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며칠 전 영화 ‘위플래쉬’(채찍질)를 보며 시간을 버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물론 영화 해석은 각자가 다양하고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바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영화에 쓰인 멋진 음악들도 이런 불쾌함을 없애주지 못했다.
이 영화는 몇 가지를 보여 주는 데, 첫째 타고난 재능을 가진 소수의 뛰어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강압과 경쟁심 자극 등 ‘무자비하고 가차없는 훈련’을 통해서 이런 재능을 더욱 효과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적 감정과 상처 등은 이런 과정에서 팽개쳐야할 낭비적 요소, ‘부수적 피해’라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생각을 가진 예술학교 음악선생인 ‘플래쳐’의 매정하고 비인간적이고 인격모독적인 교육 방식을 보여 준다. 그는 욕설과 폭력도 마다하지 않고, 학생들은 그 앞에서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양이 앞의 쥐 같은 자세를 취한다.
나는 끝까지, 뭔가 반전을 통해서 이런 교육방식을 폭로하고 모순을 드러내기를 기대했다. 특히 플래쳐의 교육방식이 한 학생의 자살을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장면에서, 그런 기대가 커졌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부수적 피해’로 취급된 것 같다.
이런 엄격한 훈육을 통해서 단련된 주인공 ‘앤드류’가 마지막에 그 선생에 대한 증오까지 담아서 재즈 드러머로서 ‘재능’을 폭발시키는 장면은 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엘리트주의적 영화가 극찬을 받고 상(아카데미)을 받는다는 현실이 씁쓸했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거의 나오지도 않는데(예술 학교나 재즈 밴드에 원래 여성이 없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나마 나오는 여성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 성공의 걸림돌인양 묘사된다. 앤드류는 ‘예술’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며 여자친구와 결별을 선언한다.
또 ‘게이같은 녀석’이 누군가를 모독하는 욕설로 거듭 나온다. 운동선수로서 경기에서 활약한 것을 자랑하는 사촌에게, 최고를 지향하는 주인공은 ‘그래봤자 2부리그’라고 경멸을 쏟아낼 뿐이다.
플래쳐는 실력과 재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주인공의 경쟁심을 자극하기 위한 “자극제”였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소모품이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학생들 사이의 믿음, 우애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경계와 질시, 불신의 눈초리만 가득하다.
주인공이 손에서 피가 나는데도 얼음물에 담그며 다시 드럼을 치는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중국 무협영화에서 자주 나오던 비슷한 장면이 떠올랐다.(피가 나는 주먹을 계속 뜨거운 모래 가마솥 속으로 찌르던)
강압적·차별적 훈육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의 입시교육이나 체육학교 등을 배경과 소재로 해도 비슷한 영화가 나올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정말 봐야 할 것은 이런 교육이 얼마나 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하며 실패하고 있는 가여야 한다.
중간에 앤드류가, 자기가 꼬마일 때 신나고 재미있게 드럼을 치던 동영상을 다시 들여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왜 그런 열정과 흥미가 저렇게 뒤틀려가야만 했을까? 이 영화는 가장 창조적이고 자유로워야 할 예술조차도 이 체제에서는 소외된 노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점에서 이번 아카데미에서 ‘위플래쉬’와 함께 화제가 된 ‘버드맨’이 나에겐 훨씬 좋은 영화였다. 버드맨은 흥미있고 감동적일 뿐 아니라, 예술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지난해 전규환 감독의 ‘마이보이’도 기억난다.
‘위플래쉬’와 비슷하게 ‘마이보이’도 마지막에 아주 긴 드럼 독주 장면이 나오는 데, 죽은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담아서 어린 주인공이 미친듯이 치는 드럼 연주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예술이란 단지 훈련된 기교가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과 희노애락을 승화시키는 과정이 아닐까.
덧붙이자면 ‘위플래쉬’에서 플래쳐가 거듭해서 찰리 파커의 사례를 들어 자신의 교육법을 정당화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선배 음악인 조 존스가 파커의 목을 향해 던진 심벌이 파커를 정신차리고 음악에 매진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전설적 음악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과연?
재즈야말로 ‘자유의 음악’이고 찰리 파커는 별명이 ‘버드(Bird)’였을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새는 자유롭게 날고 싶어하지 강압과 공포에 갇혀 있을 수 없다. 그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악기를 팔아 마약을 사기 일쑤여서 친구들이 그에게 악기를 빌려주길 꺼릴 정도였다 한다. 그는 10대 때 이미 결혼했고 그 후에도 자유로운 연애로 유명했다. 예술을 위해 연애를 포기한다는, 연애할 시간을 줄여서 연습한다는 발상을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흑인으로서 지독한 인종차별에 시달려서 그것을 증오했고 미국 공산당을 도운 적도 있다고 한다.)
파커가 개척한 비밥 재즈는 즉흥 연주가 특징이었고 플래쳐가 든 사례도, 파커의 멋대로식 즉흥 연주를 못마땅해 한 보수적 선배의 행동이었다는 해석이 더 많다.(1936년 당시 찰리 파커는 16살로 자신만의 시도를 하던 때였고 한번 솔로를 하면 엄청나게 길게했다. 조 존스는 기존과 다르고 너무 긴 솔로에 짜증이 나서 심벌을 바닦에 던졌다 한다. - 페북에 올린 이 글의 초안을 보고 재즈를 잘 아는 김득영 동지가 고맙게 조언해 준 얘기다.)
누구에게나 다양한 재능과 개성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생각,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 열정에 의해서, 경쟁이 아니라 토론과 협력을 통해서, ‘이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모두에게 감동과 행복을 주겠다는 자유로운 열망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움직이고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비웃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일부 좌파마저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고 아래로부터 열정과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기보다, 무자비한 훈련과 효율적 행동통일, 소수의 명확한 지도자와 이론가를 중시하는 것을 볼 때면 씁쓸할 때가 많다. 소수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억누르며 위로부터 국유화나 계획경제를 하며 생산력발전을 이루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볼 때처럼 말이다.
꼬마 앤드류가 신나고 재미있게 드럼을 치던 것처럼,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고 인간적 우애를 나누어 가는 것. 함께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협력하면서, 투쟁과 조직을 만들어가고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들어나가려 하는 것은 ‘이상주의’라고 무시당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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