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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박노자] 미국, 공세에서 수세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23. 11. 3.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저는 국제 시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약 10대 초반일 때, 198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억되는 것은, 대체로 3-4년에 약 한 번 꼴로 미국이 어떤 국가를 침공했다는 것이죠. 명분들은 다양했는데, 실질적인 사건 내용은 대개 엇비슷했습니다. 모 국가가 미국 영향권을 벗어나려 했거나 미국의 대외 정책에 "걸림돌"이 되었을 때에는 곧바로 침공 대상이 되곤 했었죠.

예컨대 1983년에 작은 섬나라인 그레나다가 "쿠바와 소련의 영향을 받는다"는 죄목 (?)으로 미국의 침공을 받았는가 하면, 3년 후인 1986년에 리비아의 트리폴리 등지가 미국 미사일 공격을 받았습니다. 리비아의 "테러리즘 지원"이 명분이었지만, 실제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전체적으로 "말 듣지 않는" 것은 공격의 원인이었습니다.

1989-90년에는 파나마의 노리예가 장군이 "불복종"을 하자 파나마도 침공의 대상이 되고, 3년후인 1993년에 미국은 소말리아의 내전에 개입해 거기에서 안정적인 친미 정권의 수립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소말리아는 그 다음에 미국 정책결정권자의 관심에서 다소 벗어났지만, 이라크 군의 기지 등에 대한 미-영국 공군의 폭격은 이미 1998년부터 시작됐습니다. , 2003년의 이라크에 대한 전면 침공 이전부터는 미군은 1991년 걸프 전쟁 이후 이라크에 "완패"를 안기는 것을 하나의 "남은 과제"로 인식한 것입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 대통령마다 그 임기 내에 적어도 1-2 중간 규모 이상의 침공을 수행하는 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클린턴은 1999년 유고 공습 등을 통해서 결국 세르비아에 압박을 가해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밀로세비치 정권을 붕괴시켜 놓았습니다. 부시는 아예 전임자보다 규모를 훨씬 더 크게 잡아 주요 산유국이자 "남은 과제"로 돼 있었던 이라크와 중앙아시아의 요충지인 아프간을 타깃으로 삼아 초대형의 두 침공을 벌인 것입니다.

한데 이라크에서의 안정적 괴뢰 정권 수립의 프로젝트가 실패돼 2011년에 미군의 대부분은 이라크를 빠져 나갔습니다. 아프간에서는 계속 주둔했지만, 극 국토의 대부분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 것이고, 게다가 2008년의 세계 공황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의 허점을 노출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라크에서의 패배와 공황 이후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은 대외 침공의 규모를 대폭 줄였습니다. 예컨대 2011년에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회원국들이 리비아를 공급해 "지나치게 자율적이었던"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그 과정에서는 미국의 물리적 참여가 그리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공습을 유럽 국가들이 수행한 겁니다. , 대체로 그 때부터는 대외 침공을 벌이는 데에 있어서 미국의 열기가 가시적으로 식기 시작했습니다.

트럼프는 미국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앙팡 테리블"로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 대외 공세에서 대외 수세로의 전환은 오바마 시절부터 태동되고 트럼프 임기 때에 본격화됐습니다. 하이텍을 포함한 제조업 분야에서 이미 중국에 "추월" 당하기 시작한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무역 전쟁을 벌이고 태평양지역에서의 그 하위 파트너인 일본이나 한국, 필리핀 등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시도했지만, 이는 대외 팽창이라기보다는 중국이라는 부상하는 경쟁국가로부터 제2차 대전 승전 이후의 "전리품" 격인 일본과 남한 등 미국의 기존 영향권의 "사수" 작전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 영향권 보호에 중국의 하위 파트너인 북한에 대한 포섭 작전이 도움될 수 있을까, 싶어서 트럼프 행정부는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해 북한은 광의의 중국 영향권 안에 남았습니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 푸틴"에 대해 비판 한 마디 못한 트럼프를 비꼬곤 했지만, 사실 기존 미국 영향권 사수 전략이라면 푸틴에 대한 온건 포섭 전략은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맞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두 개 주요 경쟁 국가인 중-러 중에서는 러시아야말로 비교적인 경제적 약자로서 "약한 고리"에 해당된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없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러시아를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더 벌어지게 했다면 "중국 견제'라는 미 수세적 정책의 최종적인 목표에 잘 부합됐을 겁니다. 한데 서로 요구 조건이 맞지 않아 북한에 이어 러시아에 대한 포섭의 시도도 물거품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중도 자유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습니다.

바이든 시대의 미국은 "패권 쇠락"의 증후를 계속 보였습니다. 가장 가시적인 것은 혼란 그 자체인 아프간으로부터의 후퇴 작전이었습니다. 그 작전에 이어 아프간의 전국토를 다시 통제하게 된 탈리반은 대체로 중-러의 영향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덜 가시적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와 사우디 사이의 동반자 관계 수립, 중국에 의한 사우디-이란 중재, 그리고 석유 감산 정책을 통한 사우디-러시아의 "고유가 유지를 위한 공동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이상으로 사우디는 중동이라는 핵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미국의 핵심적 하위 파트너이었는데, 이제 이 파트너마저도 경쟁 열강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우디의 완전한 미국 영향권 탈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물밑에서 사우디-이스라엘의 수교 등을 교섭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데 그 교섭이 열매를 맺기 이전에는 아마도 이란에 의해 사주된 듯한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2023107)이 벌어져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는 가시권에서 사라졌습니다. 감산 조치 철회, 즉 유가 인하를 위한 사우디에 대한 미국 압력도 당분간 통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약함을 보이기 시작해 수세적 자세를 취한 미 제국은, 경쟁 제국으로부터 거의 연전연패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미국 패권의 2008년 이후의 "하향 곡선"을 배경으로 해서 봤을 때에는, 과연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무엇이었을까요? 미국 패권의 약화 국면을 이용해 구 소련의 일부의 영토를 "회복" (?)하고, 2014년 이후 그 안보에 대한 한 미국에 기대려고 했던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그 영토를 강탈함으로서 미국의 "보호"란 미 패권 약화 시대에 더이상 예전과 같은 효력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군사 작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미국이 수세에 처했을 때에는 러시아가 그 만큼 공세를 취해도 된다고 판단하여 미 제국의 영향권 편입을 희망했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입니다. 이 침공은 만약 러시아의 완패, 즉 크림 반도를 포함해 러시아가 2014년 이후 강탈해온 모든 우크라이나 영토의 탈환으로 끝났다면 아마도 이 사태가 미국 패권의 "회복"에 도움이 됐을 터인데, 이와 같은 결말은 지금으로서 그다지 개연성이 없습니다.

지금으로서 개연성이 가장 높은 결말은, 적어도 일부의 강탈한 영토를 러시아가 자국 국토에 편입시켜 "국토 확창"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많은 "중간 지대" 주변부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보호"가 가치 절하돼 미국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 경쟁 열강들의 지속적인 대미 공세에 탄력이 붙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재분할을 의미하는 이 새로운 공세들은 또 새로운 전쟁, 그리고 또 새로운 엄청난 희생 등을 낳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격적인 "전쟁의 시대"에 돌입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적어도 한반도가 그런 전쟁의 전장이 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게 우리들의 급선무입니다.

(기사 등록 202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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