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
6월 11일 퀴어문화축제와 퍼레이드는 자유의 공기와 해방감이 넘쳐났다. 음악에 맞춰서 신나게 몸을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속에 같이 행진하면서 나는 ‘이런 사랑과 연대의 축제가 매일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길거리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가워하는 표정에도 흥겨움이 묻어났다. 동성애에 대한 저주를 쏟아붓는 ‘혐오 세력’들도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무시 속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랑이 혐오를 이기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사상 최대라는 5만 명이 참가한 퀴어문화축제가 끝나고 하루가 지난 후, 미국 올랜도에서 끔찍한 참사 소식이 들려왔다. 올랜도 게이클럽에서 일어난 이 비극은 여전히 ‘혐오가 사랑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처참하게 드러냈다.
총기난사범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은 혐오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왜 우리가 혐오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지 보여 줬다. 총기난사범의 부모, 전 부인, 직장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인종·성차별적 편견과 증오심에 찬 발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증언과 증거가 일부 엇갈리고 있지만, 동성애 자긍심의 달이자, 동성결혼 합헌 판결 1주년이 다가오는 시기에 게이클럽이 학살의 무대가 된 것은 이 것이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관련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의 다수도 가난한 라틴계 이민 2세의 성소수자들이었다.(범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동성애자였다는 증언도 나온다.)
따라서 수많은 성소수자들과 성소수자 권리 지지자들이 이것을 ‘동성애 혐오’가 낳은 참극으로 보고 혐오의 중단을 외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전적으로 공감할만한 반응이다. 이것은 가장 인간다운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비극을 또 다른 혐오의 불쏘시개로 쓰려는 자들이 바로 그렇다.
대표적으로 미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는 범인이 아프가니스탄 이주민 2세라는 점을 강조하며 무슬림 혐오에 불을 당기고 있다. 자신의 ‘무슬림 입국 금지’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다. 모든 무슬림이 다 괴물이고 과격한 테러리스트라는 식이다.
하지만 총기난사범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이기에 입국 금지로 막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총기난사범은 결코 16억 무슬림을 대표할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사망한 무하마드 알리처럼 전쟁에 반대하고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싸운 위대한 무슬림도 많다.
게다가 기독교 근본주의에 찌든 백인이 저지른 증오 범죄 때는, 결코 이런 식으로 모든 백인과 기독교도가 다 문제고 추방돼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 바가 없다. 이처럼 동성애 혐오가 낳은 비극을 무슬림 혐오에 이용하려는 것은, 이 비극의 사회적 뿌리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왜 동성애 혐오를 부추겨 왔는지를 가리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미국 밖에서 이슬람 종교와 무슬림들이 새롭게 가져 온 ‘비미국적 가치’가 아니다. 이 나라 기독교 우파들의 동성애 혐오가 이슬람과 무관하듯이 말이다. 동성 결혼한 한 여성 코미디언을 ‘추잡한 돼지’라 불렀던 건 바로 트럼프였다.
미국 정치를 지배해 온 거대양당중 하나인 공화당은 레이건 정부 시기 동성애자들을 ‘AIDS 숙주’ 취급하며 박해한 당사자들이다. 공화당은 지금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주요 기반인 기독교 우파와 연결된 정치인들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보고 수술로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전환 치료’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이런 반동적인 입장을 ‘종교의 자유’라며 옹호하기도 했던 이들이 지금 와서 동성애 혐오를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다.
민주당은 좀 다르지만 여전히 문제가 많다. 사실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은 대통령일 때 동성결혼 반대 법안에 서명했었고, 힐러리는 근래에야 동성결혼 지지로 돌아섰다. 오바마도 재선되고 나서야 동성결혼 지지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고용과 취업에서 LGBT를 차별하지 않는 법안에 여전히 서명하지 않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동성애를 ‘비정상’ 취급하며 박해하기 시작한 때는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하며 소가족 제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겹친다. 미국에서도 성소수자들의 권리는 올해로 47주년을 맞는 스톤월 항쟁을 기점으로 힘겹고 끈질기게 이어진 아래로부터 투쟁 끝에 얻어진 것이지 결코 미국 주류사회의 선물이 아니었다.
