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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샬러츠빌과 반파시즘: 나치도 ‘안티파'도 둘 다 문제?

by 다른세상을향한연대 2017. 10. 19.

남수경

 


[이 글의 필자인 남수경은 미국 뉴욕에서 도시빈민,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 등을 대변하는 공익인권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법률서비스노동조합(Legal Services Staff Association UAW/NOLSW)의 조합원이다. 처음에 실렸던 글(http://socialist.kr/right-and-liberal-attack-antifa/?ckattempt=1)을 다시 옮겨서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필자와<사회주의자>에 감사드린다.]

 

안티파(Antifa)를 상징하는 이미지 



미국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의 극우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났다. 샬러츠빌에 모여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려던 신나치, KKK, 대안우파 등 극우는 지난 두 달 동안 거센 저항에 부딪쳐 조금 주춤해진 듯하다. 8월 이후 극우는 예정되어 있던 집회를 스스로 취소하거나 아니면 맞불집회가 미리 조직될 수 없도록 기습 집회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샬러츠빌의 비극이 벌어진 후 보스턴에서 열린 극우의 소위 표현의 자유집회에 대항해 압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반대시위에 모여 극우에 반대함을 분명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819일 보스턴과 전국에서 벌어진 반나치 집회는 트럼프 당선 이후 의기양양하게 세를 키우고 있던 극우파에게 대중의 힘으로 보기 좋게 한방 펀치를 날린 작지만 소중한 승리였다.

 

지난 번 기고(http://www.anotherworld.kr/480)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샬러츠빌 이후 벌어지고 있는 안티파 ”(Antifa)에 대한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살펴보고 극우에 맞서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좌파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고조되는 안티파에 대한 공격

 

안티파는 반파시스트(Anti-fascist)의 줄임말인데, 원래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등장했다. 안티파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느슨한 무정부주의 경향의 모임으로 신나치와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저지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다. 미국에서 안티파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출범과 함께 극우가 자신감을 갖고 나오면서 이에 맞서는 반파시즘 운동이 커지자 안티파도 같이 주목을 받고 있다.

 

흔히 안티파와 동일어처럼 사용되는 블랙 블록”(Black Bloc)은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시위에 나타나 함께 행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들은 보통 극우가 시위대를 공격할 때 이를 저지하는 자위권을 행사한다.

 

안티파가 미국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지난 21일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벌어진 시위 때문이다. 학내 공화당 학생그룹이 극우 매체 브라이트바트의 전() 편집장인 마일로 이야노플러스을 초청해 강연회를 주최하려 했다. 이에 맞서 폭력과 혐오를 선동하는 극우인사의 강연을 학내에서 허용할 수 없다는 학생들이 집결했다


2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인종주의와 혐오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강연장을 점거해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야노플러스는 강연을 포기해야 했다. 극우파를 저지하기 위해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행동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을 버클리대 학생들이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파와 주류 언론은 학생들의 정당한 시위보다 해산 과정에서 소수 안티파 활동가들이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고 창문을 파괴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서 학생들의 정당한 시위 전체를 폭력이라고 매도했다. 트럼프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장 극우를 저지한 학생들을 향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비난을 했다.

 

이후 안티파의 돌출적인 행동이 운동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반파시즘 운동 내에서 벌어져 왔는데, 문제는 샬러츠빌 이후 고조되고 있는 반파시즘 운동에 대한 흠집내기로 우파가 안티파를 타깃으로 삼고 나선 것이다.

 

샬러츠빌 사건 직후 트럼프는 처음에는 극우 테러를 분명하게 비판하지 않다가 공화당 인사들로부터도 거센 항의를 받게 되자 마지 못 해 인종차별주의는 악이라며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척 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양측 모두 책임 있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여기서 양측은 극우와 극좌, 특히 안티파를 칭하는 것이었다.

 

트럼프의 발언은 즉각 극우의 지지를 받았다. 예를 들면, 과거 KKK를 이끌었던 데이비드 듀크는 트위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정직하고 용기 있게 샬러츠빌 사태의 진실을 말하고 좌파 테러리스트들을 비판한 것에 감사하다고 밝혔다.

 

안티파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극우만이 아니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토안보국(DHS)은 이미 작년부터 안티파를 국내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그것은 안티파 활동가들이 공공연히 정보기관의 감시와 사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미국에서 추방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우파의 안티파 공격에 민주당과 자유주의자들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민주당 소속인 버클리시 시장은 827일 버클리에서 벌어진 반나치 시위를 비판하면서 안티파를 범죄조직 (gang)”으로 분류해야 하고, “민병대처럼 무장한 (안티파) 무리에 대해 엄정한 법 집행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블랙 블록에 동참하지 않은 시위대에게도 안티파와 같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반나치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극단주의자들에 동조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 또한 폭력을 선동하고 공공의 안전을 저해하는 자들은 민주주의에서 설 자리가 없다827일 버클리 시위에서 폭력을 휘두른 안티파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주류 언론의 태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의 편파 보도와 검열을 감시하는 민간단체인 ‘FAIR’(Fairness & Accuracy In Reporting)는 샬러츠빌 극우테러 후 한 달 동안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등 미국 주류 6개 신문의 기사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를 보면, 812일 부터 912일까지 안티파 운동을 비판하는 기사가 모두 28개 실린 반면 신나치와 백인우월주의자를 비판하는 기사는 27개가 실렸다. , 안티파와 극우를 거의 동일하게 취급한 것이다. 일례로 워싱턴 포스트의 한 논평가는 안티파가 신나치와 전혀 차이가 없다고 몰아세웠다.

