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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녀사냥의 기억과 상처, '5일의 마중'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5. 1. 6.

전지윤


지난 연말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피해자 조양원 씨의 부인 엄경희 씨가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았다. “얼마 전 '5일의 마중'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남편의 사진을 찾아 제 수첩에 붙였습니다. 남편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섭니다.”


나도 몇 달 전 그 영화를 본 적이 있기에 엄경희 씨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됐고, 그 심경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 노동교화소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남편이 부인과 딸이 사는 집으로 찾아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인은 당국의 감시와 압박 속에 문을 두드리는 남편을 외면해 버린다. 심지어 어린 딸은 아버지가 혁명의 배신자라 믿고 당국에 그를 고발한다. 남편이 보낸 쪽지를 보고 뒤늦게 기차역으로 나가는 부인. 그러나 부인은 기차역에서 공안에 끌려가는 남편을 보면서 울부짖고 그 상처와 충격 속에 정신이 이상해지고 기억을 잃게 된다.


이 때문에 부인은 문화혁명이 끝나서 남편이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기억에 따라 매달 5일이 되면 기차역으로 남편을 마중 나간다. 남편은 부인이 자기를 알아보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보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매번 부인과 함께 기차역으로 자신을 마중나간다.


정말 너무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다. 유명한 배우 공리가 부인 역을 맡아 궁지에 몰린 남편을 외면했던 미안함, 딸에 대한 원망,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을 몰라보며 한없이 남편을 그리워하는 감정 등을 잘 연기해낸다.


남편 역을 맡은 배우도 뒤지지 않는다. 그 고통과 상처, 안타까움을 세월 속에 꾹꾹 눌러담은 표정과 태도가 자연스럽다. 나에겐 모든 장면이 안타깝고, 서글프고, 인상깊었지만 특히 피아노 장면이 최고였다.


부인이 또 기차역에 마중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남편은 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기다린다. 부인이 그 모습과 피아노 선율을 듣고 자신을 알아봐줄지 모른다고 기대하며. 실제로 피아노 치는 그의 등을 보면서 다가온 부인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두 사람은 잠깐 감격스런 포옹을 한다. 하지만 곧 그녀는 흠칫 놀라며 남편을 내친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햇살이 들어오는 방안, 피아노 치는 남편의 뒷모습, 그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부인, 고조되는 감정들이 어우러지는 명장면이다. 영화를 보면, 사랑은 두근거리는 행복한 감정이지만 또한 매우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것을 깨닫게 되지만 ^^;

 


문화혁명과 중국 국가자본주의

 

영화의 감독인 장예모는 예전에도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빼어난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실망스럽게도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는 화려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이 영화로 다시 예전의 감성과 성찰이 살아난 느낌이다.


사실, 지난해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몇 편의 중국 영화를 다시 보게 됐는데 그 중에는 장예모의 <인생>도 있었다. 거기에는 문화혁명 속에 자본주의 반동이라는 이유로 경험많은 의사들이 쫓겨나고 어린 홍위병들이 출산을 돕다가 산모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역시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특히 문화혁명의 절정기에 주인공들이 광기어린 군중에 둘러싸여 서로를 고발하는 장면은 정말 많은 생각과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시투(장풍의)와 두지(장국영)는 오랫동안 경극 배우를 같이 해 온 친구이고, 주샨(공리)은 시투의 부인이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의 배신자들을 처단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여기서 시투와 두지가 함께 한 경험과 언행을 폭로하며 서로를 고발하는 장면도 가슴 아프지만, 가장 참담한 것은 시투가 자신의 부인인 주샨의 과거를 폭로하며 저 여자와 나는 이제 남남이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공리의 표정은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시투는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눈초리에서 벗어나려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주샨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혁명의 대의라는 이름으로 친구와 가족과 연인이 가장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마저 끊어버릴 것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이런 식의 마녀사냥과 희생양 삼기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편이 감옥에서 썼던 편지와 재판자료들 때문에 구속될 처지가 된 황선 씨를 보자. 황선 씨는 말한다. “15년간 정치수배와 옥고로 고통받는 남편의 편지를 그럼, 불태우거나 신고라도 했어야 했나요?”,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서는 딸이 어쩔 수 없이 밟히는군요.” 황선 씨 부부의 어린 자녀들이 이 사회에서 겪었고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뿐이다.


그럼에도 중국 문화혁명이 특별한 점은, 그것이 사회주의와 혁명라는 이름 아래 이뤄진 비극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위기에 처한 중국 국가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의 권력 투쟁이 낳은 비극으로 봐야 한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얼굴마담으로 전락하다가 경쟁 지배관료들을 겨냥해 대중선동을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 관료 지배자들에게 사회주의란 생산수단과 권력을 독점한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착취할 권리를 뜻할 뿐이었다.

 

진심어린 사과

 

하지만 아무리 혁명적인 운동과 조직이라도 이런 종류의 위험에서 자동적으로 면제된다고 믿지는 말자. 빅토르 세르쥬는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며 나타난 변질과 후퇴에 대해 특히 민감했던 아나키스트 혁명가였다. 그는 내전과 국제적 압박 속에 볼셰비키 당 안에서마저 나타나는 타락과 변질을 보며 이렇게 괴로워했다.


나는 이 모든 사태에 가슴이 미어졌다.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소수가 결연한 의지로 단호하게 활동하면, 질식당하던 전통과 결별하고, 닮으면서 죽어가는 사태를 뚫고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5일의 마중>에서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장면은 딸이 아버지에게 사과하는 장면이다. 사실 아버지는 딸을 원망할만 했다. 딸이 고발해서 자신은 잡혀갔고, 부인은 기억을 잃은 셈이니.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딸과 함께 부인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애쓴다. 예전에 그를 혁명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던 이웃들도 그를 돕는다.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화해가 이뤄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 즈음 봤던 ‘30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어부간첩 사건에 대한 <뉴스타파>의 보도가 떠올랐다. 그 납북어부는 전두환 시절,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됐고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다. 출옥 후 그는 이웃과 친척들의 외면을 당하며, 겨우 찾아낸 하나뿐인 아들과 만나 며칠을 보낸다. 3일 후 아들은 아버지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됐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져서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린다.


그는 30년만인 지난해에 무죄 판결과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위안이 된 것은, 손배 재판에서 판사가 사법부를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뉴스타파>에 그것을 전하며 뭐라 표현하기 힘든 웃음을 짓는다.


많은 경우, 고통과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진실한 사과 한마디일지 모른다.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원망과 억울함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상처가 깊었던 것은 그만큼 가깝고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리라. , 사과를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할 줄 것이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하기도 하다. 내가 가까이서 지켜 본 사람들도 대부분 그랬다.


물론 나는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가해자들이 쉽게 반성하고 사과할 거라고, 그래서 엄경희 씨의 저런 걱정이 풀리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진보당 정당 해산까지 된 상황에서 엄경희 씨의 걱정과 고통은 더욱 깊어졌으리라. 거짓과 조작에 기반해 부와 권력을 지키려는 저 자들은 오로지 우리 편이 단결해서 강력하게 투쟁할 때만이 고개를 숙일 것이다.


우리 편의 단결을 위해서도 같은 동지들끼리 상처를 주고받았던 것은 돌아보고, 불신과 증오를 거둬내고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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