물론 오늘날 중동의 많은 억압정권들이 동성애를 사형 등으로 박해하고 있다. 하지만 중동은 19세기만해도 서유럽보다 성이 더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중동 주요 국가들에 동성애 탄압 법률이 도입된 것은 서방 제국주의의 점령기였다.
지금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동성애 억압을 자행하는 것도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다. 이라크에서도 이슬람국가만이 아니라 친미 수니파 반군들도 동성애자들을 살육하고 있다. 지금 수많은 무슬림 종교 지도자와 공동체들도 올랜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즉 이슬람의 경전과 교리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과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 이번에 한 미국 침례교 목사는 “게이가 더 많이 죽지 않은 것이 비극”이고 “만일 나였다면 게이와 레즈비언들을 벽에 세워놓고 총으로 머리를 날려버렸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어서 충격을 줬다.
결국 혐오와 편견의 진정한 사회적 뿌리는 이슬람 종교와 무슬림에 있지 않다. 더구나 미국 사회와 주류정치권은 혐오와 편견에 빠져든 사람이 언제든 살상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허용해 왔다. 그토록 많은 총기난사와 가슴아픈 죽음들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지금, 오바마와 힐러리가 다시 총기 규제를 말하고 있지만 총기협회와 군산복합체의 막강 로비력 앞에 다시 꼬리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이것은 본질을 놓치고 있는 대책이기도 하다. 과연 ‘아무나 총을 구해서 공공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까? 그렇다면 왜 미국과 마찬가지로 민간인 총기 소유가 가능한 다른 여러 나라들 중에서 유독 미국에서만 총기 난사 사건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일까? 총기는 원인이 아니라 도구인 것이다.
원인은 극단적 신자유주의 속에 빈곤, 실업, 소외, 차별이 만연한 미국 사회에 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시장논리는 절망에 빠져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더구나 인디언 학살부터 시작돼 제국주의 역사 속에 아로새겨진 미국의 오랜 군사주의적 폭력의 문화는 문제를 악화시켜 왔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극단적 양극화를 만들기 시작하고, 베트남전 패전 이후 잠시 움츠러들었던 미국이 다시 군사적 개입을 확대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미국 국내에서도 총기난사 사건이 늘어난 것은 우연이 일치로 보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민간인의 총기 소유 제한은 반쪽 해결책에 그칠 수 있다. 미국에서 흑인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경찰의 총으로 살해되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국 경찰은 군대 수준의 중무장을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범인도 사설감옥과 이민자구금시설을 운영하는 민간군수업체 소속 직원으로 뉴욕경찰이 되고 싶어했던 자였다.
무엇보다 학교, 결혼식장 등 공공장소에서 민간인을 향해 ‘총기난사’를 하는 것은 아시아와 중동에서 미제국주의 군대가 자주 해 온 범죄 행위다. 그렇기에 오바마와 힐러리가 말해 온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대한 감시와 척결’은 이런 비극을 막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파리 테러 이후 프랑스 정부의 시민적 권리 제한과 시리아 폭격이 국제적 테러의 확산을 막지 못했듯이 말이다.
이미 오바마 정부가 반테러를 핑계로 도청과 감시를 확대해 온 것은 스노든의 폭로로 드러난 바 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척결’하기 위한 오바마의 폭격도 이미 충분하다. 오바마는 중동에서 전임 부시 정부보다 4배나 많은 사람들을 드론 폭격으로 살해했다.
근래 오바마 정부는 동맹세력과 함께 이슬람국가의 3대 거점인 팔루자, 락까, 모술을 폭격하고 군사적 대공세를 펼쳐 왔다. 그러나 많은 중동 전문가들은 ‘이슬람국가는 제거되더라도 테러국가에서 테러운동으로 바뀔 뿐’이라고 전망한다. 강대국의 침공, 점령, 폭격과 학살이 낳은 이라크, 시리아의 지옥같은 상황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 지옥을 벗어나자고 일어선 아랍혁명과 시리아 저항세력은 서방 강대국과 아랍 독재정부, 이슬람국가의 협공 속에 목 졸려 죽어갔다. ‘21세기의 파리 꼬뮌’이라 불리던 시리아 알레포가 대표적이다.
