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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워터게이트의 한계가 촛불에 주는 교훈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6. 12. 13.

남수경



[이 글의 필자인 남수경은 미국 뉴욕에서 도시빈민,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을 대변하는 공익인권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법률서비스노동조합(Legal Services Staff Association UAW/NOLSW)의 조합원이다. 대구경북지역 독립 대안 언론인 <뉴스민>에 실렸던 글(http://www.newsmin.co.kr/news/16114/)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와<뉴스민>에 감사드린다.]




박근혜 게이트로 촉발된 탄핵 정국 속에서 미국 워터게이트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박근혜 게이트가 한국판 워터게이트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44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워터게이트 사건과 지금 한국의 상황에는 몇 가지 유사한 점이 있다.


닉슨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워터게이트 추문은 워싱턴에 위치한 워터게이트 건물의 무단침입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1972년 6월 17일 밤, 워터게이트 건물에 침입한 다섯 명의 괴한이 체포된다. 처음에는 단순절도미수 사건으로 넘어갈 뻔한 일이었다. 닉슨 재집권을 위해 조직된 재선위원회 주요 실무자 전화번호가 체포된 사람 중 한 명의 수첩에서 나오면서 의혹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해 말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워터게이트 사건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닉슨은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다. 이렇게 그냥 넘어갈 뻔한 사건이 시간이 지나면서 닉슨과 연결고리들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통령이 직접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커지자 닉슨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처음의 입장을 번복했다. 대통령인 자신은 몰랐고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리고 그의 보좌관 2명을 해직시키는 선에서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1973년 여름, 상원의회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전국에 방영된 이 청문회에서 닉슨의 전 보좌관은 닉슨이 직접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에 개입했다는 걸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인 녹음테이프가 있다고 증언한다. 닉슨은 의회의 녹음테이프 제출 요구를 국가안보와 대통령 특권을 이유로 거부한다.


1973년 10월, 소위 ‘토요일 밤의 대학살 (Saturday Night Massacre)’ 사건이 일어난다.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하는 특별검사 콕스를 해임하라는 닉슨의 명령을 당시 법무장관과 차관이 잇달아 거부하고 사퇴한다. 이에 닉슨은 법무부 서열 3위인 수석 검사를 임시 법무차관 대리로 임명하고, 그가 닉슨의 명령대로 특별검사 콕스를 해임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권력 남용과 불법을 자행하면서까지 자리를 보존하고자 한 닉슨의 민낯이 천하에 알려졌다. 대중의 분노는 폭발하고 여론은 닉슨에게서 등을 돌린다. 설상가상으로 대법원 판결로 닉슨이 마지못해 제출한 녹음테이프에는 그의 거짓말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났다.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닉슨이 직접 CIA 국장에게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녹음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청과 문서위조, 매수 등 부정행위뿐 아니라 닉슨이 거액의 탈세를 하고, 걸프 오일 등 대기업의 불법자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닉슨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지고 심지어 닉슨의 측근들도 그의 사퇴를 종용하게 되었다. 급기야 1974년 7월 말 하원 법사위원회가 닉슨의 탄핵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탄핵이 확정되기 전에 닉슨은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닉슨의 사퇴로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통령이었던 애그뉴는 뇌물수수 혐의로 이미 사임한 뒤였다. 닉슨은 당시 하원의 공화당 대표였던 포드를 부통령에 지명한다. 닉슨이 사퇴하자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은 포드는 제일 먼저 닉슨을 사면하는 것으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닉슨의 은공에 답했다. 이로써 닉슨은 이후의 모든 법적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포드는 닉슨을 사면하면서 “나라의 긴 악몽이 끝이 났다. 이제 시스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단순히 닉슨이 자신의 재선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라이벌인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더러운 술수를 썼다는 것 이상의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의 지배자들은 1930년 대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베트남전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지만, 모양새 있게 빠져나올 핑곗거리를 찾기 어려웠다. 국내외적으로 반전운동은 거세게 진행됐고, 블랙파워로 상징되는 민권운동은 미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다른 다양한 요구의 분출로 이어졌다. 제2차대전 이후 누리던 장기호황이 그 끝을 보이면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불만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지배계급은 분열하고 있었다. 국내의 정치적 위기와 대외 전쟁의 임박한 패배 앞에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를 두고 그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기자들에게 중요한 내부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이 사실은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펠트는 FBI 국장 후버의 2인자 역할을 하면서 민권운동가와 반전활동가들을 탄압하는데 누구보다 앞장 섰던 자였다. FBI 국장이 되고자 했던 그의 야망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지기 한달 전, 후버 국장이 사망하고 닉슨이 패트릭 그레이를 국장으로 임명하면서 좌절되었다.