 

아쉽게도 이른바 진보인사들도 안티파 때리기에 가세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으로 알려진 노엄 촘스키 교수는 안티파의 활동방식에 대해 원칙적으로 잘못된, 자기파괴적인 전술이라며, 이런 전술이 우파에게 주는 큰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파시즘을 막는 방법은 극우의 집회나 강연을 막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을 반대하는 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극우에게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 되어야 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 교육을 통해 파시즘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역시 극우의 강연을 막은 버클리대 학생들에게 극우 선동가에게 친절한 방식으로 대하지 않은 학생들이 지적으로 취약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진보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안티파가 대안우파의 거울 이미지이고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비판한다.

 

왜 지금 안티파를 방어해야 하는가?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이 사람을 살상하는 폭력을 휘두른 극우의 책임에 물타기를 하는 것처럼, 자유주의자들의 양비론은 실상 안티파 뿐 아니라 반인종주의 투쟁 전체를 극우와 별로 다르지 않는 폭력이라고 비난하면서 반파시즘 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극우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힘을 보태주는 것이다. , 양비론은 반파스시트 운동이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고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우파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인종청소를 주창하는 나치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식의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입장이 간과하는 것은 극우파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단순히 다른 의견이나 관점의 제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목표는 소수인종, 이민자,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극우 선동가 이야노플로스가 2월에 버클리에서 하려던 강연의 목적 중 하나는 대학이 서류미비 학생들에게 안전한 은신처를 제공하는 이민자 보호 캠퍼스 (sanctuary campus)’ 운동에 반대하는 우파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었다. 지난 5월 포틀랜드의 한 통근 열차에서 이슬람 혐오발언을 퍼붓던 백인 남성이 이를 저지하는 두 사람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샬러츠빌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차로 돌진해 사람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다. 일일이 다 나열하기도 힘든 폭력을 저지르는 극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종청소를 통한 백인들만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폭력을 선동하는 자유가 극우의 표현의 자유이다. 하지만 30년 대 유럽의 경험이 보여준 것처럼 극우의 혐오선동을 공론장에서 허용하는 것은 재앙으로 이어질 뿐이다.

 

안티파와 극우가 다를 바 없다는 양비론의 문제는 폭력을 선동하는 극우와 그에 맞서는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지만, 안티파 손에 살해당한 사람은 없다. 부서진 유리창과 인종청소를 같은 무게의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극우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파와 자유주의자가 안티파를 공격하는 것에 맞서 그들을 방어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운동 내부를 검열하고,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과 선을 긋기 시작하면서 운동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광범위한 공동전선을 건설할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극우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파시스트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할까?

 

파시즘은 결코 소수 활동가들의 모험적인 선도 투쟁으로 물리칠 수 없다. 파시즘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은 광범위한 대중의 저항운동으로 맞서는 것이다. 샬러츠빌 이후 보스턴이나 버클리에서 보여준 것처럼 압도적 다수의 대중이 수적 우위로 파시스트를 압박해서 물리쳐야 한다. 소수정예 활동가들만의 엘리트주의 선도투쟁으로는 파시스트를 물리칠 수 없다.

 

우파의 공격에 맞서 안티파를 방어하는 것이 곧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엘리트주의, 모험주의적인 전술에 대해 비판을 삼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티파의 전술은 투쟁에 참여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경찰의 공격에 더 쉽게 노출시킬 수 있고, 대중을 방관자로 만들어 투쟁의 대열에서 소외시킬 위험이 있다. 이것은 대중의 저항운동을 건설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소수가 아닌 집단적 힘을 과시하는 게 중요하다. 극우의 폭력에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고도로 조직된 단일 행동이어야만 효과가 있다. 안티파 식의 즉자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행동은 대안이 아니다.

 

하지만 안티파에 대한 우파와 자유주의자의 비판은, 극우에 맞서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인 토론과 논쟁이 아니라, 일부가 경찰이나 극우와 충돌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것을 전체의 문제인 양 침소봉대하면서 반인종주의 투쟁 자체를 공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의 안티파 공격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반파시즘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안티파에 대한 공격과 배제가 아닌 함께 싸우며 논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비판은 우파와 자유주의자들처럼 폭력이나 비폭력이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기사 등록 201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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