사실 중동에서는 올랜도 참사같은 비극이 매일 벌어진다. 중동에서 유럽으로 탈출하는 난민이 그토록 많아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중동의 난민들은 탈출 과정에서 ‘무슬림 혐오’에 기반한 유럽 각국의 난민 통제와 거부 때문에 또 생지옥을 맛보고 있다.
근래 유럽 강대국들이 터키-그리스 루트를 봉쇄한 결과 5월 마지막 주에만 700명의 난민이 지중해에 빠져 죽었다. 서로 부등켜 안은 채 발견된 연인들도 있었다. 올랜도에서 죽은 50여명과 더불어 이들은 모두 이 잔인한 세계의 희생자들이다.
이 잔인한 세계는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해서, 불평등과 불의를 유지하려고 한다. 동성애 혐오가 낳은 비극을 무슬림 혐오로 돌려막기하려 한다. 혐오 세력이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기독자유당이 ‘동성애·무슬림 반대’를 내걸고 원내진출 문턱까지 갔던 이 나라에서 우리는 더욱 더 맘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혐오는 답이 아니다. 혐오를 부추겨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고, 그것이 또 다른 혐오를 낳고, 그것을 이용해 더 큰 재앙을 준비하는 이 인간 혐오 체제는 더 큰 사랑과 연대를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
● 퀴어문화축제와 미대사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퀴어문화축제에서 미국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의 대사관과 다국적 기업들의 부스가 허용된 것에 대한 다양한 논란이 있었다. 주한미대사 마크 리퍼트는 무대에 올라가 발언과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성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부스를 운영하더라도, 그것은 허용돼선 안 되는 일이었다고 비판하고 반발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이곳 한반도에서도 제국주의적 개입과 침략, 학살을 일삼아 온 미국 등 강대국과 그 국가기구의 파견자들이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사랑과 연대의 축제에 동참할 자격이 있냐는 항의였다. 한 활동가는 미대사관 부스 앞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폭로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가 안타깝게도 퀴어축제조직위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다.
나는 일단 그런 비판과 반발을 하는 사람들의 취지와 심정에 크게 공감한다. 그 분들의 반제국주의적 신념과 문제의식을 높이 평가한다. 아마 그 분들은 성소수자의 권리와 해방을 위한 투쟁을 누구보다 적극 지지하면서, 다만 그것이 강대국이나 다국적 기업의 도움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 분들이 축제의 장에서 미대사관 부스를 보거나 대사의 발언을 들을 때 얼마나 불쾌했을지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도 내년 축제 때는 조직위가 대사관과 기업 부스에 대한 비판적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더 심사숙고하길 기대한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의 협조에 의존하면서 갈수록 저항과 연대의 성격이 퇴색되고 있다는 외국 퀴어축제들의 경험도 반면교사로 돌아보길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로 퀴어문화축제가 성소수자 억압에 맞선 저항과 연대의 장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는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지지와 연대보다 비판을 앞세우는 태도도 말이다.
그런 주장은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주장은 여전히 심각하게 억압당하고 있고, 특히 혐오 발언과 세력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여 왔으며, 대사관과 기업 부스들은 그런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려는 시도 속에 등장했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대사관과 기업의 부스가 퀴어문화축제의 주된 성격이나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도 말이다.
대사관과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 시장주의 논리를 강변하기 위해서보다 성소수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부스와 발언을 허가받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핑크워싱’(성소수자 권리 지지 뒤에 자신들의 악행 숨기기)이다.
이라크 침공 때도 미국은 ‘인도주의와 여성의 권리’를 명분삼는 역겨운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며 주장과 토론에 나서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지와 동참 속에서 이뤄져야 하고, 또 그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퀴어문화축제가 정치단체의 집회가 아니라 대중적 문화축제이며, 그 조직자와 참가자들 속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다양하고 불균등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더더욱 그렇다.
