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나를 배반한 역사> 등 많은 책을 썼다. 박노자 본인의 블로그에 실렸던 글(bit.ly/3jpYwgJ)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세계사를 놓고 보면 영국 패권의 시대 (1815-1914)와 미국 패권의 시대 (1945 - 2020년대)는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다릅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식민지 영토를 보유하고 글로벌 제해권을 갖고 있었지만, 아무리 대제국을 건설했다 해도 "경쟁 열강"을 전혀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19세기는 "영국의 세기"인 동시에 유럽에서는 "5열강" (영, 불, 독, 오, 러)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 5대 열강은 일단 - 오늘날의 미국, 중국, 인도, 러시아 등처럼 - 서로 매우 긴밀하게 무역 등의 경제 관계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예컨대 러시아와 영국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식민지 쟁탈 경쟁을 하고,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선제적으로 예방한다"는 구실로 1885-7년에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와 영국이 무역 파트너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러시아의 대외 무역에서는 1890년대에 아시아 국가들의 비율은 8-9%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거의 다 유럽의 경쟁 열강들과의 무역이었습니다. 한데 그러면서도 이 5대 열강은 19세기 내내 서로 치열하고, 무력 수단까지 동원하면서 경쟁해 왔습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1866년)와 프랑스 (1870-71년)를 치고, 러시아는 크림반도 등지에서 영국, 프랑스 등과 싸우고 (1853-56년)
프랑스와 영국 역시 동남아시아와 수단, 그리고 서아프리카에서 종종 대치하고...이 과정에서는 영국은 - 아무리 패권 국가라 하더라도 - 그 어떤 "총조절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독일이라는 경쟁 열강이 크고 나서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상대국이 되어, 결국 영국의 패권도 독일의 도전도 두루 다 망하는 것으로 상황이 1945년에 정리된 겁니다.
영국의 이런 패권 행사 방식과는, 1945년 이후의 미국 패권 행사의 방식은 아주 달랐습니다. 미국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해 서구와 한-일을 그 군사 보호령으로 두었지만, 영토적 "대제국"을 굳이 구축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그 군사적 보호령들 사이의 경제, 정치 협력 조직 (유럽 연합)의 성장을 조장하고, (한-일의 경우처럼) 긴밀한 관계 성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그 군사적 보호령 사이의 관계를 총조절해 "경쟁"은 물론 그 어떤 "도전"의 가능성도 거의 차단해 버렸습니다. 예컨대 일본을 보시면 자민당 안팎에서는 일말의 "반미 극우파"도 있긴 있지만, 정치적 비중은 거의 없습니다. 독일 같으면 "미국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시도는 여태까지 딱 한번, 노르트스트림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이었는데, 그 파이프라인이 결국 폭파되는 것으로 그 시도는 당분간 별 성공없이 종료됐습니다.
사실, 주류 정치로 말하면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일본이나 한국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패권이 아니고 미국 패권의 "스스로의 포기" 가능성입니다. 즉, 이미 총국민생산 대비 국채의 비율이 122%에 달해, 2050년에 200%나 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에서 "국가 디폴트 예방" 차원에서 세계 곳곳에서 미군 기지를 폐쇄하여 미군을 철수시키는 시나리오야말로 미국의 유럽, 동아시아에서의 군사 보호령 지도층의 "악몽"입니다.
한때에 서로의 경쟁자이었던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등은, 1945년 이후에 아주 순한 지정학적인 "미국의 후국"으로 변한 것은 19세기의 지정학적 지형과의 엄청난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이런 "전지전능한 종주국과 유순한 후국들"의 시대가 1945년부터 2020년대까지 가능해왔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체제 핵심권 (구미권+일본, 현재는 + 한국) 밖애서는 그 어떤 도전 세력들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련은 이념/정치적으로 도전세력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 본위의 경제인 만큼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정학적으로는 소련은 얄타체제 안에 안주하여 미국에 직접적인 군사적 도전장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중국이나 인도 등은 경제, 군사적으로 아직 약해 중립 (인도)이나 별로 효과 없는 주변부에서의 반미 투쟁 (1970년대 중반 이전의 중국), 아니면 미국 중심의 무역, 투자 체계에의 편입 (1979년 이후의 중국) 이외에는 선택지도 별로 없었습니다.
1991년 이후의 러시아는 그냥 난파선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런 호조건 하에서는 1991년 이전까지의 미국의 패권은, 1991-2008년 사이의 아예 "미국 본위의 일극 체제"로 가일층 심화된 것입니다. 사실, 1991-2008년 사이의 미국 만큼 한 나라가 전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은 세계사상 여태까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야말로 "세계사적으로 특별한 시대"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2008년의 세계 공황, 2010년대 초반의 중국의 실물경제 초강대국으로서의 부상, 미국의 이라크, 아프간에서의 패배, 트럼프형 신보호주의의 등장, 그리고 2022년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결국 202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사실 "특별한 시대"의 종말은 바로 세계사적인 "정상 궤도"로의 귀환을 의미했습니다.
핵심부는 여전히 "종주국과 후국" 구조지만, (준)주변부에서는 이제 나름의 경쟁 열강들이 성장한 것입니다. 그 경쟁의 목적들은 19세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영국이 19세기에 아덴과 봄베이, 싱가포르, 홍콩 등에서 항구 시설을 축조해 해상 무역의 루트를 관리했듯이, 지금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 차원에서 동아시아에서 유럽으로의 해상, 육상 무역 루트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영국이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형식적으로 독립국으로 인정해 놓고 남미에의 투자를 통해 그 경제권을 장악한 것처럼 중국도 지금 세르비아나 헝가리, 캄버디아, 라오스 등에서 최대의 투자국이 된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이 성립된 기초는 프랑스에 대한 승리, 그리고 알자스-로렌 지역의 영토 강탈이었듯이, 푸틴 역시 지금 우크라이나에 패배를 안겨 돈바스 등의 영토를 "성공적으로" 강탈한 뒤에 구소련 구성 공화국들의 대부분을 다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한 '연합' 형태로 같이 묶으려 합니다.
제정 러시아가 세르비아 등에서 각종의 극단적 민족주의 비밀 결사들을 키웠듯이, 이란은 예멘의 후시트나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을 키웁니다. 2008년 이후에 점차 본격화되는 새로운 열강 각축은, 1914년 이전의 열강 각축을 그대로 "계승"한 것처럼 보입니다. 단, 핵무기의 시대인 만큼 열강들은 이제 정면 충돌을 그래도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점은, 반체제 세력들의 상황입니다. 1914년 이전의 열강 각축의 세계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사민주의자들은 각국의 매우 강력한 정치세력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상당한 지분을 보유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그들이 "급진" 세력이었던 것이죠. 지금은 구미권의 급진 세력 (독일의 좌파, 프랑스의 불복하는 프랑스 등등)은 비교적 약한데다, 경쟁 열강 (중국, 러시아, 이란 등)에서는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자매 단체"들은 정치권 안에 아예 없습니다.
그러니 세계 질서가 갑자기 1914년처럼 "파열"돼도, 이 파열을 이용해 1917년처럼 급진 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상황이 과연 열릴 것인지 지금으로서 자신있게 말하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파열"은 극우들의 집권 등 "최악의 시나리오"를 더 가능하게 만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데 열강들이 정면 충돌을 피하는 만큼 "파열"의 가능성도 낮아집니다. 그냥 각축과 세계 곳곳에서의 대리전들이 끊임 없이 반복돼 가는 형세입니다...
(기사 등록 202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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