지배자들의 갈등과 분열 속에서 미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밀실에서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준 게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워싱턴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더러운지를 분명히 보여주면서 대중들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FBI나 CIA 같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정보기관이 음지에서 어떤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닉슨뿐 아니라 그 전임자들인 민주당 대통령 케네디와 존슨 그리고 악명 높은 FBI 국장 후버는 수년에 걸쳐서 반전운동과 민권운동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괴롭혔다. 대표적인 예가 비밀사찰을 통해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을 협박하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단체’라고 후버가 지목한 흑표범당 (Black Panther Party) 리더들의 암살을 지휘한 것이다.


닉슨이 취임하고 나서 정치적 억압은 사회 곳곳에 걸쳐 더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점점 더 커지는 반전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새로운 정책과 법안들이 도입되었고, FBI나 CIA 같은 정보기관들의 반전단체, 인사들에 대한 사찰과 공작이 계속되면서 탄압은 더 가혹하고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서 1971년 국방부의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 (Pentagon Paper)가 국방부 소속 내부고발자에 의해 언론에 누출된다. 펜타곤 페이퍼는 베트남전 발발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한 과정을 기록한 비밀문건이다. 30년에 걸쳐서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바로 전범이라는 증거가 이 문건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펜타곤 페이퍼 유출로 패닉이 된 닉슨 정부는 지금까지 써온 탄압과 비밀공작을 자신의 정적에게도 쓰기 시작한다. 정부 기밀이 내부자에 의해 언론에 ‘누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공작대인 “배관공 (The Plumbers)” 팀을 만들었다. 닉슨의 재선위원회가 모은 정치자금 상당액이 이들의 공작에 사용되었다. 


“배관공 팀”의 임무는 워싱턴 내부 배신자들을 찾아내 응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1972년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걸린 게 워터게이트의 시작이었다. 닉슨 정부의 사건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배관공 팀”과 워싱턴의 관계가 드러나 결국 닉슨 사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언론이 폭로보도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끈 것이 닉슨의 사임을 가져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처럼 얘기된다. 특히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 기자들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히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정부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대해 탄압을 자행할 때에 주류 언론은 오랫동안 침묵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워터게이트 폭로에 앞장선 <워싱턴포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의 저항운동을 탄압했던 억압적 방식들을 닉슨이 내부 정적들과 민주당, 그리고 언론사에도 쓰기 시작하자 비로소 주류 언론은 닉슨에게서 등을 돌렸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간 닉슨의 전(前) 수석 보좌관 홀더먼이 “베트남전이 없었다면 워터게이트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워터게이트의 뿌리에는 베트남전쟁이 있다. 거짓말로 시작한 침략 전쟁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고,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이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불법적이고 부정의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 – 설사 자신들의 내부에 있더라도- 에 대한 탄압과 감시가 필요했다. 그 결과가 워터게이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연방 하원이 1974년 탄핵을 결의할 때 닉슨이 베트남전 과정에서 저지른 캄보디아 불법 침공은 그의 범죄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초점은 닉슨이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불법도청 행위를 은폐하려고 한 것에만 맞춰졌다. 그의 거짓말이 핵심이 되었다. 워터게이트의 진정한 뿌리인 비인도적인 전쟁과 전쟁을 일으킨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해결 방식은 재앙적인 베트남 전쟁으로 초래된 위기에 대해 누가 책임지고 물러날 것인가하는 지배자들 내부 갈등을 몇몇 개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끝났다. 직전까지 닉슨을 지지하던 기존 정치권이 닉슨에게 등을 돌리면서 결국 닉슨은 물러났지만, 워싱턴의 기존 정치권은 커다란 타격 없이 재결집했다. 그리고 워터게이트의 근본적이 원인이 되었던 정책들은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닉슨이 비밀리에 캄보디아를 공습한 것이 알려지면서, 대통령의 일방적인 군사도발을 제한하는 “전쟁권한법 (The War Powers Act)” 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의 그 어느 대통령도 –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보여줬듯이, 부패한 몇몇 개인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문제는 그 부패한 개인들을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고치지 않는다면 같은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태가 2016년 한국에서 부패한 정권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교훈이 아닐까. 대통령과 그 측근이 물러난다고 세상이 더 나아질까.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사 등록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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