만약 반제국주의 좌파가 정치집회를 열면서 미대사관을 부른다면 나는 단호하게 비판하며 불참할 것이다. 만약 노동조합이 집회를 열면서 친사용자 단체도 부른다면, 나는 매우 씁쓸하겠지만 참가해서 지지하며 강한 비판을 전하려고 할 것이다. 반면 억압받는 사람들이 대중적 축제를 열면서 기업과 정부를 부른다면, 나는 기꺼이 참가해서 이 문제를 토론하고 왜 기업과 정부가 우리의 권리 향상에 도움이 안 되는지를 입증하려 할 것이다.
나는 5만 명과 나를 구분해주는 차이점에 집착하기 보다는, 일단 5만 명의 바다 속에 한 명이 돼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배우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실을 모르는 5만 명을 탓하고 밖에서 가르치기보다 내 문제의식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나누려고 할 것이다. 심지어 미제국주의 국가 기구마저 그 축제에 참가해서 정치적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좌파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찾기가 힘들다.
우리 모두는 장차 5만 명이 10만 명이 되고,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축제와 행진이 억압의 뿌리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더 큰 저항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현실이 그 이상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발을 떼기보다, 일단 그 현실 속에서 발을 담그고 그런 이상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넓혀야지 않을까. 그런 공감과 지지가 넓어지고 목소리가 커질 때 야유와 항의가 무서워 미대사관이 부스를 차리거나 감히 무대에 오를 시도를 그만두지 않을까.
● 구의역 참사 속에 노동운동의 갈 길을 고민한다
얼마전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는 위험의 외주화가 낳은 죽음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 줬다. 세월호 참사 이후 거의 달라진 게 없는 이 나라의 현실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말해 온 ‘노동존중특별시’에 담긴 허상도 드러냈다.
늦게나마 서울시는 외주화 중단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부문의 공익적 운영을 제한하고 시장주의 논리를 강요하는 박근혜 정부의 공공부문 총액인건비제와 정원 통제에 맞서지 않는다면 도루묵이 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서울시는 인력 확충을 요구하는 지하철 노동자들의 투쟁에 경찰력 투입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단지 박근혜와 박원순만 욕하고 끝날 문제는 아니다. 지금 ‘메피아’ 담론은 주로 지배자들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로 제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에는 노동운동도 돌아 볼 점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연봉 4천받는 메트로 출신 정직원들’을 싸잡아 욕하는 것은 분명히 틀렸고 불순한 의도가 담긴 이간질이다. 그들도 임금피크제와 인력감축 속에 밀려난 노동자들이며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봉 2천이 ‘너무 적은’ 것이지, 연봉 4천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규직 노조와 노동자들이 고용승계와 임금보존을 받으면서 결국 외주화를 묵인한 게 된 지난 과정은 참 씁쓸한 일이다. 힘든 싸움을 지속하기보다는 당장의 실리를 보면서 타협했던 그 결정이 이제 한 청년의 비극과 ‘메피아’ 비난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정규직 노조와 노동자들도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고 싸우기도 더 힘들어졌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외주화를 막아서고 하청 노동자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서도 앞장서서 끝까지 싸워야 했다. 어차피 그건 민주당 소속의 박원순 시장이 알아서 해줄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지하철의 정규직과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이런 관점이 필요하다.
구의역 희생자 추모제에 같이 갔던 한 동지가 ‘사고 차량의 기관사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하고 물었다. 그 노동자의 심정을 떠올려보게 된다. 이윤 체제가 낳은 외주하청 구조 속에 한 노동자는 목숨을 잃었고, 한 노동자는 공황장애를 앓으며 평생 죄인으로 살 것이다.
두 노동자가 이렇게 만나야 하는 이 곳이 헬조선이다. 세월호 노란 리본, 강남역 보라색 리본에 이어서, 이제 구의역 검은색 리본까지... 가방에 달리는 리본은 늘어만 간다. 다 연결돼 있는 죽음이고 함께 풀어나가야 할 하나의 싸움일텐데.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해 봅시다. http://anotherworld.kr/164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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