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읽기

세상읽기 - <노동자의 책>/ 그렌펠 참사/ 상호교차성/ 임금체계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6. 21.

전지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마녀사냥의 황당무계함

 

619일은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에 대한 국가보안법 집중 심리 첫날이었다. 아침 기자회견 이후 하루종일 재판이 진행됐는데, 이진영 대표가 진보를 가장한 종북이며 국가전복세력이라는 게 검사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이진영 대표가 겉으로 내세운 가치들은 모두 위장이며, 무장폭력혁명이 그의 진의라는 거였다.

 

그래서 이적표현물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배포했다는 것이다. 그 책들이 이적도서라는 건 2~30년 전의 판결들이 근거였다. 판사도 답답했는지 어떤 게 이적표현물인지 리스트가 공표돼 있는 게 아니니...’. ‘그 책들을 만 명이 읽으면 만 가지 생각을 할텐데..’라고 했다.

 

하지만 검사는 직접 언급하지 않아도 해석이 가능하다며 이진영 동지의 진의를 확신했는데, 그 근거들이 정말 황당무계한 코미디였다. 먼저 이진영 동지가 90년대에 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으므로 뻔하다는 거였다. 페이스북 친구와 트위터 팔로워 중에 보안법으로 기소, 처벌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근거였다.

 

통화하거나 카톡을 주고받은 사람중에도 보안법 처벌 전력자가 많다고 했다.(그중 한 명은 70년대 긴급조치법 위반이었다.) 일심회 사건으로 처벌된 진보당 간부와 메일을 주고받은 것도 종북을 입증하는 근거가 됐는데, 알고보니 그 사람은 동명이인이었다.

 

북한 사이트에 <노동자의 책>이 링크돼 있는 것도 근거였는데, 변호사가 북한 사이트에서 멋대로 링크한 것이고 거기엔 국회도서관도 링크돼 있다고 하니 답을 못했다. 검사는 이진영 대표의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 무장폭력혁명을 뜻한다며 이진영 대표가 한 메일에서 능지처참할 자본주의를 분쇄하기 위해라고 쓴 것도 문제삼았다.

 

결국 나도 언제든 잡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왜냐면 나도 보안법 처벌 전력이 있고, 수많은 보안법 처벌 전력자 분들과 페친에 수시로 좋아요를 눌러왔고, (이진영 대표와 달리) 동명이인이 아니라 실제 그 진보당 활동가분과 톡을 주고받은 적도 있고, 세월호 참사나 영국 그렌펠 참사를 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더 격한 분노도 쏟아낸 바 있기 때문이다.

 

재판 도중에 기가막혀서(특히 그 동명이인 문제에서) 좀 크게 헛웃음을 터트렸더니 검사가 뒤를 돌아 째려보던 눈빛이 사나웠다. 그걸 떠올리면 앞으로 보안법 전력자나 진보당 간부였던 분들과는 페친을 안맺거나 좋아요를 자제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당장 나와 페친을 맺고 있거나 좋아요를 눌렀던 분들도 조심해얄지 모른다.^^;; 멋진 변론을 해주시고 19일에 이어서 3일간의 집중심리 동안 수고하실 김하나, 김종보, 김정진 변호사님께 감사드린다.

 

영국 그렌펠타워 화재 참사가 보여 준 이윤체제의 잔인함

 

614일 영국에서 발생한 그렌펠타워 화재 참사는 정말 끔찍했다. 24층 아파트 전체가 붉은 화염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연기와 화염 속에서 비명이 들리고, 누군가는 몸에 불이 붙은채 뛰어내리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 지옥 속에서 한가닥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창밖으로 아이를 던지는 부모의 마음을 상상하면...

 

그렌펠타워는 영국 런던의 공영주택으로 거주민은 대부분 가난한 저소득층과 북아프리카 출신 이주민들이었다고 한다. 지어진 지 43년이나 돼 곳곳이 낡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서 재앙에 대한 경고와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든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누구도 잘 들어주지 않기 마련이다.

 

지난해 리모델링 공사를 하긴 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이 아닌 시장을 위한 공사였다. 외관을 현대화해서 주변의 잘 사는 지역과 어울려 보이도록 만들고 개발과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공사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싸구려 합성피복제 등이 쓰였고, 그것은 이번에 불길이 벽을 타고 순식간에 타워 전체를 삼키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스프링클러는 없었고, 화재경보는 작동하지 않았고, 화재가 나면 방에 들어가 가만히 있으라는게 관리 지침이었다. 세월호는 여기에만 있지 않았다. 지난해 의회에서 코빈의 주도로 인간적 주거를 위한 법안을 추진할 때 가로막은 보수당 의원들은 대부분 건물주들이었단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 지옥 속에서 잃어버린 이주민 청년이 언젠가 외로운 늑대가 돼서 영국 사회를 놀라게 할 일을 벌인다면, 그 비극의 악순환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상호교차하는 모순 속에서 항상 정해진 중심을 고집할 것인가

 

여성 주인공을 선정적으로 소비하기보다는 주체적이고 힘있게 그린 원더우먼을 보고 스트레스가 풀렸다는 반응을 봤다. 반면 주인공이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이니 보이콧해야 한다는 반응도 봤다. 해외에선 원더우먼과 상호교차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단다. 만약 원더우먼을 본다면 어느 순간에 무엇에 감정이입을 할지 참 복잡할 것 같다.

