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 그리스의 눈물과 플랜B
최근 <뉴스타파>가 방영한 현지 르포 ‘그리스의 눈물’(http://newstapa.org/28103)을 보면 지난 5년간 진행돼 온 ‘재정적 물고문’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비록 이 르포의 결론 부분은 정치적으로 혼란된 메시지를 보내지만 말이다.)
냉장고는 텅 비었고 수도와 전기는 끊겼다. 학교가서 물을 떠오도록 등교하는 아이에게 물통을 쥐어서 보낸다. 식탁에 올라오던 채소와 생선은 3~40% 줄었다. 공무원을 퇴직한 부인의 연금 60만 원으로 5식구가 한 달을 버틴다.
병원 예산은 1/3 삭감됐고 병원장은 ‘사람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에 치프라스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이런 현실을 바꿀 힘과 대안은 없다는 체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이번에 그리스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도날드 투스크는 근래 한 인터뷰에서 ‘다른 대안을 건설할 수 있다는 급진좌파적 환상의 힘에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높은 청년실업과 좌파의 열정적 선동이 폭발적으로 결합되면서 1968같은 상황으로 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될 뻔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가능성이 사그라든 것인가. 이번에 패배한 것은 ‘유로존 안에서 그 규칙을 따르며 긴축을 완화한다’는 잘못된 전략과 노선이지 반긴축 투쟁 그 자체가 아니다. 치프라스는 집권에 다가갈수록 시리자 당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지배계급에 대한 양보를 거듭하면서 패배를 자초하는 방향으로 이동해 왔다.
현재 치프라스와 그의 굴복을 변호하는 좌파들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시리자는 더 이상 무책임한 야당이 아니고 그렉시트는 더 큰 재앙을 불렀을 것이다’라며 후퇴를 정당화하고 있다. 만약 그렉시트(채무 불이행과 유로존 이탈)를 선택했다면 물가폭등, 자본도피, 경제적 보복 등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트로이카의 논리와 매우 유사할뿐 아니라 일종의 경제적 결정론이다. 이 논리에는 그리스 민중의 아래로부터 투쟁과 그것이 낳을 변화라는 중요한 변수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층 민중의 투쟁의 힘에 대한 불신, 비관주의와 관련있어 보인다.
더구나 경제적 논리로 봐도 그렉시트는 결코 공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리자 정부 내에 ‘플랜B’(그렉시트)를 위한 준비팀이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전 재무장관 바루파키스가 주도한 이 준비팀은 ‘대체은행’을 설립하고, 유로화 대신 대체통화로 밀린 연금과 임금 등을 지급하고, 극빈자들을 지원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지금 그리스 지배계급은 감히 이런 대안을 상상한 책임자들의 형사처벌을 추진하고 있다.
치프라스는 현재 굴복과 후퇴로 뒤덮인 ‘3차 구제금융안’을 관철하려 하고 있다. ‘시리자 정부를 무너뜨리고 우파가 다시 득세하도록 할 것이냐’라는 압박을 가하며 좌파를 단속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려 한다.
자신에게 친화적인 사람들로 대표자들을 교체한 다음, 9월에 당대표자 회의를 개최해서 3차 구제금융안을 추인 받으려는 게 그의 계획으로 보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리자는 어차피 배신할 개량주의였고 혁명정당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추상적 주장이 아닐 것이다.
시리자 안팎의 좌파는 치프라스의 이런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시의적절하게 맞서며, 긴축에 반대하는 주장과 운동이 다시 힘을 키우고 단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 버니 샌더스와 제레미 코빈이 보여 주는 가능성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일종의 사민주의 좌파인 버니 샌더스가 열풍을 일으켰고, 영국 노동당 당대표 선거에서는 강경좌파인 제레미 코빈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것은 세계적 급진화 물결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반갑고 환영할 일이다.
버니 샌더스의 급진적 공약과 주장이 호응을 얻는다는 것은 오바마에 실망한 미국 기층 민중들이 더 왼쪽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신호로, 제레미 코빈이 일으킨 이변은 ‘블레어식 제3의 길’이 노동당 기층 당원들에게 거부되고 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특히 버니 샌더스는 대외정책에서 제국주의적 한계에 갇혀 있는 반면, 제레미 코빈은 반전반제국주의 입장도 괜찮은 좌파라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그런데 샌더스와 코빈의 성과는 미국 민주당과 영국 노동당 밖에서 독립적인 좌파적 대안을 건설하려는 노력과 입장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사실 ‘코빈이 당대표가 되면 노동당이 급진좌파 정당으로 변신하며, 엄청난 격변을 일으키려 할 것’이라는 영국 우파들의 호들갑은 너무 과장이다. 미국 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이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타협해 온 역사는 오래됐고 당의 기반, 성격 등 구조적 한계와 연결돼 있다. 코빈이 당대표가 된다면 결국 어느 순간 선택의 기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분당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사실 서유럽 사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보여줄 것이라던 브라질 노동자당, 남아공 공산당, 그리스 시리자마저 집권 이후 비리를 저지르거나 파업에 발포하거나 긴축을 수용하는 등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다시 ‘민주당, 노동당에 들어가서 바꾸기’가 대안이기는 어렵다. 마치 이 나라에서 ‘새민련에 들어가서 바꾸기’가 대안이 아니듯이 말이다. 샌더스와 코빈이 보여 준 가능성이 ‘자본가의 오른팔과 왼팔’이라는 양당체제를 벗어난 독립적 좌파와 운동 건설의 동력으로 연결되길 기대해 본다.
