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트럼프'라는 현상은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 상당히 의아하게 보일 것입니다. 세계의 금융, 군사, 학술 초강대국에 돌연히 코로나를 "쿵푸 바이러스"라고 지칭하고, 이민자들이 "반려 동물들을 잡아 먹는다"는 등 계속해서 수준 이하의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전과자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예 납득이 잘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트럼프와 트럼프주의는 여태까지 미국 역사와 문화의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환언하면, 트럼프주의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만큼 트럼프 출현의 "토양"은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마련돼 있다는 것이죠.
어느 자본주의 사회나 다 그런 측면이 있지만, 특히 미국은 일종의 거꾸러 뒤집힌 피라미드 사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상층부에 있는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차지하는가 하면, 하층부는 거의 부의 분배에서 배제돼 있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최상위 1%의 가구는 전국 부의 30%를 차지하는가 하면, 밑의 50%가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2% 정도입니다.
이 정도로 상상을 초월한 불평등의 패턴을 보이는 사회에서는, 상층이 하층을 동원할 수 있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기제 등이 없다면 그 안정성에 바로 금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극소수의 상층이 다수의 하층을 동원시킬 수 있는 체제 유지를 위한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과연 무엇인가요? 원주민 학살과 노예 무역 등으로 성립된 사회에서는, 그런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어떤 집단에 대한 "배제"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역사적인 전례들이 이미 하도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만든 것은 남북 내전이었는데, 그 내전에서 승자인 북측에 맞선 것은 바로 남부의 아메리카 연합국 (Confederacy)이었습니다. 이 '연합국'을 보면 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연합국'의 지도부는 당연 흑인 노예를 많이 소유한 대농장주들이었습니다. 한데 백인 자유민 가구의 70%는 흑인 노예들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자유민 백인은 그 당시에는 자급자족의 상태에 가까운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농장주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노예제적 국가를 그들이 지지했느냐 하면, "대체로 그랬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지역마다 달랐고 일부 지역에서 일부 가난한 백인 농민들이 북측에 대해 일정한 지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대체로 1백50만 명 이상 남 측 민병대들의 대부분 전투 요원들은 바로 군에 자원입대한 가난한 백인 농부들이었습니다. 남측은, 북측과 달리 끝내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실시하지 않아도 충분한 병력 충원을 할 수 있었는데, 결국 부유한 농장주 엘리트와 가난한 농부들을 하나로 결부시키는 것은 바로 "백인 우월주의" 인식틀이었습니다. 계급적으로 엄청나게 분열된 전시 사회를,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결속시킨 가장 이른 역사적 사례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연합국'의 경우죠. 참, '연합국'에서는 노조 등 노동자의 결사는 불법이었습니다. 미국 극우들의 "꿈" 중의 하나는 아마도 바로 그런 사회일 겁니다.
트럼프의 출현을 직접 방불케 한 역사적 사례 중의 하나는 바로 윌리엄 브라이언 (1860-1925)의 정치적 "포퓰리즘" 노선이었을 것입니다. 오지 내브래스카주 변호사 출신의 브라이언은, 대체로 기업 과독점화 시대의 위기에 처한 소부르주아, 특히 중소농들의 의식 세계와 정치 의지를 대변한 것입니다.
주로 국내 시장을 위해 생산을 하고, 해외 세계에 대해 관심 자체가 적었던 농민들의 대변자인 만큼 브라이언은 예컨대 제1차 세계 대전에의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물론 독점 자본의 횡포를 억제하겠다는 등 중소 기업인들이 듣고 싶어했던 이야기도 계속 열성적으호 해댔습니다. 한데 그는 백인 농업 노동자와 '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아시아 이민자들의 유입을 결사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단, 백인의 경쟁자가 되지 않을 아시아 학생들의 입국과 체류를 지지했죠).
그가 죽은 뒤에 쿠 클럭스 클랜이 애도 의식을 진행한 것도 분명 우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즉, 인종주의의 색채가 짙은 이민 반대는, 이미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우파 포퓰리즘의 필수 불가결한 "메뉴"이었습니다. 참 이외에는 또 다른 필수 불가결한 "메뉴"들은 바로 고립주의와 기본주의적 색채가 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강조이었습니다. 그 악명이 높았던 "1925년 원숭이 재판", 즉 진화론을 교실에서 가르친 교사에 대한 재판 역시 브라이언이 주도한 것이지요.
브라이언부터 시작해서 골드워터나 최근의 팻 뷰캐낸 같은 우파 정치인들이 만들어놓은 유산을, 지금 트럼프가 그대로 전유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트럼프주의의 "상표"인 보호주의와 고립주의, 인종주의적 이민 반대, 경찰 국가와 신앙 등에 대한 강조 등의 콤비는, 대부분 이미 19세기 후반 이후의 다른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다 한 번씩 이용해본 레퍼토리인 것입니다.
이 레퍼토리를 이용하여 트럼프는 일부 하층민, 특히 가난한 중소 도시 백인 남성들의 지지까지 이끌어 자본주의 위기와 패권 위기 등 종합적 위기에 빠진 미국을 총자본의 이해와 맞는 방향으로 "개조"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외 정책 비용 삭감과 함께 보호주의와 재산업화 등은 이 "개조" 작업의 중심일 것이고, 이와 동시 끔찍한 인종주의적 언사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해리스가 당선되면 후자는 그나마 그렇게 돋보이지 않겠지만, 아마도 보호주의와 재산업화, 대외 정책 비용 삭감 쪽으로 가는 것은 대체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 속도를 조금 다르게 조절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사 등록 202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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