 

이스라엘 유대인들 자신이 한편에서 나치 학살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팔레스타인 억압의 가해자다. 비슷한 경우는 많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브로크백마운틴에서 그 부인들의 삶은 뭐냐고 되묻는 여성주의자들이 있다.

 

최근 청문회에서도 80년 광주에서 진압경찰을 향해 택시를 몰았던 배용주 씨는 그때 사망한 경찰관 가족들에게 사과했다. 김이수는 배용주 씨에게 사형 판결내린 걸 사과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경찰관 가족들의 심정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대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서로 사과하며 눈물흘리던 그 자리에 없었던 건, 아무 반성 사과도 없는 전두환이다. 전두환을 뒤이어 광주를 모욕해 온 자유당은 배용주 씨를 증인으로 불러내 김이수를 공격하고 있었다.

 

결국 억압과 모순이 교차하고 피해와 가해가 중첩되는 곳에서 우리는 그 구조를 만든 게 누구고 진정한 책임이 어디 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집단과 그들이 유지하려는 구조가, 집중하고 있는 고리가 무엇인지 말이다.

 

위안부문제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민족, 계급, 여성이 뒤얽혀 있다. 지난주 추적 60에서 다룬 미군위안부를 보면 이것이 더 넓은 제국주의, 군사주의의 일부라는 걸 알 수 있다. 국회 속기록에 남은 여성의 몸값을 올리는 게 여성 지위 향상이라는 발언은 여혐민국의 깊은 뿌리도 보여 준다.

 

아직 일부만 드러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위안부까지 가면, 국가가 바로 포주로서 여성을 강간, 착취했다는 것이 더 명백해진다. ‘추적60은 적절하게도 국가란 무엇인가라고 제목을 달았다. 즉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시스템, 그것을 주도하는 국가와 권력은 단지 계급적이지 않다. 동시에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다.

 

따라서 계급만을 중심 잣대로 삼는 건 실수다. 예컨대 우파의 집중타겟이 된 강경화에 대한 일부 진보좌파의 태도는 안타까웠다. 정말로 계급적 잣대로 문제가 될 후보들(김동연, 박형철, 이인걸...)은 이슈화시키지 못하면서 강경화에게 쏟아지는 돌에 하나를 얹었다.

 

위안부할머니, 여성단체와 여성주의자들, 공무원노조 등이 강경화를 지지하는지 고민해보지 않는 것 같았다. 흠있는 좌파도 공격받을 때는 자유주의자들의 방어를 호소했으면서, 왜 흠있는 자유주의자를 좌파가 방어해야 하냐고 묻는다.

 

복잡한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강경화가 낙마하면 누가 웃고 승리감을 느낄 것인지 말이다.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오늘도 남성상사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이 그걸 보고 뭘 느낄지 말이다. 우파와 가부장 권력은 명백히 위안부, 사드 문제에 대한 강경화의 태도를 문제삼으며 자질, 경륜 부족이라고 공격했다. 개혁정부라는데 소수자들은 계속 뒤로 밀려나는가라는 한탄이 들리지 않는가.

 

선택적 공감과 어긋난 피해의식의 위험성

 

지난달에 MBC의 세월호 두엄마 이야기에서 잊히지 않는 건 딸의 뼈조각을 찾은 엄마와 그렇지 못한 엄마가 같이 서먹하게 밥을 먹다가 결국 한명은 방 안에서, 한명은 밖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었다. 그 기막힌 비극의 크기와 아이러니는 어찌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순간 재판받는 박근혜가 왠지 안쓰러워보였던 게 후회가 됐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세월호 다큐를 볼때마다 목이 메일 것이다. 차라리 박근혜에게 세월호 뉴스와 다큐를 계속 보도록 하는 형벌을 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깊이 반성하고 미안하다는 진정어린 말을 박근혜에게 듣고 싶다고 한 아버님이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형벌이 진심어린 반성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아직도 안산추모공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막말을 들으면 지옥이 바로 거기 있다.