● 국정원 해킹 파문과 종북몰이
우리가 어렸을 때 ‘북한간첩은 임무에 실패하면 준비해 둔 독침으로 자살한다’고 배웠다. 중동 이슬람극단주의 세력의 자살테러도 ‘비이성적 괴물집단’의 상징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 나라의 국정원도 ‘자살’로 꼬리를 자르는 게 관행이 돼 있다.
사실 국정원이 불법 도감청과 해킹 등을 했을 거라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다. 그건 역대 정부와 안기부, 국정원이 계속 해왔고 가끔 드러났던 일이다. 스노든의 폭로로 드러났듯이 한국 지배자들의 큰형님인 미국 정부도 곳곳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노태우는 전두환까지 도청했었다고 하고, ‘미림팀’이 수천 명을 도청한 테이프의 일부는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때 공개되기도 했다. 소위 ‘민주정부’도 다르지 않았고, 이것은 이번에 새민련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은 김무성의 ‘국정원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거’라는 말처럼 저들이 너무나 뻔뻔해졌다는 데 있다. ‘CIA에서 빈 라덴 잡으려고 그랬듯이 우리나라를 해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래도 된다’는 식이다. 이미 ‘내란음모 조작’ 때 도감청, 프락치, 조작 등 온갖 수단을 이용한 종북몰이가 문제도 되지 않고 먹힌다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인가.
한 가지 인상깊은 것은 이제, 이런 사건에서 ‘로그기록을 제출하고, 그것을 디지털포렌식으로 조사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상식이 됐다는 것이다. 2012년 진보당 경선부정 사건 때만 해도 로그기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그기록을 보지도 않고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전문가란 사람들이 ‘로그기록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고 대부분 그것을 쉽게 ‘믿어줬다’.
김인성 교수는 그것을 밝혀낸 후 ‘친경기동부’란 딱지가 붙었고, 그것이 얼마 전 성완종 녹취록 문제로 과도한 조명과 비난을 받은 배경이었던 것 같다. 국정원의 공무원간첩 조작 사건과 세월호 국정원 노트북 등을 밝혔다고 조명받은 적은 거의 없는 반면에 말이다.
막상 성완종 녹취록을 공개한 손석희는 이제 더 이상 그것으로 비난받지 않고 있고, 이처럼 본질이 흐려지는 속에서 결국 성완종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그런데 왜 해킹 사건에서 국정원을 파헤치는 김인성 교수를 볼 수 없게 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 세월호의 진실에 대한 끝없는 의혹
<파파이스> 58회에서 참사로 희생된 신승희 학생이 남긴 사진을 근거로 사고 전에 이미 세월호 엔진의 왼쪽 스크루가 정지해 있었다는 사실을 제기한 김지영 감독이 이번 60회(https://www.youtube.com/watch?v=GChkeGqSOYY)에서도 많은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먼저 7시5분에 배 왼쪽 편에서 깜짝 놀라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아이들과 객실에서 튀어나오는 승객을 보여주는 CCTV다. 이어서 김지영 감독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의 동영상에서 쉽게 눈치 채지 못했던 점을 지적한다. 바로 쓰러지는 배의 왼쪽 강철난관이 무언가에 의해 절단되고 안쪽으로 휘어진 장면이다.
그리고 앞선 CCTV 장면에서 시찬 학생이 찍은 사진을 제시한다. 그 사진에는 세월호 옆을 지나가던 커다란 배와 그 바로 옆의 한 물체(길이 7미터, 높이 2.4미터 정도)가 나와 있다. 그밖에도 김지영 감독은 세월호의 AIS영상만이 아니라 레이더 영상도 조작돼 있다는 점, 세월호가 침몰중인 상황에서 ‘18노트로 운항하고 있다’는 이상한 교신을 주고받는 해경상황실의 음성기록 등을 제시한다.
김지영 감독의 제기와 근거들이 모두 다 맞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세월호에 대한 정부의 주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점만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국정원 해킹 사건과 의혹투성이 ‘자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는 것이다.
● 이주노조를 즉각 인정하라
10년만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결국 노동부로 폭탄 돌리기하며 이주노동자들을 우롱하는 사기극이었던 것 같다. 이주노조가 규약을 일부 고쳤음에도 노동부는 설립신고증을 반려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합법화 쟁취’라는 내용이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너희는 노예가 맞다’는 말과 다름없다. 얼마전 <뉴스타파>가 방영한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http://newstapa.org/27690)를 보면 고용허가제와 미등록 위협으로 이주노동자에게 불법의 굴레를 씌우는 게 왜 노예 처지 강요인지 잘 알 수 있다.
교통사고 당한 이주노동자가 월급도 산재인정도 못 받아도, 돼지우리같은 컨테이너 작은방에 10명이서 먹고자야 해도, 170킬로 철근을 매일 2명이 들다가 골병들어도, 항의하거나 작업장을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이주노동자 부부의 사연은 특히 짠하다. 4년만에 만난 부부는 고된 노동을 하다가 일주일에 두 번 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지 서로를 쓰다듬으며 “많이많이 좋아”라고 웃는다. 그런데 체류기간이 최대 4년 10개월로 제한돼 있기에 다시 4년간 헤어져야 한다. 부인은 남편을 못 보면 “하루가 너무 길다”고 말한다.
왜 4년 10개월인가? 이제 기술도 익히고 숙련도 높아질 때여서 일부 기업주도 계속 고용을 원하는데.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말과 생활, 문화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인간이란 점을 기억해내며 이제 무릎을 펴며 뭉치기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본 것 아닌가?
모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합법화하고 이주노조와 노동3권을 보장해야 한다.
* ‘변혁재장전’과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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