조로 인식된다.

자본주의의 순수한 경제 법칙과 다른 지배 체제 사이의 분리에 대한 대안적이고 반대되는 가정은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통일성을 직접적인 동일성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 관점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한 부분, 특히 재생산 노동이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므로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노동자주의 전통을 특징 짓는다.

다시 지면상의 제약으로 나는 그러한 관점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 사이의 차이를 모호하게 하고, 끊임없이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내에서 변형되는 다양한 지배관계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환원주의의 한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관찰로 스스로를 제한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특정한 권력관계가 노동시장 외부에 위치하면서 여전히 노동시장에 대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구체적 방식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양한 형태의 상품 소비를 통해 또는 임금 노동(또는 이에 상응하는 실업)이 개인 생활과 대인 관계에 부과하는 객관적 제약을 통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착취, 지배, 소외 관계의 명료하고 모순적인 총체성에 대한 비판으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사회적 재생산과 단일 이론

이러한 방법론적 설명에 비추어 우리는 이제 일반적으로 "단일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 내에서 "사회적 재생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용어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회 전체의 재생산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전통에서 사회적 재생산은 보다 정확한 것, 즉 일상적 또는 세대적 수준에서 삶의 유지 및 재생산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적 재생산은 인간의 생산에 필요한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 노동이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음식 준비, 청소년 교육, 노인과 병자 돌보기, 주택 문제와 섹슈얼리티 등에 대한 모든 문제들 말이다. 사회적 재생산의 개념은 이전에 가사노동이라고 불렸던 것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상당 부분이 초점을 맞추던 것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확대하는 이점이 있다. 사실 사회적 재생산은 그 개념 안에 가사노동만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일련의 사회적 관행과 노동 유형을 포함한다.

또한 사회적 재생산 노동이 항상 동일한 형태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가정의 벽을 넘어서 분석을 확장할 수 있다. 후자의 어떤 부분이 시장, 복지국가, 가족 관계에서 오는지는 특정한 역사적 동역학과 페미니스트적 투쟁에 의존하는 뒤따르는 쟁점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사회적 재생산의 개념은 우리가 가정이라는 장벽의 기동성과 투과성 성질을 더 정확하게 찾을 수 있게 해준다. , 한편으로는 가족 내의 가정생활과 상품화 현상, 노동분업의 젠더화, 다른 한편으로는 복지국가 정책 간의 관계이다.

사회적 재생산은 또한 이민 노동의 비용을 낮추고 노예와 같은 노동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 같은 억압적인 이주 정책에 의한 돌봄노동의 상품화와 그 "인종화" 사이의 관계와 같은 현상을 더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요점인데, 주어진 사회 구성체 내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기능은 사회의 생산과 재생산이 총체적으로 조직되는 방식, 즉 계급 관계와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러한 관계는 순전히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교차로 간주될 수 없다. 사회적 재생산의 렌즈를 통해 이러한 관계를 보면 이러한 이유로 투쟁이 수행하는 역할과 우발적 현상, 그리고 일반적인 관행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고 이러한 교차의 조직화 논리를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이 주체성의 형성, 따라서 권력의 관계 형성에도 결정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각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재생산, 사회 전체의 생산,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지배와 권력의 관계는 별개의 구조나 수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은 순전히 외적인 방식으로 교차하지 않으며 생산관계와 순전히 우발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권력과 지배의 다중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분절되고 모순된 통합체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프로세스를 자동적이거나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인간적 실천의 차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는 기계나 자동 장치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따라서 우연, 사고 및 갈등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우연성과 갈등은 우리의 실천이나 살아있는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세계에서의 우리의 위치, 그리고 우리의 존재 조건과의 관계를 생산하고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에 객관적인 제약을 가하는 논리, 즉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단일 이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젠더 또는 성적 지향에 기반한 권력 관계를 현대 자본주의라는 접합되고 복잡하며 모순적인 총체성의 구체적인 순간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구체적인 순간들은 확실히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적절하고 구체적인 이론적 도구(정신 분석에서 문학 이론에 이르기까지)를 사용하여 분석해야 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는 더 큰 총체성 및 사회적 재생산 과정과 내적 관계를 유지한다.

"단일 이론"의 본질적인 논제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서 젠더 억압과 인종 억압은 그들만의 특별한 원인을 가진 두 개의 자율적 시스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전의 사회적 삶의 형태들을 해체한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그것을, 인간 정신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거나 성별 "계급" 사이의 적대감 등과 관련된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 계속 존재하는 과거 사회 구성체의 단순한 잔재로 보는 것은,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젠더와 성적 억압의 심리적 측면이나 억압자와 억압자 사이의 모순을 과소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관계, 우리의 행동, 그리고 우리의 관행에 영향을 미치고, 재생산하고, 영향을 미치는 계급 관계에 의해 제공되는 사회적 조건과 틀을 확인하는 문제이다.

이 틀은 우리의 살아있는 경험과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한계와 제약을 부과하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렇게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적 흐름이 이 과정을 분석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다양한 형태의 젠더 억압에서 자본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은 우리의 아이디어를 공동으로 채택하고 우리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의 힘을 증명한다.

(기사 등록 202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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