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한 지 200일을 넘어섰다. 반올림은 4월 22일 저녁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우리의 장기는 장기전, 삼성직업병 문제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9년, 노숙농성 200일' 문화제를 열었다. 삼성전기에서 엔지니어로 일했었던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이상수 동지가 이 문화제에서 한 발언의 전문을 싣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삼성전기에서 10년 조금 넘게 엔지니어로 일했던 이상수라고 합니다. 저는 삼성에서 PCB라는 전자부품을 개발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삼성 반도체에서의 산업재해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LCD나 PCB 같은 전자 제품을 만드는 공정은 반도체 산업과 매우 유사하고 그래서 비슷한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삼성전기에서도 최근 들어 혈액암과 백혈병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요. 삼성에서 일했던 저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반올림을 통해서였습니다. 삼성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삼성은 축소, 은폐하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요 언론들이 삼성이 불편해할 사실을 잘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반올림은 이 끔찍한 기업의 살인 행위를 용기 있게 기록하고 증언해 왔습니다. 비록 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였지만, 결코 꺼진 적이 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반도체/전자산업에서 발생한 질병과 죽음’이라는 문제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결코 ‘없는 척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계속해서 삼성을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을 해소하려 했던 삼성의 안하무인식 ‘사과와 보상’ 절차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한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반올림의 이 농성이 삼성의 시도를 좌절시키는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농성이 200일이 되었습니다. 농성장을 지켜오신 분들께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부분만 함께 했지만, 이 농성에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 지난 몇 달간 제게도 큰 뿌듯함이었습니다.
삼성의 산업재해 문제를 접하는 지인들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걸 내부에서는 정말로 잘 모르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요. 생산 현장에서 일해본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불량 내지 않고 엄청난 물량을 만들어내는 일로 온 힘을 쓰고 나면, 안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잘 생기지 않습니다.
제품을 개발하는 저 같은 엔지니어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전자제품을 경쟁회사보다 먼저 값싸게 만드는 것 말고는 거의 관심을 둘 여유가 없습니다. 안전에 신경 쓰지 못하고 바쁘게 정신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에게, 반올림의 목소리는 현장의 위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유일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현장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76분의 노동자와 가족들, 병에 걸려 고통받는 노동자와 가족분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올림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 문제는 결코 조용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삼성에 똑똑히 각인시켜 왔습니다. 이런 활동이 저 냉혈한 삼성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만들어 왔습니다.
삼성은 가장 위험한 공정부터 없애는 증거인멸 작업을 해왔습니다. 황유미 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수준의 참혹한 죽음의 설비들은 삼성 공장에서 계속 사라져 왔습니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반올림의 활동이 전자산업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의 목숨과 건강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에 실렸던 ‘지는 싸움을 하는 이유’라는 글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말을 마칩니다.
‘지는 싸움’이라는 규정은 현재의 제한된 시각으로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의 결과를 앞당겨 예측하는 행위다. 이런 예측에서 미래는 현재의 연장일 뿐이다. 계속 싸우는 사람은 “우리는 이길 수 있어!”라고 답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미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을 돌려주고 있다.
그래서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일은 이기는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 경험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미래를 도입하려는 싸움이다. ‘지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미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계속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기에, 미래는 이미 변하였다.
반올림이 처음 시작되던 때, 그때는 이 싸움이 분명히 ‘지는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은 이 나라에서 그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거대한 힘을 가진 권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 온 분들 덕분에 이제는 ‘가끔은 이기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삼성에 맞서 가끔이라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이기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지금은 상상하지 못할 미래를,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오늘도 우리가 이 쉽지 않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rreload.tistory.com/16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변혁 재장전’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
'소식과 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활동의 맥락 속에서 심리적 문제를 이해하기 (0) | 2016.09.12 |
---|---|
우리는 모두 한상균이 돌아오길 간절히 원한다 (0) | 2016.07.03 |
반올림 농성 참가기 - 그 많던 절망은 누가 다 먹었을까 (0) | 2016.04.24 |
"돈 몇 푼으로 입막음하려는 삼성은 아베와 비슷하다" (0) | 2016.01.26 |
토론회 보고 “종북몰이에 맞서며 세월호 진실 위해 뭉칩시다” (5) | 2015.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