 

정혜신 박사는 예전에 박근혜나 박사모 노인들의 심리를 나는 그것보다 더한 일도 겪었는데 왜 그런거로 난리야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식민지배, 전쟁, 분단으로 뒤덮인 현대사와 부모가 모두 총에 맞아 숨진 박근혜를 연결시켜서 말이다. 즉 고통과 상처의 경험이 곧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낳는 건 아니란 것이다.

 

더구나 이 나라의 권위주의 체제는 국가가 허용하는 기억, 국가가 허용하는 분노만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그래서 박사모 분들은 전쟁통에 인민군의 학살만 기억하고, ‘종북에 대한 분노만 거리낌없이 표출한다. 그러면서 거기서 위안을 얻는 것 같다.

 

강한 공감이 오히려 더 강한 배타성과 폭력까지 낳는다는 지적도 있다. 박근혜만 보면 불쌍하다고 울면서 끼리끼리 강한 공감대를 보이는 분들이 더욱더 반대진영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불태운다는 것이다. 비슷한 양상은 사실 주변에서도 보인다. 거기엔 저들 때문에 우리가 가로막히고 고통받는다는 삐뚤어진 피해의식이 결합된다.

 

그래서 선택적 공감과 어긋난 피해의식을 경계하게 된다. 내 고통과 상처만 크게 보면서 다른 사람의 그것은 못 보는 게 아닌가, 저 사람의 고통 호소가 나를 고통받게 한다고 뒤집어씌우는 건 아닌가, 고통과 상처의 크기를 비교하려 하지 않는가. 어떤 고통을 나중에로 미루고 있지 않은가, 고통 자체가 정체성이 되면서 다양한 고통을 낳은 구조에 대한 분노와 투쟁하고 연대하려는 주체성이 사라지진 않았는가.

 

이런 점이 흐려지면 우리 안에서도 오해와 상처가 깊어진다는 것을 근래 자주 보게 된다. 우리의 연결이 끊어지고 힘이 약해지는 걸 본다.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에,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에 공감하지 못하고 벽을 쌓은 채 서로의 말이 겉도는 걸 보게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은 누구든 결함이 있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 마련이다. 순전한 가해자도, 순전한 피해자도 없으며 서있는 위치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럴수록 서로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위치에서 생각해보며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나아갔으면 좋겠다. 반올림 농성장에서 봤던 글귀가 크게 와닿았다.

 

"진실을 전달하는데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는 진실을 전하는 자요. 또 하나는 진실을 경청하는 자이다. 진실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내포된 말만이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한다."



● 임금 관련 쟁점에 대한 짧은 생각

 

김영재

 

현재 임금체계는 기본적으로 노동자 개인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비용이면서 향후 노동자가 될 자녀의 양육과 교육 비용은퇴한 노동자의 부양 비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현재 임금 체계는 특히 남성 노동자에게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양육비교육비부양비를 책임지도록 강요하는 한편여성 노동자에게는 저임금과 가사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만약 국가가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퇴자의 부양의료주택 등을 무상으로 보장해 준다면 임금은 단순히 개인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으로만 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을 적용하여 근속연수와 상관없이 노동 강도나 숙련도 등에 따른 기준을 적용해 지급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국가는 교육과 부양을 개인 또는 기업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입니다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나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호봉)체계나 단체협약에서의 복지혜택은 노동자가 취업을 하고결혼을 한 뒤 아이를 낳고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조건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호봉체계나 복지혜택에서 배제되어 있어 더욱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국가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호봉제와 복지혜택을 받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정규직과 같은 생산 라인에 있거나 동일(유사)업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의 근본 원인을 보지 않고 차별의 결과만을 비교하기 쉽습니다정규직 양보론을 쉽게 수용하는 이유입니다.

 

정부가 무상보육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주택 등을 보장하지 않으면서 임금 체계만을 손질하겠다는 것은 기존의 노동(임금조건을 후퇴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최저임금 1만원 투쟁과 함께현실적 요구와 동떨어 보일 수 있지만 최고소득제(소득상한제)를 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최고임금제가 아닌 최고소득제여야 합니다임금 격차보다 소득격차가 불평등 심화의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소득 상한을 정해 일정 소득을 초과할 경우 초과분에 대해서는 국가가 세금으로 걷어 그 돈으로 무상보육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 주택 등의 정책을 실시해야 합니다.



(기사 등록 2017.6.21)  


 * '다른세상을향한연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고 행동합시다

   newactorg@gmail.com / 010 - 8230 - 3097 http://anotherworld.kr/164


 '다른세상을향한연대의 글이 흥미롭고 유익했다면, 격려와 지지 차원에서 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지와 후원밖에 없습니다.

- 후원 계좌:  우리은행  전지윤  1002 - 452 - 402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