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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한공주> ㅡ 피해자와 생존자 사이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4. 5. 15.

이서영

 

영화의 초반부, 한공주는 곧 나가야만 할 집에 선생님과 둘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딱딱 소리를 내는 선풍기가 한 대 매달려 있다.

 

영화는 ‘밀양 성폭력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 ‘실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를테면 영화 《변호인》이 픽션이라고 초반에 밝혀놓고, 그 재판의 결과가 어땠다는 식의 자막을 깔아버리는 식의 문제들)에 빠지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영화는 관객의 눈앞에 고통을 전시하지도 않으며, 심리적인 강요를 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가 가장 뛰어나게 포착한 장면은 바로 한공주라는 개인이다. 모두가 그녀의 영혼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라고 예상할 만큼, 우리 모두의 삶이 뒤흔들릴 것이라고 예상할 만큼, 끔찍한 일을 겪은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집에 매달려 있는 선풍기가 고장나서 달그락대는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 선풍기가 신경 거슬리기는 하지만 다시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공주는 강박적으로 친구들을 피하고, 자기 내부로 움츠러들어서 세상에 높은 경계를 세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겪은 상처 그 자체가 그녀는 아니다. 물론 그것은 그녀를 이루는 일부가 되겠지만, 그녀 자신이 그 상처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열일곱 살의 개인이다.

 


세상은 그녀에게 과민하게 굴면서도 너무나 무신경하다. 그녀를 끝까지 도와주려고 하는 전 학교의 선생은 그녀의 상처가 어떤 방식의 것인지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일종의 판타지로 보일 정도로 순수하게 한공주를 받아들이는 친구 은희는 공주의 동영상을 보고 차마 공주의 전화를 받지 못한다.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한공주와 함께 살기 시작한 선생의 어머니 조 여사다. 모성에 대해 결핍이 있는 한공주에게 조 여사는 매우 현실적인 다정함을 제공한다. 그녀 자신도 세상에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서로에게 과민한만큼 무신경하다는 것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공주의 삶에 대해 지나치게 끼어들려고 하지 않으나, 결국 집을 나서는 한공주를 잡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한공주에게 다가설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그녀는 한공주의 삶을 방치한다.

 

영화가 한공주를 윤간한 가해자들을 묘사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한공주의 친구인 동윤이 타카로 고문을 당하면서, 한공주에게 약을 탄 술을 먹이고, 결국 자신의 연인과 친구를 모두 나락을 빠뜨리는 과정은 용서할 수 없는 만큼 안타깝다. 동윤을 ‘똥개’라고 부르던 불량서클의 리더는 한공주 앞에서 “이 새끼가 왜 똥개인 줄 아느냐, 이 새끼도 나와 했기 때문이다” 라며, 동윤 역시 성폭력의 피해자였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협소한 그룹 안에서 사회적 폭력이 절대화되는 상황에 인간들이 그 폭력에 굴종하게 되는 구조를 보여주는 동시에 폭력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서로를 가해하게 되는 일반론으로서의 폭력의 구조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전학을 와서 공주가 열중하기 시작하는 것은 수영이다. 수영이나 육상과 같은 운동들은 온전히 혼자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영은 고개를 숙여 물속에 들어갔다가 의지적으로 고개를 들어 숨을 내쉬어야만 하는 운동이다. 고개를 들어 숨을 들이키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삶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을 수 있다는 상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수영을 하는 순간의 인간이란 자신의 선택에 따라 고개를 그대로 내리고 있을 수도 있고, 고개를 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놀랍게도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그녀의 ‘완전히 보편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아는 관객 앞에서 완성된다. (상처입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현실에 어떻게든 발을 붙이고 싶은 모순된 자아가 17살의 한공주라는 캐릭터로 완결되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피해자가 곧바로 생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생존자(Surviver)라고 불리기 위해서, 피해자는 한공주의 수영과 같은 과정을 지나쳐야만 한다. 전화를 받지 못한 은희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며, 한공주를 잡지 못한 조 여사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도, 피해자 자신은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점부터 그것은 누군가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 자신이 자신의 피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치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하는 문제다.

 

성폭력 피해자는 물론 성폭력 피해자지만, 그것은 그 인간 자신의 전형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에 비해 폭력의 구조라는 것은 전형적이며, 그 구조에 함몰된 인간들이란 더할 나위 없이 전형적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을 생존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공주는 더 이상 몸을 내밀어 숨을 쉴 필요 없이 인어처럼 유영한다. 고장 나서 소리를 내던 선풍기는 다음 세입자가 고쳐서 쓰기 시작했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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